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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35편 1~28 그렇지만 하나님

LNCK 2022. 3. 8. 15:55

◈그렇지만 하나님       시35:1~28       여러 설교 정리, 출처

 

 

시편은 '찬양의 책'이면서 동시에 '기도의 책'입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는 '찬양시' 이기도 하지만,

또 실패와 아픔, 좌절과 낙심 가득한 현실 가운데 인간의 신음과 탄식을 토로하는

'탄원시'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듯, 시편 안에는 '탄원시'가 더 많습니다.

'탄원시'에는 전형적인 양식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

둘째, 불평과 탄식으로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제가 죽을 것 같아요."

셋째,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넷째,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확신합니다. "그렇게 해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다섯째, 찬양을 서약합니다.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겠습니다."

 

이 5가지가 탄원시의 전형적인 요소이나,

때론 한 두 가지가 생략이 되기도 하고 순서가 뒤섞여지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탄원시'입니다.

다윗은 왕권 유지에 급급했던 사울과 그 추종세력에 의해 좇기는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다윗은 그 억울하고 척박한 도피 생활 중에

자신의 기막힌 처지를 하나님께 토로하며 탄원합니다.

 

그것이 오늘 시35편입니다.

35편은 세 단락의 탄원(1~10, 11~18, 19~28)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탄원시의 전형적인 양식대로 각각의 세 단락의 탄원은 찬양으로 끝맺습니다.

(9~10절, 18절, 27~28절).

 

 

◑탄원1: 나를 도우소서 (1~10절)

 

다윗은 먼저 하나님을 부릅니다. "여호와여"(1절).

그리고 구체적인 불평과 탄식 없이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고 바로 이어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만큼 다윗이 처한 상황의 긴박성을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1~2절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3절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대적이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 
용감한 전사가 창을 들고 좁은 길을 막아서서 자기 동료들이 순조롭게 탈출할 때까지 
상대방 군대를 저지하듯이, 종종 여호와께서는 신자가 호흡을 가다듬기까지 
혹은 대적들로부터 완전히 달아날 때까지 그의 대적들을 막아 서시는 모습을 노래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거친 단어를 연거푸 반복하며

대적자들을 망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4절에 ‘낭패를 당하게 하소서’,

5절에 ‘몰아내소서’,

8절에 '멸망이 닥치게 하시며' ‘떨어지게 하소서’.

 

다윗은 대적자들을 '바람 앞에 겨'(5절)와 같게 해달라고까지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시1:4)와 같기 때문입니다.

 

대적자들은 지금 다윗의 생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다윗의 생명을 해하려고 혈안입니다(4절).

다윗을 잡기 위해 함정을 파고, 그물을 칩니다(7-8절). 다윗은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죽음이 눈 앞에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할 수 있는게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뿐입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2절)

 

"그 숨긴 그물에 스스로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8절
종종 하나님은 동해보복법을 매우 탁월하게 적용하십니다. 
덫을 놓은 사람들은 자기가 그 덫에 얽어매이고 맙니다. 
그들이 돌을 던지지만, 그 돌은 자신의 머리에 떨어집니다. 
반역을 일삼던 자들은, 자신이 반역을 당함으로 인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의 탄식조가

9~10절에 들어서면서 찬양의 분위기로 갑자기 변합니다. 반전입니다.

 

9절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개역성경에는 9절 서두에 접속사 (베, 바브)가 생략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영어성경은 And 또는 Then 으로 접속사를 쓰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접속사 (베)는 '그러면, 그러나, 그렇지만' 등으로 번역됩니다.

 

9절부터 시가 반전을 이룬다고 볼 때, '그러나'로 번역해도 좋습니다.

이렇듯 반전은 탄원시의 절정입니다.

 

불평과 탄원의 상황은 처절한 현실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애타고, 절박하게 구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처지이지만,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불안과 초조함을 떨쳐내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합니다.

 

다윗은 대적자들의 공격과 절망의 순간에서도

눈을 들어 구원하시고 건지시는 하나님을 향하며 오히려 찬양합니다.

다윗은 버려진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품에 자신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탄원2: 건지소서 (11~18절)

 

두 번째 단락의 탄원에서 다윗은 자신을 향해 거짓 고소하는 대적자들을 고발하며 탄원합니다.

 

11절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이는 불신자가 사용하는 오래된 술책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우리 주님께 닥쳤듯이, 우리에게도 발생한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 됩니다. 
사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다윗을 비방하는 자들은 항상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12~13절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다윗은 저들에게 선을 베풀었는데, 저들은 선을 악으로 갚고 있습니다. 이것도 마귀적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종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무리들 배후에는, 마귀의 영적 세력이 있습니다.

  

다윗은 저들이 병 들었을 때 정성껏 기도해 주었고,

저들이 환난에 처했을 때 마치 다윗 자신의 일처럼 함께 아파하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13
기도는 결코 잃어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만일 기도가 중보의 대상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면, 
그 축복은 기도자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수증기를 올려보낸 지점에만 항상 소나기가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어느 곳엔가에는 비가 내리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간구의 기도는 누구에겐가 은총의 소나기를 내리게 합니다. 

이 시편 전체를 통해 의인과 그의 대적들이 그 얼마나 예리하게 대조되고 있는가요! 
우리는 그 경계선을 확연하게 구분해서 보는 눈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즉 내가 악인 편에 서지 않고, 의인의 회중에 들도록 애써야 합니다.

 

"서로 모임이여, 불량배가 내가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서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아니하도다" :15
마치 매와 독수리들이 죽어가는 먹잇감 주위로 몰려들 듯이, 
그들은 나의 파멸을 통해 공통의 기쁨을 발견하고, 
나의 슬픔을 즐기며, 또한 함께 모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어 궁리하고 입으로 거짓을 발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도, 빌라도와 헤롯이 모였고,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16절. "저희는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같이 나를 향하여 그 이를 갈도다" 
흥을 돋우기 위해 연회장 주위를 돌아다니며 히죽거리는 직업적인 어릿광대와 같이, 
그들은 선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의 조롱은 단순히 웃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탐욕스럽고 거센 증오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처럼, 혹은 한 조각 빵을 얻기 위해 조롱하는 사람들처럼, 
고용된 이 악인들은 사울의 식탁에서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다윗을 핍박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이새의 아들이 자신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었던 까닭에 
그에게 악의를 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탄식합니다. 17절입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려 하나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그러나 어김없이 반전의 찬양이 고백됩니다. 18절입니다. (원전에 접속사 없습니다)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

 

그러나 내가' 주를 찬송하리이다! 외롭고, 화가 치밀고, 억울하고, 두렵고,

불안한 상황이 현실 맞지만, '그러나 내가' 주님을 바라며 찬양합니다!

 

◑탄원3: 찬송하리이다(19~28절)

 

세 번째 단락의 탄원에서 다윗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 대적자들의 악행을 고발합니다.

마치 법정에서 판사에게 자신을 변론하는 모습입니다.

21~24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21 그들은 입을 크게 벌려 "하하!" 하고 웃으면서

"우리가 두 눈으로 그가 저지르는 잘못을 똑똑히 보았다" 하고 위증합니다.

22 주님, 주님께서 친히 보셨으니, 가만히 계시지 마십시오. 주님, 나를 멀리하지 마십시오.

23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분발하여 일어나셔서, 재판을 여시고 시비를 가려 주십시오.

24 주님, 나의 하나님, 주님의 공의로 나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그들이 나를 이겼다고 하면서 기뻐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세번째 단락의 탄원 역시도 찬양으로 끝맺음을 합니다.

28절 '(그러면)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접속사 (베)가 있습니다.

 

여러분, 불평과 탄원할 수 밖에 없는 서글픈 치지와 형편이 어찌 다윗만의 일이겠습니까?

답답하여 미칠 일이 하나 둘 뿐이겠습니까? 신음과 한숨없는 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모질고 서러운 현실로 인해 비명과 눈물의 시간이 우리에게 제법 많습니다.

 

우리에게 시편을 기록하라하면 우리 역시도 '탄원시'가 휠씬 더 많을 것이 분명합니다.

기억하십시다. '탄원시'는 탄원으로 끝맺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는 '그렇지만'이 있습니다.  *9절, 18절의 히브리어 접속사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탄원으로 시작해서 찬양으로 끝을 맺습니다.

막막하고 절망적인 탄원의 자리에서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아니 어떤 비참한 현실보다 더 비참한 것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 오직 예수만 바라보며, 우리에게 허락된 오늘의 삶의 걸음을,

비록 척박한 길일지라도 기꺼이 감수하며 찬양하며 걸어가십시다.

 

27절과 28절을 보십시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의 마지막 찬양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를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공의로운 하나님께 “나를 판단하소서!” 그렇게 기도했잖아요. 

그러니까 그 기도를 들어주시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찬송하겠다는 것이지요.

이제 결론적은 몇 가지 메시지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고난과 찬양에 대하여 좀 묵상해보았습니다. 결론은 고난과 찬양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찾아오잖아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두 가지 반응이 있어요.

첫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겁니다. 그러면 믿음에 회의가 생기기도 하고요. 원망이 생기기도 하고요. 때로는 믿음을 버리는 일도 생깁니다. 솔직하게 고백하면, 목사인 저도 고난이 찾아오면 정말 힘들 때가 있어요.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그렇게 원망할 때도 있어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잠시 하나님을 떠나 있고 싶을 때도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저를 목사로 삼으신 것 같아요. 목사가 아니면, 자주 도망갈 것 같으니까요. 제가 잘 아는 신학교 동기가 있어요. 개인적으로 대학 후배에요. 저처럼 시골산이고요. 그래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순수한 분이셨습니다. 이분이 이름만 대면 아는 강남에 유명한 교회의 전도사님이 되셨습니다. 교역자들에게는 그곳에 사역하는 것이 매우 부러운 일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양해하시고 읽어주세요.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지 말아야 하는데, 종종 일어납니다. 어느 날 담임목사님이 이 친구를 부르더니, 갑자기 교회사역을 그만두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만두라고 하시는지 설명이나 들으면 좋았을 터인데, 그냥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보니까, 그 자리에 다른 분이 사역하러 오십니다. 들어보니까, 담임목사님의 친구 목사님의 아들이에요. 친구가 부탁하니까, 그 부탁을 들어주려고 아무 힘도 없는 전도사님을 그만두게 한 겁니다. 근데 새롭게 사역하게 된 분도 우리 동기에요. 그 복잡한 상황에서 사역을 그만두게 된 전도사님이 너무 괴로운 겁니다. “어떻게 교회가 이럴 수 있나? 어떻게 훌륭하다고 알려진 목사님이 이럴 수 있나?” 괴로워서 막 머리가 빠지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사라져 버렸어요. 나중에 들려오는 소리가, 목회자의 길을 가지 않기로 했다는 겁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저도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참 세상이 좁습니다. 얼마 전에 고향교회 담임목사님과 통화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이 목사님께서 미국에 세미나를 참석하러 가셨습니다. 거기서 목사님 한 분을 만나 교제하셨습니다. 우연하게 제 이름이 거론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저를 잘 알고 있다는 겁니다. 누굴까요? 네.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제 대학교 후배였어요. 목회를 그만두겠다고 하셨는데, 돌아오셔서 목사가 되셨고 어느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계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한 번 만나서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되었는지 듣고 싶어요.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은 우리를 참 힘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고, 믿음을 흔들게 만들 수도 있어요.

그런데 고난이 유익이 될 수도 있어요. 지금까지 다윗이 수없이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시편에서도 보여줍니다. 시편 말씀은 다윗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우리의 환상을 깨뜨립니다. 우리는 흔히 다윗이 누렸던 좋은 것들을 바라봅니다. 왕으로서 누렸던 모든 권세, 부유함, 화려함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편을 통해서 바라보게 되는 것은 그런 다윗이 아니에요. 다윗은 늘 고난 가운데서 살았어요. 그런데 다윗이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라는 것은 그의 권세나 부나 화려함에 있지 않았어요. 그가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점은 그가 고난을 당할 때에 어떻게 그 고난과 대면하였는가에서 볼 수 있어요. 다윗도 물론 고난 앞에서 하나님께 탄식했어요. 때로는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그렇게도 소리쳤어요. 그러나 다윗은 그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다윗은 고난을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시간으로 삼았어요. 다윗은 고난의 시간에 온전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어요. 밤낮으로 기도했어요. 눈물로 진실하게 부르짖어 기도했어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의 고난으로부터 건져주시기까지 매달려서 기도했어요. 그래서 다윗은 성경에 그 어떤 인물보다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많이 받았어요. 고난으로부터 구원 받는 은혜를 그 누구보다 많이 누렸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찬송하는 거에요. 자신을 고난으로부터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에요. 누구보다 기쁘게 찬송합니다. 누구보다 크게 찬송합니다. 누구보다 확신 있게 찬송합니다. 고난으로부터 구원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고난은 때때로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교회에도 그런 분들이 많아요. 심방을 하고, 대화를 하잖아요. 그러면 “고난이 유익이었습니다.”라는 놀라운 고백을 하는 분들이 있어요. 다윗과 동일한 은혜를 경험한 겁니다. 고난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하며 가까이 한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겁니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신앙이 더 단단해진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때때로 고난이 다가올 때에, 하나님을 더 가까이 찾으므로 고난의 유익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

 

기도 / 하나님, 서글프고 가련한 인생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음이 더 크고,

그리고 조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신음과 한숨, 탄식의 외침이 전부입니다.

사투일 수밖에 없는 인생살이를 사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내게 주어진 처지와 형편에서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며 찬양하게 해주십시오.

무력한 인생을 향해 은혜로 일하시는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며,

오늘을 살 소망과 힘을 덧입혀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