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패배에도 벌벌 떨었던 다윗 시60:1~12 여러 설교 정리
이 시의 배경에 대해서는 표제에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 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소금 골짜기에서 쳐서 1만2천 명을 죽인 때에>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 주변국과 정복 전쟁을 벌였습니다.
삼하 8장을 보면, 서쪽의 블레셋, 동쪽의 모압을 쳤고,
북쪽의 소바와 싸울 때는
다메섹의 아람 사람들이 소바와 연합해서 다윗을 대적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정복했고 13절에 따르면 남쪽의 에돔도 정복했습니다.
이 표제를 보면 다윗이 북쪽 전쟁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남쪽의 에돔이 유다를 침공했던 것 같아서,
북쪽에서는 다윗이 아람과 싸우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요압을 보내서 에돔을 막고 있는 상황입니다.
나중에 요압이 승리하고, 다윗에게 합류하게 됩니다.
사무엘하 8장은 다윗의 정복 전쟁을 요약해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삼하8:5~6 ‘다마스커스의 시리아 사람들이 소바 왕 하닷에셀을 도우려고 군대를 보내자,
다윗은 시리아 사람 이만 이천 명을 쳐죽이고,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 주둔군을 두니,
시리아도 다윗의 종이 되어 그에게 조공을 바쳤다.
다윗이 어느 곳으로 출전하든지, 주께서 그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다.’
이 시편의 표제도 그런 승리의 상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의 내용은 좀 의외입니다.
승리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아니라, 뭔가 비참한 패배를 당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내용으로 시가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탄식과 간구 (1~5절)
1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다윗이 에돔에 원정을 갔으나, 초전에 패배한 사실을 가리킵니다(왕상11:15, 16).
적의 공격으로 다윗의 군대가 사방으로 도망쳤던 사실을 뜻함이 분명합니다.
지금 다윗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다급하고 절박한지
1절에 연속하여 사용된 4개의 동사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4개의 동사는 ‘버렸다, 흩으셨다, 분노하셨다, 회복시키소서’입니다.
'분노하셨사오나'
이것은 다윗이 패전(敗戰)을 죄의 결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라고 간구합니다.
2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흔들림이니이다
'땅이 흔들림이니이다'
이는 다윗이 어느 곳으로 도망을 하더라도 안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암시를 통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간곡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이 구절도 무슨 지진 같은 자연현상을 뜻하는 게 아니라,
다윗이 지금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느끼는 극한 두려움
또는 그래서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봅니다.
1~3절의 문맥을 보더라도, 이렇게 해석하는게 맞습니다.
3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우리에게 마시게 하셨나이다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로...마시우셨나이야'
'포도주'는 즐거움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시75:8, 사51:17 등)
다윗과 그의 군대는 에돔군의 공격을 당하여 마치 술취한듯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승리에 익숙한 사람과 실패에 익숙한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승리에 익숙한 사람은 작은 실패에도 크게 충격을 받습니다.
하지만 패배에 익숙한 사람은 어떤 실패를 만나도 충격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덤덤합니다.
공부하기를 포기한 학생은, 낙제 점수를 받아도 그다지 큰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등은 한 개만 틀려도 큰 충격을 받고, 그 충격을 발판으로 해서 더 열심히 보완하고 노력합니다.
지금 본문의 다윗은, 전황이 한 번 나빠지는 것으로 인해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가 깨어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만큼 그가 늘 100점 맞고 있다가, 한 문제 틀리니까.. 지금 소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인 민감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작은 죄에도, 벌벌 떨 줄 아는, 다윗과 같은 용장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
다윗은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활을 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을 수 있도록
깃발을 흔들어 주시고
또 강한 주님의 손으로 붙들어 주시기를 구하며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다윗에게 '가시적인 깃발'을 주셨다고 보기 보다는
승리의 보장 혹은 약속을 주셨다(상징적인 깃발)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바로 이 같은 약속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에돔으로부터 구출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이기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
'주의 사랑하시는 자'
3절의 '주의 백성' 및 4절의 '주를 경외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다윗과 그 군대를 가리킨다.
'오른손'은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의 권능'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 (6~8절)
6~8절은, 현실의 위기 상황속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다가
받은 계시, 예언, 승리의 확신으로 봅니다.
6 하나님이 그의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여기서부터 다윗의 예언 시작)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내가 뛰놀리라'
여기서 '내가'를 하나님으로 볼 것이냐, 다윗으로 볼 것이냐.. 에 대한 해석아 나뉩니다.
여기서는 '다윗 자신'으로 해석합니다.
(그렇지만 주어를 '하나님'으로 해석해도, 결정적 차이는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대리자이니까요)
'내가 뛰놀리라'부터 6~9절까지 모두 '다윗'이 주어입니다.
승리에 따른 기쁨의 행동을 표현한 것입니다.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다윗은 하나님께 받은 계시로,
요단강을 중심으로 서쪽의 대표적인 지명인 세겜과 동쪽의 대표적인 지명인 숙곳을 언급하면서,
나누고 측량하겠다고 한 것은, 세겜과 숙곳을 하나님께 자기 기업으로 받았음을 확신합니다.
이 지역이 지금 에돔과의 전쟁에서 접전지에 속하나 봅니다.
다윗은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분배하여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7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6절과 마찬가지로 7절에서 다윗은 (받은 계시로) 다시 한번 더
요단 동쪽 땅 전부를 의미하는 ‘길르앗, 므낫세’와
요단 서쪽 땅 전부를 가리키는 ‘에브라임, 유다’를 언급하면서,
그 땅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이자, 하나님이 자기(다윗)에게 주신 기업임을 주장합니다.
다윗은 에브라임을 자기 투구로 삼고, 유다를 통치 지팡이 즉 지휘봉으로 삼겠다고 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가나안 땅 이스라엘 나라을 지킬 것을 다짐합니다.
기도하다가 하나님께 받은 계시로!
이와 함께 이스라엘 주위에 있는 적국인 모압, 에돔, 블레셋을 언급하면서
이들을 쳐서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게 하겠다고, 다윗은 선포(예언)합니다. :8
8 모압은 나의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나의 신발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로 말미암아 외치라 하셨도다
6~7절에서 팔레스틴 땅이 자신에 의해서 완전히 평정될 것에 대해 예언적으로 확신한 다윗은,
이제 본절에서는 팔레스틴 주변 땅도 그같이 정복될 것에 대하여 선포합니다.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목욕통'은 발을 씻는 데 사용되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발을 씻기는 일은 종이하는 것이었으므로(창 18:4;요 13:4, 5),
여기의 '목용통'은 종의 지위에 대한 상징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본 문구는 모압이 다윗에 의해서 정복되어(민 24:17;삼하 8:2),
종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을 말합니다. 다윗 때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요.
'에돔에는 내신을 던지리라'
'에돔' 족속이 다윗에 의해 정벌되어, 다윗이 신발을 두는 곳(신발장)이 되게 해서,
어쨌든 다윗이 에돔을 정벌하리라는 예언적 선포입니다.
'블레셋아 나로 말미암아 외치라'
'내가 블레셋을 격파하고, 승전가를 부르겠다' (새번역)
'블레셋을 쳐부수고 승전가를 부르리라' (공동번역)
본 시편의 표제에 '이 시의 배경에 대해서는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 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소금 골짜기에서 쳐서 1만2천 명을 죽인 때에>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윗은 지금, 에돔을 물리친 시점에, 그 승리에 감격해서
모압, 블레셋까지 다 물리치고, 나라를 견고히 할 것을.. 예언/선포/다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지금 아람(표제에 보면)과의 전쟁 중에
이스라엘 군대의 사기를 올리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갈 것임 (9~11절)
9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까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이것은, 자신의 무력함으로 인한 탄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서(11절) 자신을 결국 도우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누가 난공불락의 튼튼한 성벽을 갖춘 것 같은 에돔을 무너뜨리게 할 수 있을까?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미 다윗은 그 답을 압니다.
이 질문은 그 답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던진 수사의문입니다.
10절에서 다윗은 스스로 답합니다.
10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본절은 그 당시 다윗이 처해 있던 상황(1절)에 대한, 재 진술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비참상을 하나님께 알림으로써,
하나님의 도움이 신속히 나타나야 함을 강력히 호소합니다.
11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다윗이 전쟁의 승패가 완전히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믿었음을 보여줍니다(삼상 17:47).
사람은 아무런 필요가 없고, 사람의 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을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없는 사람의 구원은 헛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우셔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모든 확신 가운데 이렇게 결단합니다. 12절.
12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는 약간의 의역이다. 문자적으로는 “함께”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써, 우리는 용감하게 행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기력하게 가만히 앉아 있는 자들을 위해서는 일하지 아니하십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위해 대신 싸워주시리라는 믿음을 갖고
애써 최선을 다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감히 행하리니’
주권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다윗은 우리가 뭔가 하려고 하다가 패배했으니
이제 하나님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하실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겠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심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에 행합니다, 움직입니다.
◑적용
▲1.작은 패배에도 민감했던 장군 다윗
승리에 익숙한 사람과 실패에 익숙한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승리에 익숙한 사람은 작은 실패에도 크게 충격을 받습니다.
하지만 패배에 익숙한 사람은 어떤 실패를 만나도 충격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덤덤합니다.
공부하기를 포기한 학생은, 낙제 점수를 받아도 그다지 큰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등은 한 개만 틀려도 큰 충격을 받고, 그 충격을 발판으로 해서 더 열심히 보완하고 노력합니다.
본문 시편 60편에서, 작은 실패에 큰 충격을 받은 다윗의 모습을 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궁극적으로는 승리한 전쟁인데도, 다윗은 큰 소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호들갑을 마구 떠는 것 같습니다.
60:1~3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흔들림이니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우리에게 마시게 하셨나이다’
이와 같이 부대를 승리로 이끄는 다윗같은 백전불패의 장군은, 늘 영적인 민감함을 갖고 삽니다.
작은 전투에서 한 번 졌지만,
그는 1절에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다'고 야단입니다.
왜냐면 한 번 지면, 다음에 이길 수도 있지만, 두 번 질 가능성도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작은 실패가 찾아올 때, 민감한 성도는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가만히 멍청하게 있으면, 두 번 실패, 세 번 실패가 계속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경험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큰 실수가 있기 전에는, 앞서 작은 실수가 여러 번 있었다'
소위 '하인리히 법칙'이라고 하죠.
다윗이 민감한 것은, 바로 '하인리히 법칙' 때문입니다.
작은 패배가 계속 되면.. 결국 크게 패하고, 나라까지도 빼앗길 수 있음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3백용사를 뽑을 때도, '민감한 사람'을 뽑았다고 해석합니다.
작은 전투에도 패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 영적인 둔감한 사람은, 중요한 일에서 배제시키는 게 낫습니다.
▲2. 최후 승리를 바라보며, 오늘의 전투를 견디는 사람
그런데 믿음의 원리,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실패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고, 실패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창조주이자,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세상을 이긴 분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편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롬 8:31절에서 로마교인에게 담대하게 말하기를,
‘그런즉 이 일에 대 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러니까 바울 사도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대적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 존재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들이 시험을 당하여 쓰러지고, 싸워서 (잠시) 패배할 때가 있다는 것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삶의 현실적 당면 문제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회심하고 거듭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한 사람들인데,
물론 우리도 작은 실수, 작은 패배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투 combat 가 아니라, 전쟁 war 에서는 승리하죠.
다만 '승리'에 대한, 오늘날 우리의 관점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꼭 승진하고, 부자되고, 크게 확장하고, 몸이 건강해야.. 그게 승리인줄 압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도 바울도 패배한 성도이고, 심지어 예수님도 패배하셨고,
핍박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 모두가 다 배패한 성도인 셈이 됩니다.
우리는 승진하든지/ 못하든지
부자되든지/ 못 되든지
건강하든지/병들든지
사역이 크든지/작든지에 관계없이.. 얼마든지 승리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삶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오늘 영광 받고 계시고,
내 사역으로 인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선한 영향력이 미쳐지고 있으며,
건강하든지/병들든지 내 몸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면.. 그건 승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자유롭게 전도할 때나/감옥에서 편지를 쓸 때나.. 언제나 승리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승리한다는 증거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심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나에게 성령의 힘과 은혜를 공급해 주심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나에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약 성도의 승리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후6:8~10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3. 신앙에는 의지적 결단/순종/실천이 중요합니다.
12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하나님께서는 무기력하게 가만히 앉아 있는 자들을 위해서는 일하지 아니하십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위해 대신 싸워주시리라는 믿음을 갖고
애써 최선을 다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감히 행하리니’
주권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다윗은 우리가 뭔가 하려고 하다가 패배했으니
이제 하나님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하실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겠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심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에 행합니다, 움직입니다.
신앙에는 지/정/의 세 요소가 골고루 균형을 갖추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에 치우쳐, 신앙을 '공부'하는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이들이 치중하는 것은 '신앙과 성경을 올바로 알자, 바르게 알자'입니다.
감정에 치우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설교를 듣든지, 찬양을 부르든지, 기도를 하든지
자기 마음이 뜨거워져야 제대로 한 것 같고,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으면 뭔가 잘 못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지식과 감정에 치우치면서도 의지적 결단이 약하여
은혜를 많이 받아도, 행하지 않는/순종하지 않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들을 '모래 위에 짓는 집'이라고 혹평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12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이렇게 '행동하는 믿음, 순종하는 믿음, 의지적인 믿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약한 부분이거나, 많이 강조하지 않는 영역일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용감히 행해야'할 분야는 어디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