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42:1~11 스펄전 설교, 여러 설교 정리 출처
이 시편은 여호와 예배로부터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전을 오래도록 사모하며 한숨 짓는 사람의 부르짖음이다.
동시에 그것은, 낙심에 빠진 채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기를 갈망하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자신의 기초를 끝까지 붙드는 신령한 성도의 음성이다.
여호와의 가족에 속한 자들 대부분은, 이 시편에서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바다를 항해해 왔다.
이 마스길(교훈시)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달아날 때 지은 것인 듯하다.
이 노래는 동일한 후렴구로 마감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5절과 6~11절.
▲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오랜 가뭄 끝에 기진맥진한 가련한 암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듯이,
혹은 쫓기는 수사슴이 피 흐르는 옆구리를 씻기 위해,
사냥개들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강을 찾듯이,
핍박받아 지친 내 영혼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을 갈망하나이다.
공 예배를 드릴 수 없었던 시인은 마음이 상했다.
그는 편안함을 구하지 않았고, 영예를 탐내지 않았다.
그의 영혼이 급박하게 필요로 했던 것은 하나님과의 친교였다.
그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단지 멋진 사치품처럼 여긴 것이 아니라,
목마른 수사슴에게 있어서의 물과 같이 절대적인 필수품처럼 여겼다.
마치 광야에서 목이 몹시 마른 여행자가,
물병은 바닥나고, 간신히 샘을 찾았어도 거기에 물이 남아 있지 않아,
물을 마시지 못해 죽어가듯이, 그는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지 않으면 쓰러질 것이었다.
그의 영혼은, 그의 자아는, 그의 깊은 생명은 하나님의 임재를 자각하기를 열망했다.
수사슴이 울부짖듯이 그의 영혼은 기도한다.
하나님이 그에게 임하시면 그는, 가련한 사슴이 마침내 갈증을 해소하고
온전히 만족을 누리듯이 흡족해 한다.
반면에 하나님을 떠나면, 오래도록 달린 후에 숨을 헐떡이듯이 그의 마음이 허덕이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또한 그의 온몸에 경련이 일어난다.
당신도 이러한 체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매우 쓰디쓴 경험이다.
여호와의 사랑의 빛 안에서 사는 삶 다음으로 가장 좋은 것은,
그것을 소유할 때까지 불행해 하는 것이며, 매 시간 그것을 갈급해 하는 것이다.
내가 '매 시간'이라고 표현했는가? 갈증은 지속적인 욕구이며 잊혀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갈망도 지속적인 것이다.
우리가 목마른 짐승처럼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아무리 고통스러운 느낌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영혼에 유익한 일이다.
이 구절로부터, 우리의 간절한 갈망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끈질기며 열렬하게 구하는 자에게는 특별한 약속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2절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인은 성전과 의식을 갈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망했다.
영적인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러한 갈증에 공감할 수가 없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시편 기자의 초조함, 안타까운 마음, 간절한 열망을 느낄 수 있다.
갈망은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어져있는 상태이다.
사람은 갈망하는 것을 향해 가게 되어있다.
갈망하는 것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오늘 나 자신이 무엇을 갈망하는가를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시편 기자는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시 42:2)”
무시하려고 해도 무시할 수 없다. 억누른 채 살다가도 갈망이 불쑥불쑥 올라온다.
갈망은 막을 길이 없다. 갈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다.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건 '내가 언제 (성전의)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뵈올까?' 하는 갈망이었다.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성호를 높이는 집회도 사랑한다.
우리는 공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로 여겨야 한다.
공 예배를 기뻐하는 것은 은혜받은 표시이다.
안타깝게도, 단지 목회자나 동료 신자들을 만나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아니다. 교회에 나와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어야 하고, 그 갈망이 있어야 한다.
▲3절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여기에 대해선 이 설교를 참조하시라 ☞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눈물은 입에는 짜지만, 영혼의 건강에는 이롭다.
어떤 사람이 눈물을 흘릴 때, 그의 심정은 참으로 진지하고 간절하다.
마치 기진맥진한 수사슴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듯이, 시인의 눈에 눈물 방울이 반짝였다.
그는 식욕을 잃었고 눈물이 그의 유일한 음식이 되었다.
그는 다른 음식을 먹을 마음이 전혀 내키지 않았다.
마치 잠힌 밸브를 열듯이,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것이 그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을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것보다, 눈물마저 메마른 슬픔은 훨씬 더 끔찍하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는 모욕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흘린 다윗의 눈물은
존귀한 이슬이요, 거룩한 물방울이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담아주신 것이었다.
▲4절.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절기를 지키는 요란한 소리가 그의 귀에 들리고, 여인들의 춤사위가 그의 눈에 어른거린다.
아마도 그는 법궤를 운반했던 일과, 민족적인 대성일에
온 지파들이 함께 모였던 영광스러운 광경을 추억하는 것 같다.
(지금 다윗 일행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신 중인 상황, 고라 자손이 동행함)
그의 현재 상태는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
시온이 → 광야로,
흰 아마포를 입은 제사장들이 → 전투복으로 무장한 병사들로,
찬양의 노래가 →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조롱으로,
축제가 → 애곡으로,
그리고 여호와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 그분의 부재로 말미암은 애가로 탈바꿈했다.
"(내가)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지난날의 기쁨에 대한 기억은 고통스러운 생각을 일깨웠다. 그는 경건한 무리와 함께 어울렸었다.
그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서 들뜬 기분에 사로잡혔고 성결한 기쁨을 맛보았다.
또한 함께 시온 언덕으로 올라갔던 그 무리는, 그의 마음을 황홀하게 했다.
아름다운 행렬을 지어, 거룩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찬양 노래를 부르면서,
그를 위시한 여호와의 백성은 희생 제사를 드리는 성소로,
평강과 거룩함이 거하는 아름다운 곳으로 나아갔었다.
이제 시편 기자는, 그 경건한 무리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그 거룩한 장면을 마음속에 그리며 경건한 행렬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되돌아볼 때, 그의 마음은 물처럼 녹아 내렸다.
하나님이 모습을 감추시고 대적들이 격노하는 상황에서는,
자그마한 재난이 닥쳐도 강건한 자기 심령을 낙담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무 가치도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그토록 침울한 생각에 사로잡힐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자기 자신에 몰두하는 것은 쓸모 없는 짓이다.
자신의 마음을 여호와 앞에 털어놓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은가!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시편 기자는 마치 자신이 두 사람인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
그의 믿음이 그의 두려움과 더불어 변론하며, 그의 소망이 그의 슬픔과 논쟁을 벌인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구원은 하나님의 미소띤 얼굴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는 우리를 향해 얼굴을 드실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의 얼굴로 쳐다봐 주기만 하시면, 문제는 그 시간부터 끝난 것이다.
시인의 주된 소망과 바람은 하나님의 미소를 의뢰하는 것이었음에 주목하라.
그는 그분의 얼굴 뵙기를 소망하여 간절히 찾는다.. 이것이 시인의 믿음이요,
현재의 난국을 타개할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그분의 미소 띈 얼굴은, 쇠약해진 그의 기력을 회복시키실 것이며,
그를 비웃는 대적들을 멸시하실 것이고,
또한 기억 속에 어른거리는 거룩하고 행복한 날들의 기쁨을, 그에게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이 구절은, 바울과 실라의 찬송처럼, 쇠사슬을 풀어주며 감옥 벽을 뒤흔든다.
음울한 때에 이토록 당당한 시구를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코 승리를 거둘 것이다.
소망의 정원에는, 장래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월계수와 기쁨의 장미와 평강의 백합화가 점점 자라가고 있다. (미래 승리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
*스펄전의 워딩이라서 만연체입니다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과거 개역에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했는데, '여전히 still 찬송하리로다'가 좋은 번역)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때,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실 때, 두 얼굴이 마주칠 때
나의 한숨은 노래로 바뀌고, 나의 애가는 승리의 개선가로 변할 것이다.
▲6절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여기 나온 세 지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1) 과거에 방문해서 은혜 받았던 곳으로.. 그래서 과거이 세 장소를 회상함
2) 다윗 일행이 지금 현재 피난 길에 거쳐가는 장소 *여기서는 2)번을 따름
일단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서 요단강을 건넜고, 국외 피신의 느낌을 주는 경계선이며,
그 다음에 헤르몬으로 갔는데, 여기서 헤르몬(산)은
흔히 알려진 팔레스틴 북쪽 레바논 아래의 헤르몬 산이 아닌, 요단 동편의 헤르몬(수12:1)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7절과도 문맥이 맞는다. 그 지역은 폭포 등 강물이 비교적 풍성한 곳이다)
미살산은 '작은 산'을 뜻하며 이곳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요단강과 헤므론 산 근처의 작은 언덕이라고 추측한다.
시편 기자가 다시 위안을 얻기 위해 취한 과정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주의 선하심과 관련된 세 차례의 체험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요단 땅", "헤르몬" 땅, "미살산" 등에서의 체험들이 바로 그것이다.
먼저, 그는 요단 땅을 기억한 것이다.
말하자면, 요단강을 마르게 하사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약속의 땅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인자를 기억한 것이다.
그 다음에, 그는 헤르몬 땅을 기억한 것이다. (*요단 동편의 헤르몬 산)
그 땅에서 아모리 족속의 왕인 시혼과 바산 왕 옥이 패배를 당했다. 그 승리를 시인은 추억했다.
여호수아 12:1은 이렇게 전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저편 해 돋는 편 곧 아르논 골짜기에서
헤르몬산까지의 동방 온 아라바를 점령하고 그 땅에서 쳐 죽인 왕들은 이러하니라."
미살에 대해 어떤 이들은, 율법이 주어졌던 시내산과 가까운 자그마한 언덕이라고 생각한다.
위 12:1절처럼, 여호수아 때의 승리를 추억했을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옛적에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며
자기 마음속에 위로와 평안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다.
'주를 기억하나이다'
영적 침체를 겪을 때, 과거에 은혜 받은 곳을 기억하는 것은 아주 좋은 습관이다.
기억할 뿐만 아니라, 다시 한 번 그곳을 답사 가는 것도 침체를 탈출하는데 도움을 준다.
처음 은혜 받았던 곳, 뜨겁게 기도했던 기도원이나 동산, 하나님께 서원했던 그 장소..
이런 '나의 개인적 성지' 곳을 기억하거나, 직접 방문하는 것은.. 회복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기도할 힘'을 되찾는다. 8절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이다'
▲7절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원어에는 '바다'가 없다. 원어는 '깊음이 깊음을 부른다'인데, *깊음 : 테홈
'깊은(바다)가 깊은 (바다)를 서로 부른다'고 의역한 것이다.
이것을 따지는 이유는, 지금 시인의 위치, 본문의 배경을 요단 동편 (요단, 헤르몬, 미살)으로 보는데,
거기는 바다가 없고, 바다는 정반대로 이스라엘 서편 지중해에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7절의 해석은, 다윗은
(그 다윗의 심경을 시인 고라자손이 기록했다고 볼 때, 앞서 '시인'이고 했는데, 이하 '다윗'으로함)
지금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거친 광야로 도망가는데,
물이 떨어지는 폭포와 거칠게 흐르는 강물을 보고서,
현재 처량하고 휘몰아치는 자기 심경과 감정이입이 되고 있다.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풀어 쓰면 '마치 깊은 물들이 나를 공격하는 듯합니다.
지옥(깊음)이 함께 모여 나의 평안을 해칠 무서운 음모를 꾸미느라고 서로를 부추깁니다.'
마치 물기둥이 치솟았다가 떨어져 요란한 굉음을 내듯이, *강물의 파도
다윗이 보기에는 하늘과 땅이 연합하여 그의 주위로 폭풍우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에게 닥친 재난은 끊임이 없고 압도적이었다.
마치 거대한 물결이 연이어 덮치며, 큰 파도소리가 또 다른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다윗은, 거기의 구비치는 강물들과 폭포를 보면서,
자신을 거기에 잠시 감정이입을 시킨 것 같다.
육체적인 고통이 정신적인 공포를 야기시켰고, 사탄의 암시가 의혹스러운 예감과 맞장구쳤으며,
외적인 시련이 내적인 고뇌와 어우러져 천둥소리를 내었다. (스펄전의 상상의 해석)
그의 영혼은 곤경의 대홍수로 인해 익사하는 듯했고,
그 홍수 위로는 여호와의 섭리가
극도의 공포를 야기시키는 무서운 위엄 가운데서 물기둥처럼 움직였다.
곤경에 처한 그는 마치 격노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작은 범선 같았고,
파도에 휩쓸리는 돛대를 간신히 붙들고서 표류하는 선원과 같았다.
그렇지만 여기서 다윗은 놀라운 고백을 한다.
그 험한 물결과 거센 파도가 여호와의 것임을 기억하는 것으로 그는 위로를 삼는다.
다윗은 이르기를, "주의 파도와 물결이" :7 *그냥 파도가 아니라, '주의 파도'
모두 그분에 의해 보내지고, 그분의 지시에 따르며, 그분의 계획을 성취한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더욱 인내하게 된다.
▲8절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그는 마치 자신이 거대한 물에 휩쓸리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 :7
그가 처한 상황이 그를 압도하는 거대한 파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도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음은 분명했다. Under God's control
그래서 그는 주의 폭포 소리라고 하고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라고 표현한다. :7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 그에게 언약에 기초한 변하지 않는 사랑을 베풀고 계심을 알았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8절)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헤세드)을 베푸시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인생의 거친 바다에서 생명줄 역할을 한다.
은혜(헤세드)의 상속자에게 있어서는, 여호와께 버림받는 날이 단 하루도 닥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며, 또한 그는 주권자의 권세로써 명하사
택함받은 자들을 위해 은총(헤세드)을 베풀어 주신다.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받은 바 축복으로 인한 찬양의 노래는, 밤의 어두운 분위기를 활기차게 변화시킬 것이다.
곤경이 우리의 촛불을 위태롭게 끄려고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찬송이 있으면, 우리의 촛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변하지 않는 여호와께서 그를 돌보고 계시다. 여전히 그분의 찬송이 나에게 있다.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은 상황이지만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도한다.
기도는 찬양과 결합된다. 찬양하다가 기도하고, 기도하다가 찬양하는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았고,
사는 동안 기도와 찬양으로 그분과 함께하는 데에 내 생명을 바치며 살게 된다.
▲9절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하나님을 생각해 보니, 그가 처한 상황이 더욱 모순처럼 느껴진다.
내가 의지할 수 있고 기댈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나는 원수의 압제 때문에 슬퍼할 수 밖에 없는가?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이런 질문이 9절에 2개 나오는데, 이것은 뭘 몰라서 물어보는 질문이 아니다.
반어법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다고 하나님께 호소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슬프게 다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라는 뜻.
분명 주님은, 자녀의 눈물 자국으로 얼룩진 얼굴을 보는 것을 기뻐하실 수가 없다.
그들이 대적들에 의해 잔혹스러운 공격을 당하는 것을, 그분이 흡족해 하실 리가 없다.
그분은 그들에 대한 사탄의 억압을 즐기실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분이 그들을 대적들에 의해 조롱당하도록 방치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반석처럼 굳건하고 불변하시는, 강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 대해 반석처럼 냉담하실 수가 있겠는가?
겸손하게 토로하는 이러한 물음들은, 내 영혼에 안도감을 제공해 준다.
슬픔의 이유를 알면, 그것을 피하는 법을 부분적으로나마 알게 되며,
혹은 적어도 그것을 인내하는 법을 알게 된다.
주의깊은 분별이 결여되면, 역경에 부딪힐 때
종종 그것을 실제보다 더 절망적인 무게로 받아들이게 된다.
손발이 절단된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하지만 생명을 구하기 위해 수술할 필요가 있었을 때
그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 마음은 매우 기쁘다.
마찬가지로, 시련이 닥칠 때, 그것을 보내시는 여호와의 계획을 조금이나마 깨달으면
그 시련을 감당하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
▲10절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잔인한 조롱은 살보다 더 깊은 곳까지 찌른다.
그것은 마치 갈비뼈 사이를 관통하여 심장을 찌르는 뾰족한 검처럼, 영혼에까지 이른다.
설령 비난이 목숨을 앗아가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가며,
이로 인한 고통은 참기 어렵다. 혀는 뼈를 깎으며, 혀로 인한 상처는 치유되기 힘들다.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이것은 3절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의 반복이다.
대적들이 또 다시 다윗 (또는 고라자손을 포함한 그의 일행) 에게 묻는 질문이다.
'늘 말하기를'
그들은 '매일', '반복적으로', 그리고 '오래도록' 그렇게 비아냥거렸다.
그에 대한 시인의 반응은 11절이다.
만일 그가 기도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대적들의 핍박과 관련하여 하나님께 탄원을 드리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미치고 말았을 것이다.
▲11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다윗이 기도하며 생각해 보니
자신의 슬픔을 살피면서, 그는 낙망할 근거가 충분하지 않음을 자각한다.
기도하며 자기 현실을 자세히 들여다본 결과,
그의 두려움은 애매모호한 상태로 가리워져 있던 때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은 듯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영혼의 닻을 굳건히 내려라.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그는 사랑이시다.
따라서 소망을 지닐 여지와 이유가 있다.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이는 고뇌에 찬 시인의 희망적인 결론이다.
그런데 "내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덧붙여진 것은, (*5절에는 '내 하나님'이 없음)
시편 기자의 확신이 점점 더 굳건해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가 당당하게 답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분이 바로 여기에 계시다.
아무리 너희들이 비방과 조롱을 퍼부어도
나는 그분을 나의 주로 고백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분이 너희 손에서 나를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믿음에 의해 싸움은 마감되며, 시편 기자는 확신을 지니고서 승리를 기대한다.
만일 하나님을 입으로 고백하고 그분의 구원을 기대한다면, 가장 슬픈 얼굴도 밝아질 것이다.
※적용 자신에게 설교하라 / 존 파이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