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습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나의 어리석음(foolish) 때문에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잠언에도 '지혜'와 '우매'를 계속 비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죄의 결과 consequence of sin 미리 계산했었다면.. 예방할 수 있었는데,
내가 조금만 지혜로웠다면.. 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인데,
내가 곁에서 하는 충고, 하나님의 음성과 감동하심을 주의하여 들었다면..
이런 처절함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인데, 모두 나의 어리석음, 우매함 때문입니다.
6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7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8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9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10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이렇게 죄는, 우리 몸도 병들게 합니다. -내 몸이 성한 곳이 없다(4, 7절),
-내 뼈에 평안이 없다(4절),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난다(5절),
-심장이 뛰고 기운이 없어졌다(10절),
-내 눈도 흐려졌다(10절),
-내가 넘어지게 되었다(17절)고 호소했습니다.
-그리하여 지치고 희망까지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8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중병으로 인한 고통도 괴로운 일인데, 가까이해야 할 친구, 친척들까지 고난을 겪는 것을 보고 멀리 외면하는 외로움, 즉 소외감의 고통까지 겪게 되었습니다. :11~14
거기다가 믿었던 이웃이 원수가 되어 온갖 중상모략으로 공격하므로 절망적 상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까지도 자기를 버리고 멀리하지 않았는가 하는 불안감까지 겹치게 되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등돌림을 통해 받는 고통 (11~14절)
다윗이 자신 아픔을 이렇게 처절하게 고백하는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11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12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음모를 꾸미오나
마귀는 춤을 춥니다. 우리를 죽이고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여러분 중에 여전히 죄를 기웃거리거나 품고 사는 이가 있다면,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마귀가 놓는 올무, 음모에 빠지면.. 낚시바늘의 미끼에 걸린 물고기처럼.. 끝장 나는 것입니다.
13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14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
잘 모르는 사람과 시비가 있어서 다투게 되면 속은 상하지만, 이내 괜찮아지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 ‘친척’들은 다릅니다. 배우자나 부모자식처럼 깊은 관계일수록,
친구라도 친할수록, 친척들 중에서도 자주 왕래할수록 작은 일이나 부주의한 말 한마디에도
상처가 깊게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다윗은 육체의 고통만이 아니라 관계의 고통, 정서의 고통 및
영적인 고통도 함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는 그 무게가 가벼워서 충분히 자신이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즐거움과 재미로 가득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죄의 무게는 우리가 감당 할 수 없을 만큼 무겁고, 그 내용도 아주 날카로워서
우리의 속과 관계를 다 찢어 놓습니다. 그것이 죄의 무서움입니다.
죄의 그 무거움과 날카로움, 무서움을 우리가 해결할 수 있을 정도였다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을 것이고,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오늘말씀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비참한 상태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를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분노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자기에게 닥친 이 모든 고난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겠습니까? 고난당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니지요. 다윗이 자기가 겪는 고난을 받아들인 까닭은 그 모든 고난을 바로 자기의 죄와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의롭고 진실하신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의 불의와 거짓을 징계하셔서 고난을 겪게 하셨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18
◑여호와께 구원을 간구 (16~22절)
다윗의 기도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15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16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그들이 나 때문에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스스로 교만할까 하였나이다 17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18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19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부당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많으며 20 또 악으로 선을 대신하는 자들이 내가 선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나를 대적하나이다
다윗은 18절에서 자신의 죄악을 아뢰고, 자신의 죄를 슬퍼한다고 고백합니다.
죄된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은 그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죄는 즐거움이 아니라 자신을 슬프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슬퍼하다’의 문자적인 의미는 ‘걱정하게 하다’, ‘근심하게 하다’입니다.
죄는 짓는 순간에는 아주 달콤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 속은 걱정, 근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오늘 시편이 다윗이 밧세바 사건 후에 겪었던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이고도 관계적인 고통, 영적인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다윗의 삶을 돌아보면, 다윗의 몸이 아팠을 때에 정신이 고통스러웠을 때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함으로 가진 즐거움은 잠시였지만, 그로 인한 고통은 아주 길었습니다.
다윗의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그가 의뢰할 곳은 한 곳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막이 이렇게 내려옵니다. 21~2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21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22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다윗이 귀한 것은 회개만 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주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갈망하면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다윗에게 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비록 죄로 인하여 비참하게 무너졌지만 그에게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구원받고 싶었습니다. 죄가 주는 무게를 이기고 싶었습니다.
▲관련 예화 : 은혜를 받으니, 자기를 버린 가족들을 용서한다..
어느 큰 찬양 집회 때 소록도에서 올라온 노인분들 10명 정도가 특별 찬양과 간증을 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70대가 넘은 분들이었는데 그들은 열 살 때 무렵에 나환자가 되고, 30세에 쯤에 가서는 시력을 다 잃어버렸어요. 그들은 다 시각 장애인들이 되신 거죠.
그분들이 그 찬양집회 측이 마련해 준 단상 앞에 나가서 거기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올려드렸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간증을 하셨는데 이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너무 감사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별로 감사할게 없는 사람들 같이 보이는데, 그 찬양 집회에 모인 그 회중들과 그 소록도 노인들을 비교하노라면, 그분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 들인데 그런데 그들이 가장 충만한 은혜를 받고 가장 뜨거운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나병 때문에 부모 형제를 부터 버림받아 모든 세상의 소망이 다 끊어졌어요. 그런데 그들은 그 자리에서 그렇게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들이 구원을 받아서 구원의 확신이 생겼어요. 영원한 소망이 그들의 마음 속에 임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자기를 버린 부모 형제, 그동안에 사람들을 원망했던 것까지
다 회개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보는 눈이 열리고 나니까, 나중에는 나병에 걸린 것도 감사하고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도 감사한다고 고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