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마14장 22~33 물 위로 오라 하소서

LNCK 2022. 3. 8. 11:36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마14:22~33              2019.11.24.출처


◑첫번째는 홀로 기도하신 예수님입니다. 

22 '그 후 예수께서는 "곧 Immediately" 제자들을 배에 태워 먼저 건너가게 하시고 
무리를 집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마14:22

'곧'은 '즉시' 입니다. 예수님이 상당히 서두르셨어요. 
방금 전에 오병이어 기적 때는 그런 태도가 아니셨는데, 180도 바뀌셨습니다. 

앞서 빈 들에서 저녁에 제자들이 '무리들을 마을로 각자 보내시죠.' 
예수님은 '아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렇게 시간을 상당히 여유있게 사람들을 대했으며 오천 명을 먹이셨던 주님이 
갑자기 서두르시는 거예요. 

즉시로 제자들을 한밤 중에 배에 태워서 건너 보내시고 
사람들도 빨리 집으로 가라고 종용하셨어요. 왜 그러셨는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흩어진 영적인 초점을 재정비해야 될 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에게도, 제자들에게도, 예수님 자신에게도! 

사도요한이 요한복음서를 쓴 것이 AD 90~95년이라고 보기 때문에 
아주 오래전에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을 하면서, 기억을 하고 기록을 하면서 
그때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를 이렇게 적어놨어요. 

요6:15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떡에 취해 있었어요. 
'야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우리가 이런 놀라운 시대를 살겠다..' 

제자들도 초점이 흐려진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막6:52절에 그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라' 

제자들도 들떠 있었어요. 그래서 주님과 함께 가는 이 여정이 
어떤 여정인지를 망각하고 있었어요. 

▲마14:23 '무리를 보낸 뒤 예수께서 혼자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가 
날이 저물기까지 거기 혼자 계셨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예수님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셨구나..' 

오늘 본문 이전이 오병이어 사건이고 
그 오병이어 사건 이전이 14장 전반부에 나오는데, 세례요한이 죽는 사건입니다. 

당신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요한이 처참하게 처형을 당했어요. 
그리고 나서 13절에 보면, 예수님이 조용히 외딴 곳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기어코 예수님이 있는 곳을 찾아내서 따라왔다고요. 
그래도 그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불쌍해서 치유해주시고 먹여주셨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 일까지 하셨으니까 
지금은 주님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셨던 것입니다. 

왜냐면 요한의 탄생이, 예수님의 탄생의 예고편이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의 죽음 또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고편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도 이제 곧 죽겠구나..' 

그런데 그 밤에 도대체 무슨 기도를 하셨길래, 그렇게 오랜 시간 기도 하셨을까요? 
한 밤을 새셨습니다. 거의 대여섯 시간을 기도 하셨어요. 

여러분 홀로 캄캄한 밤거리를 지나가도 두려운데 
홀로 캄캄한 밤에, 산에 계셔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제가 얼마 전에 기도원에 가서, 한밤 중에 혼자 그 앞에 있는 산 정상에 올라와서 
기도한 적이 있는데, 아무도 없는 산에 혼자 있는 것이 두렵더라고요. 

주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밤의 어둠이 두렵지는 않으셨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 앞으로 다가오는 영적인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한기를 느끼셨을 거에요. 

물론 오늘 본문에는 그게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사실 오늘 이 본문은, 제자들이 풍랑에서 당하는 고난과 두려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집중하지, 
예수님이 어떤 시간을 가지셨는지에 집중하지 않아요. 

근데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혹시 예수님이 그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힘겨운 씨름의 기도를 하지 않으셨을까?' 그런 묵상을 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밴쿠버 사역을 하러 갈 때 
16명의 청년들을 단기 선교사로 같이 갔었거든요. 
그런데 오랜만에 같이 만나서 식사하며 교제를 했어요. 

그 밴쿠버 사역을 할 때, 매일 쪽잠을 자며 
쓰러져 있는 교회를 일으키기 위해서, 정말 목숨 걸고 사역했습니다. 

교회는 많이 회복되고 부흥했지만 
그때 동역했던 동역자들을 잘 케어하고 격려해주지 못한 게 
늘 후회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많았어요. 

그런 마음들을 표현했는데, 한 청년이 그러는 거예요. 
'그동안 저희만 힘들다고 불평을 많이 했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까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목사님(설교자)도 참 힘들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드는데 제가 굉장히 위로가 되더라고요. 
가끔 성도님 들이 질문합니다. '저희야 이렇게 목사님께 상담도 받고 위로도 받고 하지만 
목사님은 힘들 때 어디 가서 하소연하시냐고?' 

저는 늘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물론 가족이 있고, 친구들이 있지만 
여러분, 부르심의 길에 대한 어려움을 사람하고 다 나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여러분, 이 부르심의 길은, 주께서 나를 부르셔서 가는 길인데 
그 길을 가다가 초점이 흔들릴 때, 슬플 때, 두려울 때.. 어디에 쏟아 놓겠어요? 
부르신 그분 앞에 엎드려 하소연하는 것 외에, 어찌 다른 길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분 앞에 엎드려서 통곡하고, 그분 앞에서 위로를 받고 
그분 앞에서 인생에 다시 힘을 얻고 일어서는 것이죠. 

사실 이 본문은 제자들의 두려움을 다루는 본문이지만 
저는 엉뚱한 묵상을 어제 한참 한 것 같아요. 
'예수님도 두려우셨겠구나..'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는 분들은 좀 마음에 동의하기 어려우실 지 모르겠어요. 
근데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두려우셨거든요. 힘드셨거든요. 

세례요한의 죽음 이후에 예수님의 마음이 굉장히 힘드셨어요. 
그런데 예수님도 도움이 필요한, 이 상황에 대한 얘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혼자 기도하셨다'라는 한 줄로 끝났어요. 

▲24절에 보면 '거친 바람으로 시달렸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거친 바람'이 헬라어로는 역풍입니다. 가려는 방향에 역풍이 불었던 거예요. 

갈릴리 바다에는 돌풍이 자주 분다고 합니다. 
그 한가운데서 돌풍이 불면 2미터 높이의 풍랑이 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풍이 제자들에게 불었는데, 제자들에게만 역풍이 분게 아니었어요. 
실제로 영적인 역풍은 예수님에게 너무나 강력하게 불고 있었어요.  

사단의 광야시험 이후에,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그 코너로 몰아가기 위해서, 아주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비참하게 헤롯에게 처형된 이후에 
예수님은 이런 영적인 역풍이 강하게 불고 있다는 걸 느끼신 거예요. 
그래서 산으로 혼자 기도하러 가신 거죠.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영적인 풍랑을, 기도가운데 해결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기도가운데 해결 하신 거예요. 

온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신 이후에, 예수님의 마음이 잔잔해 지셨어요. 
그리고 툴툴 털고 일어나신 거예요. 

▲마14:24절 '제자들이 탄 배는 이미 육지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거친 바람으로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탄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을 맞았어요.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할 때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좀 훈련시키려고, 
초점이 흐려졌으니까 다시 훈련시키려고 바다 한가운데 내보내고 기다리셨나보다.. 
시간을 지연하셨나보다.. 그렇게 생각했었거든요. 

근데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이죠. 

자 인생이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은 3가지 차원의 요소가 있고 해석이 필요합니다. 
1) 첫번째는 나의 부주의 때문에 생기는, 나의 잘못 때문에 생기는 고난입니다.

2) 또 한 가지는 사단의 공격

3) 세 번째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 가지 해석으로 치우치시는 것은 좀 위험할 수가 있어요. 

여러분 이 상황을 놓고 보면, 오병이어 후에 제자들이 영적인 초점을 잃어버렸다고요. 
들떠서 자기들의 인생에 큰 뭐 부귀영화를 누릴 걸로 생각했어요. 

사단은 그들의 빈틈을 정확하게 알아보고 공격을 한 것이고요. 
그러나 주님은 그런 고난 중에 있는 제자들을 훈련 하실 뿐만 아니라 
다듬으시고 회복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쳐서 
1) '이 모든 고난은 나 때문이야' 이런 자책감에 빠져서도 안 되고 
2) 그렇다고 '원수의 공격 때문이야!' 이 한 가지로만 해석해서 영적 두려움에 빠져서도 안 되고 
3)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이런 하나님에 대한 원망에만 빠져서도 안 되는 거예요. 


◑2. 두번 째는 결국에는 주님이 회복하십니다. 

마14:25절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이른 새벽을 개역성경에는 '밤 사경'이라고 되어 있는데  *밤을 4등분한 4번째 밤
그러면 새벽 3~6시입니다. 

예수님은 한 밤을 꼬박 다 새시고 새벽에 나타나셨어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 오셨습니다. 

저는 성경을 묵상하다가 종종 예수님께 질문하거든요. 
'예수님, 도대체 그 때 무슨 생각이셨나요?' 

제가 만약에 지금 천국가서 인터뷰를 한다면,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실지 모르겠다는 
좀 엉뚱하고 재밌는 상상을 해봤어요. 

'아~ 그때 내가 밤새 기도하고 생각에 골몰하게 잠겨 있어서 
무심코 걸어가다 보니까 바다더라고.. 그래서 앞서 건너간 제자들을 향해 걸어갔지..' 

여러분 뭐 상식적으로 '물 위로 사람이 걸어간다'
이거 위험천만한 거죠.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니까요. 

사람 입장에서 그렇지만, 예수님 입장에서는 물 위에 계시는 것이 
사람들이 있는 땅 위에 있는 것보다 더 안전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물 위가 땅 위보다 절대적으로 불안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아닐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26절 '제자들은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두려워하며 유령이다 하고 외쳤습니다.' 

여러분 홀로 산에서 내가 길을 잃었다면 '도와줄 사람이 없나?' 
그때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면 그것만큼 반가운 게 없으면서도 
그것만큼 두려운 게 없는 거예요. 날 도와줄지, 아니면 해코지를 할지 모르잖아요. 

제자들이 놀란 이유는, 그 한밤 중에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게 두려운 것이고, 
그런데 그 나타난 존재가 물 위를 걸어오고 있다는 게 두려웠던 거예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인생의 풍랑한 가운데서, 물 위를 걷는 것이 더 두려운 것일까요? 
아니면 배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더 두려운 것일까요? 

둘 다 두렵나요? 
당연히 물 위가 더 두려운 법이죠. 

하지만 인생의 풍랑 속에서 사람들을 보면 역설적입니다. 거꾸로 입니다. 
차라리 목숨을 걸고 물 위를 담대히 걷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런데 오히려 배에 의지해서 살고 싶다고 버티고 있는 사람이 두려운 법이에요. 

예전에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전쟁을 많이 치르신 한 장로님이 계셨어요. 
그분이 전쟁담을 들려주시는데 
전쟁터에서는 그냥 초연하게 '내가 목숨을 그냥 내놓는다' 생각하고 
그 전쟁터에서 싸워야 살아남는다는 거예요. *생즉필사, 사즉필생

'내가 곧 죽을 것 같아, 두려워' 하고 벌벌 떨고 있으면 그냥 당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내 목숨을 부지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아니 사람으로서 다 자기 목숨을 지키고 싶어 하겠지요.
근데 주님은 우리에게 목숨을 걸고 자기를 따르라고 하시잖아요. 
요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하나님 차원과, 우리 차원의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고 전존재로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시게 합당한 영광이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는 우리를 위한 것인데 
목숨 걸고 헌신해야만 두려움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에요. 
목숨을 걸고 헌신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항상 위축되고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내가 아쉬운 게 있고 집착하는 게 있으면 있을수록 두렵게 되어 있어요. 
왜냐면 그것을 놓칠까봐... 

두려움과 갈망은 항상 비례 곡선으로 가는 것이죠. 
사단이 정확하게 그 부분을 알고 우리를 노립니다. 

제 저서 <두려움 너머의 삶>이란 책에서 누차 이야기한 것입니다. 
'두려움은 거짓말입니다. 
근데 그 두려움이 사람들에게 너무나 잘 먹히는 거예요. 
왜냐하면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나거든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죠. 
베드로가 물에 빠질까봐 두려워 하지 않았다면, 물에 안 빠졌을 거예요. 
참 이게 신기한 일이에요. 

보이스피싱도 마찬가지죠. 
돈을 잃어버릴까봐 두렵기 때문에, 돈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이 두려움에 빠지면, 원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돼 있어요. 
성경이 366회나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게 있다는 거죠.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그런데도 제자들은 두려움에 빠졌어요. 
방금 전까지 예수님은 임금이 되시고, 우리는 장관들이 될 것처럼 들떠 있었잖아요. 

이렇게 바다 한가운데서.. 그런데 여기서 빠져 죽는다면 아무 소용없지 않느냐? 
인생의 성공의 최고점에서 실패의 최저점으로, 바닥으로 확 떨어졌어요. 왜 그런가? 

이들은 성공도 위기도, 기도 없이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사후 처방이 아닙니다. 
기도는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전쟁에 대한 준비는, 전쟁이 나고 나서 준비하면 이미 늦은 거잖아요. 
전쟁 준비는 평화의 때야 하는 것이죠. 
국방에 대한 준비는 늘상 해야 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기도 없이 성공한 사람은, 거만함에 빠지게 돼 있고 
기도 없이 위기를 맞이하는 사람은, 원망에 빠지게 돼 있어요

여러분 새벽을 깨우고 기도하십시오. 
또한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십시오. 
스마트폰 노트북 꺼놓고 여러분,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자녀들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되지만 
여러분 자신이 정말 기도하지 않으면 
인생에 좋은 시절이 와도 (교만으로) / 어려운 시절이 와도 (불평으로).. 다 어려워지게 되어 있어요. 

▲자 예수님도 지금 사실은 두려울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십자가가 다가오고 있었어요. 

제자들이 경험하는 풍랑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어마어마한 해일이 예수님에게 다가오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두렵지 않으신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 외에 의지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외에 의지하는 것, 집착하는 것, 붙들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삶이 두렵게 돼 있어요. 

반면에 제자들은 왜 두려웠는가요? 
배를 의지했기 때문이에요. 

물 위에 서 있는 사람은 하나님 밖에 의지할 데가 없지만 
배를 의지하는 사람은, 배가 흔들리는 순간 
자기의 의지하고 믿었던 게 다 무너지는 겁니다. 

특별히 어부들에게 배는 어떤 것입니까? 
자기에게 최선의 능력이잖아요. 
자기가 갖고 있는 최고의 소유잖아요. 

근데 자신의 능력도, 자신의 소유도 
이런 풍랑의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때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간혹 '비행기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난기류를 만나서, 비행기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이런 사람은 얼굴이 사색이 되고, 심박수가 마구 뛰는 거죠.

이때 개선책은
'나는 지금 통제 불능의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다'
를 속으로 계속 되뇌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난기류에 비행기가 흔들리면, 불안한 생각이 되는데 
그게 인지적인 오류라는 걸 알려주는 겁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난기류와 흔들리는 비행기 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뭔가요? 

보이지 않는 조종실의 베테랑 파일럿이 비행기를 안전하게 운항하고 있다고 
이 비행기는 통제 가운데 있다고... 계속 확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통제가운데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두렵지 않으신 것은 
풍랑 이는 바다도, 하나님의 통제 가운데 있기 때문이에요. 

십자가가 다가오지만, 그 십자가의 거대한 해일도 
하나님의 통제 가운데 있기 때문이에요. 

인생의 어떤 고난이 다가와도,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통제 가운데 있는 줄로 믿습니다. 
Under God's control 하나님이 통제하고 계세요. 

27절 '그러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제가 혼자 이 구절을 읽다가 
'예수님이 너무 공감능력이 떨어지시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에 잠시 빠졌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뱀새 몇 시간을 시달렸는지 모르고,
풍랑 속에서 엄청나게 시달리고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시잖아요. 

예수님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얘기를 하시나요?
그런데 제자들을 보면,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풍랑 때문에도 두렵지만, 이번에는 누구 때문에? 예수님때문에 더 두려워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의 고난을 당할 때, 왜 두려움에 빠지는가요? 

고난 자체보다도, 그 고난을 내게 주셨다고 생각되는 주님 때문에 
더 두려움에 빠지는 거예요. 

'도대체 주님은 무슨 의도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나요?'
'내가 이런 고난 당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왜 이런 고난을 제게 주시는가요? 이유를 좀 설명해 주세요.' 

왜 풍랑을 사전에 안 막아주셨나요? 왜 그 산 정상에서 예수님은 기도만 하시고
우리만 일부러 여기에 내버려 두시고 
이 새벽까지, 가장 절망과 고통의 정점의 순간에.. 비로소 이제야 나타나시나요?' 

그러니까 그 나타나신 주님이 '야 두려워 하지마!' 그러면서 다가오시는데 
주님이 낯선 거예요. 
여러분 고난가운데 들어가면, 주님이 낯설어집니다. 
평상시에 내가 알았던 은혜의 주님이 아닌 거예요. 

'어 주님, 잠깐만요. 다가오지 마세요! 
도대체 주님이 어떤 의도인지, 내가 주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얘야, 나야!' 그리고 가까이 다가오시는데, 다가올수록 두려운 거예요. 
(자녀가 죽었다거나, 자기가 큰 중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등을 돌리고 그냥 떠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길게 설명하지 않으시고 그냥 '나다!' 그러셨어요.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7

'너는 나를 신뢰하지 않니?' 
'나다!' *에고 에이미

'에고 에이미 I am'은 요한복음에서 7번 나온다고 하는데,
여기서 마14장에서는 그냥 '나다. 내가 여기 있다.'는 뜻입니다. 
'나 이기 때문에 너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아무리 통제불능의 상황일지라도, 여전히 풍랑가운데 있을지라도 
'내가 있잖아 그러니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거야!' 이렇게 얘기하셨어요. 

▲한 권사님의 아들이 있었는데, 정말 하나님 앞에 헌신하겠다고 
너무나 예쁘게 신앙도 인생도 잘 커가던 한 아들이 
신앙에도 회의에 빠지고, 인생도 방황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 아들 때문에 통곡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도 아들은 아무 변화가 없는 거예요.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그러니까 3주 금식에 들어간 거예요. 

금식하며 기도하고 나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데 허탈한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이 아들을 언제 살려주시겠습니까?' 
근데 '내가 그 아들을 사랑한다' 

'아니요, 내 아들을 사랑 하신다는 그런 얘기 말고 
언제 이 아들의 방황이 끝나겠습니까, 언제 풍랑이 멈추겠습니까?' 
'아니, 내가 그 아들 사랑한다;

하나님의 대답은 너무나 명쾌한데 
우리는 상황이 종료돼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응답이라는 거예요. 

▲어떤 한 분이, 자기 인생의 진로가 갑자기 그냥 올스톱이 되었어요.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지 않았습니까? 
제 인생의 진로를 열어주십시오' 오래도록 기도 했는데, 하나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내가 너와 함께한다' 

그는 '아니요. 내가 너와 함께한다.. 그런 추상적인 얘기말고 
명확하게 내 진로를 언제 열어 주실 건지, 어디로 가야 되는 지를 얘기를 해달라고요.' 
'내가 너와 함께 한다니까' 

근데 우리는, 주님의 대답이 대답으로 들리지 않는 거예요. 
여러분 '주님이시다 I am' 그 한마디면 신뢰해야 되거든요. 

근데 제자들은 
'아직 풍랑이 일고 있습니다. 아직 배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상황은 하나도 바뀐 게 없습니다. 
주님이 여기 계신다고 해서, 상황이 바뀐 게 없기 때문에 저희는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제가 사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많이 설교했지만 
어제는 궁금한 것을 해답을 얻을 때까지, 계속 묵상한 것 같아요. 

32절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자 바람이 잔잔해졌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좀 얄밉더라고요. 
'좀 일찍 잠잠하게 하시면 안 되나? 
왜 꼭 이 모든 게 종료되고 나서 (뒤늦게) 풍랑이 잠잠해졌지?' 

아니 예수님이, 제자들앞에 나타나셨을 때 잠잠하게 해주셨으면 
'와 풍랑이 잠잠해 줬구나 정말 주님이시구나, 웰컴!' 하지 않았겠어요? 

근데 풍랑이 계속 일고있고, 그 한가운데를 걸어오고 계시니까 
'이건 도대체 뭐지? 예수님의 의도는 뭐지?' 의심하는 겁니다.

사실 예수님도, 이것도 좀 엉뚱한 상상인데 
예수님이 방수복을 입으신 게 아니잖아요.

 

저는 아마 걸어오신 예수님이 멋지게 걸어오셨지만 
그 성화에서나 나오는 것처럼, 물 한 방울 안 튀기신 그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혹시 물에 많이 젖지 않으셨을까요? 

2미터 되는 높이의 풍랑인데, 
그럼 예수님도 좀 물에 안 젖으려면 
처음에 걸어오실 때부터 좀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그냥 그 풍랑 한가운데를 뚫고 걸어오셨어요. 

우리는 문제상황이 해결되어야만 안심이 되고 
문제 상황이 해결되어야만 주님을 인정해요. 

마지막 33절에 '배에 올라타셔서 풍랑이 잠잠해지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그러잖아요. 

진짜 이게 믿음의 고백일까요? 
풍랑이 잠잠해졌기 때문에, 그 고백을 한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기도한 것이 고난에 대한 해답,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평안하게 해주시고 
상황이 종료되고, 정리 되어야만.. 제가 하나님을 인정하겠습니다.' 
다들 이렇게 얘기해요. 

근데 예수님은 뭘 얘기하고 싶으신건가요? 
'아니, 여전히 풍랑이 일고, 여전히 배는 가라앉을 것 같고 
그래도 그 한가운데 내가 나타나면, 해결된 거다. 해결된 거다.. 
그걸 믿음으로 받아들여라!' 그 얘기를 하고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 그 얘기 잘 아시죠?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실제로 당시에 최고 유명한 곡예사가 밧줄을 양쪽에 걸어놓고 
'여러분 제가 밧줄 위를 걸어서, 이걸 건널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믿습니다.' 그는 건너간 거죠. 

그리고 나서 이제 자전거를 한 대 세워놓고 
'제가 이 자전거를 타고 건널 수 있다는 걸 믿으십니까?' 
'믿습니다.' 건너간 거죠. 

여러분 '여기 사람을 한 사람을 태우고 건너갈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믿습니다.' 
그럼 지원자를 받습니다. 
아무도 지원을 안 하는 그 상황 자체..
군중들은 그 곡예를 하고 있는 사람을, 그저 엔터테인먼트로 보고 있었던 거지요. 

이 성경이 만약에 우리에게 그 질문하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누가 지원을 했어요. 
베드로가 지원한 거예요.

이 상황은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베드로가 지원한 것과 같습니다. 

28절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정말로 주이시면 
제게 물위로 걸어 오라고 하십시오!' 

하여튼 간에 베드로는 남이 생각하지 못한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참 기특한 것은, 모두 주님 때문에 두렵다고 할 때 
베드로는 주님때문에 '나는 물 위를 걷는 도전을 해보겠다.' 

베드로는 '정말 주님이시라면 풍랑을 멈춰주세요.' 이렇게 요청하지 않았어요. 
'저도 풍랑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세요! 
저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인생의 수많은 풍랑이, 인생의 수많은 파도가, 
인생의 수많은 시험과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 제가 그 하나하나를 해결해 달라는 게 아니라 
내가 아예 이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그런 기도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너무나 흔쾌히 '오너라!' 그러셨어요. 

그래서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어요. 
근데 바람을 보고 두려워서 물 속에 빠져 갔다고요. 
그리고 주님께 살려달라고 외칩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31절입니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했느냐?'

저는 이 본문을 볼 때마다, 그래도 대담한 시도를 했는데 좀 칭찬해 주시지.. 
혼내기만 하셨구나' 
근데 자세히 보니까, 꾸중은 꾸중인데, 또 꾸중이 아니더라고요. 

무슨 얘기냐면 예수님이 이렇게 얘기하지 않으셨어요. 
'시몬아, 그러니까 네 분수를 알았어야지!'

'구약의 그 위대한 인물들, 모세와 여호수아와도, 엘리야와 엘리사도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넜지만 
물을 가르고 건넜지, 물 위를 걷는 건 네가 처음이야!'
 
여러분 성경의 역사에서도 가장 첫 번째 시도를 한 사람이에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는 시도를 했어요. 

그러나 주님은, 주님을 그대로 모방하고 따라오려는 그를 기특하게 여기시고 
격려해 주셨다고요. 

다만 주님이 책망하신 것은, 도전이 아니라 의심이었습니다. 
여러분 '불가능에 도전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내가 그 부르심이 아무리 고난의 길이고, 불가능해 보여도 도전하겠습니다!' 

그렇게 따라오는 사람을 주님이 외면하지 않으세요. 
오히려 격려해주시고 칭찬해 주십니다. 

그러나 의심에 대해서는 책망하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한 여정인데, 왜 믿음으로 계속 가지 않고 너 의심했느냐?' 

믿음이 무엇이고, 의심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예수님이 세상보다 커 보이는 것이고 
의심은 세상이 예수님보다 커 보이는 거에요. 

그래서 믿음은 예수님을 주목하는 것이라면 
의심은 예수님을 향한 초점이 다른 데로 새버리는 거예요. 

여러분의 영혼의 초점을 재조정하셔야 돼요. 
요즘 연말에 뭐 행사도 많고, 모임도 많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자신의 삶의 초점을 재조정하고 새해를 맞아야 하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이때 흩어지잖아요.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의 인생, 정말 평생 바람 잘 날이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잖아요. 
다사다난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잖아요. 

그런 가운데 '풍랑이 잠잠하게 해주십시오!' 를 기도하지 마시고 
'풍랑을 넘어서는 인생이 되게 해주십시오!'를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잠잠할 때도/ 풍랑의 일 때도 
여러분은 늘 승리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그 도전!
만약에 주님, 이것이 나의 부르심이라면 이 길을 가고 싶습니다. 
그 믿음의 도전은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마치는 말

세상은 여러분에게, 길이 없는 곳은 가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길이 아닌 곳엔 가지 마라.. 이렇게 가르칩니다. 위험하니까요. 

근데 예수님은 거기에 부르심이 있고, 주님이 그 길을 가신다면 
길이 없는 곳이라도, 내가 길을 만드니까, 내가 곧 길이니까 
나와 함께 가자 말씀하시는 거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풍랑 이는 그 바다 위를, 
길을 만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광야 한 가운데도 길을 내시고 
풍랑이는 바다 위에서도 길을 만드시는 주님, 

아무리 역풍이 불어도, 더 강력한 성령의 바람으로 승리하시는 주님 
주님을 닮은 하나님의 아들, 딸들되게 하여 주옵소서! 

한 해를 살면서 실패에 대한 기억, 실패에 대한 아픔과 트라우마가 남아서 
우리를 주저앉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계선을 뛰어넘어 다시 영적 도전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한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