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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48편 시온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함

LNCK 2022. 3. 23. 19:49

◈시온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함       시48:1~14         여러 설교 정리

 

오늘 본문의 표제어는 <고라 자손의 시 곧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배경은 여러 성경학자들이 앗수르의 왕 산헤립을 하나님께서 물리쳐 주셨을 때에

지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문 시48편은, 시46, 76, 84, 87, 122편과 함께

“시온의 노래”로 분류되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예루살렘>이 시의 주제가 됩니다.

특별히 48편은 이런 주제가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 시편은 마치 예배자들이 예배소인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예배 인도자가 회중을 인도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배 장소인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면서, 하나님과 그 처소를 소개합니다. (1~2절)

그리고 그 처소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언급합니다. (3~8절)

그리고 그것을 지금의 예배자에게 적용합니다. (9~14절).

 

그런데 이 시편을 읽는 키는, "종말론적인 이해"입니다.

가만히 읽어보면, 이 시는 마치 신약의 계시록의 내용과 매우 흡사합니다.

시인이 노래하는 시온 성은, 온 세계의 성이고,

시인이 찬양하는 구원과 심판은, 온 세계와 땅 끝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켜주심에 대한 고백과 감사 (1~8절)

 

1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산헤립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히스기야 왕 제십사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를 공격했습니다.

온 나라가 위기 상황 가운데 유린당했습니다.

  

열왕기하 19:14-19절은 포위당했을 때에

하나님 앞에 매달려 전적으로 기도한 히스기야 왕의 기도입니다.

 

왕하19:19 ‘주 우리의 하나님, 이제 그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셔서,

세상의 모든 나라가, 오직 주님만이 홀로 주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표준새번역

 

히스기야 왕이 말한 그는 앗수르를 가리킵니다.

그 시대에 앗수르는 당해낼 나라가 없었습니다.

 

앗수르가 가는 나라와 땅은 다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이방 나라마다 섬기던 신들이 있었고, 그 신들을 의지하여 전쟁했는데

앗수르 앞에 속수무책으로 다 무릎을 꿇었습니다.

 

앗수르 이름만 들어도 공포였고,

앗수르가 섬기던 신은 이방 나라의 다른 신들보다 더 위대한 신이 되었습니다.

그 앗수르가 유다에 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비방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교만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히스기야 왕의 기도처럼 천하 만국이 오직 주님만이 홀로 주 하나님이심을

친히 알게 하셨습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왕하19:35

 

모두가 잠이 든 깊은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움직였습니다.

출애굽 전 여호와의 밤에 처음 난 것은 다 죽임을 당한 것과 같이 밤 중에 일어났습니다.

 

셀 수 없는 대군을 거느리고 온 앗수르 군대는 거짓말처럼 다 전멸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백성들을 지켜주십니다.

   

2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2절은 시온산을 터가 높고 아름다운곳이고, 온 세계가 즐거워하는 곳이고, 
큰 왕의 성이고, 북방에 있는 곳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시온산이 온세계의 즐거움이 되는 것은 시온산으로부터 생명수가 흘러 나오고 
세상을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기 때문입니다.

'온 세계가 즐거워함' .. 이것은 종말론적인 표현입니다. 시인은 종말론적으로 시온 성을 찬양합니다.

'북방에 있는 시온 산'

이것은 현재의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 새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언젠가 하나님은 현재의 땅을 멸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이 새 땅은 계시록 21장과 22장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새 땅의 수도로 새 예루살렘을 정하셨습니다. 시인이 그걸 내다보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 도시는 유대인들만의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은 “온 땅의 기쁨”(2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만 찬양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곳에서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10절).

이 시편에서 시온 자체를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수도 이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 지구의 수도로, 시간도 영원까지 내다보고 있습니다. 

 

즉 '하늘의 예루살렘'을 묘사하기까지 하는데,

계시록의 마지막 장(새 예루살렘)을 미리 생각하면서, 그 성을 마치 여기서 미리 쳐다보는 듯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적으로 내다보고 있는 것이죠. 아래 3~8절이 특히 그러합니다.

3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요새로 알리셨도다

'하나님은 그 성의 요새에서, 자신이 피난처이심을 스스로 알리셨다' 라는 뜻입니다.

  
요새는 적군들의 공격을 막는 안전한 피난처의 역할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시온산에 계셔서, 요새가 되시고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시온산이 요새가 될 수 있는 것도, 시온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안전한 요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성의 기초와 터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리적 조건과 성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대적들로부터 시온성을 지키고 보호하셨습니다.

이것은 현실의 보호와 아울러, 종말론적인 보호를 담고 있습니다. (2~14절)

 

우리의 교회와 가정도 이와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의 가정은 영원히, 안전한 요새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샬롬이 우리 가정에 넘칠 것입니다.

 

4 왕들이 모여서 함께 지나갔음이여

5 그들이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지나갔도다

 

개역성경은 4절이 '왕들이 모여서 함께 지나갔음이여' 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앞에 '보소서!' 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보소서 하나님의 요새를 왕들이 연합하여 시온산으로 쳐들어왔습니다'는 의미입니다. 

 

'모아서 함께'  :4

원수들이 하나님이 계신곳을 모여서 침범한 것입니다.

고대 전쟁이 보통 그렇듯이, 앗수르도 여러 민족을 모아서, 연합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 결과가 5절에 이어집니다. “그들이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지나갔도다” 했습니다. 
“그 성을 보고 그들은 깜짝 놀라서 무서워하며 달아났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A라는 아이를 그의 친구들이 괴롭히고있는데 
A의 아버지가 나타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A를 괴롭히려던  그의 친구들은, A의 아버지가 나타난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6 거기서 떨림이 그들을 사로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도다

 

이들의 고통을 6절은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떨림이 그들을 사로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이 고통같도다” 했습니다. 
산모에게 해산의 순간은 가장 무서운 순간이며 큰 고통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성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원수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또 큰 고통을 겪고 도망간 것입니다. 

 

7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신다고 찬양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다시스의 배'는 부와 번영의 상징이었습니다. 

왕상10:22절을 보면 솔로몬왕이 다시스의 배로 
금과 은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을 실어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에 다시스의 배는 가장 크고 견고한 배였고 
여기서 다시스의 배는 안전하고 화려한 것, 번영과 안전, 세상의 권세와 힘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다시스의 배'라고 하더라도하나님과 대적하면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권자 이시기 때문에 
의인에게 구원을 베푸시기도 하시고 악인에게 심판을 내리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신다는 말은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교만하고 악한 세력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8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리로다 (셀라)

 

8절은 시인의 선포에 대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응답입니다. (이런 형식을 '교창'이라고 하죠)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러 온 적군을 두려움에 떨게 하시고 

도망치게 하시는 것을 듣고 직접 보았습니다.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에 계신 하나님께서 항상 그 성을 안전하게 하신다는 것을 

자신들이 보았다고 간증합니다. 

또한 앞으로도 영원토록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견고케 하시리라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토록 인도하신다 (9~14절)

 

9~11절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모인 순례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입니다.

 

9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헤세드)을 생각하였나이다

 

'하나님, 성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인자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 곧 ‘헤세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를 절대로 놓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끝까지 그를 붙잡고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성전에 들어간 순례자들은, 바로 이와 같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했습니다.

 

오늘날 구원 받은 우리들에게도 이것은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할 때 우리를 구원하고 보호하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헤세드이기 때문입니다.

 

10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하나님, 주님의 명성에 어울리게, 주님을 찬양하는 소리도 땅 끝까지 퍼졌습니다.'  

'땅 끝까지'란, 하나님은 온 세계의 하나님이 되시며, 종말론적인 찬양입니다. 계시록과 같은 내용이죠. 

'하나님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다'는 '당신의 하시는 일은 오로지 옳사오니' 라는 뜻입니다.

  

11 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시온 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

 

11절은 시적인 표현으로 예루살렘이 위치한 시온 산이 마치 사람처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 때문입니다. 

계시록에도, 이런 구절들이 종종 등장하죠. 종말적 심판을 성도들이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스라엘의 원수인 열방을 심판하시고, 
반대로 예루살렘 성과 주의 백성들을 구원하셨음을 즐거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지금도 여전히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찬양하고,

또한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찬송이 열방 가운데 널피 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열방 가운데 충만할 것입니다.

 

12 너희는 시온을 돌면서 그 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 보라

13 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12절과 13절에서 시편기자는 예배자들을 불러 예배의식에 동참하기를 권면합니다. 
시온산의 신년 축제때, 제사장이 앞장서고 
모든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을 한바퀴 도는 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옛날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라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성을 돌던 때처럼 
시인은 시온성을 돌면서 둘러보라고 말합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이스라엘이 예루살램 성벽을 중건 했을 때에도 
레위인들이 앞서가며 감사의 행진을 했습니다. 

여기서 시편기자는 다섯가지를 명령하는데, 
시온성을 돌면서 둘러보라고하고, 
그 망대를 세어보라고하고, 
성벽을 자세히 보라고 하고, 
궁전을 살펴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후대에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줍니다. 바로 후대에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우리 가정을 돌보셨는지,

과거에 우리가 어떠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었는지.. 내 자녀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14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이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이며,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죽을 때까지는 죽음을 넘어서, 라는 뜻이며, 의역하면 영원토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토록 인도하십니다.

 

지금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고 낙담하고 계십니까? 자녀들의 문제입니까?

경제적인 어려움입니까? 어떤 상황에 있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를 지키시고 영원토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붙잡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세상 끝날에만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계속해서 영원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이런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또 종말까지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찬양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또 그런 구원을 경험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즐겁게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위대하신 구원의 하나님으로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우리 하나님의 성’이 될 것입니다. 영원토록!

 

▲적용 / 종말론적 신앙과 삶
‘종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두려움이 아닐까 합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속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종말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질 때가 곧 올 것을 예고하시며,

이에 앞서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기며

하늘에서 무서운 일들과 표징이 일어날 것이고, 박해가 일어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 뒤에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눅21:18

잘 살펴보면 예수님은 종말과 심판에 관한 무서운 일을 말씀하신다기보다, 
그러한 일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을 따르는 신앙의 길을 굳건히 걸어갈 것을 당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종말과 심판은 두려움이 아닌 희망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신앙으로 끝까지 견디어 내면 
생명을 얻으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한편 복음이 전하는 환난과 시련은 심판 때에 일어날 일만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우리 삶에는 전쟁과 반란, 지진과 기근, 전염병, 박해 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때로 우리의 용기와 자신감을 앗아가고 좌절과 절망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말을 희망으로 기다리는 신앙은 
갖가지 환난에서 주님이 오실 날이 머지않았음을 깨닫도록 합니다. 

 

그분께서 곧 오시어 지금 우리가 겪는 시련과 환난을 없애 주시고 
영원한 행복과 안식을 주시리라는 희망을 선사하며, 
지금 여기서 시련에 맞서 의연하게 살아갈 용기와 힘을 줍니다.

그분께서 곧 오십니다. 아니, 그분께서 이미 문 앞에 당도해 계십니다.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개인적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늙고 병들어 죽습니다. 늙고 병든 사람에게 희망은 무엇일까요?

다시는 아픔이 없고, 질병이 없고, 눈물이 없는..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전쟁이나, 전쟁의 위협이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전쟁이 없는...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을 '두려움'으로 생각해서 회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개인적 종말이든지/ 지구적 종말이든지

주님의 통치가 완성되고, 주님이 다스리는 완전한 나라가 이루어질 그 날을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며, 내다보면서.. 오늘의 힘듦과 고통을 이겨나가는 '종말론적 신앙'을

혹시나 내가 잊지 않았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