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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뜻을 굴복함으로 성령 안에서 살기 P3 / 잭 푸닌

LNCK 2022. 3. 18. 14:16

우리의 뜻을 굴복함으로 성령 안에서 살기 P3 / 잭 푸닌 - YouTube

◈우리의 뜻을 굴복함으로 성령 안에서 살기 P3    롬8:13, 마7:21~23    출처의 41~끝, 정리

Yielding Our Will To Live In The Spirit   잭 푸닌        P1            P2   

*관련설교 : 혼적인가 영적인가? 

 

지난 P2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의지를 드려서 순종해야” 한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진리를 말씀하시는데,

여러분이 자기 의지를 내어드리지는 않고

마음이나 생각으로만 그 진리를 깨닫고 이해하는데만 그친다면

여러분은 결코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스스로 성령충만하고 방언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도

자기 의지를 굴복해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자기 의지=자기 뜻을 주님 뜻에 굴복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나 자신의 뜻과 의지에 No! 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Yes!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성막 tabernacle 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성소 - 성소 - 마당입니다.

이것은 우리 영 - 혼과 - 몸에 대입됩니다.

 

성소를 보면, 지성소성소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휘장으로 구분되죠.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에게도 혼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있습니다.

성막의 은 우리 을 의미하죠.

 

히10:20절은 정말 중요한 구절인데요

사람들이 많이들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히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육체인 휘장 가운데로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개통하셨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줄, 여러분은 아십니다.

그 길을 여셨다는 것은, 우리도 이제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구약시대 때는, 지성소에 아무도 못 들어갔는데,

이제 새언약, 신약시대 때는,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길을 따라서

우리도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것은 구약시대처럼 ‘혼으로’ 사는 게 아니라

이제 신약시대에는 ‘영으로’ 사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선구자 forerunner 라고 성경에 말씀하고 있죠. *히6:19~20, '앞서 가신 자'

이것은 하나님의 이, 내 을 주장해서, 결국 내 의지를 순종으로 이끄시는 방식의 새로운 삶입니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단지 지성 mind (생각)과  *지

감정 emotion 으로서만 성경을 이해하고,                *정

영적인 spiritual 사람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

즉 구약시대처럼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이란,

말씀을 그저 지성감정으로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의지로까지 받아들여 결국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저 혼적인 크리스천은

모든 것을 머리(지성) 속에서는 분명히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머리로 이해만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에 대해 흥분도 합니다.

흔히 ‘은혜 받았다’고 얘기하지요. 즉 감정도 반응한 것입니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며 주님을 찬양하고, 손을 높이 듭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를 정말 영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그의 의지가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반대의 그룹의 사람들은

손도 들지 않고, 소리지르며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죽은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쪽은 말씀에, 감정적으로만 반응했고     *정

또 한쪽은 말씀에, 지성적으로만 반응하는 것입니다.    *지

둘 다 혼적인 사람입니다.                      *프쉬키코스 soulish

 

정답은, 지성감정 양쪽을 다 가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보태서, 내 의지까지 반응하는 것, 즉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계에 이런 두 흐름을 뚜렷이 볼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지성을 자꾸 계발시킵니다.

다른 쪽에서는 감정을 자꾸 계발시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쪽에만 계속 머무르면 안 되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즉 우리의 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지배를 받은 증거는

우리의 이, 성령의 뜻에, 즉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즉 '의지'가 작동되는 사람입니다.

그가 바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프뉴마티코스, a spiritual

 

예수님께서 죽으시자,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래서 새언약 시대에서는, 예수님을 뒤따라

신약 성도들이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이제까지 성경을 해석해 왔는데)

 

저 잭 푸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사실을 우리 삶에 적용하면

이제는 혼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신앙생활, 지성소로 나아가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성소는 우리의 ‘영’에 대비되는데,

이제는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그 결과, 우리가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제는 의지적 차원에서 신앙생활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지성소로 우리가 나아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기 영혼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그런 삶을 평생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성소를 통해) 평생 도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뜻을 부인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도 성령님이, 나의 지성소에 임하시고, 내가 거기서 성령님을 만날 때

내 뜻을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내 의지를 부인하고

성령의 뜻에,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내 의지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새롭고 살아있는 길 new and living way’ 이라고 부릅니다. 히10:20

구약에는 이런 길이 없었다는 것이죠. 휘장이 아직 찢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이렇게 사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지 못하고 혼적으로 사는 사람은

(그 아래 단계에 육적인 사람이 있는데,                *사르키코스

그런 사람은 우리 가운데 없다고 보고요..)

                    

혼적으로 사는 사람은 두 부류인데

-자기 지성으로 믿는 사람  (말씀파)

-자기 감정으로 믿는 사람  (은혜파)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뜻으로, 자기 의지로 삽니다.

그 결과는 실패, 낙담, 실망, 괴로움, 불순종입니다.

 

아직 자기 의지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환하게 알고, 마음이 뜨거울 수도 있는데, 그것으로 끝입니다.

실제 삶에서, 다이다믹한 성도의 삶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아직 자기 의지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롬8:13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육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이 말씀을 지금 길게 늘여서 설명하는 중입니다.

쉽게 깨달을 사람은, 그냥 간단하게 깨달으십시오!)

 

▲마귀는 종종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도록 유혹합니다.

우리는 이때마다, 나의 의지를 하나님 뜻에 복종시키는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그것은 나의 영의 지성소에서, 내 영이 성령님을 만나서, 성령님의 코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선언하게 됩니다.

‘마귀야, 미안하지만 나는 네 유혹을 거절한다.

나는 내 의지가 주님 뜻에 복종하기로 나를 내어드린다.

나는 생각으로만 아니라, 감정으로만 아니라, 나는 의지로도 주님을 믿는다!’

 

선수는 나입니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성령님은 코치입니다. 강력하게 옆에서 코칭은 하시지만, 결정은 내가 합니다.

내가 성령님의 코칭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거죠.

 

여러 가지 육신적인 생각들이, 내 생각 mind 속으로 들어올 때도 있습니다.

그때 나는 성령의 코칭을 받은 내 의지로 그 생각들을 거절합니다.

 

신앙생활을 생각이나 감정적 차원으로만 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의지적 차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결판은 내 의지 will 로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내 의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내 육신적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는 내 의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한다’ 요6:38

자기 의지를 아버지께 내어드렸다는 뜻입니다.

 

마7:24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듣는 것은 머리로, 생각으로 듣습니다.            *지적인 영역

 

그 다음에 감정적으로 은혜를 받을 수도 있겠지요.

‘오 대단한 말씀이야! 굉장했어!

나는 그 말씀을 듣고 정말 도전을 받았어요.’        *감정적 영역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의지적 영역

 

듣고 그저 잠시 흥분한 사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은혜를 받았다며 잠시 흥분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은 아직 ‘반석위에 지은 집’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행하기 위해, 자기 의지를 굴복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모래위의 집’입니다.

 

참된 믿음, 성숙한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자기 뜻을 굴복 할 때.. 라는 것을 우리가 꼭 이해해야 합니다.

즉 ‘행하는 믿음’입니다.

 

눅6:48절도 마찬가지죠.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지금 집을 짓고 있는 거죠?

반석위에 세운 집, 모래 위에 세운 집.. 이들은 서로 10마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둘 다 서로 바로 옆에서 집을 지었습니다.

 

예수님도 두 사람이 함께 맷돌 갈다가

한 사람은 들려 올라가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건축자가 다른 점은, 집의 기초가 서로 각각 달랐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모래 층을 지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그래서 그의 집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기초를 깊이 파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겉표면 위에, 모래 위에다 쉽게 집을 지었습니다.

 

아마 모래 위에 집을 다 세울 때까지

반석 위에 짓는 사람은, 여전히 깊이 기초 공사를 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기초에 들어가는 공사비도 그만큼 줄일 수 있었으니, 그 돈으로

눈에 보이는 집은 더 크고 화려하게 지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얼핏 보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가 더 지혜로워 보입니다.

폭풍우가 오고, 강물이 범람할 때까지는요!

누구의 집이 폭풍우와 홍수 때 여전히 버티고 서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이 비유를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지킨 자’와   *의지의 영역에서 순종한 자

‘내 말을 듣기만 하고 지키지 않은 자’를 예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지식과 감정으로만 믿은 자

 

오늘날 우리는, 내가 하나님 말씀도 듣고, 가끔씩은 은혜도 받고 있으니까..

누구든지 자기를 반석위에 세운 집, 그 건축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럼 당신은, 그 은혜 받은 말씀을 진실로, 의지로 순종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행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착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모래 위에 집을 건축하는, 어리석은 신앙의 건축자입니다.

마지막 때가 될 때, 그 집은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이 사람이 ‘주여, 주여’ 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는 머리와 생각으로는, 주님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세상 불신자가 아닙니다.

 

또한 ‘그가 귀신을 내어쫓고 병자들을 고쳤다’고 했습니다.

그는 감정적으로도 뜨거웠던 사람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천국 (새 예루살렘 성) 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 단락의 마지막 결론이 어떻습니까?

마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의지의 영역을 뜻합니다.

 

자기 의지의 영역을 무시하고 신앙생활 하는 신자들이, 오늘날 아주 많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교회 다니고, 기도를 열심히 한다 하더라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신앙의 건축자들이고,

결국에는 천국에서 내어쫓김을 당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집회에 나와서 그저 은혜 받는 것으로 끝나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여러분이 집에 돌아가서, 내 영이 성령의 인도와 감동을 받아서,

의지를 성령님의 뜻에 복종시켜서

그 들은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소 ‘반석 위에 세운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순종할 수 있나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령의 세례가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말씀을 머리로 깨닫기 위해서도 필요하겠고,

신앙적인 뜨거운 감정을 고양하기 위해서도 필요하겠지만,

자기의 뜻(=의지, will)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롬8:13 ‘성령을 통해서 through the Holy Spirit 몸의 행실을 죽이면 네가 살리니..’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 길은, 예수님이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뒤따라, 휘장 가운데로 지나가서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즉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이때 내 의지와 내 뜻이 죽고, 성령의 뜻에 순종해서 ‘행하는’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자기 생각으로 예수 믿는 사람,

자기 뜨거운 감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홍수가 나고 풍랑이 오면.. 견디지 못합니다.

 

이런 지성과 감성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한 마디로 말하면 ‘혼적인 사람’입니다.             *soulish, 프쉬키코스

 

이런 사람들이 자기 지성으로 공부를 많이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까지 합니다.

 

여러분, 자기 가정생활은 엉망이면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집에서 자기 자녀를 제대로 키우지도 못하면서

교회에서 다른 사람을 영적으로 키우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좌절하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머리가 좋아서,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조심하십시오.

그게 믿음이 좋다는 증거는 결코 아닙니다.

진정 믿음이 좋은 사람은, 들은 말씀을, 성령을 통해서 행하는=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롬8:13

    

▲제가 이렇게 의지를 사용해서, 그 의지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고 할 때,

지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을 등한시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지성과 감정,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거죠.

신앙의 지정의가 다 사용되어져야 하는데,

 

특별히 사람들이 지식과 감정 수준까지는 신앙생활을 하기 쉽지만

의지적 수준에까지 이르러, 받은 말씀을 순종하기는 대단히 힘들다는 것이고,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알지 못하면,

신자가 설교를 듣다가, 또는 찬양을 드리다가

갑자기 자기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스스로 자기가 감정적으로 고양될 때가 있어요.

 

그때 사람들은 스스로 속기 쉽습니다.

‘나는 성숙한 신자야, 나는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야!’

 

아닙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수준이 끝이 아닌 것입니다.

반드시 집에 돌아가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그대로 사는 사람이

정말 성숙한 성도이고, 참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만으로.. 스스로 속지 마십시오.

 

제가 어릴 적에, 예수님에 대한 영화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저는 울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저는 이전과 똑같이 죄악된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마음이 몹시 흥분되어 말합니다. ‘오 나는 오늘 큰 은혜를 받았어요!’

 

작년에 이 컨퍼런스에 와서, 은혜를 받고 돌아간 후에

여러분 가정에서 정말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아니면 그 은혜를, 집에 돌아가서는 다 까먹고 말았습니까?

그래서 아무런 변화와 성장도 없이, 금년에 또 이 집회에 오신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도 이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9:23

 

자기 의지를 버리라는 뜻입니다.

자기 의지를 버리고, 주님의 의지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의 수가성 우물 곁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영으로 ‘영으로 예배한다’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혼으로’까지만 예배했습니다.

지성과 감성을 사용한 예배였습니다.

 

이제 신약시대에서는, 내 영속으로, 하나님의 영을 초청하여

하나되어 동행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의지가, 성령님의 의지에 복종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주1)

 

여러분, 예배 때 감정이 고양되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사람들은 ‘성령충만’이라고 말하는데요.. 물론 성령충만은 거기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건 성령충만이 아니라, 그저 감정의 충만이었던 것이지요.

 

진정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자기 의지까지도 성령님께 복종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삶에서도, 성령충만의 증거와 열매들이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충만이 중요하지만, 그건 그저 예배시간에 감정의 고양에 그쳐서는

진정한 충만이 아닙니다.

정말 성령충만하면, 자신의 의지가, 성령의 의지에 굴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적용

 

여러분, ‘주님은 경외하는 자에게 그 비밀을 알게 하십니다.’ 시25:14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 그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비밀’이란

우리가 혼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표현하면 ‘자기를 부인하는’ 길입니다.

일례로 이런 것입니다.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먼저 형제를 찾아가서,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십니까?

 

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부당하게 취한 돈은 돌려주어라. 네가 빌린 돈이 있으면 성실히 갚아라’

괜히 잊어버렸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돈 떼 먹은 것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성경은 ‘빚을 지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빚을 지셨다고 상상이 되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행하신 대로, 진정 행하고 싶으신가요? 요일2:6

 

여러분이 가진 돈이 조금이면, 조금만 구입하십시오.

‘나중에 갚으면 되지..’ 하면서 빚으로 물건을 사지 마십시오.

 

빚으로 가재도구를 장만하고 싶은 유혹을 떨쳐 버리십시오.

그런 우리의 의지를, 자기부인 하십시오.

 

‘여보, 우리 집도 그것을 장만해요!’

‘미안하지만 우리는 그럴 여유가 지금은 없소.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몇 년 기다렸다가, 저축해서 그때 사도록 합시다!’

 

여러분, 제 말을 믿으십시오.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서 사는 삶은, 정말 놀라운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려면 작은 일들로부터, 은밀하게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더 부인하면 할수록

더 많은 강줄기가 여러분으로부터 흘러나올 것입니다.

 

가늘게 조금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강줄기 하나가 아니라, 여러분의 샘의 근원에서

많은 지류들이 흘러나와 사방으로 퍼져서, 거대한 강물로 흐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을 제한시켰다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 성취하신 것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그럼 마지막 심판대에서 혹시 하나님이 이런 것을 보여주신다면요?

‘나는 너의 삶을 통해, 이것보다 열 배는 더 많은 것을 이루기 원했다.

그런데 너는 네 삶으로부터 가늘게 조금, 생수가 흘러나오는 것에 만족했다..’

‘너는 강줄기 작은 지류 하나에 만족했다.

나는 너를 통해 50개의 지류가 여러 방향으로 흘러나가서 넘치기를 원했는데..’

 

저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말씀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예수님을 닮게 만드시고

그런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을 하기 원하시는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왜냐면 내가 네게 어떤 것을 하라고 했을 때,

네가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네가 네 의지를 내 뜻에 굴복시키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기다려달라거나.. 그건 제게 곤란하다고 말하곤 했다.

 

‘내가 네게 누군가를 용서하라고 했을 때..

또는 어떤 사람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라고 했을 때..

너는 즉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성경에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남편과 아내들이며, 화가 난 채로, 용서를 구하지 않은 채로,

용서해 주지 않은 채로.. 잠자리에 들지 마십시오.

어떻게 크리스천 부부가, 그렇게 화가 난 채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개인의 삶에서, 모든 가정에서, 모든 교회에서

마귀를 몰아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기 뜻, 자기 의지 self-will 를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적인 이해와, 감정적인 흥분을 가지고

자신이 스스로 영적인 사람이라고 속지 않기 바랍니다.

 

지적인 이해도 필요하고, 감정적인 흥분도 인정합니다만

거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내 의지로 성령님의 뜻에 복종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진정 영적인 사람입니다. *프뉴마티코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이 메시지가 우리 삶에 실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

 

주1)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요4:23

여기서  '영으로' 예배한다..는 지성소에서 내 영이 성령님을 만나서,

온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삶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고 위에서 해석했는데,

 

그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구약에 '인자와 진실' 라는 말이 종종 나오는데요, 특히 시편에 자주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말인데,

인자(헤세드)는 언약적 사랑, 즉 변치 않는 사랑을 뜻하고, 

 

진실(에메트, 에무나)는 truth 나 faithful로 번역하는데,

그 의미는,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지 않고, 꾸준한 사랑,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식의 영원히 변치 않는 여전한 사랑을 뜻합니다.

 

요4:23절에서 '진리'은

그 히브리식 '진실(에메트, 에무나)'을, 헬라어 진리(알레테이아)로 번역한 말이고,

이것을 오늘날 우리는 '말씀의 진리 truth'로 이해하는 것은 아닌지요?

 

영어로는 구약에서도 truth, 신약에서도 truth, 그걸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이해합니다만

그러면 뭔가 앞뒤 문맥이 잘 맞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