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말아야 할 것 딤전4:11~16 2022.01.09.스크랩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주인공 기독도(크리스천)가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에도 여정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갈대아 우르에서 출발해서
믿음으로 약속의 땅으로 나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방황하는 광야를 지나,
안정된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도
우리의 신앙을 잘 표현합니다. 출발과, 과정과, 도착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앙 여정에서 경험한 것을
영적으로 낳은 아들인 디모데에게 전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떤 단계를 거치며, 성숙과 변화로 나아갈 것인가?
이것이 2022년 연초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주제입니다.
◑1. 너의 성숙함을 나타내라
딤전4: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성숙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성숙은 영적인 성숙을 의미합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내가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났으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자라가야 합니다.
영적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멈추어 서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앞으로 가든지, 뒤로 밀리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내가 오랫동안 정체되어있는 것 같다면, 그건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뒤로 물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영적으로 자라가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드러내라고 합니다.
성숙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알게 된다는 거죠.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끝이 없습니다.
깊은 산으로 가다가 비경을 만나면, 그냥 산을 내려가고 싶지 않습니다.
더 깊은 곳으로 가면 더 멋있는 곳이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청난 영적인 경험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어떤 한 부분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고, 그분을 우리가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심전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딤전4:15
바울은 자신이 디모데에게 신앙을 전수한 것처럼
디모데가 또 다른 사람에게 신앙을 전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숙함을 통해 또 다른 사람에게 성숙이 전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7절에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연단’은 참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것을 이어진 8절에는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라며 육체의 연단과 비교합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들의 눈물을 보면 압니다.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면 대부분 웁니다. 왜냐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습니까?
피와 땀이 서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연단은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훈련을 통해 조금씩 축적된 힘이 어느 순간 발휘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습니다. 약간이라는 말은 “잠깐”이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연단으로 오는 유익은 잠깐입니다.
그러나 경건을 위한 연단은 범사에 유익하고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습니다.
역도 선수들도 한순간에 무거운 무게를 들지는 못합니다. 아주 조금씩 들다가 나중에는
어마어마한 무게를 들고 버텨냅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살다보면 우리를 짓누르는 인생의 무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영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성숙이 없으면 영혼의 빈사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성숙해야.. 그 삶의 무게들을 지탱해 나가게 되는 거죠.
골다공증이 그렇습니다. 뼈의 골밀도가 점점 없어집니다.
그래서 넘어지면 뼈가 다 부러져 몸져눕게 됩니다.
영적으로도 골다공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자신의 영혼이 텅 비어갑니다.
육체는 세월이 가면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건강식을 먹고 운동을 해도, 육체적인 쇠잔함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고백합니다.
겉사람은 낡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쇠하여지는 육체를 위해서만 투자를 합니다.
몸에 집착하는 동안에는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어떻습니까?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영혼의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영혼의 변화와 성숙이 일어나게 될 때
이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세상의 무게에도 견뎌내는 영혼의 강인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근육이 단단해지는 것보다 영혼이 단단해져야 합니다.
육체는 어쩔 수 없이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상승곡선을 그려가야 합니다.
▲스포츠 경기를 보아도 전반전에는 강하다가 후반전에 급격하게 힘을 잃고 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뒷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전반전에는 조금 헤매는데 후반전에 가서 더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후반전에 다 약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잘하는 것입니까?
전반전은 헤매더라도 후반전에 만회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후반전에 더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게 낫습니다.
갈렙과 같은 사람은 후반전에 더 강했던 인물입니다.
엘리 제사장 같은 사람은 후반전에 숱하게 자책골을 먹습니다.
갈수록 잘하는 것, 처음보다 끝이 더 좋으려면 만만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연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헬라어로 ‘짐나조’라는 연단은 운동선수가 경기에 나가기 전에 몸을 준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들, 국제대회 나가는 선수들이 얼마나 땀을 흘리며 훈련을 합니까?
이것이 연단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에 이 연단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초기부터 훈련해야 합니다.
좋은 교회에서 좋은 인도자들을 만나서 제대로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도 훈련입니다.
저절로 기도가 터지는 법은 없습니다. 훈련은 습관을 바꿉니다.
우리 안에는 마음대로 살고 싶은 욕망,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습관들이 있습니다.
죄 된 습관들을 바꾸어 내는 작업을 하려면 훈련을 해야 합니다.
죄를 짓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져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으로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훈련을 해야 하고,
그 훈련이 쌓이면 제2의 천성이 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계속해서 디모데의 신앙 멘토 역할을 합니다.
신앙이 성장하려고 하려면, 본을 보여주는 멘토가 있어야 합니다.
운동도 그렇습니다. 혼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본문 12절에는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는 젊은 사역자입니다. 그래서 그가 가르치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나이를 많이 따집니다. 어디를 가든지 나이를 묻습니다.
나이가 어리면 약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이는 중요합니다. 살아온 삶의 경륜이 있고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적인 나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새로운 질서가 있습니다.
나이가 몇인가 하는 것보다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영적 성숙도입니다.
육체의 나이와 영적인 나이는 비례하지 않습니다. 영과 육의 세계가 구분되어야 합니다.
육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영에 눈을 뜨지 못하면, 육의 나이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눈을 떴는지, 복음에 눈을 떴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의 엘리트입니다.
젊은 나이에 산헤드린 공회원이 된 것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굉장히 지성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 뭐가 나타납니까? 전혀 영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고린도교회도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젖을 먹고 딱딱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갓난 아이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 권위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습니까?
이것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나이에 걸맞게 신앙의 여정 속 영의 세계에 눈을 뜨고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어야
그것을 성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성숙을 위해서 본문 12절 하반절은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라고 말씀합니다.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본이 되라는 것입니다.
본이 된다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닮아가야 할 대상이십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려면 내가 본 것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본 만큼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내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교회 안에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분들입니다.
내 믿음만 지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내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노출되기 시작합니다.
노출될 때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고 있는가?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믿음의 실력 이상을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가정 교육입니다.
신앙의 대를 잇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1세대가 100 정도 뜨거워도 다음세대로 넘어가면 70-80 정도가 됩니다.
이마저도 잘 전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신앙의 계승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실체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은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살아본 다음에 “내가 해보니 좋더라” “내가 살아보니 이 말씀이 진리더라”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우리의 고민은 성경 해석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있습니다.
신앙은 이론만으로는 안 됩니다.
▲1. 본을 보여야 하는 것 중에 첫 번째는 ‘말’입니다. 성숙은 혀가 중요합니다.
나의 혀가 스스로 통제되고 있습니까? 이게 참 어렵습니다.
그다음으로는 행실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말과 행실 그 외에도 믿음과 정절 사랑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성숙에 대한 매우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결국 내 안에 있는 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문제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죄의 영향력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의 종노릇 하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시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죄에 끌려다니지 않고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3절에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존 오웬은 “죄를 계속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죄가 너를 계속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죄는 우리를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 죄의 속박으로부터 이겨내는 끝없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죄로부터 자유를 얻고 선을 행할 능력이 강해져 가는 것이 성숙입니다.
말과 행실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그런 변화가 먼저 믿는 자 안에서 본이 되어야
그것을 성숙이라고 합니다. 따르고 싶은 신앙이 되는 것이 성숙이라는 것입니다.
▲영적 성숙을 위해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본문 13절에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세 가지를 다루는데 첫 번째는 말씀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읽고 몸에 새겨가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그냥 낡고 뒤떨어진 구전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영감된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가운데 성령이 임하시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은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렇기에 말씀을 보는 자체가 매우 중요합니다.
요즘 교회에서 성경통독도 하고 필사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참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이 나도 모르게 살찌워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선명하게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우리의 삶의 의문들이 하나씩 풀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이 우리의 영적 성숙에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2. 두 번째는 다른 사람들이 말씀대로 살도록 권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내가 은혜받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내가 예수를 잘 따르면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때 나를 따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가이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 권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교회에는 ‘권사’라는 직분이 있습니다. 권사님들의 역할이 권면입니다.
일종의 멘토 역할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성장을 나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가르치는 일입니다. 교회의 핵심 사역 중 하나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누가 가르치느냐도 참 중요하고, 어떻게 가르침을 받는가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성도들이 영적으로 자라갑니다.
교회는 주님 오실 때까지 이일을 계속하게 됩니다. 교회는 가르치는 교육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배울 때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안 배우면 성장이 멈춥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
또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가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성장에 참 중요하다는 것을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세 번째로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은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자신을 계속 점검하고 평가하라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 대한 평가를 게을리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남들을 평가하는 것에 더 열심을 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면 자기 세계에 갇혀버리게 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지 않으면 스스로를 속이게 됩니다.
이것은 말씀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지 말고 나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오래 믿은 사람들, 교역자들이 범하기 쉬운 죄입니다.
다른 사람을 계속 판단하면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고 맙니다.
자기를 성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기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것, 참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변화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을 접할 때 일어납니다.
나보다 신앙이 월등하고 탁월한 사람을 만나면 자극이 됩니다.
그분을 통해 내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항상 헷갈립니다.
서로 판단하게 되고 내가 잘하고 있는지 아니면 부족한지,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영혼을 세워가는 사람들은 남이 아니라 자신을 통찰하며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시간을
많이 가집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비난하기보다 자신 안에 있는 연약함을 보아야 합니다.
내면의 소리를 듣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내 목소리를 내려고 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성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있습니다. 바로 고난입니다.
잘 나갈 때는 모릅니다. 그런데 고난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게 됩니다.
야고보서 1장 4절에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고난 속에서 인내하면 그 인내를 통하여 온전함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계속 성숙해 가는 신자들의 특징은 고난입니다.
욥이 순금같이 나오게 되는 모든 과정 속에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고난이야 말고 우리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믿음이 여물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순례는 일평생입니다. 멈추어 있지 않고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마라톤을 할 때 초반에 선두로 달리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초반에 질주한 사람은 나중에 위험합니다.
정말 노련한 마라토너는 똑같은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꾸준하게 달려갑니다.
한때 열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동받고 한두 번 열심히 하는 것,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굴곡이 많으면 위험합니다.
챔피언은 기복이 없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하고 변함없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에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골인 지점까지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끝까지 달려갈 수 있습니까?
자신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고 날마다 성숙함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영혼의 부를 축적하시길 바랍니다. 위대한 영혼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영혼이 자라가고 세워져 가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뿐만이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선한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본문 16절 하반절에는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성숙함을 추구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개인적인 성숙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거룩하게 살아가는데 세상과는 분리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갈수록 신앙이 축소됩니다.
점심시간에도 혼자 밥 먹고 종일 기독교 채널만 보는 것은 신앙의 성숙이 아닙니다.
신앙의 성숙은 그 이상입니다. 내가 죄를 안 짓고 살아가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신앙이 주일성수와 십일조, 술·담배 안 하는 것 이상을 못 넘어갔습니다.
물론 기본을 지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실체를 드러내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세상 속에서 진가를 발휘해야 합니다.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 복음은 세상 속에서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으니까 겁을 냅니다.
자꾸 작아지고 어쩔 수 없이 다시 교회로 도피합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구원으로 끝나버립니다.
나의 구원으로만 끝나면 안 됩니다. 나의 변화가 세상의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나의 신앙이 가정과 직장에서 빛을 발휘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입니다.
연초에 우리는 신앙이 어디 지점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지를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어디 지점에 와 있는지 한번 보십시오. 지금 있는 곳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신앙생활 몇 년을 해왔든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훨씬 더 깊은 세계가 있습니다.
훨씬 더 풍성한 하나님의 약속이 앞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족하거나 여기서 멈추어 있지 않고
신앙의 성숙을 향하여 결단하시고 연단하시고 훈련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연말에는 하나님이 나를 자라게 하신 것에 대한 감격과 기쁨을 표현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