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광아 깰지어다! :8 시57:1~11 여러 설교 정리
다윗은 사울 왕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장군의 지위를 빼앗겼고, 가정을 빼앗겼고, 제사장에게 갈 수도 없었고,
친구들도 곁에서 대거 사라졌습니다.
얼마나 사람이 급했으면 적국인 블레셋으로 도망을 갔을까요?
적진인 블레셋에 위장 도피도 했었지만
침을 흘리고 미친 척하고서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시56편)
이제 다윗에게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다윗은 광야를 향해 발길을 돌렸습니다.
조금 전까지 살던 궁전과 비교할 수 없는 곳입니다.
뜨거운 열기와 빗줄기, 모래 폭풍과 우박이
시도 때도 없이 사방에서 불어 닥치는 곳입니다.
표제어에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의 추격으로부터 피해 다닐 때에 숨었던 동굴 중에서 성경에
2개의 굴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사무엘상 22장의 아둘람 지역에 있던 굴이고,
또 하나는 사무엘상 24장의 엔게디 광야에 있던 굴입니다.
본문 시57편은, 그 중에서 아마 상황이 아둘람보다 더 절박했던,
그러면서도 신앙인의 위엄을 잃지 않았던
엔게디 광야의 굴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한참을 헤매던 다윗은 저 너머로 사해가 보이는 엔게디의 한 동굴에 들어가서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곳이 엔게디 굴입니다.
햇볕이 들지 않고 조용하며 안전하였습니다.
어두컴컴한 굴 속에 앉아 있는 다윗을 그려 보십시오.
세상천지 어디에도 갈 데가 없습니다. 광야의 굴속으로 은신처를 마련했습니다.
누웠던 다윗이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바닥에 대고
기도를 시작했을 때 눈물이 쏟아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울며 기도하다가 다윗의 마음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기억해 냈습니다. 들판에서 홀로 양을 칠 때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외롭게 버려지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함을 알았습니다.
그 때 드린 기도가 본문 시편 57편입니다.
◑동굴 속에서 드리는 절박한 기도 (1~6절)
1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굴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굴이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피난처는, 엔게디 굴이 아니라, 사실은 '주의 날개 그늘 아래'였습니다. :1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 속에 있었습니다.
주님께 대피하면 절망은 사라진다는 믿음이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출구가 꽉 막힌 것처럼 보이지만, 다윗은 길이 보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재난상황이 오면 절대로 정신줄을 놓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일상이 부서지는 상황을 재난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중대질병이 찾아옵니다. 재난입니다.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일이 터집니다. 그게 재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믿음으로 재난상황을 대비해야 합니다.
다윗은 대피훈련 많이 했습니다. 기도로 재난을 극복하는 훈련입니다.
우리도 평소에 기도로 대피훈련을 해놔야, 재난이 왔을 때 능히 피할 수 있습니다.
2 내가 지극히 놓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로다
다윗은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원문에는 '모든 것을'이 없습니다. 목적어가 빠져있습니다.
그냥 '나를 위해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죠. '모든 것을'은 번역자가 만들어 넣은 것이죠.
그래서 새번역은 '나를 위하여 (복수해 주시는) 하나님께'
현대인의 성경, NIV는 '그는 나를 위해 (자기 뜻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개역, KJV, NASB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문에 빠진 목적어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본문에 나타나 있는 '나를 위해'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기초입니다.
위기를 겪을 때, 사람들은 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악화될 때에는 희망을 갖는 것이 사치가 됩니다.
그때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나를 위해' 뭔가를 해 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이 피한 엔게디 굴에는, 다윗을 따르는 용사들도 거기에 같이 있었습니다.
왜 엔게디 굴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사람들입니까?
나를 위해 뭔가를 해 주시는 하나님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2
다윗과 그들 용사들은 자신의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에 눈이 떠지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교인은, 누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자녀입니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다시 딛고 일어섭니다. 엔게디 굴 사람처럼 말입니다.
3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인자와 진리'
인자는 헤세드, 언약적인 사랑 즉 변치 않는 사랑을 뜻합니다. *헤세드
진리는, 진리의 말씀을 뜻하는 게 아니라, 진실로 사랑한다는 뜻인데, *에메트, 에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난하나 부하나.. 어떤 여건과 환경에 상관없이 끝까지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둘 다 '사랑'인데, 끝까지 변치 않고, 흔들리지 않고 사랑함을 뜻하는데,
다윗이 역경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그 인자와 진리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이었죠.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확신하면, 군대에 가거나, 해외유학을 가거나 흔들리지 않고,
부부가 서로의 사랑을 확신하면, 해외 출장을 가거나, 지방에서 주말부부로 살아도.. 서로 흔들리지 않죠.
다윗이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의 사랑'을 확신함으로, 현실의 난관을 넉넉히 이기고 나가는 것입니다.
비록 외적인 환경은 흔들릴지 모르나, 내면은 평안한 것입니다.
10절에 '인자와 진리'가 또 나옵니다. 시편에 계속 나옵니다.
피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복음성가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할 때, 인자죠.
그리고 2절은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또는 성실하심이) 진실 truth, 성실 faithful.. 이 둘은 같은 뜻입니다.
인자는 .. 신사임당처럼 온화하고 인자한 성품 할 때의 '인자'가 아닙니다.
어질 '인'자를 쓰는 '어질고 인자한 사람'이 아니고, 이것은 헤세드인데, 신약적으론 아가페이죠.
진리 truth는 .. '에메트'인데, 시편의 다른 구절에 '성실 faithful, 에무나'로 나올 때가 있는데,
진리(에메트)나 성실(에메트)이 같은 의미, 같은 뜻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끈질긴 사랑, 인내하는 사랑을 뜻합니다.
여자가 불성실해도, 남자가 끝까지 참고 끌고나가는 의미로 '진실하다, 성실하다'고 하는 거죠.
다윗이 많은 위기를 겪어도, 늘 웃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토브)과 인자하심(헤세드)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시23:6
4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쫓겨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한 사람만 나를 쫓아와도, 상황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그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자기를 뒤쫓고 있습니다.
그 군대는 최고의 정예병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마치 '사자'와 같습니다. :4
그리고 '불 가운데 누웠다'는 '사방의 불길 가운데 처했다'는 뜻인데,
사면초가인데, 그 사면이 산불이나 들불 같은 불길인 것입니다. 도저히 빠져나가기 어렵다는 뜻이죠.
원수들의 추격을 받고 어려움을 당할 때, 사람들은 어려움을 피하는 데만 급급해합니다.
정신이 없습니다. 도망가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피하는 것과, 도망가는 것은 다릅니다.
도망간다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도망가면 더 큰 어려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도망자는 불안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현실의 문제에서 빨리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피할 길을 스스로 찾으려고 합니다. 쫓기듯 살아갑니다.
다윗이 정신없이 피하다 보니 나중에는 블레셋 땅에 가서 죽을 뻔했습니다.
다윗은 미친 체하여 그곳에서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시56편)
그때 다윗은 도망자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도망갔다가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시편 57편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로 피했습니다.
다윗은 어려움을 피해 다녔습니다. 굴은 은신처, 피난처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피난처를 만나기 전까지 삶은 불안정합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1
살다 보면 누구나 어려움을 겪습니다. 어려움이 왔을 때, 도망가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피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피하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기도로 평소에 (대피) 훈련이 필요합니다.
5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께 피한 사람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신자는 예배에 살고 예배에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려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사43:21
예배가 깨어질 때, 사람은 불행해집니다.
사탄은 우리의 예배를 방해합니다. 예배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것을 예배하게 합니다.
예배를 통해 구원 받습니다. 모든 것이 예배에서 시작합니다.
예배에 실패할 때, 모든 것이 실패합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지 않을 때, 모든 문제가 시작됩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우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힘들 때, 하나님의 위로를 구하기 전에 예배를 온전히 드리시기 바랍니다.
두렵고 용기가 생기지 않을 때,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예배를 온전히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용기가 저절로 생길 것입니다. 두려움이 떠날 것입니다.
불안이 사라질 것입니다. 자신감이 생길 것입니다. 담대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께 피한 사람입니다.
6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그렇습니다. 이것은 자연법칙이자, 성경에 나오는 법칙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대접한 대로 대접 받는 법이고,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하는 것입니다.
웅덩이를 파는 사람은, 그 웅덩이에 자기가 빠지는 것입니다.
◑ 반전,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7~11절)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7~11절에 보면,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다윗은 예배하다가 (5절) 큰 은혜를 받았나 봅니다.
밤새 절망 중에 누워있던 다윗이, 새로운 희망의 아침을 바라고 있습니다.
7절에서 다윗은 ‘확정 fixed’이라는 단어를 2회 거듭 사용했습니다. 강조의 의미입니다.
'마음이 확정되었다'는 뜻은,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자신이 대처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흔들리지 않겠다는 거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불안한 것은, 자기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표정도 불안함이 역력해 보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확정된 사람은, 비록 사형수라 하더라도, 표정이 덤덤합니다. 천국 소망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김 자신의 감정 상태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8절로 이어집니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내 영광이여 깰지어다'
다윗은 새벽을 깨우기 전에, 먼저 자기 영광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내 영광'이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입니다.
야곱도 '내 영광'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죠. 창49:6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럽고 탁월한 부분입니다.
진정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의 숨결(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래서 자신이 '영광스런 존재'임을 인식합니다.
즉 영광스러운 능력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거룩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반사하는 자로서 가지는 영광입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거듭난 사람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고전11: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이것은 때때로 성도들에게 있어서 잠자고 있기에.. 깨워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휴면 상태'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을 때, 다시 일깨우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속이 이미 있는 것, 잠자는 것을.. 새롭게 일깨우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이 그랬습니다. 그는 큰 환난을 겪었고 그의 영혼은 엎드러졌습니다.
그는 다시금 은혜를 받고서, 스스로 '일인 부흥회'를 가져서, 영적으로 활성화 된 것입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새벽은 누가 깨우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면 때가 되면 새벽은 어김없이 옵니다.
다윗이 깨우겠다는 새벽은 그 새벽이 아닙니다. 영혼의 새벽입니다.
그의 영광이 깨어난 시간이, 새벽이었습니다. 그는 비파와 수금을 들었습니다. :8
(귀로 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손으로 잡았다는 뜻입니다.)
새벽에 고요한 시간에, 그는 찬양하고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그래서 또한 '새벽을 깨운다'는 말은,
고요한 새벽시간을, 비파와 수금의 찬양으로 요란하게 만들었다는 뜻이죠.
김진홍 목사님은 '새벽을 깨우리로다' 라는 주제로 유명한 설교를 하셨지요.
이 구절을 영적으로 해석해서 '암울한 시대를 깨우는 비전을, 다윗이 아둘람에서 받았다'고 풀었습니다.
당시는 사울왕 치하에서, 하나님을 떠난 왕이 다스리니, 나라가 잘 돌아갈 리 없었지요.
그런 암흑의 시대를 깨우리라.. 새 시대의 새벽을 열게 하리라.. 라는 비전을,
다윗이 아둘람 동굴에서 새벽에 기도하다가 받았다는 것입니다. *더 자세히 보시려면 -클릭-
그렇게 다윗이 새벽을 깨울 수 있었던 이유는,
먼저 그에게 '내 영광이 깨어나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다윗을 깨운 것이 아니라, 다윗이 새벽을 깨웠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다윗이 찬양하고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기약 없는 도망자의 세월에
새벽부터 일어나서 악기까지 들고 찬양할 일이 뭐가 있냐는 것이죠.
다윗이 여기서 생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9~11절
자신의 인생의 우선순위가 명확하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지금 유대광야에 있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놀라운 찬양들을 했어요.
9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1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울 왕이 왜 불행했습니까? 다윗만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을 주목했습니다. 여기에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내가 무엇을 주목하는가가 인생을 결정합니다.
이 감사는 눈물 없이 나올 수 없는 감사입니다.
다윗의 심령 안에 진정한 감사의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삶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눈물의 감사가 터질 때 삶이 변화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삶은 변화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게 됩니다.
다윗만이 아닙니다. 역사 이래로 성령에 의하여 눈물의 감사가 터지므로
말할 수 없는 파멸의 위기에서 놀라운 삶의 승리를 얻었던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모함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사람들이 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모함하는 사람들을 향해 칼을 들고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거침 없이 쏟아내지 않았습니다.
대신은 다윗은 하나님께 피하며,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다윗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찬양했습니다.
다윗은 하늘, 하나님께 집중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가고 있지만,
자신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어두운 동굴 안에서도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캄캄한 동굴 안에 있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치하시고 보호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문제에 휩싸이면, 문제가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은 작게 보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안고 뒹굽니다.
고통에 "집착"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나 작건 크건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여러 가지 육체적 질병으로 고생하기도 하고,
정신적으로도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더욱 난감해지는 것은,
왜 악인만이 아니라, 다윗같은 선인도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끔은 주위의 착한 사람들이 더 크고 많은 고통을 받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정말 공평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신가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3년 전 태풍 루사가 제가 생활하던 기도원을 덮친 사건을 겪었습니다.
홍수와 산사태가 나서, 제가 아끼던 책들과 물건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렸습니다.
복구 작업 하느라 허리도 고장이 나고, 몸도 많이 쇠약해졌습니다.
그때는 제가 ‘왜 하나님은 기도원도 구별 못하시고, 주의 종도 못 알아보시는가?’
하고 투덜거리기도 했습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저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하며 집착하면 할수록 더 큰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돈에 너무 집착하면
그가 겪는 고통은, 돈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크게 느낄 것입니다.
건강에 너무 집착하면,
조그마한 병에도 다른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이러한 집착은.. 우리의 주관적인 의식, 혹은 고정관념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이든 그것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따라, 달라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태풍도 아니요, 병도 아니요, 돈도 아니요, 건강도 아니요,
그에 대한 우리들의 고정관념입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지나친 관심과 집착)이 어떠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고통 대신에 주의 인자와 진리를 묵상하십시오!
'인자와 진리'에 대해선 3절에서 잠시 설명했습니다. 10절에 또 나옵니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0
혹자는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하늘은 무한대이고, 궁창은 한계가 있으므로,
그래서 주의 인자(헤세드)가, 주의 진리(에메트)보다 더 크다..
이렇게 해석하는데,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나
본절이 원래 의미하는 바는 '둘 다 엄청나게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비행기는 아무리 높아도 13킬로 아래서 다닌다고 합니다.
대기권은 4개의 층으로 형성되는데, 제일 낮은 것이 지상 100킬로 라고 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이 하늘만큼, 그만큼 크다는 뜻을 설명하는 중입니다.
그 높고 크신 '인자와 진실의 사랑'으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우리는 그 높이와 크기를 잘 모르는데, 다윗은 그걸 알았고, 바울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엡3:19
하나님이, 또한 그 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높은 분이신가를 알 때, 나와 나를 둘러싼 문제는 작아집니다.
하나님은 크십니다. 크신 하나님께만 우리가 충분히 숨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할 때, 내 문제는 작아집니다.
그러므로 내 문제의 크기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묵상하십시오!
다윗이 동굴에서 기도했듯이
우리가 기도할 때도, 문을 잠궈야 합니다.
사람이 많이 출입하고,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사람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고. 짐을 벗겨주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친구든 자식이든. 이웃이든. 누구든 우리에게 짐을 지울 뿐이지,
우리를 도와주실 이는, 모든 무거운 짐을 벗겨주실 이는, 우리 주님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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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시57편도 시56편과 같이 표제어가 3개가 붙어 있습니다.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표제어의 ‘믹담시’는 그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지만,
‘돌비에 새겨진 시편’, ‘황금의 시편’, ‘대속의 시편’ 등의 의미 중에서,
일반적으로는 돌비와 같은 곳에 새긴 시편을 뜻합니다.
또한 이 시편을 아주 중요하고도 가치 있게 여겼기 때문에 돌비에 새겼을 것이고,
황금과 같이 여겼을 것이고, 구원과 관련이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마치 중고등학교 시절에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만나면, 예쁘게 다시 써서 벽에 붙여 놓기도 하고,
코팅을 해서 책 속에 깨워 두기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그 시가 내게 다른 시와 다른 의미를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믹담시도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었을 것입니다.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는 운율의 표현인데,
알다스헷 운율은 시편에 57편, 58편, 59편, 75편 등 모두 4편이 있습니다.
그 의미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멸하지 마소서. 파괴 하지 마소서’라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자신의 힘들고도 처량한 처지를 외면하지도, 버리지도, 무너뜨리지도 마시고,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간곡하게 바라는 곡조로 생각됩니다.
본문시 57편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1a)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이것은 56편의 첫머리와 동일합니다.
그래서 시편 56편과 시편 57편이 닮은 점이 많다고 하여, ‘쌍둥이 시편’이라고 불립니다.
56편이 다윗이 사울왕의 칼을 피하여 블레셋의 가드 지방까지 갔는데
거기도 있을만한 곳 되지 못함을 확인하고, 미친척하여 성문에 글자를
아무렇게나 글자를 긁적거리고, 수염에 침을 흘리면서 도망 나와야 했던
처량함을 노래한 시편이라면,
57편은 다윗이 블레셋의 가드에서 도망 나와서 아둘람 지역의 굴에서
엔게디 황무지에 있는 굴까지 굴에서 굴로 전전해야 하는 서글픔을 노래한 시편입니다.
그래서 두 편이 모두 집이 아닌 광야에서 살 수 밖에 없었던 때를 노래했기에
쌍둥이 시편이라고 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