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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4장 43~52 배반의 키스

LNCK 2022. 4. 6. 14:56

◈배반의 키스            막14:43~52            2022.02.13.스크랩
 
◑악의 연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가 끝난 후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무리들에 의해
예수님이 체포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 제자들의 실패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배신과 도망치는 모습입니다.
 
본문에서는 가룟 유다를 ‘열둘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최측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기도를 끝내고 하산하실 때 무장한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체포 작전은 굉장히 조직적이고 신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막14: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누가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습니까? 그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룟 유다가 가세를 합니다.
악의 연대가 일어나고 있는 모습입니다.
 
막 14:10~11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의 배신에는 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
 
처음 가룟 유다의 배신은 마음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죄를 많이 짓습니다.
미워하기도 하고 욕을 하기도 하고 마음으로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마음먹은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습니다.
마음을 먹은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다릅니다.
 
좋지 않은 마음을 품었다가도 돌이키고 행동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행동하면 강을 건너버리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 생각을 가질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자마자 일어난 사건입니다.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자들과 함께
검과 몽치를 들고 들이닥쳤습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신 주님을 향해 다가온 것입니다.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밤을 보내실 때 이미 가룟 유다는 그 방을 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는 예수를 팔아넘기기 위해 적들과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날이 새기 전입니다. 어렴풋이 사람을 인식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시려는 주님 앞에 가룟 유다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입맞춤을 하게 됩니다.
 
제자로서 예수님께 입맞춤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입맞춤은 달랐습니다.
본문 44절을 보면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예수를 팔아넘기는 신호였습니다.
본문의 ‘입 맞추다’라는 헬라어를 보면 ‘필레오’라는 단어가 아닌 ‘카파 필레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냥 입맞춤이 아닌 강력한 입맞춤, 여러 번에 걸친 입맞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열정을 다해 애정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둠 속에서 예수인 것을 알리기 위해 오버액션을 한 것입니다.
 
▲가장 은혜로운 장소에서 가장 다정한 모습으로 위장한 배반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주님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 오른 동산입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과 함께 한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를 음모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있으면서 누렸던 것들이, 적들에게 넘겨줄 고급 정보로 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받지 않고 경험한 영적 세계의 사건들이
때로는 악의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본문 45절을 다시 보면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인류 역사에 가장 잔인하고 음흉한 배반의 키스입니다.
 
입맞춤이란 무엇입니까? 보편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포옹이나 악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깊은 신뢰를 주고받는 표현입니다.
 
잠시 예수님의 입장을 상상해 보십시오.
가룟 유다가 어두운 밤에 다가와서 눈을 마주쳤을 것 아닙니까?
오랜 세월 동안 제자와 스승의 관계였습니다.
 
가룟 유다가 미소를 띠며 주님께로 다가와 입맞춤하는 장면은 얼마나 섬찟한 장면입니까?
모든 일은 신속하게 진행됩니다.
 
입을 맞추는 순간에 사인이 전달되면서 체포 명령이 떨어집니다.
본문 46절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가슴이 떨리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이 장면에서 놀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참 악하다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의 찬 기도 속에는, 곧 일어날 가룟 유다의 배신도 염두 했을 것입니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제자의 배신은 가슴을 에는 아픔입니다.
열둘 중 하나의 배신이 주는 상처가 너무 큽니다.
 
가룟 유다의 뻔뻔함과 음흉함에서 철저한 이중성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이런 일까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가룟 유다는 드라마틱하게 배신을 했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배신하지는 않지만
일상 속에 다양한 형태로 예수님을 배신할 때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노골적으로 배신했지만, 우리는 교묘하게 주님을 배신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 예수를 모른 척하고 때로는 이용할 때도 있습니다.
 
돈 때문에 오랜 친구가 등을 돌립니다. 형제간에서도 등을 돌리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본문도 예수와 돈 사이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돈이 끼어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마26:5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향해 ‘친구여’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가능합니까?
상대는 배신의 칼을 들이댔는데 주님은 친구라고 했습니다.
상대는 변질될 대로 변질되었지만 주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는 것이 어떠냐에 따라 그대로 돌려줍니다.
상대가 원수 짓을 하면 원수이지 친구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동일하십니다. ‘친구여’라는 말에는
너는 나를 배반해도 나는 너를 배반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들쑥날쑥하게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은 변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끝까지 사랑한다고 할 때 이 ‘끝까지’를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완전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초대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에 의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도
가룟 유다의 발을 가장 먼저 씻어주셨다고 합니다.
주님은 끝까지 가룟 유다를 챙기셨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충분히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편에서는 아픔이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사랑한 만큼 배신이 주는 고통인 더 큰 것입니다.
 
▲배신을 경험해 본 분이 계십니까?
인간이 당하는 아픔 가운데 가장 상위권에 있는 아픔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겪으셨을 고통은 우리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지금은 어떤 때입니까?
예수님에게는 가장 힘든 시간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환대와 지지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간입니다.
 
바로 그때 열둘 중의 하나가 예수님의 등에 칼을 꽂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향하여 친구라고 부르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 답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다가올 십자가 사건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배신과 도피극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간절한 기도로 승화시키어 내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의 힘을 느낍니다.
주님은 기도를 통해 다가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하셨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그리고 끝없는 용서입니다.
주님은 마음을 담아 가룟 유다를 향하여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원수를 사랑하셨습니다.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말씀뿐 아니라 그렇게 실천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늘 배반하고 배반하지만
주님은 배반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배신 이후입니다. 회복하면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순간적으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실수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오십보백보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넘어집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은 넘어짐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용서를 구하면 됩니다.
 
주님이 가룟 유다에게 끝까지 친구라고 부르신 것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마음을 전달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8-9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진짜 배반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사랑을 끝까지 외면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넘어지고 넘어집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고 기회를 다시 주십니다.
 
회개하면 삽니다. 지금도 돌이키면 삽니다.
이것이 가룟 유다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제자들의 실패는 계속됩니다.
본문 46-47절에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베드로가 돌출행동을 합니다. 대제사장 종의 귀를 잘라버린 것입니다.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입니다. 자칫하면 양쪽의 싸움으로 큰 충돌이 일어날 뻔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행동을 지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용기가 아닌 무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십자가와 정반대의 길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무협지 흉내를 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잘못된 열심이 문제입니다. 열심은 필요하지만
잘못된 열심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나쁩니다.
잘못된 열심은 하나님 나라의 걸림돌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적인 힘과 방법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영의 일을 육으로 감당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릇된 열심은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 뿐입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무모한 힘을 낭비하게 만듭니다. 사탄의 장난에 놀아나서는 안 됩니다.
사탄은 매우 간교하기에 손 하나 대지 않고 승리하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귀의 술수에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기도하심으로 영적 전쟁을 대비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도할 시간에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은 후유증이 금방 나타난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휘두르는 칼이 멋있는 게 아니라 칼집에 꽂혀 있는 칼이 더 멋있습니다.
 
세상의 나라는 칼을 휘둘러 세워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칼을 칼집에 꽂아두어 이루어 가는 나라입니다.
 
남의 귀를 자르고 목을 베어야 세워지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죽인 자리에 내가 올라서는 것은 혈과 육의 싸움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칼솜씨를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날카로운 칼일수록 숨겨야 합니다.
우리는 칼을 갈며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대신에 칼집을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칼을 갈면 결국 그 칼에 자신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베드로는 대제사장들이 보낸 군사들과 일전을 벌이고
자칫하면 죽을 뻔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칼과 몽치를 들고 온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요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주님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엄격하게 분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싸우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무능하기 때문입니까?
두려워하셨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가지신 힘을 철저히 감추셨다는 것입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명검일수록 칼집이 좋다고 합니다. 칼집에 꽂혀있지 않은 칼은 위험합니다.
내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가의 문제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을 담는 인격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칼이 실력이라면 칼집은 인격이라고 합니다.
인격에 뒷받침이 안 되는 실력은 흉기가 될 때가 많습니다.
절제되지 않은 힘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힘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따라 긍정 혹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가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자기가 쌓은 힘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짐승도 힘이 센 짐승들은 전부 동물원 신세가 되거나 멸종되었습니다.
 
사울 왕이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삼손도 그랬습니다. 힘이 너무 많아 자기 힘에 망하고 맙니다.
 
힘은 유혹입니다. 사탄은 너의 힘을 사용하라고 부추깁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칼을 휘두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힘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언제 칼을 쓰고 싶습니까?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이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주로 많이 쓰는 칼이 있습니다. 바로 혀입니다.
말로 사람들의 비수를 찌릅니다.
 
부부관계 안에서도 힘의 역학 구조가 날마다 작용합니다.
세상이 투쟁적이고 폭력적인 이유는 모두 힘 때문입니다.
 
주님과 베드로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칼을 휘두른 베드로와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적들이 내민 칼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정당한 권리마저도 철저히 절제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30년 동안은 조용히 칼집에 꽂혀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눅22:51절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엄격하게 정제된 절제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칼이 아닌 칼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어떤 힘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칼을 품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칼은 상대를 죽이는 칼이 아닌 자신을 겨눈 칼입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죽이려는 칼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칼이 나옵니다.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을 모리아 산의 정상 번제단에 올려놓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향해 칼을 듭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기 위해 치켜든 칼,
바로 그 칼은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든 칼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칼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칼을 갈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겨누고 있습니까?
 
칼을 가는 게 아닌 칼집에 넣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겟세마네 동산이 필요합니다.
칼을 칼집에 놓는 자리는 바로 기도의 자리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속에 당신의 모든 힘을 빼셨습니다.
 
주님은 묵묵히 끌려가시기로, 수모와 고통을 그대로 당하시기로 하셨습니다.
풍랑을 잠잠하게 하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능력의 모습을 지금은 볼 수 없습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육적인 힘을 계속 빼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나의 힘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서는 어떤 힘도 느낄 수 없습니다.
완전히 힘을 빼신 모습이 십자가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자들의 실패를 봅니다.
 
그들이 약했기에 실패했습니까? 그들의 실패의 핵심적인 요인은 기도의 실패입니다.
기도하지 않았기에 다가오는 시험에서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기도로 준비하셨습니다. 다가오는 시험에 힘으로 대응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 앞에 모든 것을 복종하기 위해 스스로 힘을 다 빼셨습니다.
 
요18:3~6절에는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모든 것을 맡기십니다.
힘의 충돌을 피하고 조금도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힘을 빼지 않으면
예기치 않은 순간에 육의 힘으로 칼을 쓰다가 망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모든 것은 이미 예언된 바로 돌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27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고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에 맡기셨습니다.
스가랴 13장 7절에는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목자를 친다는 것은 곧 십자가 사건을 의미합니다.
양들이 흩어진다는 것은 이제 각자 살길을 찾아 도망을 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과 제자들의 도망이 본문 속에 클로즈업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앞두고 모두 예수를 버렸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그리스도의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은 홀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게 있습니다.
인간의 처절한 실패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곁에서 사랑을 받고 돌봄을 받았던 그들이 넘어지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처절한 실패를 봅니다. 인간의 모습은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구원의 역사를 이룸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도망을 치지만 주님은 다시 찾아와 만나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배반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믿음의 길에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의 귀한 제자의 삶을 끝까지 걸어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