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고난주간부흥집회 ① : 그리스도의 기쁨 (youtube.com)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기쁨 시16:1~3, 행2:17~37 출처
◑초대교회를 탄생케 한 베드로의 행2장 설교
신약교회가 탄생하는 그 현장에 대해서,
우리가 잘 이해하고 알고 있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확실합니다.
왜냐면 행2장을 보면, 교회가 어떤 정황가운데서 어떤 방식으로 탄생을 했는지
자세하게 기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히 교회가 그냥 만들어진 것 아닙니다.
그날 사도 베드로가 설교를 했는데 3천 명이 회심했다고 했습니다.
그 3천명은 성인 남자의 수입니다.
여자와 어린아이의 수를 합하면, 적어도 1만명 이상의 큰 규모로
교회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어떠한 설교를 했길래, 3천명 이상 되는 회중이
가슴을 찢고 하나님 앞에 돌아왔을까요?
그 베드로의 설교의 개요를 행2이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설교본문은 두 군데입니다.
시16편이, 베드로가 그날 사도행전에서 설교한 설교의 본문입니다.
그래서 시16편이, 사도 베드로의 설교 중에서 어떻게 주해되었는가
우리가 한번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순절 날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방언의 역사가 터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큰 일을, 각각 자기의 나라 말로, 자기 민족 언어로 사람들이 알아듣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현상을 두고 사람들이 우왕좌왕할 때 무리 가운데 베드로가 일어나서
'너희가 어찌하여 당황하느냐? 이러한 사건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요.
이미 하나님께서 수백 년 전에 선지자 요엘을 통해서 약속하신 것이
지금 우리 역사적 시점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이렇게 선언하죠.
'내가 말세에 나의 영을 (성령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2:17
베드로는 요엘2장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설교 서론의 결론을 어떻게 내리냐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행2:21
하고 서론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사실 한때 저는 이것이, 베드로의 설교의 전부인 줄 알았었어요.
그러나 다시 성경을 보니까, 이것은 그날의 설교 도입부(서론)에 해당하고
본론은 행2:22~33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해 선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25~32절까지 베드로가 시16:8~11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을 논증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날 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것이 행2:34~36절입니다.
행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했으나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앞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거라. 시110:1
36 그러므로 여러분, 이 일을 분명히 아십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습니다.'
37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였다.
이것 역시 시110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설교를 결론 짓고 있습니다.
시110편의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 어려운 말로 '재위' 라고 합니다.
이것을 베드로는 선포하고 있어요.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고, 초대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초대교회를 탄생시키는데 있어서, 베드로의 설교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한 내용은,
성령께서 여태까지는 우리가 받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계시를 주신 것이 아니라
서론은 요엘서 2장,
본론은 시16편,
결론은 시110편,
이렇게 이미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한, 즉 계시한 말씀을
새롭게 주해하는 주해설교였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날 설교의 주제는 뭐라고 말씀 드렸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승천, 재위..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이었어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이것을 어려운 말로 '기독론적인 설교'라고 합니다.
그날 베드로의 설교는, 주해설교였고, 기독론적인 설교였어요.
그 날의 설교전체를 여러분과 나누지는 않을 겁니다.
본론에 해당하는 시16편을 우리가 공부 할 텐데
시16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메시야 시편의 특징을 잠깐 살펴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16편, 110편 모두 장르상 '메시야 시편'으로 구분됩니다.
◑메시야 시편이란?
'메시야 시편' 난 그런거 처음 들어본다.. 이런 분이 계실지도 모르지만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메시아의 시편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메시아 시편은 이렇게 시작해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22:1절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가상 7언의 일곱 마디를 남기셨는데 그 중에 한 마디가
시22:1절을 암송하신 겁니다.
그 자체로서 예수님의 기도이기도 하지만, 틀림없습니다. 시22편을 암송하신 거예요.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냐면, 시22편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아주 자세하게, 디테일하게
그리고 아주 정말 잘 묘사를 해주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지금 십자가사건 앞에서 당황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당황할 필요가 없어, 이것은 이미 다윗 선지자를 통해서
1천년 전에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그 사건이 역사적으로 성취되는 거야!' 이렇게 가르쳐 주신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전도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성경공부시키신 건 잘 몰랐어요.
예수님께서 '너희가 시22편을 봐라'
제가 대표적인 몇 구절만 읽어드릴게요.
시22:7~8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마27장과 눅23장에서 이 예언이 성취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22:14~15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십자가에 극심한 목마름의 고통을 미리 예언했는데
요19장에서 성취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사실 머리가 쭈뼛 서는 내용이죠. 마치 십자가에 사건을 진짜 그대로 보면서
기술한 것처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족을 찔렀다'고 했으니.. 십자가 형에서 손과 발을 못 박은 것을 묘사한 것이요.
'내 옷을 제비뽑았다'는 것은.. 당시 로마 군인이 관행을 깨고, 속옷을 찢지 않고 그것을 제비뽑아서
한 사람에게 몰아준 것이죠.
그 행동까지도 미리 내다보면서 이렇게 자세히 얘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시22편을 너희가 읽어봐 그러면
'말씀대로 이 일이 성취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죠.
▲예수님께서 그럼 아예 시22편 전체를 암송하시지,
왜 1절만 암송하셨을까요?
사실 이것은 제 생각인데요. 전체를 아셔도 암송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너무 힘들어서, 너무 숨이 차서 못 하셨을 거예요.
제가 오래전에 크리스천 의사들이, 십자가 형틀에서 죄수들이 어떤 방식으로 죽어가는가에 대해서
논문을 쓴 것을 읽어본 적이 있어요. 근데 그때 참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죄인들이 죽는 직접적인 사인은, 뜻밖에도 '질식사'라고 합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는 것도 아니고, 숨을 못 쉬어서 죽는 거래요.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의 발을 겹쳐서도 못을 박기도 하고
두 발을 따로 복숭아뼈 근처에 이렇게 못을 박습니다.
사람을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아 두죠.
그리고 팔도 이렇게 펼쳐서
팔뼈 두 개 사이에 쇠못을 박아둡니다.
그래서 오직 못에 걸린 무게에만 의지하면, 이제 사람 몸이 추욱 처지게 돼요.
숨을 쉬려면 몸을 일으키면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하는데
제일 처음에 숨을 쉬기 위해서 힘을 주는 장소가 발목입니다.
그때 발목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킬 때, 그 안에 지금 쇠못을 박아놨잖아요.
말 그대로 뼈가 갈리는 고통을 느끼면서 몸을 일으킵니다.
일단 무릎을 일으키고, 그 다음에는 손을 이렇게 안쪽으로 잡아 당기면서
숨을 내쉬게 되어 있어요.
그때 역시 마찬가지로 팔의 뼈와 뼈 사이에 쇠못을 박아뒀잖아요.
그 뼈가 갈리는 고통을 느끼면서 숨을 쉬게 돼 있어요. 숨 쉬기가 아주 어렵고 고통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 십자가의 형틀이란 것은
그 당시 고문기술자들이 어떻게 하면 최악의 고통을
가장 오랜 시간 느끼게 하는가? 그렇게 해서 만들어 낸 게 십자가의 고통이에요.
숨을 쉴 때마다 말그대로 뼈가 갈리는 고통을 느끼는 것이죠.
그래서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는
몽둥이로 때려서 무릎 뼈를 탈골 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매달려 있다가 무릎뼈가 딱 탈골 되면 힘을 받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몸을 일으키지 못해요.
몸을 일으키지 못하면 결국 질식을 해서 죽는다고 해요.
그래서 이제 십자가 형틀에서 그러한 관행들..
예수님은 이제 무릎을 꺾지 않아서 미리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옆구리에 창을 찔리셔서 물과 피가 또 다 쏟아진 게 빠른 사인이 되겠죠)
그러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동안
짧게 짧게 일곱마디 한 게 다예요.
'내가 목마르다.'
그리고 그 다음엔 또 한참 얘기를 못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길게 설명드렸지만
시22편 1절 말씀만 암송하셨어도 전체가
'메시아 시편이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메시아 시편의 또 다른 특징은 인칭이에요.
예를 들면 시22편에 '나'라고 나옵니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여기서 <나>가 누굴까요> 이 시편은 다윗의 시편이에요.
그러나 주인공은 다윗이라기보다는,
다윗을 감동해서 이 말씀을 쓰게 한 메시아의 영, 메시아 자신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사53:5
여기서는 <그>로 나오죠. 3인칭 남성 대명사로 나옵니다.
그렇지만 '메시아 시편'은 많은 경우에 화자가 1인칭으로 바뀌어요.
그 화자가 1인칭으로 바뀌는 것에 근거해서
베드로 사도가 오늘 시16편과, 110편을 주해하고 있습니다.
시16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걸 모인 회중이 다 압니다.
얼마 전에 자기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거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무엇을 못 믿고 있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못 믿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때 베드로가 '그것을 왜 못 믿느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이 역사적으로 미리 예언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부활하실 것도, 시16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예언하셨다'는 거죠.
시16:10절과 행2:27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자 시16편도 다윗의 시편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주인공일 리가 없다.. 하는 것이 베드로의 논쟁이에요.
'우리는, 다윗이 이미 죽어서 무덤에 장사돼서
지금 그 왕릉이 우리 예루살렘주변에 있는 것을 안다.' 이렇게 베드로가 얘기하죠.
'그런데 이 본문말씀을 봐라.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 시16:10
그러니까 죽어서 시체가 무덤에 묻혔는데,
그 시체가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라고 예언되어 있다는 거죠. 행2:27
야(베드로의 설교) '자 우리가 1천년 전에 다윗이 죽은 건 아닌데,
그런 그의 무덤을 한 번 파 볼까? 다윗이 정말 시신이 안 썩었겠냐? 썩었다.'
그러면 시16편은 다윗이 주인공일 리가 없다.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이다! 그 분이 16편 그대로 부활했다)'
시110편도 마찬가지에요.
(베드로의 설교) '다윗은 하늘에 승천하지 않았다.
그러면 시110편의 주인공은 다윗이 아니고 메시아 이시다.' 이렇게 논증을 하는 겁니다.
시22편 말씀 중에 1절만 암송해도,
전체가 메시야 시편인 것을 우리가 알듯이
지금 시16편의 8~11절 말씀을 사도행전 기자가 인용하는데
육체부활 논증하는 부분만 인용하는 거죠.
그렇지만 사실 시16편 전체가 '메시야 시편' 인걸 우리는 압니다.
◑시16편 주해
16: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셔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여기서 <나>가 누굴까요?
다윗 자신이라기보다는, 다윗을 감동시킨 메시아의 영, 즉 메시아 자신입니다.
아마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두려워셨던 것 같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을 두려워했다기보다는
삼위 하나님 사이에 있는 영원한 교제가 일순간 단절되는 그 순간을 두려워 하셨던 것 같습니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성자 하나님의 성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신기하죠.
삼위 하나님 사이에 일어나는 대화를,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해서
당신의 교회로 하여금 (저와 여러분이) 엿듣게 하셨어요.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사랑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3절은 누구를 향한 사랑의 고백일까요?
'땅에 있는 성도'라 했으니.. 천상의 이미 있는 영광을 입고 흠이 없는 교회(교인)를 말하는 것이 아니오
저와 여러분을 포함하여 지상에 있는, 약하고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지상교회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이 말씀을 잠시 우리 마음에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결혼 하신 분들은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고
또 그 말을 듣지 않고 결혼한 분도 없을 거에요.
결혼하지 않은 우리 젊은 청년들도, 그 말을 하기도 하고, 들어보기도 했을 거예요.
그 말을 하고/ 듣게 될 때.. 여러분은 가정을 이룰 겁니다.
여러분, 인간의 삶 가운데 '사랑의 고백'은 여러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모든 사랑의 고백가운데 가장 고상한 것이
'나의 모든 즐거움이 당신에게 있습니다' 라는 고백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러냐면,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는 이 고백을 못합니다.
아무리 내가 지금 연애를 하고 있어도
정말 여러분의 모든 즐거움이 여러분 상대자에게 있습니까? (No)
뭐 제 얘기를 할 수밖에 없죠. 저는 결혼을 했는데
우리 처가 근처에 낚시터가 있었어요. 아주 산속에 있는데 정말 아름다운 곳이에요.
그래서 이제 제가 처가에 갈 때마다 낚시대를 드리웁니다.
제가 적어도 낚싯대를 드리우고 찌를 바라보는 그 순간에는
제가 신혼때라도 '나의 모든 즐거움이 신부에게 있지 않습니다.'
신부도 즐겁지만, 낚시도 즐겁다는 뜻입니다.
지금 여자분들이 좀 비웃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시는데..
만약 여러분이 좋아하는 드라마를 푹 빠져서 보고 있는데
띵똥하고 이제 사랑하는 남편이 퇴근했습니다.
그때 정말 백 퍼센트 여러분의 온 마음을 다해 그 남편을 맞이하시나요?
그보다는 '하필 왜 이 중요한 순간에 집에 오고 난리야?' 하는 마음이 드실 겁니다.
지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에게 있도다' 라는 고백이, 쉽게 하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제가 어렸을 때는 저희 엄마를 너무 좋아해서
'저는 앞으로 장가 안 가고, 우리 엄마랑 결혼해서 살 거야!' 늘 그렇게 얘기를 했대요.
그렇지만 엄마를 너무 좋아하는 아들이라 할지라도
컴퓨터 오락하고 있을 때면, 엄마가 '밥 먹어' 그러면 바로 달려 오던가요?
그런 아이는 거의 없습니다. '엄마 잠깐만, 잠깐만!' 그러면서 계속 게임을 하죠.
아무리 엄마를 사랑해도, 적어도 컴퓨터 게임하고 있는 그 순간에는
아들의 모든 즐거움이 엄마에게 있지 않아요. 그게 인간의 사랑이에요.
근데 하나님은 거짓말하시지 않잖아요.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즐거움을 저와 여러분에게 두시겠다.. 말씀하실 때는
정말 그렇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집에 수족관이 있는데 가끔 새로운 열대어를 사서 넣을 때가 있어요.
그러면 며칠 동안은 아이들이나 저나, 집에 와서 제일 먼저 그걸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며칠 안 가요. 며칠 지나면 싫증나서 안 봅니다.
또 더 며칠 지나면, 물고기에게 밥 주는 것도 까먹어요. 그게 인간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정말 24시간 당신의 모든 즐거움을 두는..
당신의 교회를 향해, 저와 여러분을 향해
쳐다보고, 기뻐하시고, 또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시는 겁니다.
▲사실 시16편이 이런 메시아 시편이고
그 안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진한 사랑의 고백이 있다 라는 것을
저는 이제 신학교 들어와서 처음 배웠어요.
특히 3절에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신대원 1학년 때 반드시 들어야 되는 과목이 <구약총론>인데
합동신학교에 지금은 은퇴하신 김성수 교수님이라고 계셨어요. *동명이인이 많으시죠.
그분이 시16편을 여러 시간에 걸쳐서 주해해 주셨어요. 물론 주해가 만만치 않았어요.
히브리어로 이렇게 쭉 주해를 해주셨는데
'아 이게 예수님의 사랑의 고백이구나!' 이게 이제 수업시간에 깨달아지면서
이렇게 제 마음에 감동이 되고, 약간 눈에서 눈물이 글썽했어요.
그때 이제 예수님의 마음이 전달되면서 제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이는데 좀 창피하잖아요.
그래서 눈물을 안 흘리려고 고개를 쳐들기도 하고, 나름 애를 썼죠.
그래도 눈물이 주루룩 볼을 타고 흐르고 말았어요.
제가 창피하니까 딱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근데 제 마음이 너무 뭉클해지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내가 여태까지 이걸 모르고 살았구나'
그게 막 제 마음에 전해지면서, 닭똥 같은 눈물이 막 줄줄 흐르는데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급하게 제손을 뺨에 대서, 떨어지는 눈물을 막아보려 했는데
그러자 눈물이 이제는 손등을 타고 팔목까지 계속 떨어져서
제 책상을 흥건히 적셨습니다.
그때 첫번째로 너무 창피했어요. 일단 창피했어요.
그래서 남들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너무 창피했는데... 마음은 너무 좋았어요.
그때 제가 속으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신학교 1 학년 때였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즐거움을 나에게 두시겠다고 한 이 고백!
감사합니다. 제가 이것 이상의 은혜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사랑의 진한 고백을 하셨는데
내가 무슨 다른 은혜를 구하겠습니까?
내가 다른 것을 하나님한테 바라면 저는 사람도 아닙니다.
저는 예수님을 다시 만날 때까지, 이 말씀 붙들고 이 길을 가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어요.
▲여러분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
저는 시16편 말씀에서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 말씀을 하셨는줄로 알고 있었어요.
근데 구약을 공부하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늘 당신의 교회를 향해서
'나의 모든 즐거움이 나의 교회에 있다' 이 말씀을 자주 하셨더라고요.
여러분께, 많은 구절가운데 한 구절만 나눠 드립니다.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은 다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교회사 2천 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달콤한 말씀을 여러분과 나누는거에요.
저는 서른 살 때 이 말씀을 받고서, 그 전과 후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여러분도 이 말씀을 받고서
여러분이 평생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저처럼 전환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62:4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헵시바.. My delight is in her 란 뜻입니다.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 여기서 그녀는 구약의 예루살렘, 신약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 아는 너무 유명한 이 단어(헵시바)가
'나의 모든 즐거움이 교회에 있다' 라는 하나님의 선언이죠.
쁄라라 라는 말은 Married woman 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결혼한 여자'라는 뜻인데
헵시바와 쁄라, 이 둘을 합쳐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한 청년이 한 여자를 보고 너무 반했어요. 한눈에 반해서 24시간 그녀 생각만 나요.
이게 이제 상사병이 걸리고, 도저히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가서 사랑을 고백하고 프로포즈를 합니다.
감사하게도 여자도 기뻐하고, 그걸 받아줬어요. 그래서 둘이 결혼했어요.
인간을 경험 속에서, 이 가장 뜨거운 남녀의 사랑에,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빗대신 거에요.
사62: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커플들 가운데도,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
출근하고 나서도 하루 종일 아내 생각을 하고
또 아내도 하루 종일 신랑 생각을 하면서 서로를 그리워하는 그 심리, 마음의 상태
그것에 빗대어서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이렇게 연애하고 사랑한다' '나의 모든 즐거움이 내 신부된 교회에 있다'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죠.
베드로의 이 설교를 통해서
그날 하나님의 이 사랑이 그 회중들의 마음에 계시되었어요. (시16편을 베드로가 모두 인용했다고 볼 때)
'아~ 이곳에 하나님이 모든 마음을 두시고
하나님의 모든 기쁨을 두시는구나..'
이것이 그들의 마음 가운데 계시됐을 때
그들도 그 자리를 뜰 수가 없었던 거에요.
하나님은 여기(교회)에 모든 것을 거셨는데, 내가 집에 가면 안되겠죠.
그래서 집에 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는 거에요.
마음을 열고, 자기들의 마음을 그 자리에 내려놓은 것이죠.
마음과 마음, 전부와 전부가 만나서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시16:8~11절까지 주해하고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시16:8~11절이, 베드로 사도가 행2장의 그의 설교가운데 인용한 부분이에요.
아까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을 논증하는 그 부분을 위해서 이 구절을 인용했다고 말씀드렸는데
지금은 조금 다른 측면에서 이 구절들을 한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이 단락에 주제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한번 확인해 볼까요?
16: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즐거움에 밑줄 그어 보세요.
16: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기쁘고 와 즐거워하며 에 밑줄을 그어 보세요.
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충만한 기쁨, 영원한 즐거움에 밑줄 그어 보세요.
전체적으로 시16편의 주제는 즐거움, 기쁨이에요.
시22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굉장히 리얼하게 정말 생생하게 잘 그려냈다면
시16편의 말씀은,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러 나가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의 상태를 잘 묘사했습니다.
근데 그 마음이 어떻다고요? 기쁘셨답니다. 즐거우셨답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시16편의 말씀은
우리의 가슴을 정말 찢어놓는 말씀이 됩니다.
제가 시16:1~3절 주해에 은혜를 받고, 정말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 됐는데
그럼에도 시16:8~11절에 나오는 '기쁨'이라는 단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이 '기쁨'이 얼마나 중요한 단어인지요!
올해(2017)가 종교개혁 5백 주년을 기념하는 해지요.
마르틴 루터를 우리는 종교개혁가, 혁명가로 알고 있는데
사실 마르틴 루터는 일평생 신학교에서 구학과 신약을 가르친 성경신학 교수라고 말할 수 있어요.
루터가 시16편을 주해했는데
19세기 영문판으로 제가 페이지를 넘겨보니까 39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주의 했습니다.
아주 길게 많이, 자세히 주해했다는 뜻이지요.
라틴어 판에 보니까, 이 시16편 주해에 소제목이 달려 있는데
그거를 라틴어 소제목을 영어로 번역하면 delight of Christ 입니다.
그리스도의 기쁨이죠.
눈치가 빠른 분은, '설교자 안 목사가 오늘 설교제목을
마르틴 루터의 시16편 주해 소제목에서 카피했구나'
맞아요. 그 역사적인 루터의 성경주해에서 오늘 제목을 그대로 따왔습니다.
그리스도의 기쁨이에요.
자 이 그리스도의 기쁨을, 제가,
언제 그런 마치 마르틴 루터가 이해를 한 것처럼
제가 언제 이것을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됐냐 하면
그 다음 해 일어난 일 때문이었습니다. 죄송하지만 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제가 신대원 2학년 때, 우리 큰 아이가 좀 희귀병을 앓았어요.
아주 좀 어려운 병이었는데, 16개월 때 얘가 알았던 병명이
'랑거한스 세포 조직구증 Langerhans cell histiocytosis' 라는 병이었습니다.
처음 들어보셨죠?
우리나라의 <병원24시> 라는 프로그램에서 두 번인가 소개됐는데
두 아이 다 죽었어요. 일종의 백혈병으로 분류되고
랑거한스 셀 이라는 특정한 백혈구가 이상 증식하면서 조직을 파괴하는 거에요.
몸의 어느 신체 부위에서도 발병할 수 있는데
일단 발병하면, 몇 주 안에 그 조직이 그냥 없어져요.
위에서 발병하면 위가 없어지고, 뇌에서 발병하면 뇌가 없어지고.. 굉장히 무섭습니다.
우리 아이의 경우는 이제 뼈에서 발병을 했는데
병원에 처음에 갔을 때, 치킨 윙 시키면 그 속에 뼈가 두 개 있는 거 아시죠.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오른쪽 팔에 이렇게 뼈 두 개가 형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 밑에 아래쪽 뼈가 이미 녹아서 없어진 상태고, 위의 뼈도 '새우깡 같다' 그랬어요.
의사 선생님 말인데, 그만큼 작다는 뜻이죠. 아무리 16개월이라 하더라도요.
그래서 수술도 하고, 항암치료도 하고, 여러 가지 치료를 받아야 되는데
제일 먼저 깁스를 했습니다. 꽉 잡으면 그냥 뼈가 아스라지니까요.
근데 사실 제가 부모로서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제가 정말 한 2년 정도는 거의 병원에서 살았던 것 같아요.
아주 큰 연단을 받았는데요.. 그 말씀을 지금 다 드리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셨어요.
의사선생님도 '와 기적 같다' 이렇게 말할 정도로
양쪽 끝에 조금 생장점이 남아 있었던 게
굉장히 세포분열을 많이 해서 뼈도 자라고
새우깡 같은 것도 다 채워지고...
16개월 때 그렇게 고생했던 우리 아이가 지금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됐습니다. *2017년 설교
이렇게 겉으로 볼 때, 속으로도 그래요.
그렇게 아팠던 친구인지 모르게.. 아주 건강하게 잘 자라줬어요.
근데 이제 병원생활 하고 투병할 때, 사실 많이 힘들었죠.
말 그대로 울기를 밥 먹듯이 했죠.
제가 집에서는 안 울었죠. 아이들 앞에서도 안 울었는데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정말 많이 울면서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이가 백혈병 병동에 입원했을 때, 크고 작은 어려운 일들이 있었지만
첫번째 골수검사했던 날의 에피소드를 좀 나눠드립니다.
간호사가 오셔서 '엄마는 병실에 계시고요. 아빠가 같이 가실게요'
그러고 이제 골수검사하러 검사실로 데려가는 거에요.
가는 길을 제가 물었죠. '왜 엄마는 병실에 있으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간호사님이 그러는 거에요.
'어린 애기들 골수검사할 때, 그게 너무 힘들거든요. 골수 채취할 때 막 시트가 금방 피투성이가 되고
그게 보통주사가 아니에요. 굉장히 아픈데, 엄마들이 그걸 못보고 종종 기절합니다.'
엄마는 기절하니까 병실에 있고, 아빠를 그래서 데려가는 거에요.
제가 무늬만 남자지, 사실 저도 얼마나 겁이 났겠어요..
'이게 그렇게 힘든 검사구나..'
그래서 검사실에 가서, 우리 아이가 이제 눕고
의사 선생님들과 간호사 둘이 아이를 잡고 골수 채취를 하기 시작하는데
정말 금방 막 피가 많이 튀고, 시트가 많이 피에 젖었어요.
그런데 저도 깜짝 놀란 게, 우리 아이가 이제 막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는 거에요.
왜 깜짝 놀랐냐면, 여러분 백혈병동에 가면, 생각 밖에 애들이 안 울어요.
저도 처음엔 너무 놀랐어요. 매일같이 아이들에게 피를 뽑아가거든요.
이렇게 피를 뽑는데 애들이 안 울어요. 울면 그거는 한 달 미만 입원 한지 얼마 안 되는 애들이에요.
고통을 주기적으로 계속 반복해서 주다보면, 나중에 거기에 그냥 익숙해집니다.
그래서 안 우는 거죠.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이 가스 사형실로 가면서
그냥 죽으러 가면서도 무덤덤한 표정 있잖아요.
그런 표정이 아이들에게 나타나요.
그래서 울지도 않고, 아프다고 그러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 아이도 병원에서 (입원 하면서) 말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늘 했던 말이 '빨리 끝내!' 그 말을 했어요.
'빨리 해!' 하고 막 소리를 질렀어요.
이제 부모 마음이 많이 아프죠.
나 죽겠다는 식으로 막 우는데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자꾸 왔다 갔다 해서, 검사실 문이 열릴 때마다
우리 아들하고 저하고 눈이 마주치는 거예요. 정말 제 표정 관리가 안 되더라고요.
아빠가 울면, '왜 아빠가 울고 있나?' 그럴 것 같고
내가 웃으면, '나는 이렇게 아픈데 왜 나를 안 구해주나?' 그럴 것 같고..
말도 잘 못하고 어린애지만
아빠가 표정이 막 일그러지고 마음이 정말 아프더라고요.
마음이 아프고 무엇이 힘드냐면
부모로서 자식으로만 사랑하겠어요.
근데 수없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뽀뽀도 하고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 많은 주사 중에 한 대를 대신 못 맞아주는 거예요.
지금 그 자리도 '애는 힘들어서 안되겠어요. 아빠가 대신 오세요' 만약 그러면
정말 할렐루야! 하고 뛰어갈 갈 것 같았어요.
근데 그럴 수 없는 무기력함...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비참함... 그게 인간 부모의 사랑이더라고요.
그래서 이 가슴이 아프니까, 저도 그때 신기한 걸 체험했는데
실제 통증이 오던데요...
너무 마음이 아프니까, 실제 몸에서 통증을 느껴요.
막 심장을 이렇게 칼로 후비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 이러다가 기절하는구나!' 그 직전 단계까지 갔어요.
근데 문득 그때 시편16:8~11절 말씀이 제 마음에서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행복했겠다..' 생각했어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인간부모는 사람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습니다. 능력이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시잖아요.
예수님은 '나의 모든 즐거움이 너에게 있다' 라고 얘기할 정도로
그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실제로 그 자리에 대신 가셨잖아요.
그 고통을 대신 하셨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즐거움입니다.
대신해서 죄 값을 치르시고 나를 천국으로 데려가셨잖아요.
그 예수님이 너무 부러운 거예요.
그 예수님이 너무 행복해 보이는 거예요.
그제서야 비로소 이 본문말씀에 있는 그리스도의 기쁨이
내 마음 가운데 해석이 된 거에요.
머리로만 알던 게, 내 가슴에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다르시구나...'
그래서 그 전까지는, 십자가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이
왠지 하나님이 약한 모습 같고..
그 하나님의 약함이 드러났다고 생각했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난 것이고, 전능한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된 곳이 십자가구나!
그것을 그때 알게 됐습니다.
지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회중들 마음 가운데
이 그리스도의 기쁨이 게시된 거에요.
그리스도의 마음이
십자가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했다는 이 말씀 앞에..
이 말씀이 회중들의 가슴을 찢어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등부 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길거리 전도를 나가면 요3:16절 말씀을 갖고 나가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아~ 정말 성부 하나님의 사랑은 크시구나, 독생 성자를 우리를 위해 주셨구나!'
근데 그때 문득 제가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보냄을 받은 독생자의 입장에서는 좀 힘들었겠다..
왜냐하면 직접 십자가를 져야 되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 저 같은 생각을 하는 친구도 있을 수 있어요.
그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요3:16절과 더불어 다른 한 손에 반드시 들고나가야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외우기도 쉬워요. 3:16절을 거꾸로 하면, 시16:3절입니다.
'땅에 있는 자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예수님의 마음도 기쁘셨대요.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마음이, 힘들지만은 않으셨대요.
왜냐하면 당신의 모든 즐거움을 두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그렇게 지극히 사랑하는 그 대상을 위해서, 십자가에 대신 들어가는 그 자리가
'그 마음이 즐거우셨대요' 이렇게 얘기해주는 겁니다.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몇 달 전에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일평생 목회하셨습니다. 은퇴하시고 생전에 담임목사로 시무하실 때
아버지 서재에 가면 정말 커다란 액자에 잠27:23절 말씀이 이렇게 인쇄돼서 거기 붙어있었어요.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게 마음을 두라'
하나님께서 모든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그것을 요구하시는 거에요.
여러분이 작은 구역을 섬기든, 뭐 청년부에서 작은 모임을 인도하시든,
또 구역을 섬기시든, 뭐 성가대를 섬기시든
여러분이 섬기는 그 공동체에게, 여러분이 마음을 두셔야 됩니다.
근데 그 마음은 일부만 두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두셔야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기쁨을 취하는 모든 기쁨을, 그 공동체에 두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우리 예수님의 모든 기쁨과, 예수님의 모든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은 영물입니다. 저도 신학교에 가기 전에 초등부 6학년 남자반 교사만 8년 했어요.
우리반 아이들이요. 눈빛만 봐도 선생님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비록 선생으로서 좀 자격이 부족하고, 그리고 말주변이 없고, 좀 실력이 없어도
'이 선생님의 마음에 우리가 우선순위다.'
'이 선생님이 우리를 자기 자녀들만큼 좋아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거 알아요.
그러면 그 부서가 부흥합니다. 작은 교회가 세워지는 거에요.
아까 말씀드렸죠.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마음과
자기의 전부와, 자기의 모든 기쁨을 이 교회 공동체에 두신다는 것이 계시되었을 때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 자리를 뜰 수 없었고,
자기들도 마음을 찢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마음 전부와 자기의 모든 기쁨을 그 자리에 둘 때
전부 와 전부가 만나서 교회가 탄생한 겁니다.
작은 교회의 탄생은 원리에 있어서 오늘날도 그대로 지속된다고 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쁨은 어디에 계십니까?
주님의 이 교회에, 여러분의 모든 마음과 기쁨을 두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통 사람들이 아닌 것 알게 됐으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한 자 라고 하셨고
그 이유가 하나님의 모든 기쁨을 우리에게 두시는 시16:3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인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두신 곳,
또 주님이 모든 기쁨을 취하시는 이곳에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두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기쁨을 두기를 원합니다.
그러할 때 교회에 부흥의 역사가 있게 하시고
작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하시고
나의 헌신을 통해서, 주님의 나라가 멋있고 귀하게 참으로 세워져 나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저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