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14, 23 시50:1~23 여러 설교 정리
오늘 본문의 표제어는 <아삽의 시>입니다. 주1)
오늘 본문은 제사의 형식만 갖추고, 진정한 감사와 찬송이 없는 제사,
곧 내면적인 준비가 없는 제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책망하며,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재판장 하나님의 입장 (1~6절)
1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1절,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성경에
하나님의 이름을 3번 연속해서 쓰고 있습니다.
'엘 - 엘로힘 - 야웨' 입니다.
NASB 영어성경이 원어 그대로 번역했습니다.
The Mighty One(엘), God (엘로힘), the LORD(야웨), has spoken..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세 번이나 언급한 것은, 그 말씀하신 내용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즉 시50편 본문의 내용이 아주 중요하기에, '엘 - 엘로힘 - 야웨'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세 번 연속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다음 구절과 연결하면,
그 중요한 내용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다 말씀하신다는 거죠.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해 돋는 데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이니 세상의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4절에서는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불러]”라고 말하는데,
이 역시 하늘과 땅을 부르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증인들을 불러 모으시는 것입니다.
2~3절은 그렇게 증인들이 모인 곳에, 하나님께서 장엄하게 임재하십니다.
2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3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예루살렘을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이라고 합니다.
‘온전히’는 ‘완전한, 완벽한’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도시가 아닙니다. 숲도 별로 없는 광야와 같은 곳입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언덕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그곳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곳이 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기로 약속하시고, 언약을 두신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으로 인해서 그곳이 온전히 아름다운 곳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은 모두 온전한 아름다운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일터 등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온전히 인정이 되는 곳이라면,
그곳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으로 인해서 아름다운 곳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해 돋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1
온 세상을 불러 모으신 이유를 4~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의 내용과 태도에 대해서 판결(:4)을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4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4
하나님이 임재하신 이유는 판결, 재판하시려고.. 입니다.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4
하늘과 땅은 이 판결에 있어서 중요한 증인입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몇 번이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아
언약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그 증인들을 불러 세우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피고들을 부르십니다. :5
5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하나님은 피고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이들은 “성도들”입니다.
언약 백성들입니다,
6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셀라)
그리고 마침내 재판관이 입장합니다. :6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재판관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 백성을 판결하실 것입니다.
판결의 내용이 그들에게 호의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에게 어떤 판결을 내리실 것인가요?
이 판결은 백성들의 제사(예배)에 관한 것입니다.
◑첫번째 재판장의 판결 : 그들의 예배에 대하여 (7~15절)
7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8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번제가 하나님 앞에 항상 있다고 하는 것은
매일 드리는 ‘상번제’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제물 때문에 책망하지 않으시겠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드린 제물에는 소홀함이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드린 제사가 온전하였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제사에 다른 문제가 있었음을 돌려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제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제물로 드린 짐승도 온전한 것이었고, 그 짐승으로 매일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11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9~13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제물이 온전한 것이었어도
그것을 받고서 좋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 있는 수소나 그들의 짐승,
우리에 있는 숫염소를 갖고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성경에는 10절 앞에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숲 속의 뭇 짐승들과 산 속의 가축들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영이시며,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들처럼 주리는 일이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청하지 않는 것은
모든 짐승들의 소유주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세상의 있는 모든 짐승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제대로 된 짐승으로 제물을 드릴 지라도
그것 자체로는 바른 제사(예배)가 되지 못하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의무감에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이런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삶에서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다가
때가 되면 그저 기계적으로 반복적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을 그저 우리의 예배만 기다리고 계시는 분인 것처럼 만듭니다.
정말 그런가요? 사실은 정확히 반대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예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한 주석가는 이렇게 말했죠. “우리가 아무 것도 드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우리는 예배하지 않으면 온전한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형식적으로만 드려지는 예배는, 전혀 그 반대의 사실을 주장합니다.
마치 하나님은 예배를 절실히 받으시길 원하는 것 같고, 우리는 예배가 필요 없는 것처럼요!
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감사’로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뒤집어서 말씀을 드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은 짐승으로 제물을 드리기는 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감사함이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혹 선물을 받으셨는데, 그 선물이 값비싼 것이기는 하지만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적이 있으십니까?
나와 좋은 관계에 있지 않는 사람, 내가 관심도 없는 사람,
더 나아가 내가 말을 섞기도 싫은 사람으로부터 선물을 받게 되면,
그것이 아무리 값비싸고, 아무리 구하기가 쉽지 않을지라도
쳐다보기도 싫고 불쾌하기만 할 것입니다.
반면에 나와 좋은 관계에 있는 사람, 내가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으로부터는
꽃 한 송이만 받아도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집니다.
아니 아무 것을 받지 않아도 좋기만 합니다.
‘감사’란 단어는 ‘찬송’으로도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감사와 찬송은 동의어와 같습니다.
우리의 입에서 감사가 나오고, 찬송이 흐르는 때는
지금의 나의 상황과 삶의 자리가 눈에 보기에 좋아 보이든 그렇지 않든지 간에,
여기까지 나를 인도해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나를 머물게 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수용이 되면, 그 때에 감사와 찬송이 울려나오게 됩니다.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그런데 이렇게 예배를 등한시 하는 삶을 살면.. 환난이나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 말은, 예배를 드린다는 뜻이니다.
창세기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했는데, 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성도가 어려움을 당해서 예배할 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은 성도를 어려움에서 건져주시고, 그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두번째 재판장의 판결 – 그들의 외식적 삶에 대하여 (16~21절)
공예배가 올바르게 드려지려면, 평소에 삶이 예배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주일 예배 분위기가 싸늘하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목회자 탓일까요, 성가대 탓일까요, 교회 전통 탓일까요?
대부분 전문가들은 이렇게 진단합니다. '성도들의 주중의 평소 삶이 예배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
예를 들면, '젖은 담요'(미국식 표현)들이 잔뜩 교회에 모여 있으니,
그 예배가 더 분위기가 싸늘하고, 냉랭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시편기자도 그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평소에 '외식적인 삶'을 살면서,
성전에 나와서 거룩한 예배를 드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제사가 될 뿐이라는 거죠.
오늘날 우리에게도 준엄한 경고가 됩니다.
일례로, 어떤 설교자는, 예배 때 입는 양복은 평소에 다른 곳에 절대 입고 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과거에 한국의 어떤 성도들은, 헌금을 드릴 때 지폐를 다리미로 다려서 드렸습니다.
불필요한 형식 같지만, 예배를 그만큼 구별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그런 정성과 마음자세를 받으실 것입니다.
21~22절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예배를 제멋대로 드리고, 하나님을 잊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사용된 형상은 '먹이를 찢는 사자나 이와 유사한 짐승의 형상'입니다.
더욱이 이 심판에서 이 사람들을 구원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건질 자 없으리라'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에 대한 열성과 사랑이 없는 외적인 행위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저 하나님을 입에 담는 일과를 하고 있는데도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표준에 맞지 않을 때
주님은 심판으로 우리를 (사자가 먹잇감을 찢듯이) 찢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러한 명백한 불순종을 할 때, 우리는 언약의 축복이 아니라, 언약의 저주 조항에 의해서
그런 결과가 초래되는 것입니다. *신28:16~끝절, 레위기26장 등
16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17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18 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
19 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20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16~21절, 공부하기 싫은 학생은 방과 후에 집으로 돌아와 자기 가방을 뒤로 휙 던지고,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 던지고는,
도둑들과 친구가 되고, 간음하는 사람들과 한통속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 재산을 부풀리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벌였고,
자기 욕망을 채우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예배의 생활화도 형식적이었고,
생활의 예배화는 흔적도 없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 제물을 좋은 것으로 드렸으니, 더 이상 내 생활에 간섭하지 마세요.
그러면 다음번에도 좋은 짐승으로 제물을 드릴테니까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죄악된 행동을 묘사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직접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살인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이들이 ‘이런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어요.
어쩌면 겉으로 볼 때, 이들은 이런 일들과 거리가 멀어 보였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도둑질이나 간음을 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원색적인 비방의 말이나 거짓을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실제로 이런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둑이었고, 간음하고 있는 자였고, 형제를 비방하는 자, 살인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21절과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21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그들의 죄는 표면적으로는 가려져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죠.
심지어 하나님도 당장은 잠잠하셨습니다. 이것을 그들은 “괜찮다”는 신호로 받아들였죠.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과 같은 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면.. 하나님의 침묵을 절대 그렇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뻔뻔하게 하나님을 오해하고, 죄악된 삶을 사는 중에 예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가 크며, 그 죄를 드러내실 것이라 경고하십니다.
아마 사람들 앞에서 “거룩해 보이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이것은 가장 무서운 경고의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재판장의 권고 (22~23절)
2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이들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섬긴다고 말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잊은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뒤로 던진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그들의 앞에 두고
그들이 미워하던 하나님을 교훈을 사랑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찢으실 것이고
누구도 그런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들을 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만이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23절)
다시 한 번 14절의 명령이 반복됩니다.
진실된 감사의 제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합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들의 고백 뿐 아니라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삶이어야 합니다.
완벽할 수 없는 삶인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어찌되었든) 실패할 것을 알기에 하나님은 제사라는 의식을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나올 길도 마련해 두셨습니다. :15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려는 진실된 마음이고
그런 마음의 결과로서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그것은 하나님께로 우리를 더욱 가까이 이끕니다.
성공은 감사와 기쁨의 예배를 드리게 할 것이며,
실패는 낮아짐과 은혜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
이 모든 삶과 공적인 예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합니다. :14, :23
15절에서는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고,
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은 환난 날에 부르짖는 것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삶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지 제사를 드렸다 정도로 끝나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깊이 관여하고 계시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인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첫 번째 목적이 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하고, 업적을 남기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환난 속에 있어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과, 내가 가지고 누리고 있는 것이
내 능력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께서 해 주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감사의 고백이 있는 사람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좋은 제물로 예배를 드렸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 던지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은
자기 웅덩이에 빠져 인생이 썩어 가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며, 감사로 제사(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생명의 빛을 발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늘 하나님을 부르며, 감사로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사는 자녀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주1)
시편 150편 중에 12편이 아삽이 기록한 시편입니다.
73편을 기록한 다윗 다음으로 많은 시를 지었습니다.
그것은 아삽이 뛰어난 시인이자 음악가였음을 말하여 줍니다.
다윗왕과 솔로몬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아삽은 헤만, 여두둔과 더불어
3명의 찬양대 인도자(악장) 중의 한명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선견자(대하 29:30)로도 불린 것으로 보아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역시 깊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는 오늘날로 하면 찬양대 지휘자 겸 찬양담당 목회자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아삽이 기록한 시편 12편 중에 1편만 제2권에 있고, *오늘 본문 시50편
나머지 11편은 제3권인 73~83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