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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43편 나의 얼굴 표정을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

LNCK 2022. 3. 17. 19:10

 

◈나의 얼굴 표정을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   :5        시43:1~5    여러 설교 정리, 출처
   
시편 43편은 42편의 뒤를 따르는 연결된 시입니다.                     주1)
시편 43편은, 시인이 현재 자신의 상황에 대해 깊은 한숨을 쉬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계속 표현하는 시입니다.

 

이 시 43편은, 42편처럼 '고라 자손의 시'로 봅니다. (표제어가 없지만 연결된 시로 볼 때)

그러면서 주석가들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에 의해 쫓겨가서 지은 시'로 봅니다.

둘을 종합하면, '다윗의 노래, 다윗의 심경을, 고라 자손 중 누가 정리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시의 지은이로 생각되는 다윗은

그의 원수들의 옳지 못한 폭력과 포악에 의해, 자기 나라에서 쫓겨난 후에

그것을 보응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곳에 다시 돌아갈 소망을 갖도록 자신을 격려하고 있다.” - 칼빈주석

1~2절, 주께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 주시길 간구하다
3~4절, 시편의 저자가 성전에 다시 돌아와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하다
5절,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새롭게 부르짖다

 

▲1절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1절에 사용된 동사, ‘판단하다’, ‘변호하다’, ‘건지다’와 같은 단어들로 봐서

시인은 굉장히 난처하고도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상황은 굉장히 억울한 일을 겪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동사들을 써서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한 일을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이번만 넘겨주시면 다음부터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바르게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악의를 가지고, 또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다가온 사람들 때문에

억울하고도 곤혹스러운 일을 당했을 때,

아주 뛰어난 변호사가 변호를 해 주거나, 아주 바른 판사가 재판을 담당하는 것은

나의 무고함을 해결해주는데 굉장한 힘이 될 것입니다.

 

고라 자손인 시인은 하나님이 그런 분인 줄을 잘 알고 있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침묵을 지키고 계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2절에서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아룁니다.

 

▲2절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최근 우리 사회의 키워드 중 하나는 ‘힐링’입니다. 
우리 사회가 많이 지쳐 있습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경쟁으로 지쳐 있고, 

 

상처와 분노, 불안과 좌절 등으로 
유명한 자나 그렇지 않은 자나,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가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시편은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힐링 하는 책입니다. 
힐링은 무엇보다 자기 속 안에 있는 것을 토해냄으로써 시작됩니다. 

그냥 가슴앓이를 하는 것보다 노래로나 말로 토해내는 것이 치유가 됩니다. 
본문 2절에서, 시인은 2번이나 ‘어찌하여’란 말을 사용하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5절에도 한 번, 모두 세 번을 쓰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why 나를 버리셨나이까” :2
“내가 어찌하여 why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2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why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5
하며 자기 마음 속을 끄집어냅니다. 

지금 본문의 등장인물은 한 사람인데
마치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 같습니다. 
믿음 있는 내가, 믿음 없는 나를 달래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자기 속 이야기를 하는 것부터 힐링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하소연을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우리의 탄식은 벽을 향한 탄식이 아닙니다. 
세상 곳곳에는 하나님의 귀가 있고,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누군가 우리 소리를 들어줄 수 있다면 우리 고통은 많이 경감될 것입니다. 
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 잘 들어주는 것, 여기서부터 힐링이 시작됩니다. 

공감하기보다 먼저 답을 찾으려고 하니까 
상대방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일단은 전심을 다하여 들어주고 공감해주십시오.

 

참고로, 힐링은 욕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이루어집니다. 
자기를 괴롭혔던 세력에 대해서 욕과 저주를 퍼붓는 것입니다. 

시편에는 이것이 성경이 맞나 할 정도로 원수에 대한 저주가 많습니다. 
시인은 1절과 2절에서 자기를 괴롭게 하는 세력이나 사람에 대해서 
‘간사한 자’, ‘불의한 자’, ‘원수’라고 부릅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전에 내 안에 있는 감정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혼잣말이지요.
실컷 욕하고 저주하다보면 가슴이 풀리면서 
용서할 수 있는 마음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는 흔치 않지만 
이렇게 답답할 때, 때론 원망도 하고 하소연도 하고 저주도 하고, 
때론 기도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서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기에,

억울하고도, 무자비한 환경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한 가지 분명하게 아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힘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비단 이 시인의 고백만이 아닙니다. 다윗도 시편 18:1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 역시 하나님이 힘이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에스라는 예루살렘 성전 수문 앞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 울었습니다. 그 때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이날은 기쁜 날이니

울지 말고 음식을 먹으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8:10

 

하나님이 힘이 된다고 하는 것은 특정한 사람들만의 고백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동일한 고백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말씀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우리 각자의 지난 삶을 곰곰이 돌아보면, 내가 이룬 일보다 내게 이루어진 일이 더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그렇게 처절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간절히 원하는 이유를

3절이 잘 일러 주고 있는데, 이렇게 증거합니다.

 

▲3절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인이 간절하게 소원하는 것은 단지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만을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가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혹시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데

그렇게 성전으로 갈 필요가 무엇이 있나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는 철저하게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이었습니다.

 

시인이 성전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기에

그토록 성전에 가고 싶어 하는 지를 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4절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본문의 시인은 하나님께 계신 성전에 가서

거기서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가서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었는지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하나님을 2번씩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2번은 강조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나아오면서 아무런 기대도 없이 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찔림을 줍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극락(나의 큰 기쁨 my exceeding joy)’이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가장 큰 즐거운 존재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 고백을 통하여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과연 우리 인생에서의 가장 즐거움을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사람은 인생에서 수 많은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아름다운 자연, 배우자, 자녀들, 건강, 직장, 친구, 취미 등등.. 나열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것이 선한 것이라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이 되어야 하는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왜냐면 아름다운 자연도, 배우자도, 자녀도들도, 자신의 건강도, 직장도, 
친구들도, 취미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속에서만 즐거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그 첫번째 질문을 이렇게 묻습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 대답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glorify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enjoy 것이다.’ 
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 ever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때 가장 기쁩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체를 기뻐할 enjoy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합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가장 행복한 상태는,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을 자신의 극락(최고의 기쁨)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슬픔 이유를 원수들에 의해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가지 못하게 된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빛과 진리를 속히 보내셔서, 
자신을 성소로 인도해 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라고 
다시 영혼의 기쁨을 찾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까? 
우리의 원수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허무와 슬픔에 빠지게 합니다. 
헛된 목적으로 삶을 바쁘게 살도록 하거나 목적없이 인생을 허비하게 합니다. 

그때 우리는 다윗의 기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허무와 슬픔에 빠진 이유는 하나님 기뻐하지 않게 된 것에 있습니다. 

속히 우리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인도되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말씀은 빛과 진리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소망을 둔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참 기쁨을 찾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최고의 기쁨으로 고백할 것입니다. 

시인이 이처럼 간절하게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소원이 있었음에도

그의 환경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어떻게 그것을 이기려고 하는지를 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예전에 사용하던 개역에는 좀 더 로 원어적으로 해석하여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이것이 더 마음에 와 닿는 번역으로 여겨집니다.

 

그럼 원어적으로 “내 얼굴의 도움, The help of my countenance”이란 무슨 뜻일까요?        주2)

예를 들어, 찡그린 얼굴은 슬픔을 나타내고

사람의 얼굴에 미소는 기쁨을 나타냅니다.

 

시편 43편에서 저자는 하나님이 “내 얼굴의 도움”이라고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의 찡그린, 슬픈, 침울한 표정에서 → 미소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리는 뜻입니다.

 

시편 43편이 시작되면서 시인은 대적들 때문에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1절

 

저자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지만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시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주는 내 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왜 나를 버리십니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를 인하여 애통하리이까?”  2절

 

대적들과 맞서야 하는 고독함을 느끼는 그의 표정에는

슬픔과 걱정, 좌절감이 가득합니다. 그는 자신의 표정을 '슬픔 sadness'이라고 표현한다.

'내가 어찌하여 슬프게 다니니이까':2

그는 아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행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지만,

시인은 여전히 믿음으로 하나님께 그를 인도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시온)에 이르게 하소서3절

 

그는 자신이 직면한 상황이 혼자서 처리하기에는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가 필요합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자신을 대신하여 행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만 자신이 처한 역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기도 중에 믿음을 회복합니다. 그 내용이 4~5절입니다.


시인은 믿음으로 계속 하나님을 바라보고, 계속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여 그가 원수들에게서 벗어나 구원을 받아

하나님이 정하신 처소인 장막에서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실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4절

 

 그는 하나님께서 그가 겪는 슬픔, 걱정, 좌절을

“큰 기쁨 exceeding joy”으로 바꾸실 것임을 확신합니다!   :4

시인은 자신이 낙담하도록 내버려 둔 이유에 대해 스스로 질문합니다.

“내 영혼아, 왜 낙심하느냐? 왜 내 안에서 불안해 하느냐?"

 

자신이 경험하고 느꼈던 슬픔에 직면하여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유지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상기시킵니다.

 

이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를 쳐다보고 계시기 때문에

그는 이 어려운 시기에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꾸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내 얼굴의 도움”으로 봅니까? 

다시 말해서, 나는 "내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분"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지나친 슬픔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는 이렇게 자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5절 말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얼굴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고후 5:7).

 

위 5절 말씀이 42:5, 11절에 2번이 더 나옵니다.

만약 시편 42~43편이 한 편이었었다면, 같은 구절이 3번이나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황이 아무리 낙심하게 만들고, 절망스럽고, 좌절스러울지라도

소망을 하나님께 두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손을 내미신다는 확신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이처럼 답답한 일을 당할 때, 일들이 잘 풀려가지 않을 때, 
불가항력적인 사태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사정을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망을 하나님께 둘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5절에서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자신에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Hope in God”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금년도 우리 교회 표어는 “하나님을 바라라(Hope in God)”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거짓된 소망에 이끌리면 절망과 무력감은 더 커질 것입니다. 
사람들이 의지하는 물질, 명예, 성공 등은.. 참 소망이 아닙니다. 거짓된 소망입니다.

또 한 가지 거짓된 소망은, 자신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자신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념이나 세력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어떤 환경이나 우연을 또한 신뢰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께 우리 소망을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일이 되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셔야 일이 이루어집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사14:24) 

하나님께서 작정하지 않으시면 어떤 일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은혜의 천수답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에서 은혜의 비가 부어져야 일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만 신뢰합니다.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사30:15) 

인간의 계획과 ‘빨리빨리’가 무성한 시대에 
우리는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됩시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아픈 것은 충분히 아파해야 하고, 
채워질 것은 채워지고 난 다음에야 넘어갈 수 있습니다. 
성급하면 나중에 고생하고 오히려 돌아갑니다.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어느 날 마르틴 루터는 궁지에 몰려 몹시 상심하고 낙심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루터의 아내가 상복을 입고 루터에게 나타났습니다. 

루터는 “누가 죽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루터의 아내는 “예, 하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하고 묻자 

그 지혜로운 아내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당신이 그토록 기가 죽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당신이 낙심하고 무기력한 것을 보니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소” 

 

하나님은 우리 기를 살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내 얼굴의 도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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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1) 시편 42~43편은 연결된 시편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성경에는 42편과 43편이 분리되어 있지만,

히브리어로 된 마소라 성경에는 42~43편이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42:5절과 11절이,

43:5절에도 동일하게 반복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42~43편이 하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시편 42~49편까지가 모두 ‘고라 자손의 시’라고 표제어가 붙어 있는데,

43편에만 아무런 표제어가 없는 것도, 42~43편이 하나였던 것을 알려줍니다.

 

 

주2)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43:5

과거 개역은,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 으로 번역했다.

 

KJV는 the health of my countenance 내 얼굴의 건강

NASB는 the help of my countenance 내 얼굴의 도움.. 이렇게 제각기 번역이 약간씩 다르다.

 

히브리어로는 '예슈아 파님'이다. salvation of my face

'예슈아 - 구원' 이란 뜻이, 위경에서 건져짐, 질병에서 건강, 곤란에서 도움 등 여러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합하면 '내 근심어린 얼굴, 내 침울한 얼굴에서 → 환한 얼굴, 펴진 얼굴로 변화시키는 분'이란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