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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36장 1~12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LNCK 2022. 3. 9. 19:25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시36:1~12        출처 여러 설교 정리

 

시편 36편의 표제어는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입니다. 

시편 36편은 의인과 악인의 대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악인에게서 나타나는 악한 성품을 비교함으로써,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성품을 걷어내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품고 나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 시편 1편을 시편 전체의 주제 시라고 말합니다. 

시편 1편에서 말하는 주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의인의 삶과

그렇지 않은 악인의 삶을 대조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편 시편 36편은 시편 1편과 어떤 면에서 맥락을 같이 하는 시편입니다.

시편 36편은 의인과 악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악인에게서 나타나는 악한 성품을 비교함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성품을 걷어내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품도록 도전하고 있습니다.  

 

시편 36편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각 부분의 교훈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1. 첫째 부분은 1~4절까지인데요. 여기서 다윗은 악한 인생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악한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1절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다윗이 주어를 “악인의 죄가”라고 표현함으로써, 악인이 짓는 죄를 의인화하였습니다.

그 의미는,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죄를 쉽게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생각하냐면요?

‘내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미움도 받지 않고,

심판도 받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3절과 4절을 보면 악인이 어떻게 살아가냐면

항상 악한 말을 하고, 악한 행동을 하고, 악한 생각만 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다시 1절을 보면,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이 말씀을 표준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렇게 쉽게 번역했습니다.

“악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죄의 속삭임만 있어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습니다.”

 

여기에 악인에 대해 정의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죄의 속삭임만을 듣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사람은 자기 의지로 선해지지 못합니다.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조차도 로마서 7장에서 고백하기를, ‘내 속에 선한 것이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내가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선을 행하지 못한다고 고백했습니다.

  
1절에서 다윗은 ‘내 안에 죄의 속삭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속삭임을 듣다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분노와 미움을 계속 묵상하다 보면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자신에 대해 분노합니다. 

반대의 현상으로 나갈 때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공격적인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왜 이렇게 사람이 악하게 변해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속삭임'을 듣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죄의 속삭임을 듣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묵상하지 않으면, 
자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 즉 죄의 속삭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그 속삭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2

 

이 악인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다윗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착각은 자유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윗이 보기에 악한 자의 착각이 뭐냐면요?

자신이 아무리 악한 일을 범하여도 하나님께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139편 1~4절에서 다윗이 어떻게 적고 있냐면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내가 짓는 죄를 알 리 없어!”라고 생각하는 악인의 생각은 완전 착각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악한 자들을 묘사하면서 우리에게 주는 지혜가 무엇이냐면요?

'착각하지 말고 삽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악한 말과 악한 행동과 악한 생각이 다 하나님께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사십시오.' 이것이 다윗이 주는 지혜입니다.

 

▲3~4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

 

여러분, 전원주택을 가지며, 특별히 넓은 마당을 가지신 분들은

하루 종일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마당의 잡초를 뽑아내는 일이라고 합니다.

매일 잡초를 뽑아내지 않으면, 금방 잔듸밭이 잡초밭으로 변하고 만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자기 마음밭을 날마다 가꾸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자기 마음속에서 나온 것을 입으로 말하게 되고,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데,

그건 마치 잡초와 같고, 독한 쑥과 같습니다.

남들을 죽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부터 죽이는 것입니다.

 

본문 시36편이, 그 주제와 내용이 시1편과 비슷하다고 했는데,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으면,

본문 1~4절과 같이, 내가 '악인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증거 중에 하나가 '침상에서부터 악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4

 

 

◑2. 둘째 단락은 5~9절까지인데요. 이 구절들에서 다윗은 악한 자들과 대조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해줍니다.


1~4절에서 인간의 사악한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주의 인자하심은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은 공중에 사무쳤다고 시편 기자는 노래합니다. 

마치 지상에 태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도 
구름을 뚫고 올라가면 파란 하늘과 눈부신 태양이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비행기가 구름층을 지나 높은 곳에 이르게 되면 파란 하늘이 펼쳐집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과 진실하심은 
결코 세상의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이 땅위에 내려주시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매일 이슬이 내리듯이요)

 

▲5~6절을 보시면, 다윗은 하나님의 4가지 성품, 혹은 속성을 찬양하는데요.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5절에서는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진실하심”을 찬양하는데, 그것이 하늘에까지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엄청나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뜻이지요.

 

'인자와 진실'은 구약성경에 아주 자주 나오는 관용구입니다.                                  주1)

시인은 대자연을 보면서, 하나님이 인자와 진실, 헤세드와 에무나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대자연을 보면서, 그런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연상해 낸다는 것은, 대단한 신앙, 영성입니다.

여러분이 대자연에 나갈 기회가 있으면, 거기서 한 번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을 묵상해 보십시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무런 은혜나 감흥도 오지 않기가 일쑤입니다.

 

신자가 그 정도라면,

세상 사람들, 불신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에 대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결국 시인(다윗)이, 대자연, 즉 하늘과 공중의 광대함과 광활함을 보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을 묵상했다면,

평소의 삶에서 그가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을 늘 묵상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정말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을.. 거울처럼 반사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는데, 창1:26

그 형상, 즉 인자와 진실을 가장 잘 반사해내고, 드러내 보여주었던 인물이, 구약에서는 다윗이었죠.

그래서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나님은 그를 칭송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5절,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라며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찬양한다는 말은,

그 주님의 성품을 본 받아, 시인도 (적용하면 우리도)

인자와 진실, 헤세드와 에무나 주1) 가 하늘과 공중에 미칠 정도의 사람이 되고자하는

기도와 염원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설교 서두에, 본문 시 36편은 

악인의 성품(1~4절)과, 하나님의 성품(5~9절)을 비교한다고 했는데요,

어디 비교할 게 없어서, 그것을 서로 비교하겠습니까. 표면적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사실 속으로는, 악인의 성품과, 성도의 성품을 비교한다고 봐야 하겠지요.

 

▲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6절,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시인은 주의 의(체타크)는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미스파트)이 큰 바다와 같다고 말합니다.

아주 크다는 뜻이지요. 5절에 하늘과 공중에 비유한 것처럼, 산과 바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도 5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나 크심을 찬양하지만,

아무도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의 의와 공평, 참되신 판단을 노래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가 본받고 추구해야할 하나님의 성품을

시인은 산과 바다에 빗대어 노래하고 있습니다. 상상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하나님, 저 높은 산과 같은 주의 의를 제게도 주십시오.

하나님, 저 광대한 바다와 같은 주의 (의로운) 심판을 제게도 허락해 주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고,

우리 성도가, 그런 산과 같은 공의와, 바다와 같은 (공의로운) 심판을 보여주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와 심판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도무지 알 길이 없게 되지요!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공평하신 판단이 큰 바다와 같다'고 말한 것은,   
'죽음 앞에서 사람은 다 평등하다'는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이 말씀을 큰 도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공의와 심판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성취될 것이지만, 
그 크신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책임은 
그 크신 공의와 심판을 이 세상에 드러내고 보여주기 위해서

부단히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인의 원래 목적이요, 다짐이라고 봅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웃이 있으면 발벗고 나서서 돕고, 
억울한 일 당한 이들이 있거든 그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공의를, 우리가 이 땅에서 실현하는 일입니다.

6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면요?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사랑이고요.

또 하나님의 공의도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공의라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우리들에게 인자와 공의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거기엔 인자와 공의를 본받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들어가 있는 것이죠.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사랑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에서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저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대신에 예수님을 대속의 죄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므로 죄인인 우리를 살려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도 우리를 구원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로 악인은 심판하셔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하십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예수님의 공의가 믿는 우리에게 전가되게 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사랑도 드러나지만, 하나님의 공의도 드러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렇게 하므로 죄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사단의 권세에 대하여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죄물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의롭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의의 하나님이 관심하시는 것은 무엇이냐면요?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인자하심(사랑)으로 안아주시는 이유도 구원하시기 위함이고,

죄를 미워하셔서 공의로 꾸짖으시는 것도 구원하시기 위함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이 무엇이냐면요?

하나님께 피하여 사는 인생이 되라는 겁니다.

 

7b절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피한다.”는 말은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인생이 되어야 하는가?

악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요.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있냐면요? 8절을 보십시오.

8절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인생은 두 가지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8

이 말씀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소에 나와 예배하는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영육간의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말씀이고요.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8b
‘복락의 강물’에서 ‘복락’은 즐거움입니다.  * river of thy pleasures
단순한 기쁨이 아닌 “아다네카”라는 최고의 ‘기쁨,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에덴의 강' 또는 '즐거움의 강'인 것입니다.  

창세기 2:8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에덴 pleasure' 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만큼 최상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강물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냥 졸졸 흐르는 강이 아닙니다. 
여기 사용된 히브리어 ‘나할’은 ‘골짜기에서 내리치는 급류’라는 뜻입니다. 

‘메마른 땅에 많은 양의 물이 쏟아 부어진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엄청나게 센 급류는 사람이 절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가만히 서있기도 힘듭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정없이 내리치는 은혜의 급류’가, 
우리에게 내리치고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질 때, 
우린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물이 쏟아 부어지면 오물과 먼지, 찌꺼기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마찬가지로 복락의 강물은 우리의 죄악들을 떨어져 나가게 만듭니다. 
내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내 환경이 절망적인 상황 일지라도 그것을 초월하게 합니다.

그래서 내 소망이, 세상이 아닌 오직 예수그리스도임을 고백하고 깨닫게 만듭니다. :9~12

 

 

◑3. 끝으로 세 번째 단락은 10~12절입니다.

이 세 절의 말씀은 다윗의 기도입니다. 이중적인 내용의 기도인데요.

 

먼저 10절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주를 아는 자, 마음이 정직한 자”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예배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공의를 바라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인자와 공의를 베풀어주심으로 구원하여 주십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믿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런 기도입니다.

 

반면에 11~12절을 보십시오.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이르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들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악을 행하는 자들이 거기서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11절은 악한 자들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인데요.

그렇게 되려면 악한 자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야 하냐면요?

12절에서처럼, 악한 자들이 넘어져서 다시는 일어날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악한 자에게 임해야 하는 거지요.

 

그러므로 다윗이 10절로 12절에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교훈하여주는 신앙의 확신이 있는데요.

하나님 앞에서는 두 가지 인생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선한 자인가/ 악한 자인가?

의로운 자인가/ 불의한 자인가?

하나님을 믿는 자인가/ 믿지 않는 자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인가?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존재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 존재인가?

이 외에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회색 지대는 없습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은 항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기심을 받으며 구원의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관련 예화 / 주님의 성품을 추구하다가 결국 잘 된 이야기 

 

필라델피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스티븐 지라드'라는 대부호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토요일, 그는 직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이런 지시를 내렸습니다.
"내일 정상 출근해서, 오늘 도착한 선박의 짐을 내리도록 하십시오!"

 

갑작스러운 업무에 직원들은 투덜거리며 불평들을 늘어놓았습니다.
못마땅해 하며 흩어지는 사람들 가운데
한 청년이 지라드 앞에 다가와서 정중히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내일이 주일이기 때문에
저는 나와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을 그만 두게!"
이렇게 청년은 그 직장에서 해고되고 말았습니다.

 

해고된 후 청년은 3주간이나 여기저기 직장을 찾아다녔으나
일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라드와 평소에 친분이 있던 필라델피아 은행 총재가
그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 좀 해 주게나!"

 

순간적으로 지라드의 머리 속에는, 몇 주 전에 해고된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지라드가 그 청년을 추천하자, 은행 총재가 놀라며 물었습니다.
"아니, 그 청년은 자네가 해고하지 않았는가?"

 

"물론일세. 그러나 내가 그 청년을 해고한 것은
사람이 나쁘거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네.
주일에 일을 할 수가 없다고 해서 해고한 것일세.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과 원칙을 바꾸지 않던 그 청년은
믿어도 좋은 사람일 걸세."

 

그렇습니다. 결국 청년의 굳은 믿음은 그를 보증하는 큰 재산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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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인자는.. 헤세드이고, 언약적인 사랑, 결코 파기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뜻합니다. 헬라어로는 아가페.

 

그 다음에 진실 truth 과 성실 faithfulness 둘은 비슷한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에무트, 에무나 인데

그 헤세드이 사랑을 해 주시되, 변함없이, 조변석개하지 않고, 사랑했다 쉬었다 하지 않고,

꾸준히, 끝까지.. (인간적 표현으로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변함없이 사랑해 주신다는 말이

'진실' 또는 '성실'입니다.

 

그래서 인자와 진실, 인자와 성실은.. 늘 같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결코 깨어지지 않는 사랑이.. 결코 변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에까지 사무쳐 있다는 것이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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