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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터전 시11:1~7 2014.02.09.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시11:3
◑세상의 모든 터전, 인간이 만든 터전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요즘 많이 쓰는 단어 중에 “테크, Tech”라는 말이 있습니다.
테크라는 말은 “테크롤로지, Technology”의 줄인 말로서 전문적인 과학기술을 말합니다.
현대인의 삶은 테크놀로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흔히 쓰는 냉장고, TV, 휴대폰 등 모든 것이 과학기술의 열매입니다.
과학기술 없는 삶을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서 거치지 않고 시간과 돈에까지 테크라는 말을 붙여
‘시테크, 재테크’라는 말을 등장시켰습니다.
시간도, 재산도 과학적으로 관리하여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교회 옆에 큰 건물 이름까지 테크노마트입니다.
테크놀로지라는 말은 단순히 과학 분야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런 이름 속에는 과학을 흔들리지 않는 터전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의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 기술을 흔들리지 않는 터전으로 믿고 있는 인간들을 비웃는 사건들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터전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지난 2011년에는 일본에서 쓰나미가 발생하여 사망과 실종자가 1만 9천명에 달했습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쓰나미라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고,
그런 대형 쓰나미 재해를 만난 적도 없었습니다.
혹시 영상으로 보신 분들은 지진과 함께 바다 물이 밀려오는데,
달려서 도망하는 사람보다 바닷물이 더 빨리 밀려왔습니다.
결국 달리는 자동차도, 뛰어가는 사람도 피하지 못하고
바닷물에 휩쓸려가는 끔찍한 공포를 보았습니다.
여기에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까지 유출되어 우리의 식탁을 즐겁게 하던 생선을
먹기도 꺼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에는 필리핀에 하이엔이라는 태풍이
건물 하나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인간이 쌓아놓은 터전을 싹쓸이해가 버렸습니다.
이때 사망자가 1만명이 넘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처처에 기근과 전쟁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조류 독감이 휩쓸고 있습니다.
옛날에 들어보지도 못한 용어입니다. 농림축산식품부 통계에 의하면
지난 8년간 실제로 조류독감에 걸린 오리와 닭은 121마리였는데,
도살 처분한 오리와 닭은 2천 5백만 마리가 된다고 합니다.
이 광명한 천지에 어처구니없는 대책이 최선의 대책이 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여기에서 한수 더 뜨고 있습니다. 철새를 조류독감 바이러스를 옮기는 주범으로
지목하여 철새 서식지에 방제 차량이 연신 소독약을 뿜어대고
헬기까지 동원하여 소독약을 뿌리고 있습니다.
수천 년 전부터 날아왔던 철새들이 조류독감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애꿎은 철새들이 불청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지난 주중에는 조류독감으로 닭을 출하하지 못한 농민이 자살하는 사태까지 일어났습니다.
과학기술의 덕분으로 백신 하나면 어떤 질병도 예방된다고 믿었던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있습니다.
테크 테크 심지어 테크노피아, 과학을 통한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세계관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과학을, 인간의 기술을 종교처럼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일련의 연속되는 사건을 보면서 “과학도 흔들린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이 흔들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흔들리지 않는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우리 사회도, 국가도, 가정도, 학교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흔들리지 말아야 할 우리네 인생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평생 다니던 직장에 어느 날 아침 출근했더니, 자기 책상은 간데없고 대기발령이 떨어져 있습니다.
평생 경영하던 사업이 어느 날 나와 관련도 없는 뉴스가 나오더니
제품이 창고에 쌓이기 시작하고 결국 도산하고 말기도 합니다.
평생 아픈 것을 모르고 살았는데 건강진단을 받다가 암이라는 판정을 듣기도 합니다.
내 인생의 산과 같이 나를 지켜주었던 부모님을 잃기도 하고,
내 인생의 버팀목이었던 가족을 잃기도 합니다. 내 평생 존경하면서 살았던 영적인 스승을
떠나보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견고할 줄만 알았던 인생의 터전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은 흔들리고, 흔들리다가 무너집니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실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옛날의 사람도 동일했습니다. 그게 인생살이입니다.
▲시대의 예언자라고 말할 수 있는 폴 틸리히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독일에서 루터교회의 목사로 섬기다가 유대인 학생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나치 정권에 의해 목사직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연합장로교 소속 유니온 신학교에 조직신학 교수로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더 영향력을 끼치신 분입니다.
대개 신학교 교수들은 설교를 잘 못합니다. 그래서 설교집을 내는 교수들도 참 드뭅니다.
이분은 특이하게도 1948년 설교집 한권을 출간했는데,
그 설교집 제목이 오늘 설교제목인 “흔들리는 터전”입니다.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문명의 한계를 보았고, 인간이 만든 문명은 흔들리고 있고,
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터전마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터전 삼지 않는 모든 것이 흔들린다고 예언적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여러분,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땅에 터전에 서 있는 저와 여러분은
흔들리고 싶지 않아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시편을 통해, 흔들리는 터전에서
어떻게 하면 요동치 않고 굳건하게 살 수 있을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흔들리다가 무너지는 인생은 다윗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다윗의 생애는 매우 견고해 보였습니다.
그가 베들레헴의 어린 목동일 때 당시 최고 대제사장 사무엘이 직접 찾아와
그에게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후 그는 골리앗을 이기고 화려하게 백성들 앞에 등장했습니다.
그는 떠오르는 태양과 같았습니다.
그는 군대 장군으로서 충실하게 직무를 수행했고, 백성들은 환호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노래가 민간에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사울 왕의 딸 미갈과 결혼하여 왕의 사위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의 목동이던 때와 비교하면 상상도 못할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부러웠겠습니까?
사울 왕은 비록 마음에 없는 말이기는 했지만,
“자네 밖에 없네. 자네가 골리앗을 물리쳐 주었기에 우리나라가 유지되지 않았나?
이제 내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면서, 내게 힘이 되어 주게...”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든든했겠지요. 그러나 다윗의 인생의 터는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그가 그렇게 사랑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섬겼던 왕이자 장인인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자객을 보냈습니다. 그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했고,
얼마 후 그의 아내 미갈도 다른 남자에게 시집 가 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하루살이 같은 목숨을 부지하면서 끝도 없는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13년의 세월을 찬 이슬을 맞으며 지명수배자 생활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성공한 것처럼 보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가장 비참한 지경에 떨어졌습니다.
그의 인생의 터가 무너진 것입니다.
▲여러분, 터가 무너질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요? 3절을 보십시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이 대목을 표준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이 마당에 의인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터가 무너지면 비록 그가 의인일지라도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정말 무기력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단 하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망하는 것뿐입니다.
어서 빨리 도망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살길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그것은 “어디로 도망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터가 무너질 때 어디로 피해야 할까요?
본문은 두 군데의 피난처를 제시합니다.
그 하나는 산입니다.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1
많은 사람들이 다윗에게 권한 피난처는 산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적에게 공격을 받을 때 집과 농토, 성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행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유황불로 무너질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산으로 도망했습니다. 복음서 말씀에도 마지막 날에 큰 환난이 날이
이르겠고, 환난을 피해 사람들이 ‘산으로 도망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두보는 안록산의 난을 만나 감옥에 갔습니다.
나라가 엉망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그의 심정을 노래한 시가 있는데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입니다.
나라는 망해서 엉망이 되었는데 산은 요동치 않고 제자리에 서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두보 역시 인간사의 극심한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순리에 따라 존재하는 산을, 인간의 피난처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나거나 어려운 일을 겪으면 산으로 들어갑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 몸 숨길 수 있는 곳을 찾는 인간의 심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산으로 도망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처사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새라면, 새처럼 날개가 달렸다면
높은 산으로 날아가서 우거진 숲에 은신하면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은 새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새처럼 날수도 없고, 새처럼 덩치도 작지 않아서 몸 술길 곳도 없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어떤 사람이 산으로 피하려 한다면
그는 자신을 새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자신에게 날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미 그의 날개는 꺾인 지 오래입니다.
아직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얼마나 연약한지 제대로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빗대어 산으로 도망하는 일은
새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짓이라고 풍자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1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산으로 가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사울 왕에게 쫓길 때 산으로 피신한 적이 많았습니다.
사무엘상 후반부를 보면 산과 들로 숨어 다니는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산은 다윗에게 피난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가 산으로 피하면 사울 왕도 산으로 그를 추격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삼상24:2절을 보면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코 산도 안전한 피난처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터가 다 무너진 다윗을 보호해준 피난처는 과연 어디였습니까?
그 피난처는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사울이 산에까지 추격해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삼상23: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사울이 매일 찾아도 하나님은 매일 다윗을 보호하셨습니다.
다윗은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의 품이다.
여호와 하나님 같은 피난처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는 마음을 정했습니다. 남은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하나님께 숨기로 했습니다. 망설이거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저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 피하십시오.
터가 무너질 때,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
여호와 하나님께 피신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께로 피합니까?
기도로 피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피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 등 뒤로 피하듯이, 그렇게 믿고 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피난처를 찾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고백하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 중에 “내 육신의 아버지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것은 저의 인생 경험에서 우러나는 고백입니다.
저의 아버지 46세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경영하시던 포목전이 불이 나서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에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 고향으로 낙향해서 살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아버지는 경제권을 잃었고, 다시 일어서질 못했습니다.
학비는 고사하고 먹고사는 것도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 회갑연을 열었는데,
머리를 빡빡 깎고 사진 속에 서 있는 제 모습을 보니 참 서글퍼 보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 쓴 일기장에 보면
“우리 아버지는 평생 무엇을 하며 사셨길래, 송곳 꽂을 땅 한 평도 남겨놓지 못하고,
남들 다 가는 대학은커녕, 고등학교 등록금도 내지 못하게 찢어지게 가난하게 사셨을까?”
무능한 아버지에 대한 서러움은, 하나님을 찾는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등록금이 없어 겨울방학 때마다 찹쌀떡 장사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그 덕분으로 목사하기에 좋은 목소리로 단련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때마다 제가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돈은 한 푼도 없는데 배짱은 더 좋아졌습니다.
단돈 1천 달러도 없는 사람이 유학을 꿈꾸고 있었는데,
섬기고 있던 교회에서 2년 반 동안 미국 신학교 등록금과
받던 생활비 50% 지원해 주어 공부했습니다.
돈만 지원해 주신 것이 아니라, 빚진 자의 마음도 주셨고,
누군가에 갚아야 하는 사명감도 주셨고, 제 인생 전체에 대한 감사함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을 공급해 주셨고,
넉넉한 피난처가 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참 피난처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고백하고 있고,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보다 더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것은 최 (호득) 목사 한 사람에게만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주를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난 날에 하나님께 피하라는 것입니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자기 의지 말고, 사람 의지 하지 말고,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참 피난처가 될 수 있을까요?
본문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계신 곳부터가 다릅니다.
여러분, 터가 무너져 내릴 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그 곳은 하늘입니다.
지진으로 터가 무너져도, 쓰나미가 와서 모든 것을 쓸어가도
하늘에 떠 있는 사람은 안전합니다. 그러므로 하늘로 피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늘은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11: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사람을 발을 디디고 있는 “터”와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터 위에 인생과 가정, 성공과 명예의 탑을 쌓습니다.
그런데 그 터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터가 무너지는 그 순간에도 하늘은 변함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실존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는데,
어떻게 날개도 없는 우리가 하늘에까지 날아오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로 날아가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그 손을 잡으면 우리는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손은 어디에 나타나 있습니까?
본문 4절은 매우 중요한 힌트를 줍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여기서 우리는 안심하게 됩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 계시다고만 되어 있다면, 우리는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란 구절이 먼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늘 보좌에만 계시지 않고, 이 땅에 있는 성전에도 계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너희의 터가 무너졌느냐?
어디로 피할지 몰라 망설이느냐? 내게로 오라. 와서 내 손을 잡으라.
내 손을 잡고자 하는 자는 내 성전으로 오라! 너희가 하늘로 올라올 수는 없지만,
성전에는 올 수 있지 않느냐? 성전에 와서 내 손을 잡으라.
내가 너희를 하늘로 끌어 올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성전으로 오십시오. 성전에서 하나님의 손을 잡으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능력의 오른손으로 우리를 하늘 보좌로 끌어올려 보호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은 어디입니까? 여기서 성전은 장소적 개념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겠지요.
그러나 여기서 성전은 장소가 아닌 영적 상황을 말씀합니다.
성전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릎을 꿇는 바로 그 곳입니다.
터가 무너져 당황하는 사람들이 하나님만이 자신의 피난처를 인줄 믿고
엎드려 경배하고 찬양하고 눈물로 기도하는 그 곳이 성전입니다.
결국 오늘 우리가 서 있눈 이 자리, 우리가 지금 예배하고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성전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엎드리면 거기가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간절히 하나님을 부르는 그 자리가 성전입니다.
예배자리, 기도자리입니다.
거기서 믿음의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손을 잡으시고, 그 손에 붙들려 터가 무너지더라도
걱정 없는 하늘 피난처로 새처럼 날아오른다는 말씀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 곳에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마치 유괴되어 고생하던 어린이가 아빠 엄마를 다시 만난 기쁨과 감격이 넘쳐날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기쁨을 7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7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좋아하십니다.
정직한 자가 그 얼굴을 뵙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일을 하지 못한 사람들,
정직하지 못한 죄인들은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쫓겨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 정직한 사람은 도덕적이고
율법적 개념이 아닙니다. 누가 의롭습니까? 누가 정직합니까?
터가 무너질 때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입니다.
자신은 새가 아님을 아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입니다.
산으로 피해도 산이 자신을 숨겨줄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나가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로 피하는 사람입니다. 즉 믿음의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요, 정직한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뵈옵는 영광은 믿음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다윗은 산으로 피하는 대신에, 여호와 하나님께로 피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를 생명싸개로 싸셔서 숨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피난처가 되시고, 피할 바위가 되시고, 구원의 뿔이 되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되길 원합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은 마지막 때가 되어갈수록
자신의 터를 과신하고,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터, 우리의 문명의 터전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더불어 나 자신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을 때 우리가 안연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
마치는 말
우리는 흔들리는 세상 속에 살고 있으면서 흔들리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들리는 것을 붙잡고 나의 삶이 요동치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명도 흔들리고, 사람도 흔들리고 당에 있는 모든 것은 흔들립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을 영원한 피난처로 삼고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