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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당신을 그의 선하심의 표본으로 만들기 원하십니다 P1 / 잭 푸닌

LNCK 2022. 3. 25. 16:08

잭 푸닌 하나님은 당신을 그의 선하심의 표본으로 만들기 원하십니다. - YouTube

 

하나님은 당신을 그의 선하심의 표본으로 만들기 원하십니다 P1 / 잭 푸닌 - YouTube

◈하나님은 당신을 그의 선하심의 표본으로 만들기 원하십니다 P1  히4:1~11, 히12:14    출처

God Wants To Make You an Example of His Goodness            *출처의 1~21분까지 녹취

잭 푸닌  

 

히브리서 12장을 보겠습니다.

히브리서는 매우 강한 권고를 합니다.

그래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책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신약성경 중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입니다.

 

저는 ‘성경해설 70시간 시리즈’ 중에서 *70 hours through the Bible

히브리서에 70시간 중 4시간을 할애했습니다. (많이 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책 수와, 페이지 분량으로 봤을 때

비율에 맞지 않는 많은 시간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 마음 속에 그러한 부담을 주셨습니다.

 

특히 제 소명이, 다른 기독교인들이 강조하지 않는 부분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느끼기에,

저는 <히브리서>에 그런 부담을 느낍니다.

 

◑예수를 거절하진 않지만 등한히 여기는 신자들

  

무엇보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들’에게 

쓰인 책이라는 것입니다.

 

히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는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에게 쓰여진 책입니다.

  

히2:3절에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히브리서 저자는, 구원을 거절하는 사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위 두 구절을 종합하면, 이 책의 수신자들은 히브리인들인데,

그들은 이같이 큰 구원을 거절 reject 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등한히 neglect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들 모습과 비슷하지요)

 

여러분은, ‘아이를 거절 reject 하는 것’과, ‘아이를 등한히 neglect 여기는 것’의 차이를 아시죠?

자기 자녀를 거절하는 부모는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을 집 밖으로 쫓아내지 않죠.

그러나 아이들을 등한히 여길 수는 있습니다.

 

즉 아이들을 잘 먹이지 않고, 돌보지 않고, 좋은 교육을 시키지도 않고

잘 입히거나 먹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등한히 neglect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신자는, 구원을 거절하지는 않지만

얼마든지 구원을 등한히 여길 수 있습니다. 히2:3

그들이 성경말씀을 등한히 여길 수도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 가운데, 성경을 거절하는 사람은 없지만,

어떤 분들은 등한히 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구원을 거절하지는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어하죠.

그러나 그들은 이 구원을 등한히 여깁니다.

 

여기서 ‘구원’이란, 우리를 이 땅에서 내 죄에서 구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내 죄를 극복하고, 내 죄를 끊고, 내 죄에서 승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구원’이란 말의 뜻입니다. ‘무조건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뜻만이 아니라요.

 

그래서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는 말은,

즉 내 죄를 극복하고, 내 죄를 끊고, 내 죄에서 승리하는 것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는 태도를 뜻합니다.

 

히3: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여기 ‘형제들아’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믿는 거룩한 신자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 수 있을까요?

 

네, 얼마든지 그렇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그런 일들을 종종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자란 젊은이들 가운데,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등한히 여겼고, 거절하기도 했고

교만해졌고, 그것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으로 발전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했습니다.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졌다는 증거는

그들이 너무나 교만해졌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과 함께 사실 수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하죠.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 사람들은 교만해집니다.

우리는 그 젊은이들이 그렇게 넘어지게 된 것을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자기가 살아있는 믿음에서 떨어진 것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에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히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왜냐면 권면하고 돌이킬 기회가, 늘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이란 시간을 붙잡지 못하면, 그것은 다시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 partakers 가 되리라’ 히3:14

 

우리가 일생에 한 번 주님을 영접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히3:14

 

여기서 얼마나 여러 번, 저자는 무언가를 강조했는지 보세요.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15

 

 

◑구원을 등한히 여겼던 출애굽 히브리 백성들..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다

 

그리고 그는, 모세에게 이끌려 출애굽하던 자들을 예로 듭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그들이 출애굽했을 때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16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죠.

제 생각인데, 아마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어떤 사람은 ‘말도 안 돼, 어린양의 피가 우리 생명을 구원할 것처럼

문설주에 피를 바르라고?’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등한히 여겼고, 장자가 죽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라 하더라도요.

 

그러나 문설주에 피를 바른 극소수라도 이집트 사람이나 이방인은

재앙을 피할 수 있었어요.


출애굽할 때, 이방인들도 극소수 섞여 따라나온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출12:38

 

그러나 등한히 여기고, 믿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죽었습니다.

그 후에도,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믿지 않았던 히브리인들이 계속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들은 문설주에 피를 발랐기 때문에 출애굽을 하였고,

홍해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홍해에서 나와서, 구름기둥이 그들 위에 임하였고

그것은 성령의 세례의 묘사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구름기둥 속에 불기둥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만 보이는 거죠)

 

구름기둥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데,

신약의 성령세례에 견줄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광야의 이스라엘은, 오늘날로 치면

물세례도 받았고, 성령의 세례도 받은, 구원받은 신자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그들에 대해 격노하셨습니다. :17

 

▲이것은 우리에게 경고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3:18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애서 구원하셨지만,

그들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19절에,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요!  :19

 

히3:18~19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그래서 뭐라고 하십니까?

 

히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복음을 그저 듣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믿음으로 그 복음을 살아내야 합니다.

 

히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믿음을 화합지 않았다는 뜻은, 믿음대로 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믿음대로 살아내면

우리는 안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히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도 역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지 않으면

주님을 뵙지 못합니다.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합니다.

 

히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우리는 죄사함은 한 순간에 받지만,

성화는 한 순간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사함은 한 순간에 받습니다. 법정적 선언으로 받죠.

물론 목욕한 자도, 발을 매일 씻어야죠.

 

하나님께서 ‘내가 네 과거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시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 process’입니다.

그것은 등산하는 것과 같고,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우리가 거룩함 sanctification을 좇지 않으면,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과 화평함을 좇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히12:14

 

우리가 모든 사람과 완벽하게 화평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열심히 ‘추구하는 pursue’ 것입니다.

 

비슷한 말씀인데요.

롬12:17~18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누군가 여러분에게 소리를 지르거든, 맞받아 소리치면 안 됩니다.

누군가 여러분의 뺨을 치거든, 맞받아 쳐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 여러분의 뜰에 쓰레기를 버리거든, 똑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누구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마세요.

 

누가 당신을 법정으로 끌고 간다면, 맞고소 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당신이나 자녀에 대해 거짓말을 퍼뜨린다고 해서

똑같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다 맡기십시오.

 

저는 주님을 이제까지 50년 이상 섬기고 있는데요.

그러니 아시다시피 저는 사탄의 타깃입니다.

 

그 사실이 저를 불안하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제가 사탄의 타겟이 된 것이 영광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종종 제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을 상대하지 말아라. 그를 내버려두라. 내가 그를 상대하겠다!’

‘네가 그를 상대하려느냐? 아니면 내가 상대해 줄까?’

저는 ‘아닙니다. 주님께서 상대해 주십시오!’ 라고 하죠.

 

▲사도바울을 가장 많이 괴롭힌 사람 중에

구리 세공업자인 알렉산더 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말했죠.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딤후4:14

 

‘주님이 그를 상대해 주십시오. 저는 그를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8절에 ‘할 수 있거든’ 이라고 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12:18

 

여러분, 이 구절이 ‘할 수 있거든 if possible’ 로 시작하는데,

‘할 수 있거든’이라고 신약에 나오는 거의 유일한 명령입니다.

다른 명령에서는 이같은 표현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할 수 있거든 화를 내지 말아라’

‘가능하면 음욕을 품지 말아라’

‘가능하면 진실을 말하라’ .. 이런 명령이 다른 곳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할 수 있거든 if possible’ 이라고 말씀한 것은,

이웃 사람과 화평을 도모하는 일은, 나혼자만 잘 해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게도 달려 있기 때문에, 화평이 가능할지/ 못할지.. 결과는 모르는 거죠.

그것이 ‘할 수 있거든 if possible’ 이라고 말씀한 이유입니다.

 

분노, 더러운 생각, 거짓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린 것입니다.

그것들은 다른 사람들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의 화목은, 나도 화목해야 하지만

그가 나와 화목하고자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게 달린 부분에서만큼은 가능한 if possible’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여러분의 측면에서는 항상 모든 사람과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가 화목을 원치 않으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와 싸우지 않을 수 있지만,

그가 여러분과 계속 싸우고 반목하기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래서 ‘때로는’ 모든 사람과 화목을 추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마주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집을 찾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이런 충고를 합니다. ‘그 집을 방문하지 마세요.

성경에는 모든 사람과 화목을 추구하라고 하셨기 때문이죠.’

분란이 벌어질 만한 곳으로, 일부러 찾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와 화목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과 화평을 추구하기 위해서

그의 집을 방문해서 교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럴 때가 있고, 그렇지 못할 때가 있는 거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귀신의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알세불

그때 예수님은 그들의 집을 찾아가셔서, ‘내가 귀신의 왕이 아닌 이유를 설명해 볼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에 대해 원한을 품지는 않으셨어요. 그들을 용서하시고는, 그들을 경고하셨죠.

‘조심해라. 심판 날에 너희가 한 말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과 화목을 추구하신 거죠.

 

예수님은 그들과 화목을 원하셨지만,

그들은 결코 예수님과 화목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 경우, 저는 늘 제 마음에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자들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을 때,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는 예수님께 대해 매우 화가 났을 거라 생각합니다.

왜냐면 대제사장이 화를 내며, 예수님을 붙잡아오라고 명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고를 보고, 베드로가 욱 해서 말고에게 칼을 휘둘렀죠.

이때 모든 사람들과 화평을 추구하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은, 말고의 귀를 만져, 도로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의 떨어진 귀를 다시 붙여주신 거죠.

 

제 생각인데, 말고는 그 이후로

더 이상 대제사장을 섬기지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예수님께 감화받은 그는, 아마 천국에서 우리가 만나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천국에서 베드로에게 감사하며 ‘당신이 내 귀를 잘랐기 때문에

내가 여기 올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안 나오지만, 상상입니다.

 

제가 감동받은 것은, 자기를 잡으러 온 자들 앞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베드로야,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

‘이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마시라고 주신 잔이다.

말고는 단지 그것을 가지고 온 것 뿐이다.

그는 배달부니 그에게 화를 내지 말아라’

 

‘이것은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온 잔이다. 나는 그 잔을 마시기 원하노라’

예수님의 태도는 이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와 화목하지 않고, 나를 붙잡으려 하지만

나는 그들과 화목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선을 행할 것이다.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도 선을 행할 것이다’

 

‘나는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다.

나는 나를 저주하는 자들을 위해서 축복하겠다’

 

저는 제 인생에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이런 말씀을 순종할 수 있나요?

그 누구도 당신을 저주하지 않으면

당신이 어떻게 저주하는 자를 축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나를 핍박, 저주하는 자들로 인해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당신을 악의적으로 이용한 사람들로 인해 감사하십시오.

그들을 위해 기도할 기회를, 당신은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당신의 원수들로 인해서 감사드리십시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할 기회를, 당신은 얻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제겐 많은 골칫거리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저를 괴롭힙니다.’

 

여러분, 당신은 그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는 만큼, 당신은 모든 사람들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롬12:17절과 마찬가지로, 19절에

‘절대로 never’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원수 갚음은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네가 나에게 이렇게 했어? 그럼 내가 쓴 맛을 좀 보여주지!’

그것은 불신자의 것입니다. 마귀의 자식들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지

우리는 그와 같이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직면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엄청난 위안이 있습니다.

고전10:13절 말씀과 같이, 모든 것을 제어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10:13

 

그리고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저 잭 푸닌도 제 때가 올 때까지 저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때가 되었을 때, 비로소 죽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라면,

여러분들은 당신의 때가 이르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롬8:28절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면

내가 복수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나에게 악한 일을 한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다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용서하고 반격하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 나라에서 승진하는 것입니다.

 

나는 직장에서, 나를 승진케 하는 사람에 대해서, 화를 낼 필요가 없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의롭게 판단하실 것을 믿는다면

내게 해코지 하는 사람에게 전혀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내가 똑같이 되갚아 주려 한다면... 그건 하나님을 안 믿는 행위이지요.

 

하나님은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내가 보복하리라’ 신32:35 vengeance is mine!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히10:30

   

하나님은 ‘내가 복수할지도 모르지..’ 라고 모호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보복하리라!’ 저는 성경에서 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그가 너를 아프게 했느냐? 네가 나서서 복수하지 말라.

그에게 악한 일이 있기를 바라지 말라.

그를 위해 기도하라. 그를 축복하라!’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런 일을 행하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가 나에게 행한 일을 갚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말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반드시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토록 독실했던 사도바울이

딤후4:14절에서 한 말을 보십시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구리 장색 알렉산더, 그의 출신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아마 유대인이며, 타락한 기독교인 이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때로는 매를 맞고, 옥에 갇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입은 해는, 작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한 번이 아니라, 내게 해를 많이 입혔다고 했습니다.

저는 사도바울이 그를 용서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성령에 감화되어, 바울은 ‘(언젠가) 주께서

그에게, 그가 행한대로 갚으시니리’ 라고 말씀합니다. 딤후4:14

 

그렇습니다. 바울은 깨끗이 그를 자기 마음에서 용서했지만

하나님은 그 알렉산더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리스도로서 재림하실 때

예수님을 죽인 그 사람들은 반드시 갚음을 받고,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셨다고, 그들이 천국에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수평적 차원에서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적 차원에서 말이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면, 그는 수평적 차원에서 용서는 받겠지만

수직적 차원에서 하나님께도 용서를 받으려면, 그는 회개해야 합니다.

아니면, 내가 용서해 주어도, 그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처벌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히브리서 12장으로 돌아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12:14

 

저는 이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화평의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와도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인도의 오토바이 택시 운전수들과도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제 말은 바가지를 써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건으로, 노동자들과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그럽고 관대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말다툼에도 함부로 가세하지 마시고

길에서 행인과 어깨가 부딪혔다고, 그에게 화를 내지 마십시오.

이 모든 일에 더 화평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누구도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제 큰 열정은, 언젠가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 날에, 예수님이 저를 알아 주시는 것입니다. 히12:14

 

여러분도 예수님을 그 날에 뵙기 원하신다면

오늘날 주위 모든 사람들과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 그 사람의 사정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은, 그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이것이 그를 꼭 방문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를 찾아가 교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용서는 교제와 다른 것이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셨지만, 소수의 사람들과만 교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셨지만,

소수의 사람들과만 교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극소수의 사람들과만 교제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 용서하셨죠.

그들이 용서를 받아들이든지/ 안 받아들이든지에 불구하고요.

 

이것이 제 관점입니다.

저도 매우 소수의 사람들과 교제를 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충성된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사람들을 다 용서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는 하나님 앞에서 제 양심이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 인생에서 어떤 종류의 해를 끼친 사람에게도

제 마음속에 그 어떤 악한 것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런 제 양심을 깨끗이 유지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기 원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옳은 일이고, 그것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P2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