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복음서의 기자들이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에 초점을 많이 맞추고 있습니다. 전기 biograph 로는 좀 독특한 방식이죠. 전성기에 대한 기록이 아니고, 마지막 한 주, 십자가로 가는 한 주간에 초점을 맞춥니다.
어쩌면 마지막에 일어난 이 사건이,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강단에서 가장 설교가 잘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주로 고난주간에 딱 한 번 하죠.)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담담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과정을 기록하는데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의 과정을, 어떤 수식어나 또 어떤 설명도 더 붙이지 않고 마치 기자가 현장을 보고 간략하게 상황을 기술한 것과 같이, 사실적인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마가의 원래 저자는 베드로로 보죠. 베드로가 구술한 것을, 마가가 대필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짧은 이 단락, 예수님이 고문을 당하시고 십자가 처형까지 가시는 이 장면에서,
이 본문을 대하는 독자의 관점, 그리고 태도에 따라서 전혀 다른 메시지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이런 짧은 대목이 우리의 인생을 바꿔놓을 만한 파괴력을 가진 강력한 메시지가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그저 무덤덤하게 옛날 지나간 영화를 하나 보는 것처럼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죠. 왜냐하면 십자가에 대한 나의 반응이 무엇인가를 좀 지켜보는 것은 우리 신앙에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2004년에 개봉되었던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 영화는 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에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이 굉장히 리얼하게 표현되었습니다. 굉장히 충격적인 장면이 많았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예수의 그 모습이 화면 전체를 꽉 채울 때 그것을 계속 관람하는 신자로서는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극장에 가 보니까, 아주 진지하게 그 영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팝콘을 먹으면서 그 영화를 무심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이 본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길 옆에 있었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만약 내가 2천년 전에, 그 시절에 예루살렘에 있었다면,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어떤 반응을 과연 보였을까요? '그때 너 거기 있었는가 그 때에' 찬송가처럼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기록을 읽을 때 나는 어디쯤 있으며, 또 어떤 마음으로 본문을 읽는가요? (혹시 팝콘 먹는 마음으로 읽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영화가 아니라, 목격자의 기록을 통해서 예수의 처형과정, 그 직전 고문의 과정을 살펴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도상에는 다양한 부류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제자들이었죠. 앞에서 우리가 많이 보았는데, 그들은 예수를 따르는 일에 실패합니다.
가장 최측근 거리였던 그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버리고 도망합니다. 가장 뼈아픈 대목이죠. 제자들의 실패...
둘째는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예수를 죽이기 위해 가장 앞장을 섰던 인물들이죠. 군중들을 선동하고, 예수를 십자가로 몰아간 장본인은 바로 종교지도자들 이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종교의 허구를 보는 거죠. 메시아를 가장 환영해야 할 사람들이, 죽이려고 안달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죠.
셋째는 무리들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놀아난 무지한 백성들, 모두 예수를 거부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요1:10~11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여러분 이것이 오늘 인류의 역사의 모습이에요. 세상은 그 분을 알지 못하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경험했던 것은 리젝션, 거부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죄의 특징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의 최종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로부터 싫어 버린바 되었다' 사53:3
그래서 이사야가, 그리스도가 오시기 7백년 전에 예언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결코 하나님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적대적입니다.
오늘 이 세상의 모든 문화 안에, 하나님에 대한 이런 적대적인 문화, 그것은 우연히 아니고요. 그냥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또 다른 그룹을 만나는데 로마 군인들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직접적으로 맡았던 군인들!
여기 군인들은 총독 관저에 있는 군인들이라고 볼 수 있고요. 예수를 잡으러 왔던 군인들은, 성전 경비병이었고요, 대제사장의 관할 하에 있던 유대인들로 여겨집니다. (요즘으로 치면 교회, 은행, 아파트 경비원과 비슷했죠)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 처형을 담당한 군인들은, 정규 로마군인이었습니다. 팔레스틴을 관할하는 총독 빌라도의 지휘를 받는 식민지 점령군이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실행할 때는, 군중들의 동요도 막아야 하고 사회 질서도 유지해야 되기 때문에 아마 상당한 군인들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이미 군인들이 시내 곳곳에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공포의 분위기에 휩싸이고 있죠.
십자가 처형은 로마인들에게는 시행되지 않는 형벌입니다. 중형 중에 중형이죠. 그래서 십자가 라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오래 버틸 수 있으며 그리고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것을 연구해서 만들어낸 고문방식, 처형방식입니다.
군인들은 예수를 굉장히 거칠게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정말 예수님을 거칠게 다루고 있고, 물건이나 짐승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도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의 악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악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선의 결핍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악랄하고 적극적인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를 적극적으로 능욕하는.. 농락하고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점령군 군인들은, 피지배국의 죄수들을 어떻게 다뤘을까를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군인들에게 예수는 일종의 희롱 대상으로 전락해 있습니다. 예수를 때리고, 그의 몸이 망가뜨려질수록 그들은 더 흥분해 하는 거죠. 매우 거칠고 난폭하게 예수를 다루고 있습니다.
◑악의 평범성
▲1세기 당시의 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악이 어떻게 노출되고 있는가? 우리가 그것을 보고자 하는데요.
1세기의 인간이나 지금 20세기의 인간은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성은 자체는 다르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아요. 인간의 악은 그대로 여전히 그대로 있다는 거죠.
요즘 우크라이나에 전쟁이 벌어졌지만 이 전쟁이 벌어질 때도, 인간의 죄악성이 충분히 드러나고 있죠. 무고한 아이들과 여성들이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라크 전에서도 포로에 대한 잔인한 참수 영상들이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히틀러에 의해서, 유대인들 6백만이 학살을 당합니다. 우리는 그런 기록들을 보면,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가? 6백만이나!
같은 인간으로서 놀라게 되죠. '인간이 그런 수준까지도 갈 수 있는 것이구나...' 가스실에 집어넣어서 집단적으로 죽이고, 그냥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거죠. 악의 실체를 우리가 적나라하게 보는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히히만> 책에 보면, '악의 평범성' 이라는 글이 나옵니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악행은 어떤 광신자나 혹은 반사회적인 인격장애자가 행한 것이 아니고 평소에는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 의해서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저자는 그 책에서 주장했죠. 사이코가 아니라는 거죠.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인물 중 한 사람이 루돌프 아이히만 입니다. 나중에 정신과 의사들이 그의 정신상태를 검진해본 결과가 놀랍습니다. 정상, 매우 정상!
아이히만은 직속상관인 힘러의 지시를 따라 가장 훌륭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감당했던 충직한 부하였다는 거죠.
전후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을 때 아이히만은 자신의 무죄를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나는 국가를 위하여 충성을 다했고, 상부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과거를 조사해 본 책의 저자 한나 아렌트는 놀랐습니다. 아이히만은 한때 정유회사의 직원으로 일했고, 매우 평범한 사람으로 한 가정에서 자상한 남편으로, 책임감 있는 아버지로 살았던 인물이었다.. 는 점에 놀랍니다.
악랄한 죄를 범한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은 누구에게나 발견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주장을, 저자는 내놓은 것입니다.
▲그 관점은 성경의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일제시대 때 종군 위안부들에 대한 역사의 기록을 보아도 끔찍하죠.
20세기에 민족들이 뒤섞여 사는 곳에서 벌어진 '인간 청소' 라는 살육국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이 자행한 악의 실체를 대할 때마다 우리는 크게 놀랍니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나..'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이 무수하게 학살을 당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게 믿어지지가 않아요. 1천5백 만명.
어떻게 죽였는가요? 외부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는 인디언들에게 전염병으로 죽게 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천연두 환자들이 사용했던 담요를 다 모아가지고 집단적으로 배부해 줘서, 그것을 덮으면 그냥 천연두에 걸려서 떼 죽음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북한의 탈북자들을 통해 북한 안에 일어난 어떤 참상들을 접하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인간의 죄가 얼마나 깊고 심각한가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그걸 봐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십자가 처형)은 어떤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사람이 저질렀다는 역사로 끝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보편적인 인간의 악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디까지 약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고문의 발달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고문 도구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을 제가 한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너무도 끔찍했습니다. 소름이 돋았어요.
어떻게 하면 인간이 최대한 고통을 겪으면서 죽어가게 할 것인가를 연구하여 만든 기구들입니다. 그런 많은 기구들이 또한 종교재판소에서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역사! '아~ 인간이 참 악하구나!' 십자가가 바로 그런 산물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간에게 선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그런 결론적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도다!' 롬3:10
죄로 인하여 어두워진 인간의 모습을 잘 갈파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여도 그냥 죽이지 않아요. 재미를 추구하며 더 자극적으로 죽이려 합니다.
문제는 그런 끔찍한 죄를 짓고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죄를 죄대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에게는 '죄'라는 기준 자체가 없는 거죠.
◑여러분, 예수님에게 폭력을 가하는 현장을 가보면 폭력만이 아닙니다. <희롱, 조롱>까지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죄인들에 의해 비웃음을 당하고 있는 모습은 충격적입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는 범죄자 중에 하나로 취급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조롱을 당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계속되고 있죠.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도, 십자가 아래에서 사람들은 조롱을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고!' 그 밑에서는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고 있는 것입니다.
막15:17절에 예수님께 자색 purple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씌우고 있습니다. 자색 옷은 왕이 입는 옷입니다. 아마 어디 가짜 자색 옷을 가져왔겠죠. 이것은 놀리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네가 왕이라고?' 그래서 가시관을 엮어 씌웠다는 겁니다. 아주 뾰족하고 강한, 사막에서 자라는 가시로, 면류관을 상징하는 관을 엮어 씌웠고 그 앞에서 경배하기까지 했습니다.
막15:18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19~20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여러분 이것이 세상이 가지는 예수에 대한 태도입니다.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예수를 조롱하는 세상이죠. 욕하고 농담의 소재로 삼고... 합니다.
영어에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이름을 끼어넣은 욕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리스도를 비웃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받으셨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가 당하신 핍박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예수께서 핍박을 당하신 일들을 통해 <앞으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당할 일을 예고>하고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고난, 조롱 당하신 일은, 그리스도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따라오는 일입니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제대로 된 신자로 살려고 하면 반드시 겪게 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고난, 박해 라는 거죠.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실 때 이미 그 말씀하시는 고난의 삶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 안에는 변질이 많이 일어나서 고난을 생략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항상 고난이 따라다니는 게 정상이며 고난을 생략하고 그리스도를 따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고난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일어나서 안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막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난이 빠지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될 수가 없어요. 고난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에게 명백히 따르는 일이라는 거죠.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욕을 먹고 비웃음을 당한다면,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 반대에 부딪치게 되고요, 세상에서 거절을 맛보게 됩니다. 때로는 욕을 얻을 먹을 수 있고요. 오해를 받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우리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 중에, 학교에서 기도운동을 하는 애들이 꽤 많습니다. 굉장히 자랑스러운 아이들이 많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때인데, 이 중고동부 아이들이 학교에서 모여 기도한다니까요.
요즘은 초등부 아이들도 자기 학교에서 점심 시간에 모여 기도운동을 하는 애들도 있는데.. 놀라운 일이죠.
중고등부 아이들이 학교에서 이렇게 기도를 하려고 모여서 삼삼오오 기도하려고 하면, 막 이렇게 핍박이 있어요.
막 그냥 놀리기도 하고, 성경책을 빼앗아가기도 하고, 왕따를 경험하는 거예요. 그런데도 우리 아이들이 잘 버텨내면서 교장 선생님을 위해서, 학교를 위해서, 기도하는 이 아이들이 우리 교회에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여러분 오늘날 교회가 잘못해서 욕을 먹는 경우도 있지만, 그냥 교회가 싫은 거예요. 그래서 욕을 하는 것이죠.
교회 이미지를 바꾸자! 하는 노력을 해야 되지만 그렇다고 교회 이미지가 좋아지면, 세상이 교회에 대해서 우호적일까요? 그렇지 않아요.
◑십자가를 통해 발견할 것 한 가지는 - <인간이 얼마나 악한가?>
로마 군인들이 더 이상 조롱할 수 없을 때까지 이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롱하는 것도 이제 지루해지자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기 위해, 해골이라는 뜻을 가진 골고다로 데리고 갑니다.
그들은 가능한 최고치의 모멸감을 주려고, 모든 것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하는 것은, 인간에게 악이 얼마나 속속들이 꽉 차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입니까? '인간이 얼마나 악한가?' 하는 거죠.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매달려서 하신 가상칠언 중에 중요한 말씀이 뭐예요?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십자가에 못을 박고 있는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심각한 죄를 짓고 있는가를 몰랐어요. 이게 인간의 무지입니다.
여러분 죄인의 특징이 뭡니까?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거죠. 자기를 못 봐요.
여러분 결국은 죄를 짓고도, 결국은 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기의 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미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죄에 대한 자각을 하지 못해요. 죄를 짓고도 끊임없이 합리화 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구입니까? 그는 정말 이스라엘 열조가운데 가장 탁월한 왕으로 하나님의 마음 합한 자로, 성경 어디에 어떤 인물보다도 그는 인정받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가장 다윗 다웠을 때가 언제였는가요?
많은 설교자들, 신학자들이 얘기하기는 시편51편을 인용합니다.
다윗이 왕으로 잘 나갈 때의 다윗보다, 자신의 죄를 철저히 인정하고 회개할 때가 가장 다윗 다운 모습이라는 거죠. 그것이 다윗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거죠.
여러분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내가 누구인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게 뭐지요?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면,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그것이 끔찍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씀과 예배를 통하여 계속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야되고, 계속 나를 들여다보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어요.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까? 그들은 자기의 의로 가득 차 있어서 자신의 실체를 보지 못해요.
다른 사람들의 문제는 보였는데 자신의 죄를 볼 줄 몰랐어요.
예수님의 출현은 그들에게는 굉장히 거북스런 일이었어요.
우리가 여러분 그렇습니다. 남의 잘못에 대한 지적은 참 잘하지만 정작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부부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자신의 연약함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문제될 게 하나도 없어요. 싸울 일도 없어요. 서로 자기의 문제를 보고 있는데요...
내 문제가 뭔지를 알고 있는데 근데 우리가 어디서 사고가 납니까? '나는 문제가 없는데, 저 인간이 문제가 너무 많아요!'
내 약점을 보지 못하고, 상대의 약점만 크게 보이면.. 답이 없습니다.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상담 카운셀러 아무리 만나도 소용없습니다. 내가 나를 (극심한 죄인인줄) 모르는데...
여러분 내가 나를 안다는 게 얼마나 귀중한 일입니까!
오늘 우리는 앞에서, 인간의 죄악성, 인간의 잔인성, 인간의 폭력성, 오늘 인류의 역사 속에 끊임없이 지금 재현되고 있는 사건들도 마찬가지죠.
이런 인간의 이 죄의 밑바닥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 되는데 남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성입니다.
여러분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가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입니다! 내가 나를 모르는 거예요.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거죠.
우리 인간이 그렇게 악하고, 허약하다는 거죠. '그 사람은 싸이코라서 그런 거야!' 아니에요.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면 답이 없어요. 싸이코가 아니라도, 평범한 사람이라도, 싸이코패스 같은 죄를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다는 거죠.
인간 속에 죄성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죄의 깊이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 밑바닥까지 가 있는 그 실체를 보지 않으면 우리는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요.
도대체 십자가 왜 있느냐는 거죠? 왜 하나님의 아들, 죄 없으신 그분이 그렇게 처참하게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는가에 대한 이해를 올바로 할 수가 없어요.
우리 인간의 죄에 대한 깊은 직면을 해야 됩니다. 그 죄성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내 자신을 인식해야 됩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인간은 누구인가 하는 거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아니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십자가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고 십자가 앞에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고개를 들 수 없어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우리는 오늘, 인간의 죄 문제 앞에서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절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 놀라운 은혜에, 내가 온전한 반응을 하고 그 십자가를 붙잡을 때.. 구원이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를 거절하신 모습이 23절에 나와요.
막15: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이 몰약을 탄 포도주는 약간의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주님이 그걸 거부하셨다는 거죠. 왜요?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온전히 모든 걸 감당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고통을 제거하시기 위하여, 당신에게 주어진 진노의 잔을 말끔하게 완전히 마시기 위하여, 조금이라도 고통을 경감시키는 그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그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앞에 두시고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경감시켜주는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기 거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고통을 완전히 제거하시기 위하여, 주님이 친히 모든 고통을 다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죠. 어떻게 그 고통을, 그 미련해 보이는 방식으로만 우리에게 그 일을 통해서만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일인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다른 길이 없었을까?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었을까?
그러나 그리스도가 고통을 피하지 않으신 이유는 그 길밖에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를 피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를 바로 이해해야, 우리의 신앙이 날개를 달게 되고 성경 전체가 눈이 열리게 되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거예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완벽한 마스터플랜 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입니다. 인간의 최악의 죄악을, 하나님은 최선으로 바꿔 놓으셨습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단순한 도가 아닙니다. 교리가 아닙니다. 사상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피가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벌어진 참혹한 장면들 하나 하나에는 우리가 받아야 죄에 대한 징벌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제 이 십자가의 형장에 우리는 계속해서 가까이 다가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발견하는 은혜가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십자가를 따라가면 결국은 우리가 그 십자가의 가해자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골고다 언덕 길의 어느 지점엔가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우리를 향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고 그 실패의 지점, 가장 처참한 죄인의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주님이 팔을 펴셔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이 십자가 상에 매달려 있는 양팔을 벌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온 인류를 품어내시려고 하시는, 환대하시려고 하시는 주님의 모습이에요.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거절했지만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품어내시는.. 우리를 끌어안으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그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 인간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죄인인가를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가를 동시에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서 넘어지고 깨어지고 예수를 오래동안 믿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우리는 십자가로 돌아가야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를 붙들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에 비밀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신비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이 십자가 위에 놓여져 있다면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 중심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십자가가 그 중심에 놓여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덧입으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