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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8편,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신비

LNCK 2022. 4. 20. 11:36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신비          시8:1~9            여러 설교 정리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본 시의 저자 다윗은 여호와를 가리켜 '주'( 아도나이)라고 부르고 있는 바,

이는 하나님의 왕적(王的) 측면을 강조하는 말이며(왕상 1:11, 43, 47)

아울러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을 나타내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147:5).

 

“온 땅에 아름답다 majestic”라는 말을 다른 번역에서는   *beautiful 아님
“위엄이 넘친다” “크다” “장엄하다” “뛰어나다”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름답다”는 표현은 단순히 예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두렵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이름'과 '영광'은 히브리시의 일반적 특징인 대구법의 사용으로

의미를 서로 보완하고 있습니다.

주의 영광이 온 세상 피조물을 다 덮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새번역)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저 하늘 높이까지 주님의 위엄 가득합니다.'   

 

▲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은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2

 

“대적”과 “원수”, “보복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는 존재들입니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권능을 세우시고 그들을 잠잠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바로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으로 그렇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리석은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창조주의 이름을 부인하고 교만으로 잘난 체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고전 1:26-31)

 

한편, 이 구절은 예수님에 의해 메시야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어린아이들의 찬송에

적용되었습니다. (마 21:16)

 

하늘에서만 여호와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래에 있는 땅도 그분의 위엄을 선포합니다. 

하늘에서는 별들이 장엄하게 자기 궤도를 달리며 여호와의 능력을 증언합니다. 
그러나 땅에서는 그분의 능력이 작은 것들에 나타나 있습니다. 

젖먹이의 입에서 나오는 작은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여호와의 능력을 증언하지 않는가요! 
우리는 어린아이를 보면서 우리가 잊어버린 하나님을 다시 알게 되지 않는가요! 

세상에서 학식 있는 바보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어린아이들의 웅얼거리는 소리는 
그들보다 더 큰 소리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지 않는가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혀를 붙들어 매고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 않지만,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젖먹이는 하늘의 하나님의 영광을 증언하지 않는가요!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다윗은 본절에서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년간의 목자 생활을 통하여 밤의 하늘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관찰에 근거하여 신앙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이토록 감탄적으로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다윗은 주의 손가락으로 천지를 만드셨다는 표현으로써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은연 중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광활한 우주를 하나님께서 간단하게 창조하실 수 있었다는 사실을

다윗은 이 은유적 표현을 통해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과 같이 육체적 존재가 아니시며 영적인 존재이시지만

천지 창조의 생생한 현장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

다윗은 이처럼 신인 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1절에는 시인의 시선이, 의 온 땅과 하늘과 창공을 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했고,

2절에는 시인의 시선이, 어린아이와 젖먹이 같은 '사람'에게로 옮겨왔다가

 

3절에서 시선이, 다시 밤하늘로, 별들로 옮겨갔다가

4절에서 시선이, 다시 사람에게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이 광활한 천체에 비해 인간은 참으로 보잘 것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하물며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는 너무도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에 다윗은 크게 놀라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높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본절에서 주께서 사람을 생각하신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염려해 주시고 기억해 주셨다는 뜻으로,

이는 구체적으로 인생을 만물 중의 으뜸으로 창조해 주셨다는 다음 구절들(5-8절)의 내용과 관계있습니다.

 

‘인자가 무엇이관대... 돌보시나이까’

여기서 '인자'란 앞절의 '사람'과 동의어로서, 유력한 사람이나 존귀한 사람을 뜻합니다.

 

'돌보시나이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카드'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동사인데,

여기서는 '주의깊게 돌보다'(attend to with care)라는 뜻으로 사용 되었습니다.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여기서 '천사'는 원문상으로 '하나님'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엘로힘'의 번역입니다.

초기의 많은 역본들은 이를 '천사들'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70인역, 벌게이트역, 시리아역본 등)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70인역(LXX)을 따르고 있습니다(히 2:7, 9).

 

혹자는 이 번역을 반대하여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에게 비교하는 것이 신성 모독죄에 해당합니다고 여겨

'천사'로 의역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혹자는 본절의 '엘로힘'이 삼상 28:13과 슥 9:7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단순히 신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고 주장합니다. (Alexander, Anderson, VanGemeren).

 

인간이 하나님과 비교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 견해가 더 타당합니다. (히 2:9)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만물에 대한 인간의 위치와 임무를 규정하는 구절입니다.

'영화와 존귀'는 왕의 표식(marks)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것들로 인간에게 관을 씌우셨다는 말은

인간을 만물을 다스릴 지배자로 세우셨음을 나타냅니다.

 

이와같이 만물을 지배하는 지배권은 본래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에게 그 지배권의 일부를 할당시켜 주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듯이

인간은 만물의 지배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앞장서야 할 임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다스리게 하시고...발 아래 두셨으니’

이는 창 1:28의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과 유사한 표현입니다.

왕에게는 백성이 종속되어 있듯이, 하나님은 인간의 통치권 하에 만물을 종속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간의 지배권은 인간의 부패와 타락으로 상실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와 같은 지배권은 회복되었습니다. (마28:18)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본 절은, 집 안에 있는 가축뿐만 아니라 들짐승까지도

인간의 지배권 하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의 결과로 짐승들의 반역 행위가 나타났으나 (왕하17:25, 26, 욥 40:24, 41:1-10).

메시야의 시대에 짐승들은 완전히 인간의 지배 하에 있게 될 것입니다. (사11:6-9, 65:25)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공중의 새...다니는 것이니이다’

여기에는 모든 짐승들(7절) 외의 모든 생물이 포함됩니다.(창1:28)

이처럼 땅과 바다와 공중에 있는 모든 생물이 인간들의 지배하에 있게 된 만큼

인간의 영광은 왕적인 영광입니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여호와 우리 주여...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다윗은 처음에 시작했던(1절) 말로써 본 시를 마무리짓고 있습니다.

 

 

◑적용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신비"  

여기서 '신비'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보통 인간의 이성으로는 깨닫기 어렵고, 세상 관점으로 보면 비상식적인 얘기인데,

여기에 진리를 담고 있으므로,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신비 mystery'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난 2천년간 내려온 전통적인 기독교는

자꾸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자리로 스스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helpless infant (절대적 도움을 받아야 하는 갓난아이)의 능력입니다. 

 

본문 시8편을 얼핏 보면, 1절과 끝절인 9절이 모두 여호와를 찬양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 같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햄버거에 비유하면,

빵에 해당하는 1절과 9절을 제외하면

중간의 패티에 해당하는 2~8절이 모두 '사람의 존귀함'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2절에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등장하는데, 누가 어린아이와 젖먹이인가요?

 

1) 다윗 자신을 뜻한다고 봅니다. 그는 혈색이 좋은 소년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셔서 골리앗을 이기도록 하셨습니다.

즉 어린아이를 통해, 원수와 보복자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2절에 나오는 “대적”과 “원수”, “보복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는 존재들입니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2)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고 봅니다.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연약한 사람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시고

그렇지만 결국 십자가로 원수 사탄 대적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정복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원수를 그분의 발 아래 두셨습니다. (시110:1, 고전15:27).

 

3) 사도들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위대한 자들과 비교해 볼 때,

외면적으로는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처럼 보잘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이리떼 가운데 보내진 어린 양들 같았습니다.

 

4) 저와 여러분같은 연약한 성도, 하나님의 자녀를 뜻합니다.

1~4번 넷 다 맞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이런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53:2

 

그래서 심지어는, 세상에! 세례 요한까지 헷갈릴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이 맞습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라고 물어보기까지 했습니다. 마11:3

 

그리하여 예수님도 종종 이 진리를 전해 주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11:25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눅18:16

 

우리는 종종 이 기독교의 신비를 잊어버릴 때가 정말 많습니다.

개척교회 목회자들은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담하고 예쁘고 그럴싸한 교회 건물 하나 지어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그런데 대개의 경우, 하나님은 이런 기도에 매몰차게 외면하십니다.

 

선교사들은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부자 장로님, 권사님이 후원자로 연결시켜 주셔서,

여기 이렇게 할 일이 수만 가지 널려 있는데, 그런 일들을 다 원활히 감당하게 하옵소서!'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못 들은 척 하십니다.

 

또 어떤 영향력 있는 주의 종은, 이제 자기 사역이 정상 궤도에 올라섰으니

자기에게 건강이 좀 더 허락된다면, 더 왕성하게 활동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좀처럼 하나님은, 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건강, 또는 자기 가족의 건강 문제로 인해.. 늘 시한폭탄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 같은

위기감 가운데 가까스로 사역해 나갑니다.

 

또 어떤 교회나 선교단체는, 이제 사회에서 인정도 받고, 한 번 열심히 사역해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싶은데.. 그들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찰거머리처럼 따라다니고 붙어다니면서, 자기들의 사역을 방해하고 훼방하는데

하나님은 좀처럼 그 거머리들을 떼주시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이게 바로 "기독교의 신비"인데, 다시 말하면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약한 자를 들어서 쓰십니다.

약한 자를 들어서, 능력을 부으셔서 강하게 만들어 쓰시지만,

강한 자를 불러서 쓰시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하고 멸시받는 그들을 도구로 삼아, 이 세상을 정복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들은 가장 겸손한 자들입니다.

 

주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내 나라에서도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위대한 자가 되고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자 하는구나.

그러나 내 나라는 젖먹이들의 나라이며, 겸손한 자,

자신들이 스스로 보기에도 작은 자, 다른 사람들이 멸시해도 꿋꿋이 견디는 자,

세상에서 위대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 자들의 나라이다.'

 

-그래서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 수많은 강대국 카드들을 다 버리시고, 작고 약한 나라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말구유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유력 가문이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12 제자들도 한결같이, 갈릴리 시골뜨기 출신들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처음에는 가말리엘 문하에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강한 자였으나

 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스스로 낮아지고,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후6:8~10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런데 아직도 강철왕 카네기가 되고,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가 되고, 

무슨 거부가 되고, 무슨 거상이 되어서 주의 일을 하겠다고 한다면... 정통 기독교는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을 불러 쓰지 않으시는데,

사람들은 그런 자가 되어서, 주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엇박자가 생기는 것이고.. 그게 사실은 주의 일이 아니라,

자기 야망을 '주의 일'을 빌미로 이루고자 하는.. 아주 유아기적인 상상입니다.

 

시편 49: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 3~8절은, '어린 아이와 젖먹이' 같은 사람이 가진 영광을 절절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사람이 존귀한 것은

하늘과 베풀어두신 별들은.. 다 '어린 아이와 젖먹이'같은 우리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3~4절

 

우리는 대 자연을 보면서, 꽃들과 나무들과 바람과 햇볕을 보면서, 

이 모든 것을 나를 위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하심을 감사하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2) 사람이 존귀한 것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4~5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영화와 존귀'는 왕의 표식(marks)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것들로 인간에게 관을 씌우셨다는 말은

인간을 만물을 다스릴 지배자로 세우셨음을 나타냅니다.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장차 천사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갖게 될 것입니다. 히1:14

 

무엇보다 사람이 존귀한 것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목숨을 버리고 나와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버리시고,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3) 사람이 존귀한 것은, 세상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6~8절

마치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다른 말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군림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창조질서의 보존(자연 보호)'에 힘쓰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이 권세를 사용하는 길이 됩니다.

 

성도가 신앙이 성숙되고 깊어질수록

자신은 비록 '어린아이, 젖먹이'같이, 외면적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자신이 너무너무 존귀한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늘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1, 9절

뭘 자꾸 '달라, 달라' 하는게 아니라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분명한 권위의식'이 필요합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막11:28)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내쫓으시자, 이를 본 대제사장들이 물었던 질문입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무슨 권위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권위의 근거에 대하여 가장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 사도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서신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임을 밝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 
갈1:15절, 하나님이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셨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어떤 인간적인 권위나 결단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것은,

본인에게는 대단한 사건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객관성이 없는 한낱 신비 체험에 불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고후12:11) 
 
성경적 권위는 학벌이나 외모로부터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며, 실제 누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12:12) 
 
이런 권위의식은 누구에게든 필요합니다. 
거드름 피우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에 확신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이 일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라는 사명감입니다. 
열정은 이처럼 그 권위가 하늘로부터 온 사람들에게서 나타납니다. 
그 권위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카리스마라는 능력 또한 하늘로부터, 권위와 함께 주어집니다.
  
▲각자 자기 고유의 역할과 독특한 사명이 분명히 있습니다.
아주 작은 것들, 예를 들어 개미나 지렁이 같은 것들은 
이 세상에서 별로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렇지가 않다고 하지요. 
 
개미가 한꺼번에 없어지면, 인간이 살아가기가 무척 힘들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생물학과 교수인 윌슨 박사의 말에 의하면 
세계에는 시베리아의 툰드라 지방에서 부터 더운 열대 지방까지 
 약 8,800여종의 개미들이 살고 있으며 
전 세계 개미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정도로 많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보기에 별것 아닌 개미들이 일시에 지구상에서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전문가들은 이 세상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개미들은 식물의 씨앗을 분산시켜 주고, 씨앗에 해가 되는 벌레들을 잡아먹으며 
땅을 헤집고 다녀서, 식물이 자라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지렁이 역시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징그럽게 보이지만 
땅 밑을 기어 다니면서 흙을 작은 입자로 부드럽게 만들어 
식물이 뿌리를 쉽게 내릴 수 있게 하는 큰일을 담당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비옥한 땅 1에이커에 있는 지렁이 수백만 마리가 
매년 못 쓰는 땅 20톤을 부드럽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이밖에도 많은 작은 생물체들이 나름대로 이 땅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결코 쓸데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전능하신 능력을 느낄 수가 있는 부분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이 능력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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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찬양의 시이며 특히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본시의 내용은 창세기 1장의 기사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즉,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전체적인 창조와 함께

인간의 탁월한 위치가 기록된 것과 같이 본시에서도 같은 내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 '달', '별'과 같은 용어들이 기록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이 시는 밤의 축제에 많이 암송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한편 표제어의 '깃딧'은 아직까지 분명한 의미를 알 수 없는 용어이나

일반적으로 악기의 종류이거나, 멜로디 또는 음조의 스타일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깃딧'을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의 히브리 어원을 추적하면서,

포도를 밟고 포도주틀에서 일하는 자들을 위한 즐거운 노래를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깃딧”이란 제목이 붙은 시편은 이 시 외에도 두 편이 더 있죠(81, 84편).

 

이 두 편의 시가 모두 즐거운 시라는 점에서

이 머리말이 붙은 시는 모두 기쁨의 시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