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임박해 있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죽으셨는가?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왜 죽으셨는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들이, 이제 우리가 여기서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빌라도라는 인물을 보게 되는데요. 빌라도는 역사 속의 주후 26~36년까지 약 10년 정도 유대의 총독으로 재임했던 실제적인 인물이죠. 그런 역사의 유명한 인물이 됩니다. 근데 명예로운 이름이 아니고 아주 악명을 날리는 이름이 되죠.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가 언급됩니다. 2천 년 역사 속에 끊임없이 수 없는 사람들의 입에서 사도신경으로 고백되어지는 문구속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자로 알려지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인류 역사에 빌라도는 참 불행한 인생을 산 사람이 되죠. 그럼 빌라도가 어떻게 예수를 죽인 자로 지목되었을까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는 일에 연루된 자는 아주 많습니다.
사실 배후에서 조종했던 인물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죠. 그런데 성경은 빌라도를 지목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죽였다는 거죠. 왜냐하면 그가 사형 집행을 언도하는 책임자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리가 참 중요합니다. 그 자리에서 내린 결정이 역사에 남는 것이죠. 당시는 사형집행권는 로마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있던 유대의 입장에서는 종교지도자들이 아무리 예수를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있었지만, 산회드린 공회는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결국은 이들은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서, 빌라도 앞에 세웠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시비를 거는 신성모독죄에 대해서는 사실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가 과연 로마의 반역자요, 황제를 위협하는 자인가에 대한 확인을 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신성모독이에요.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본심은 따로 있었습니다. 예수의 존재가 그들을 위협했기 때문에, 예수의 활동은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절정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임금 삼으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팬덤현상이 일어났습니다. *팬덤 : 팬들이 결집하여 킹덤을 이루는 것
예수에 대한 대중의 뜨거운 열기는 기득권에 속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예수의 활동이 부각될수록 종교지도자는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은 기존의 종교체제를 다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외식적인 죄들이 드러났습니다. 결국 예수에 대한 적대감이 갈수록 강해졌고 예수는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눈에는 가시처럼 보였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왜 예수를 자기에게로 데리고 왔는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막15:10절에 '이는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더라' 그건 시기심이었습니다. 여러분, 시기심이 참 무섭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정당한 재판을 해야죠. 그런데 멈칫거리고 있습니다. 이유는 이 백성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죠.
빌라도의 관심은 공정한 재판을 하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거예요. 이 권력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사실 이게 권력자의 속성입니다. 권력의 유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 권력에도 일종의 중독 현상이 있습니다. 한번 맛을 보면, 내려놓기가 어렵습니다.
사무엘상에도 보면, 권력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울이 나옵니다. 사울은,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의 등장 이후, 자신의 권력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 광기 어린 행동을 서슴지 않죠.
자기 사위가 된 다윗을 죽이려고 그럽니다. 사위도 죽이는 게, 이게 권력입니다. 자신의 권력을 순순히 내어놓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정치적인 혐의점을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이 빌라도가 누구입니까?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가 유대를 통치하기 위해서 보낸 총독이죠.
이 총독 아래 모든 권한이 있는데 유다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전역까지 전체를 지휘하는 권한을 가진 총독이 빌라도였습니다. 당시는 지배국과 피지배국간에 팽팽한 긴장이 돌던 때였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하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총독부가 한국에 설치되어모든 것을 관할 했죠. 그 때 우리는 독립하려고 저항운동들이 곳곳에 일어났는데, 삼일운동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당시는 유대의 독립을 위한 열심당원들이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시점은 유월절 절기 기간이라,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까지 모여들어 예루살렘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폭동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당국자들이 예민해 있을 때였습니다. 빌라도의 역할은 유대의 이 복잡한 상황을 조율하고 평안을 유지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관심사는, 황제로부터의 신임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폭동이 일어나면, 로마 황제로부터 소환을 받거나, 그의 총독 직위가 박탈될 수도 있었습니다.
또 역사가의 전언에 의하면, 빌라도는 당시 로마 황제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권력의 자리에 있었지만 늘 불안했습니다. 예수를 재판하는 일은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그는 결단을 내리는 것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그의 판결에, 유대 지도자들이 반감을 가지고, 황제에게 불만을 호소하면 자신의 자리가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던 거죠.
▲그럼에도 초기에는 빌라도가 예수를 석방하라고 예를 썼습니다. 요19: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가 예수를 풀어주려고 애를 썼지만 유대인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만약 예수를 풀어준다면, 당신은 로마의 가이사에게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당신이 예수를 풀어주기만 하면, 우리가 황제에게 고발하겠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위기에 봉착합니다. 오늘은 여기서 권력자의 일상을 살짝 들여다보게 됩니다.
힘의 정점에 앉아 있었지만, 불안해하고 있는 지도자! 여러분, 권력을 잡으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권력이라는 게 그래요. 겉은 굉장히 화려한데, 안을 들여다보면 늘 흔들리는 것입니다.
권력자들이 왜 전쟁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불안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권력은 쉽게 폭력성을 드러냅니다. 독재자들이 일어나는 이유죠.
여러분, 종교적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지도자들역시 그들이 가진 힘으로 예수를 제거하는 일을 지금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불법적으로!
이 권력자의 불안은 대중의 눈치를 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죠. 권력의 정점에 있지만, 여론조사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국정 지지율에 민감합니다. 자신에게 불리해지면 통계나 언론을 임의로 조작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지나친 통제와 감시를 하기도 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입니다.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어렵지만,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높은 곳에 오를수록 더 불안이 심해지는 것입니다.
분명히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어요. 예수가 죽을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정당한, 공의로운 재판을 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막15: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빌라도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정한 판정을 내리면 돼요. 그런데 백성들에게 판결을 지금 맡기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랴? 너희들이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
이건 무책임한 모습입니다. 지도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판단을 대중에게 맡겨버렸습니다. 책임을 져야 하는데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역사적인 어떤 책임이 있다는 거죠.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것이죠.
근데 이 빌라도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자 책임을 져야 할 자가 행동하지 않을 때, 백성들의 소리는 더 높아집니다. 막15:13 '그들이 다시 소리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군중들은 이미 폭도로 변해 있습니다.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는 백성들의 마음을 돌려보려 하지만 실패합니다. 군중들의 소리에 이미 빌라도의 말은 들리지도 않고 파묻혀버렸습니다. 군중들은 이성을 잃었습니다.
여러분 '다수의 폭력성'을 조심해야 합니다. 집단화 될 때 위험한 요소가 굉장히 많아요.
그 집단 안에 들어가 버리면, 개인의 판단력이 흐려져버려요. 우리는 '다수가 늘 옳다'는 등식을 가지고 있으면 안 돼요.
역사 속에 언제나 다수가 진리를 선택한 게 아닙니다. 이들 군중들은 누구입니까?
지금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이 군중들은 우리가 알듯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환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 일부는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났을 때 떡과 고기를 먹었던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거리는 좀 떨어졌지만요. 군중은 이렇게 쉽게 변하는 것입니다.
다수의 압력에 밀려서, 드디어 빌라도가 결정을 내립니다. 역사의 치명적인 오류,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15절에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여기에는 공의가 없습니다. 정의가 없습니다.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줍니다.
여러분 바라바는 누구입니까?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한 사람이에요. 십자가에 형이 언도된 사람이, 그런데 그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게 합니다.
그 의도가 뭐죠?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그랬습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빌라도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즉 자기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의에 대하여 눈을 감은 것입니다. 공의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빌라도는 순간적 위기를 모면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현실에 따라 타협하는 자였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확실한 기준을 갖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상황 논리'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준이 없으면, 상황에 따라 흔들립니다. 상황은 늘 변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때 적당하게 반응하며 살아가야 돼요. 그거 얼마나 피곤한지 몰라요. 그래서 눈치를 봐야 되는 거죠.
우리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뭐냐면 '기준 standard'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이런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삶의 기준을 정확하게 제시를 해 줍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캐논(정경) 이라고 합니다. '자 ruler'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준'이라는 겁니다.
기준이 없으면,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빌라도가 마찬가지예요. 군중들의 요구에 지금 휘둘리고 있는 모습.. 그는 기준이 없어요.
이런 군중들의 요구는 늘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군중들의 표피적인 필요만 채워주려고 하면, 인기주의 포퓰리즘이 되는 거죠. 그것은 지도자와 백성이 함께 망하는 길입니다.
우선은 백성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지만, 결국은 백성의 눈을 감기고, 속이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필요를 살펴야 하지만 너무 백성들의 눈치를 보는 것도 문제입니다.
때로는 백성들의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할 일을 해야 진짜 지도자죠.
빌라도는 소리치는 군중들 앞에서 고민에 빠집니다. '바라바냐, 예수냐?'
그것은 군중의 소리이기도 하지만, 빌라도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였습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양심의 소리가 있습니다.
양심의 소리에 정당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내적 갈등은 계속 커져가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했어요.
풀어주려니 군중의 압박이 거세고 십자가에 내어주자니 양심이 괴로워요.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고, 일평생 그 선택에 대한 무거운 죄값을 뒤집어쓰고 살 것인가? 한 순간 편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은 어렵지만, 영원에 후회없는 선택을 할 것인가? 여러분 이것은 오늘 우리 일상에서도 늘 일어나는 문제요, 계속되는 유혹입니다.
타협에 대한 압박이 치열할 때, 우리에게는 용기가 필요하죠.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순간, 밀려올 현실적 어려움들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 우리는 주저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올지라도 '나는 과연 예수를 선택할 것인가?' '현실적인 문제들 앞에서, 양심을 무시하고 현실적인 실익을 선택할 것인가?'
'내가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고, 정말 과연 안전할까?' 오늘도 우리는 예수와 현실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타협을 거부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돼요. 우리의 믿음 생활은 언제나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 '예수냐 아니면 세상이냐?'의 갈림길에 늘 서게 됩니다. 오늘의 빌라도를, 우리는 우리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빌라도의 고백처럼 '그리스도라 하는 이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할까?' 올해 일상 속에서 내가 신앙인으로 살아가고자 할 때 수많은 선택들 앞에서 '내가 이 문제 앞에서, 예수의 편에 설 것인지/ 세상 편에 설 것인지.. 우선의 안전을 선택할 것인지/ 영원의 안전을 선택할 것인지.. 우리는 매 순간 믿음의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군중들의 요구들을 넘기고 맙니다. 마27:24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예수를 넘겨주고 난 다음에, 아마 빌라도는 양심의 어마어마한 가책을 느끼면서 자기가 지은 죄책감을 씻기 위해서, 그가 손을 씻는 장면이 나오는 겁니다.
자신의 무죄함을 증명하듯이, 그는 물로 손을 씻어요. 그러나 물로 손을 씻는다고 그의 죄가 사라지지는 않죠.
그때 백성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얼마나 무서운 말을 내뱉었는지요!
이 대답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비운의 역사들이 많아요. 빌라도가 자신은 죄없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범한 죄가 사라지는가요?
성경은 빌라도의 죄를 결코 묵인하지 않습니다. 그의 죄를 영원히 묻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어요. 자기의 죄를 떠넘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죄가 다른 사람에게로 돌려질 수는 없습니다.
빌라도의 죄는 무엇입니까?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다 하지 않은 죄! 아무리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을 할지라도 회피할 수 없어요. 빌라도의 비겁한 인간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거부한 사람입니다. 허약하고 무력한 인생이었습니다.
정의를 말하지만, 정의를 지킬 능력이 전혀 없었던 지도자였죠. 빌라도는 구원자로 오신 예수를 죽인, 인류 최대의 희대의 악인이 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우리는 빌라도를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가능성이 오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눈이 어두우면, 현실의 문제에 다 빠져 있으면 진리의 눈이 가려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의 문제만 계속 집중해 보십시오. 언제든지 예수를 못 박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너무 현세적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습니까? 내가 내 자리에서 할 일을 마땅히 하고 있는가요? 내가 살려고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일은 없었는지..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나 때문에 예수는 팔려가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는지요? 제 2의 빌라도는 얼마든지 오늘도 만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빌라도를 몰아내야 돼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현실과 타협하려는 유혹과 싸워야 한다는 거죠. 당장을 살기 위해, 영원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영원과 진리를 위해 현실의 순간적인 유혹으로부터 매일 싸워 이기는 승리하는 삶을 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 이제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의 모습, 이상한 조우입니다. *조우 : 마주쳐 만남
참된 재판장이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선 예수의 모습은 너무 어색해요. 누가 누구를 심판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말도 안 되는 것이죠.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은 분명히 왕이십니다. 물론 빌라도가 생각하는 왕은 아니죠.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나라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진정한 왕은 한 분 밖에 없어요.
이스라엘 남북의 역사 가운데 세워진 왕들은 다 허약했습니다. 남북 열조가 모두 이방 나라에 찬탈을 당했습니다. 왕 다운 왕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앞으로 5년간 이끌 대통령을 선출하는 투표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기도해 왔습니다. 누군가 세워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람에 관심이 매우 많습니다. 대통령제 시스템 안에서 대통령의 역할은 큽니다.
무엇보다도 불안한 역사를 지나오는 가운데 지도자의 역할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에 관심이 많아요.
우리 교회도 국가를 위해서 좋은 대통령이 세워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동안 지속적으로 뜨겁게 천 몇 백명이 계속해서 기도해왔습니다.
▲근데 우리가 좀 더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나님'이어야 돼요. 진정한 왕은 오직 한 분밖에 없어요.
하나님은 왕 중의 왕이십니다. 완전하신 통치자고, 영원하신 통치자는 하나님 밖에 없어요.
이스라엘의 가장 탁월한 왕은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왕 됨의 기준이었어요.
그러나 그도 밧세바 사건을 기점으로 기울어지고 말년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얼룩진 역사로 쓸쓸히 마감합니다. 다른 왕은 말할 것도 없죠.
한국의 대통령제는 5년이죠. 금방 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통치를 넘어,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역사의 굴곡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가 여기까지 이른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설명하기 어려워요.
우리 민족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기구하고 질곡 속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워요.
우리의 잘남이 아니에요. 인간의 통치를 넘어선 하나님의 통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관심이나 기대는,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신자들은 사람에 대한 과열된 관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역사는, 어떤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고 그분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에 의해서 유지되고 돌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거죠. 그래서 이 선거의 과정에서 '사람' 누구가 아니라 이 과정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어떤 것인가를 바라보고 기대하는 거죠.
▲빌라도가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마가는 진정한 왕은 누구인가를, 독자들로 알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왕인가? 이 질문을 계속 독자들에게 묻고 있는 거죠.
그것은 로마의 황제도 아니고, 헤롯 왕도 아니고, 총독 빌라도도 아니라는 거죠. 성경은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아요.
성경을 바라보면, 우리는 성경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안경을 가지고 있어야 돼요.
빌라도의 질문을 통해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선포한 셈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만의 왕이 아니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모든 열방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은 왕을 세워 달라고 조르죠. 왕이 있는데 왕의 왕을 세워달라는 거예요.
왕이 있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계세요. 신정통치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왕을 원했어요. 그 말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인간 왕의 통치를 받겠다는 겁니다. 그건 하나님에 대한 거역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왕을 허락하셨어요. 그러나 그 왕들을 통해 이루었던 남북 열조의 역사는 질곡으로 얼룩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