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배경 하박국 선지자가 첫번째 질문을 했던 내용은 남유다의 사회악을 보면서 '하나님 언제까지 징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라는 것이 었어요. 1:2~4
이에 대해서 하나님의 첫번째 응답은 '내가 바벨론을 일으켜서 남유다를 징계하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1:5~11
그러자 하나님이 주신 첫번째 응답에 대해서 반응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게 12절입니다. '주께서 심판을 위해 그들을 세우셨군요.'라는 말이었죠.
합1:12 '오 여호와여, 주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시지 않습니까? 내 하나님, 거룩하신 주여, 우리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오 여호와여, 주께서는 심판을 위해 그들을 세우셨습니다. 오 반석이시여, 주께서는 그들을 세워 벌하셨습니다.'
하박국이 바벨론의 이름을 들었을 때 신흥강국 바벨론에 대해서, 하박국이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박국이 예언하던 시점이 남유다 18대 여호야김 왕의 통치기로 보는데, 이때 신흥강국 바벨론이 이미 상당히 세력을 키웠을 때입니다.
여러분, 바벨론이 성경역사에서 언제 최초로 등장하느냐면 히스기와 왕이 죽을 위기에 처했었죠. 그런데 하나님께 간구해서 하나님이 그를 살려주시고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어요.
그때 바벨론의 축하사절들이 와서, 히스기야 왕이 그들에게 성전에 있는 보물창고, 왕궁의 내탕고를 다 보여주고 너무 신나서 자랑하니까 (내가 이래봐도 최강국 앗수르를 물리친 왕이요.. 우리 왕국이 그만큼 강하오.. 라는 자랑)
이제 하나님이 징계에 대한 말씀을 하셨죠. 그때가 하박국 예언 시기보다 60~70년 전입니다. 히스기아왕은 13대 왕입니다. 본문의 18대 여호야김 왕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흐른 것이죠.
그러니까 여호야김 왕 2년 차에 바벨론에 나보폴라살 (느부갓네살의 부친)이 수백 년 동안 중근동을 주름잡던 패권국가 앗수르에 반기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신바벨론 제국(성경의 바벨론 나라)을 창설하고 주변국들을 위협했던 것이죠.
◑그러면 하박국 선지자가 <두 번째 문제 제기>한 것은 무엇인가요?
합1:13 '주의 눈은 정결해서 죄악을 보시지 못하시고 죄악을 그냥 바라보시지 못하십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들을 파괴시키고 있는데 왜 반역자들을 조용히 바라보고만 계십니까?'
'바벨론이 남유다를 치게 하신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 이렇게 문제 제기를 한 것입니다.
'주께서는 정결하신 분인데 어떻게 죄악을 방관하시나요?' (개역)
그러니까 유다가 잘못을 했다고 해서 어떻게 유다보다 더 악한 바벨론이 유다를 치게 하시고 그것을 침묵하실 수 있느냐? ..는 문제 제기입니다. 이게 하박국의 두 번째 문제 제기이죠.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였다는 것은 알겠지만 하여간 하나님의 역사 경영에 대해서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하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하박국이란 그 이름 뜻 그대로 *'들러붙음' 하박국이 정말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자신의 마음에 있는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죠.
▲자 그래서 이제 하박국의 연약함이 여기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는데요.
첫번째는 자기가 하나님보다 의로운 줄 알았던 것이고요. '저런 남유다의 악인들을 징계하셔야죠.' .. 하면서 하나님의 통치가 못 미더워서 하나님을 한 수 가르치려 들었죠.
두 번째는, '아니 그렇게 남유다를 (바벨론을 통해) 쎄게 징계하시면 안 되시죠' 하나님을 너무 무자비한 분으로 보는 것이에요. 자기가 하나님보다 훨씬 너그럽다는 거죠. ..
이게 하박국의 두 번의 질문을 통해서 드러난 하박국의 연약함이었습니다.
'남유다가 잘못이 많으니까, 좀 혼내주셔야 되는거 아닙니까?' *1st 호소 이렇게 얘기했던 사람이
'그래도 그렇게까지 세게 혼내시면 안 되죠' *2nd 호소 또 이렇게 얘기해요.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두 가지가 다 불만인 거예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이 두 가지가 다 불만입니다.
하나님이 공의로 징계하고 심판하시면 하나님이 너무 무섭다고 불만이고,
하나님이 사랑으로 참고 기다려 주시면 하나님은 너무 물러 터진 분이라고 불만이에요.
자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 역할을 하면, 좀 속이 시원하고 만족이 될까요? 인간의 공의는, 하나님의 공의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솜방망이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비는, 하나님의 자비처럼 깊지 못하기 때문에 실개천같이 금방 말라버리게 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되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주 1강에서 나눴던 것처럼 하나님이 하박국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시고 또 자세하게 답변도 해주시는 것은
그 시대를 향한 하박국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이에요.
제가 밴구버에서 사역을 하면서, 교회가 막 처음에 부흥을 했어요. 다들 막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때 제가 좀 정색을 하고 리더십 모임에서 얘기했어요. '교회가 부흥한 게, 사람들이 자기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지 여러분이 한 영혼을 놓고 눈물 흘리면서 전도해서 데리고 오셨냐고'
'우리 교회 잘 된다, 우리 교회 잘 된다!' 여러분 온누리교회 안에서 예배드리면서 우리는 좋은 환경에서, 좋은 양육 시스템에서 예배드리니까 한국교회가 지금 얼마나 어려운지 잘 모릅니다. 한겨울로 들어서고 있죠.
그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냐는 거죠. 하박국은 그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고, 눈물이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공감하고 계셨던 거예요.
합1:14 '주께서는 사람을 바다의 물고기처럼 만드셨고
다스리는 이가 없는 기어다니는 생물처럼 만드셨습니다. 15. 그(바벨론)는 갈고리로 그들 모두를 낚아 올리고 그물로 끌어 올리며 어망 안에 모아 담고는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16 '그리고 (바벨론은) 자기 그물에다 제물을 바치고 자기 어망에다 분향을 합니다. 잡아들인 것이 많고 그들의 음식이 풍성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16절은 바벨론의 우상숭배죠. 잡아 들인 것이 많고, 그들의 음식이 풍성하게 됐기 때문에, 좋다고 자기 신에게 제사하는 겁니다.
17 '(하박국의 탄원) 이렇게 그들이 그물을 비우고 계속 무자비하게 민족들을 죽여도 됩니까?'
바벨론이 이렇게 중근동 나라들을, 마치 그물로 싹쓸이 하듯이 다 잡아들이고, 무자비하게 죽여도 되는 겁니까? .. 라는 하박국의 하소연이죠.
이렇게 합1:13~17(끝)절까지, 하박국의 두 번째 호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자신의 항변을 하나님께 이미 얘기 해놓고 나서도 하나님이 이해가 잘되시도록, 비유적으로 상황 설명을 또 한 것이에요. 그게 14~17절이에요.
'어부의 그물망에 걸리는 물고기 떼처럼 사람들이 걸리고 있다.' 바벨론 사람들이 그렇게 주변 민족들을 무자비하게 정벌하고 있다는 거죠.
여러분 사람을 물고기처럼 낚는다.. 이건 성경에서 좋은 뜻으로 쓰인 적이 있지만 *마4:19, 겔47:10 여기 합1장에서는 부정적 의미로 쓰였습니다. 무분별하게 사람을 낚아서 해치고 죽이는 의미이죠.
마치 오늘날도 법적으로 제한을 두는데도, 쌍끌이 어선을 동원해서 불법조업을 하고 어족 자원을 고갈시키는 것 같은 그런 짓을, 바벨론이 사람에 대해서 행하고 있다는 하박국의 두 번째 호소입니다.
앗수르 제국도 무자비한 것으로는 악명을 떨쳤던 제국입니다. 그런데 바벨론도 그에 못지않게 무자비하게 주변 민족들을 정벌한다는 것이죠.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수목이든지, 생명 가진 것은 모조리 다 죽이는 초토화 정복전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들인 인간이, 마치 물고기 떼처럼 싹쓸이로 죽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쟁이 벌어지면, 인권이라는 것은 뭐 주장할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하박국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소연하는 것이죠. '하나님,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들이 이렇게 죽어나가는 것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이게 옳은 것입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어떻게 하나님이 방관하실 수 있습니까?' 하박국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런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악인에 대한 징계는 필요하지만 바벨론에 의한 전쟁과 같은 과도한 징계는 인간의 존엄성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틀린 얘기는 아니잖아요. 우리는 이같은 하나님의 역사경영 방식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몇 년 전까지 맹위를 떨쳤던 ISIS 중동에서 시리아 내전을 일으키고, 전 세계 곳곳에서 테러를 일으켰던 아이시스 (한국에서는 '아이에스'로 부름)
그들이 일어났을 때, 크리스천들, 또한 넌크리스천들 진영에서도 똑같이 나오는 비명소리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자들을 가만히 두실 수 있느냐? 저렇게 잔학무도한 자들을 어떻게 하나님은 가만히 두시느냐? 어떻게 죄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나가는 것을, 하나님이 그냥 보고 있을 수 있느냐?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인정할 수 없다!'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 것이죠.
◑잠시 본문을 벗어나서, 하박국의 이 관점에 대해서, 하박국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답변을 들어야 되는데 일단 제가 중간 답변을 두 가지로 먼저 드릴게요. 변증학 적인 답변입니다.
▲1. 첫번째로, 인생과 역사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경영하시는 최고경영자이시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역사경영을 하시면서, 매니저를 세우셨어요. 그게 누군가요? 인간이죠.
최고경영자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안을 다 직접 뛰시는 게 아니잖아요.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매니저 역할을 맡기신 거란 말이죠.
하나님은 대개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래도 하나님이 자주 개입하셔야지 좋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 예를 들면, 직장에서 신입사원으로 말단으로 일할 때 상사가 일을 맡겨놓고, 계속 채근하고 계속 개입하면, 직원들이 얼마나 싫어합니까?
여러분이, 학교 교사인데 날마다 교장선생님이 창문 너머로 수업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교사들은 모두 사표를 내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매사에 모두 관여하지는 않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역사경영을 맡기시고, 그렇게 자주 개입하지 않으세요. 그건 하나님이 방관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리더십이 훌륭하시기 때문이에요.
자 그렇다면 우리가 질문해야 될 것은, '도대체 하나님은 왜 방관하시느냐?' 를 질문하기 전에
'이 지경이 되기까지 청지기인 인간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거예요. 이게 정직한 질문이죠.
역사 경영권을 우리에게 위임해 주셨는데, 청지기인 사람들이 과도한 사고를 친 거예요. 그 지경에 이르도록 만든 거에요.
하나님께서 전혀 그렇게 잘못을 할 생각이 없는 착한 사람들을 꼬드겨서 죄를 짓도록, 악한 일을 행하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게 아니잖아요.
사람에 대한 긍휼이 많으신 분들은, 이런 하박국 같은 마음을 갖게 되어 있어요. 그러다 보면 내가 하나님보다 자비한 거죠. 하나님을 자기보다 더 무자비하다고 비난하게 되죠. 그런 관점으로 역사나 성경을 왜곡해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통독 이나 강의를 할 때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저는 '모든 질문이 좋은 질문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질문하는 그 질문 안에는, 질문자의 인생이 담겨 있어요.
그 사람의 관점이 담겨 있고, 그 사람의 생각이 담겨 있어요. 그래서 이제 출애굽기를 보면서 어떤 분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애굽왕 바로를 더 불쌍히 여기더라고요.
'바로가 도대체 무슨 잘못이냐?' 왜냐하면 출애굽기 뭐라고 써 있나요?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셔서' 바로가 히브리인을 보내지 않았다는 거죠.
'성경을 봐라, 하나님이 바로를 그렇게 강팍하게 만들어서 그 일을 불순종하게 만들어 놓고, 왜 바로를 때리느냐?'는 거죠.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정직해야 되거든요. 자신의 관점에 치우쳐서 보는게 아니라 성경 출애굽기를 정직하게 읽어보면
'하나님이 그를 강퍅하게 하셨다'가 5번 나오고, '바로가 스스로 강퍅해서 그 짓을 했다'가 5번 나와요.
그런데 내 관점의 편향성 때문에 (내가 원하는 쪽) 그쪽만 보이는 거예요. '바로가 전혀 잘못을 할 생각이 없는 착한 사람인데 하나님이 억지로 그렇게 만드셨다'가 아닙니다.
바로는 자신의 강퍅함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통감해야 되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출애굽기 중간에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죠. '내가 열 가지 재앙을 내릴 필요도 없다. 단 한번의 역병, (우리가 지금 전염병으로 고생하고 있잖아요.) 단 한번의 역병으로 애굽인들을 한 방에 날릴 수도 있지만 내가 열 번의 재앙을 내리는 것이다.'
근데 그것은 이중적인 효과였거든요. 열 번의 재앙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분이 정말 하나님이시구나!' 이걸 깨닫게 하는 것,
또 한 가지 효과는 뭔가요? 열 번이나 돌이킬 기회를 주신 거예요. 열 번이나 그렇게 무서운 징계를 당하면서도 열 번이나 거역하는 바로가 정말 완악한 자였던 것이죠.
△자 그러면 하박국의 시대에 적용을 해본다면 남유다가 범죄하고 우상숭배에 빠졌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이키시기 위해서 수많은 선지자들을 매시대마다 보내셨거든요.
하나님께서 몇 년을 그렇게 기다려주셨나요? 무려 사백 년을 기다려주신 거잖아요.
주전 1050년경 다윗이 통치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주전586년에 무너졌으니까 하나님은 4백년 이상, 450년을 기다려주신 거예요.
그렇게 그 오랜 기간 동안 돌아오라고 하신 하나님이 정말 아무 일도 안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의 답변은 이제 조금 있다가 들으실 거고요. 제가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변증학 적으로 하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잔인한 전쟁을 일으키게 하나님은 놔두시는가?' 이런 말을 하나님께 할 수 있냐고요? 거의 5백 년을 하나님은 기다려 주셨는데...
그런데 사람은 한 시대만을 살다가 떠나니까 관점이 근시안 적일 수밖에 없어요. 5백년을 기다려주신 하나님의 대해서는 보이지가 않는거에요.
그리고 그 시대에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만 하나님께 항변하는 거에요.
자 그 오랜 기간 하나님께서, 역사의 경영을 사람들에게 맡겨 주셨는데 자신들의 땅도 아닌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 비워서 그들에게 맡겨 주셨는데 과연 그들은 역사경영에 청지기로서 남유다 인들은 도대체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요?
▲2. 두 번째로, 이건 좀 더 뼈아픈 얘기인데요. 인간은 재난과 재해와 같은 심각한 상황에 빠지지 않는 한 인간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를 잘 알지 못해요.
'하나님, 그렇게까지 심하게 세상을 징계하실 필요가 있나요?'
참 안타까운 것은, 인간은 그 지경에까지 가지 않으면.. 깨닫지를 못해요. 건강을 잃고 나서, 건강의 소중함을 압니다. 이런 말 많이 하죠. 가정이 깨어지고 나서야, 가정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이거 너무 뒤늦은 것이죠.
평안할 때 하나님 앞에 겸비하고, 이웃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면 참 좋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 안 듣고 막 나가다가 결국에 고난에 들어가야만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나고 비로소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게 인간입니다.
△인류 사상사를 보면, 우리가 잘 알잖아요. 18세기 말~ 19세기에 계몽주의 사상이 일어나고 계몽주의는 결국에는 인본주의 이거든요.
인간의 지성이 계몽되어서 세상을 유토피아적으로 건설할 수 있다는 사상이죠. 근데 딱 그 시기에 또 산업혁명이 일어났잖아요.
그러면서 인간이 꿈꾸는 모든 것을 우리는 꿈을 꿀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계문명과 학교 교육을 통해서 이룩할 수 있다.. 이런 (잘못된) 자신감이 넘쳤어요.
그런데 그러면서 그 시대에 나온 사상 들이 다 희한한 것들이 나옵니다. 신에 대해서 부정하는 실존주의, 무신론, 공산주의...
기독교 진영에서도 성경을, 기적은 다 빼버리고 뭔가 맘에 안 드는 구절들은 다 칼로 잘라버리는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합니다.
딱 그러고 나서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1차대전, 2차대전이 터지죠. 1차대전에 1천5백만 명이 죽었어요. 2차대전에 군인이 2천만 명, 민간인이 4천만 명, 도합 6천만 명이 죽었어요.
1차대전과 2차대전을 합쳐서 7500~8500만 명이 사망했는데, 거의 1억 명이 죽은 거였어요.
그런 밑바닥을 경험하고 나서야, 서구 사회에서도 복음주의 부흥이 막 일어나기 시작하고요. 이 한국 땅에서도 (일제 강점과 625의 시대에) 교회가 그 밑바닥을 치면서 또한 한국 사회가 밑바닥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매달리고 간절히 부르짖어서 큰 영적인 부흥과 사회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1970~1980년대)
그런데 2차대전이 끝난지 불과 50 년도 지나지 않아서, 인간은 다시 인본주의의 극단에 빠지게 됩니다. -과학지상주의, 즉 과학이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는 것처럼.. -물질 만능주의, 즉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것처럼.. -신을 거부하는 신무신론 new Atheism이라는 것은, 유신론자들을 지상에서 다 제거해야 된다.. 이런 주장을 합니다. 아주 공격적 무신론이죠.
-그외 종교다원주의, -인간이 이상적인 미래 사회의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
이런 극단적인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가운데 팬데믹이 일어났어요. 현재 COVID-19으로 인해서 사망자 수가, 2021년 6월 기준으로 전세계에 7백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마 2021년 12월 안으로 1천만 명에 이르게 될 것 같아요. 왜 이런 밑바닥을 우리가 경험해야 되는가요?
하나님이 무자비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밑바닥을 경험하고 있나요? 여러분, 하나님을 계속 원망해야 될까요? 아니면 인간의 죄악에 대해서 우리가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될까요?
오늘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인본주의로 인간은, 인간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에 빠져 있어요.
그리고는 어리석은 사상들과 정책들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국가의 근간을 흔들고, 사람들의 인생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매우 고매하고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이상적인 존재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이 극단적인 인본주의에 기초해서 이런 여러 정책 기조들이 나오는 겁니다.
도대체 인간이 어디까지 더 낮아져야만, 스스로 죄인인 것을 고백할 수 있을까요? 얼마나 더 험한 꼴을 당해야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까요? 이런 게 안타까운 것이죠.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두 번째 대답
합2:1 '내가 초소에 서서 망대에 자리를 잡고 주께서 내게 무엇을 말씀하실지, 내 호소에 주께서 뭐라고 응답하실지 지켜보겠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망대에 있는 자신의 초소에 서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자 그런데 이제 개혁성경에는 '파수하는 자리다' 이렇게 표현을 했죠.
진짜 그러면 하박국이 성벽의 파수꾼 역할을 했던 것인가, (그것보다는) 하박국은 선지자이기 때문에, 민족의 파수꾼 역할을 자처한다는 의미인 것 같아요.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우셨는데 에스겔서 3장, 33장 등에 보면 파수꾼에 대한 이야기들이 계속 나옵니다.
즉 '악인에게 경고를 했는데도 그 악인이 돌이키지 않아서 스스로 멸망했다면 너 파수꾼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파수꾼이, 위험이 오는데 경고해 주지 않아서 그 악인이 죽으면 그 사람의 피를 너에게서 찾겠다.' 파수꾼의 무거운 책임이죠.
▲자 그런데 파수꾼의 책임은 세분하자면 세 가지입니다.
1) 적군이 쳐들어오지 않는가 살피는 경계의 의무,
2) 적군이 올 때 성내에 알려야 되는, 경계를 하고 있다가 침략을 알게 되면, 그 사실을 보고해야 되는 의무
3) 세 번째 의무는, 그렇게 보고하고 나서, 왕이 어떻게 결정을 내려서 명령하달을 하는지 그것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의무가 있는 거예요. 이것이 세 번째 의무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탄원(보고)했고, 기도 했으니까,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기다렸던 것이죠. 2:1
▲기록하고 기다리라!
합2:2~3 '그러자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셨다. “이 묵시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달리는 사람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3 왜냐하면 이 묵시는 정해진 때가 돼야 이뤄지고 마지막 때를 말하고 있으며 반드시 이뤄진다. 비록 늦어진다 해도 너는 기다려라. 반드시 올 것이며 지체되지 않을 것이다.'
위 구절은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두 번째 응답입니다. (물론 그 답변을 보려면, 2장 전체를 봐야 되지만, 2장 나머지 부분은 다음 주에 강해 하겠습니다)
자 그 시작 부분에 뭐라고 말씀을 했냐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묵시(예언)을 기록하라!' :2 기록하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달리는 사람도 그것을 읽을 수 있도록 확실하게 기록을 하라고 하셨어요. 그럼 2절에 갑자기 '달리는 사람'이 왜 나올까요?
책이나 기록물은 가만히 서서 읽는 것이 더 낫잖아요. 꼭 달리면서 읽어야 되나요?
2절에 그렇게 말씀한 것은, 왕의 어명을 전달하는 전달자가 정말 다급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되는 경우에는 달려가는 것이거든요.
그 표현입니다. 그래서 메신저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마치 마라톤 평원에서 그리스가 페르시아와 큰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 42.195 킬로를 목숨 걸고 달렸던 군사와 같은 것이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답변은, 그러면 기록하라, 확실하게 기록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답변의 핵심은 무엇이냐면, 3절에 나오는데
'이 묵시는 정해진 때가 돼야 이루어지고, 마지막 때를 말하고 있다' :3 여기서 '마지막 때'를 개역성경에서는 '종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종말은 '바벨론의 종말'을 이야기합니다. 세상 종말이 아니라요.
'교만한 바벨론의 종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기다려라'
이게 하나님의 두 번째 답변이에요.
자 남유다의 사회악이 지금 너무 너무 심각해요. '하나님 징계하셔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 내가 징계할 거야, 바벨론을 들어서!' *첫번째 질문과 대답
'근데 바벨론은 더 심각한 죄인들 아닙니까?' '내가 바벨론도 징계할 거야, 기다려라!' 이게 두번째 질문과 대답이에요.
△교만한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칠십 년 만에 이루어졌어요. 여러분 칠십 년이면 굉장히 긴 세월 같지만 하나님의 긴 역사 여정과 경영을 놓고 보면 거대 제국인 바벨론, 그것도 중근동의 패권국가가 70 년 만에 무너졌다는 것은,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무너진 거예요.
그래서 '속히 이루어진다'고 3절에 말씀하신 거죠. '그러니까 비록 네가 느끼기에 늦어진다고 해도 너는 기다려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3
자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역사의 근시안에 빠지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공의와 구원의 섭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을 소망하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2:4절에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이죠. 하박국서에서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말씀인데요.
합2:4 '보아라.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의롭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그의 (끈질기게 기다리는)믿음으로 살 것이다.'
놀라운 말씀이에요. 여러분 4절 말씀을 한 주 내내 묵상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지난주 1강 설교 마지막 결론이 그거였잖아요.
하박국처럼 사사건건 질문이 많은 성도가 있으면 '저 사람은 믿음이 없어서 저렇게 질문이 많다'며 성도들이 싫어할 거라고요.
그러나 하박국이 집요하게 질문하지 않았다면 이 주옥과 같은 말씀은 기록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2:4절 말씀이 구원론의 정수를 담고 있는 로마서의 핵심 구절로 인용이 됐잖아요.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게 하박국 2:4절을 인용한 거예요.
그래서 4절을 좀 더 묵상해 보면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누구이고 (바벨론이죠)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의인는 누구인가요? (이스라엘 중에 의인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바벨론을 얘기합니다. 역사의 주도권이 자신들에게 주어졌다고 해서,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렀던 거예요.
그래서 다니엘서를 보면, 느부갓네살이 교만을 부리다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서 일곱 때를 소처럼 풀을 뜯으며 미친 사람이 됐었잖아요.
또 바벨론에 마지막 왕인 벨사살은 교만에 빠져서 나라가 그때가 위태로울 때 였거든요.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의 은금기명(그릇)을 가져다가 거기에 술어 부어 마시면서 잔치하다가.. 그날 밤에 메데-바사 연합군에게 바벨론이 무너졌죠.
그래서 그 이후로 바벨론은 교만의 대명사가 됐어요.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대명사가 됩니다.
여러분 계시록을 보면, 적그리스도 세력, 세상에 하나님을 대항하는 반그리스도세력의 핵심을 '바벨론'이라고 칭합니다.
△자 그러면 믿음으로 살아갈 의인은 누구인가요? 좁게 보면, 하박국이고요. 넓게 보면, 하박국 외에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이 고난의 시기를 뚫고 나가고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죠.
지금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앞으로 바벨론을 내가 징계할 것이다' 라는 얘기를 하시기 전에 하박국에게 마음의 태도에 대한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 응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을 기경해주시고, 내 마음을 정결케 하시는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바벨론 징계에 대한 사실을 말씀하시기 전에 훨씬 더 중요한 영적인 진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건 무엇이냐면 '교만한 자는 의롭지 않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자가 의로운 사람이다.' 이 얘기를 하셨잖아요.
우리가 단순 대조로 바벨론과 하박국으로 이야기했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런 의미로 갖고 있는 거에요.
지금 하박국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더 의로운 척, 자기가 더 자비한 척하고 있잖아요. '하박국, 그렇게 네가 의로워서 나의 의로움을 의심할 정도냐? 진짜 의인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너의 그 의로운 척하는 그 마음도, 하나님이 받아주시고, 들어주시고, 대답해주시는 것은 나의 의로움으로부터 너의 의가 나왔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가 하나님에 의에 기초한다.. 라는 것을 얘기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 정직하게 이야기 하면, 교만한 자에게는 두 종류가 있는 것입니다.
1) 첫번째는 바벨론처럼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무신론적인 교만에 빠진 자들! 안하무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눈에 뵈지 않아요. 이렇게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교만한 자들이 있어요.
2) 그런가 하면 두 번째는 하박국처럼, '내가 하나님을 뻔히 잘 알지' 이렇게 주장하는 이신론 적인 교만에 빠진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은 늘 하나님 얘기를 해요. 하나님께 기도도 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자주 개입하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 폭발해서 (이신론 이란, 하나님이 세상에 원리원칙만 만들어 놓고 개입을 안하신다는 이론)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도 안 하셔. 도대체 뭘 하고 계시는가?' 이런 교만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야말로 무신론적 교만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태이지만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수많은 교인들이 '이신론적 교만'에 빠져있다는 거예요.
그럼 왜 이신론적 교만에 빠져 있을까요? 시대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볼 때 우리의 예배생활에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 체험이 없다면, 우리의 실생활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여정이 없다면,
세상 역사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역사 경영에 대한 신뢰함이 없다면 성경은 지식에 불과한 거예요.
성경을 봐도 애굽의 바로가 불쌍해 보이고 하나님은 정의롭지 않아 보이고... 이런 왜곡된 관점에 빠져 있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양산되고 있어요.
마치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고, 존재하시지 않는 것처럼 마치 하나님이 정지화면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교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것입니다. 2:4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거예요.
믿음을 '그냥 무조건 믿습니다' 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고 정말 하나님 누구이신지를 인격적으로 아는 데서 나오는 믿음이에요.
*여기서 '믿음'은 히브리어로 에무나인데 '흔들리지 않음'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버티기'입니다. 출17:12에 모세의 기도의 팔이 내려오지 않음(버팀) 이 단어가 시편에 종종 (인자 hesed 와 함께) '진실'로 수차례 나오는데, 시33:4, 36:5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큼 흔들리지 않고, 굳세게 우리를 사랑해주신다는 뜻이며,
하박국 2:4절 상황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본문에 '믿음'으로 번역)가 그렇게 '흔들리지 않아야' 된다는 거죠. 본문에서 믿음이 그런 뜻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같은 단어가 시편에서 주로 '진실'로 수차례 번역되었는데, 의미가 '흔들리지 않음, 버팀'입니다.
교만은 자신의 잘남에 근거한 것이지만 인간의 교만이라는 것은 인간 자신에게 근거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에 의에 기초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되었어요. 십 년째 이십 년째 평생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도대체 하나님 뭘 하고 계십니까?' 여기에 우리가 빠져있다면 그건 굉장히 심각한 거예요.
여러분 수십 년 신앙생활을 했는데 나의 신앙이 도대체 무엇에 근거하고 있나요?
세상사람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크리스천이 이신론적 교만에 빠져있다면,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혀놓고 *C S 루이스의 저서 자기 맘대로 하나님을 재단을 하고 *하박국과 비슷하게 하나님, 뭐라고 대답을 하시라고.. 하나님, 도대체 뭘 하고 계시는 거냐고..
물론 성장과정에서는 사춘기 자녀들도 부모 원망하고 다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신앙이 성숙할 만한 시즌이 됐는데도 여전히 그걸 계속하고 있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죠.
불완전하고 죄많은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이 온통 그라운드 전체가 흔들리는 세상 한가운데 살아가면서 우리의 인생을 견고하게 세워주실 분은 오직 우리 인생의 반석되시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시대가 어렵다고, 인생이 어렵다고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불신하면 여러분 의롭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 없어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음(에무나)으로 이 어려움을 뚫고 나갈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