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이 있는 곳에는 찬양도 넘친다 시9:1~20 여러 설교 정리
▲시9편이 겨냥하는 대상이 누구인가?
얼핏보면 9:5절, 15절, 19절에 '이방 나라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다윗은 지금 '이방나라들의 공격'으로 인한 위험에 처한 가운데서,
'이방 나라'를 겨냥한 시로 여겨집니다만,
'이방나라'를 뜻하는 히브리어 '고임'은, 이스라엘이 제외한 모든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로
종종 '개' 같은 비하하는 표현으로 쓰입니다. 원래 이방인을 멸시했으니까요.
'이방인과 같다'는 말이 성경에 종종 나오는데, 믿음 없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죠. 진짜 이방인이 아니라!
결론적으로, 시9편과 10편에 나오는 '이방나라'는 진짜 이방나라 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만)
다윗을 대적들을 악인들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봅니다.
왜냐면 시9편과 10편이 “원래 한 개의 시”라고 보는 설이 유력한데,
10편에서도 ‘이방나라’(고임)가 나옵니다. *10:16
그런데 시10편을 읽어보면, 다윗은 처음부터 끝까지 '악인'들을 겨냥해 시를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모압과 암몬 같은 이방나라가 그 대상이 아니라요.
그럼 시9편도 다윗이 ‘이방 나라’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악인’을 겨냥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일례로 사울 일당이 되겠죠.
그런데 크게 보면, 다윗이 겨냥한 대상이 ‘(사울 일당같은) 악인’이든,
‘암몬, 모압 같은 이방나라’이든.. 시의 주제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시의 주제는, 악인(또는 이방나라)의 압제에, 의인이 기도로 승리하고, 하나님이 결국은 도와주신다.. 이거든요.
<구조>
주의 기사에 대한 찬송(1-3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4-12절)
하나님의 도우심 간구(13-20절)
◑주의 기이한 일에 대한 찬송(1-3절)
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에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시편 기자인 다윗은 여호와께 찬양을 드리겠다는 강력한 결심을 보여 줍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암몬 같은 이방 나라와) 전투가 끝난 후 다른 사람들은 기뻐 좋아하지만
다윗은 조용히 하나님 앞에 혼자 무릎을 꿇고 전쟁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쟁의 한순간 한순간을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패배대신 승리의 영광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북받쳐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드리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약간의 가식이나 자기 자랑도 없습니다.
100%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며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담대히 이번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하였습니다.
2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주1) '지존하신 주'
1~2절에서, 다윗은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2가지를 결심을 합니다.
첫째는 ‘주님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둘째는 ‘지존하신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그 이유를
3-6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3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주 앞에서 넘어져 망했다’는 것은
원수들의 후퇴가,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것임을 묘사합니다.
다윗이 드리는 감사와 기쁨의 이유는 원수들이 도망을 가다가 넘어졌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와 송사를 변호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셔서 의롭게 심판하신다고 신앙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많은 원수들을 물리쳐 주신 경험을 했습니다.
암몬을 물리친 경우도 그런 경우입니다 (삼하10:6-14, 12:26-31).
다윗이 대적을 물리칠 때 그들이 도망하여 멸망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승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과거에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셔서 대적을 물리쳐 주시고
그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 것을 전심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전심으로'는 전 인격적인 감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행하신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하나님의 기사를 모두 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일들을 기억하여 선포하는 것은
미래에도 함께 해주실 것을 확신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 (4-12절)
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이는 다윗의 승리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의 결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셨다'는 표현은
곧 하나님께서 의로운 심판을 하기 위해 강림하시거나 효과적으로 개입하시는 상황입니다.
5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6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다윗의 대적이 완전히 패망하여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대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엄하게 행해졌음을 보여줍니다.
7 여호와에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8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9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다윗은 본 구절의 내용을 노래함으로써 하나님의 양면성을 표현해 주었습니다.
즉, 악인에 대하여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재판장이 되시는 동시에
당신을 의지하는 겸손한 자에 대하여는 인자하신 보호자가 되신다는 양면적 진리를 보여줍니다.
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주의 이름을 아는 자’
이는 하나님과 연합된 삶을 사는 자, 또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와 동행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알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다'는 체험적 지식을 가리키는 인간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진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의지하다', '찾는다'는 말은 특별히 위기를 맞이했을 때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믿음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핍박하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찾았으며,
그러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안전하신 보호를 체험하였다.
이러한 체험에 근거하여 그는 본 구절의 말을 담대하게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37:28).
그리고 특히 10절에 사용된 두 동사(의지하다, 찾다)는
앞에서 사용된 '알다'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11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백성 중에’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이방 나라들 중에'라는 말입니다.
12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피흘림을 심문하시는 이’
피흘림 당한 자들을 위해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생명의 근원인 피를 취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복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창4:10, 9:5).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저희'는 환난 때에 여호와를 의지하며 찾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에 대해서는 보수(報讐)하시나
겸손히 그를 의지하고 찾는 자들은 환난 중에 기억하셔서 구원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양면성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가난한 자'란 문자 그대로 '가난한 자'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은유적인 표현으로는 원수들에게 압제당하는 자, 고통당하는 자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간구 (13-20절)
13절부터, 다윗은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데,
아마 다윗이 과거의 승리의 경험으로 되돌아가 (1~12절) *과거의 회상
그때의 심정으로, 지금 처한 어려움에 대해 기도 (13-20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현실에 새로운 대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미래의 기대
13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즉, 다윗은 과거의 놀라온 체험으로 어느 정도 원수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껏 그를 위협하는 세력들이 이스라엘 주위에 잔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위기중에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14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5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이방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이는 기도 응답의 결과에 대한 노래입니다.
여호와의 응답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 악인들에 대한 재앙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열방의 멸망은 하나님의 재앙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또한 자기들이 악을 행한 보응으로써 받은 자연스러운 결과였죠.
본 구절을 통해 볼 때 다윗을 괴롭힌 대적들은 주위의 이방 나라들이며
이들은 다윗을 대적하여 전쟁을 시도했으나
결국 그 전쟁에 의해 파멸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힉가욘, 셀라)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자신을 대적한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셨음을 의미합니다.
‘힉가욘, 셀라’ - 내용상 하나의 주제가 끝났음을 알리는 표시입니다. 주2)
17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18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18절은 17절과 대조되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궁핍한 자'는 17절의 '악인', 곧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사람으로서
단순히 부요치 못한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악인들에게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나 하나님께 소망을 둔 의로운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19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인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노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다윗이 일반적으로 '사람' 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히브리어 '아담'이란 말 대신에
이 용어를 본 문맥에서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에 인간의 연약함을 의도적으로 대조시키기 위함입니다.
이와같이 인생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을 때 여지없이 멸망당할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생이 하나님을 이기려하는 행위는
실로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20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자기는 인생뿐인줄 알게 하소서’
여기서 인생은 19절의 인생과 같이 '아노쉬'입니다.
다윗이 이 단어를 거듭 사용한 것은 그만큼 인간이 연약하며 제한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될 것입니다.
◑적용 / 부흥이 있는 곳에는 찬양도 넘친다
▲1. 솔직한 기도
19~20절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악인을 벌해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내용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시인이 처한 상황이 악인으로 인해서
그만큼 처절하고 고달프고 힘들다는 의미로 수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하소연을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해 고통스럽다며 비명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욥의 친구와 같이 됩니다.
내가 가진 믿음의 틀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신앙의 전부는 결코 아닙니다.
그런 기도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고백으로 드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2. 부흥이 일어나면 찬양이 일어납니다.
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2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3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11절.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선언했던 것처럼(1-2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은 이렇게 전파력, 파급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움직여서
그들과 함께 찬송을 드리게 하기까지는 만족함이 없습니다.
복음 사역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는 것은
찬양 부흥이 놀라우리만큼 늘 함께 일어났습니다.
말씀 중심으로 종교 개혁을 이루었던 루터는 많은 시와 찬송가를 썼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와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그가 음악적 재능이 있었다는 게 아니라
부흥 운동이 일어나면, 찬양 부흥도 언제나 동시에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현대의 부흥 운동을 일으켰던 존 웨슬리(John Wesley), 휘트필드(Whitfield),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존 뉴턴(Newton),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사람들도
찬양 부흥도 동시에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메시지와 더불어, 당시에 찬양을 통해서 식어졌던 영성을 다시 회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선포하시며 나타나시는 영적 은혜의 계절이 되면,
마치 봄날에 숲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쾌활하고 활기찬 노래 소리처럼,
성도들의 활기찬 찬양이 여기 저기서 들려옵니다.
형제들이여, 노래하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거하신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시온에 오르면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성도들의 찬양 중에 거하시고,
그분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특별한 경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 입술에, 그리고 우리 공동체의 입술에 찬양이 시들해지면,
부흥이 필요한 시기라는 싸인입니다.
부흥이 먼저냐/찬양이 먼저냐.. 달걀과 닭이 먼저냐 라는 질문처럼
뭐가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심령 부흥에는 찬양이 반드시 따른다는 것입니다.
심령에 부흥이 일어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찬송치 않겠습니까!
우리 개인도/가정도/공동체도, 찬양의 부흥이 다시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심정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3. '사망의 문'에서 '딸 시온의 문'으로 바뀌기를 기도해야 됩니다.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13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이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찬사인가요! 얼마나 영광스러운 구원인가요!
우리가 병들었을 때나 죄 가운데 빠졌을 때,
절망 가운데 있을 때나 유혹에 빠졌을 때,
우리는 지극히 깊은 곳으로 떨어졌고, 그 깊은 곳에서 영구히 사슬에 묶일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밑에는 영원하신 팔이 있었고,
그 팔에 안겨 우리는 하늘의 문에 이르도록 올려집니다.
'사망의 문'에서 구원 받는 것입니다. 죽음(완전 파탄) 일보 직전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망의 문에서 나를 일으키시는 주님'이 되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딸 시온의 문'으로 인도하십니다.
13~14절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딸 같은 시온의 문" 시온의 문이 그만큼 사랑스럽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사망의 문(입구)'과 같았던 전쟁터에서, 구사일생으로 승리하고 돌아와서
'시온 성의 성문'으로 다시 들어오게 되는 장면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때 '시온의 문'을 지나면서, 다윗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감격스러우며, 안도감이 넘치며,
거기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겠습니까!
그래서 '딸 시온의 문'은 마치 '개선문'과 같은 곳입니다.
얼마 전에 전쟁터에서 겪었던 '사망의 문'과 지극히 대조적입니다.
시23편으로 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서
'잔칫상을 받고, 머리에 기름이 발라진' 상황과 같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우리가 어떤 곳에서 어떤 상태로 구원받았는지를 기억하고
앞으로도 그러한 구원을 받을 것을 기대하며,
마음을 다하여 즐거운 노래를 가장 높은 목소리로 하나님께 올려드립시다.
왜냐면 하나님은 나를 '사망의 문'에서 건져서
'딸 시온의 문' 즉 '사랑스러운 구원의 문'으로 다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혹시 오늘 '사망의 문'을 통과하고 있을지라도,
주님은 다시 우리를 건져 '딸 시온의 문'을 통과하게 하실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 입에도 '주의 구원을 기뻐하는' 찬양이 넘쳐야 하겠습니다.
..................................................
오늘 본문 시편 9편과 내일의 본문인 시편 10편은
본래 하나였다가 2개로 나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로는 히브리어성경과
히브리어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성경>
그리고 <70인역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성경>에는
모두 시편 9편과 10편이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9편에는 표제어가 있는 반면에, 10편에는 표제어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9편과 10편의 내용이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모두 22자입니다.
거의 2절씩 알파벳 순서대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알파벳시 Acrostic Poem, 답관체
오늘 시편의 표제어가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뭇랍벤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뭇랍벤’이라는 단어가 시편에서 여기에만 나오기 때문에 그 의미를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뭇랍벤은 ‘아들의 죽음’이란 의미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NIV영어성경은 ‘아들의 죽음을 노래한 곡조를 따라
(To the Tune of the Death of the Son)’라고 표제어를 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편은 어떤 배경으로 지어졌는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주1)
'지존하신 주'란 히브리어로 '엘리욘'인데
이는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 (사 14:!4), ‘다른 신들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97:9),
그리고 천지의 창조자(창 14:19)를 나타내며,
더 나아가 만물을 다스리는 위대한 왕의 개념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47:2;신 32:8).
이방의 거대한 군대를 물리치게 하신 하나님을 '엘리욘'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주2)
'힉가욘'은 '연주 방법'을 지시하는 용어입니다.
이 용어가 '묵상하다', '슬퍼하다', '탄식하다'는 뜻의 동사 '하가'에서 파생된 것으로 볼 때
'엄숙하게', '조용하게', '부드럽게'라는 의미를 가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