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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언약 체결에 나타난 복음

LNCK 2022. 4. 23. 17:40

https://blog.naver.com/karamos/222138894520

 

모세언약 체결에 나타난 복음         출24:1~11         2015.04.12.

 

서론

 

출애굽기(Exodus)는 하나님이 중보자 모세를 통해 택하신 백성을 바로의 지배로부터

구원해 내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을 예표합니다.

 

하나님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택하신 백성을 마귀의 지배로부터 구원해 내시는

복음이 바로 그 실체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200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시고

시내산에서 1년 동안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1년이란 시간 동안 십계명을 음성으로 들려주셨고,

‘언약의 서’(The Book of Covenant)라고 불리는 출애굽기 21~23장의 내용을 일러주셨습니다.

‘언약의 서’는 십계명을 어떻게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 볼 출애굽기 24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언약은 시내산에서 체결되었기 때문에 ‘시내산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는 1~18장까지 출애굽 사건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19~24장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으며,

25장 이후에는 언약을 체결한 백성이 성막을 중심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지,

성막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와 성막의 건설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출24장이 출애굽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관건이자 축이 된다는 의미죠.

출24장에는 성경 전체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숨겨져 있는데,

그 열쇠는 바로 ‘복음’입니다.

출24장에는 복음의 모든 요소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범할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24:1~2절에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너 모세만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불러 가까이 오게 하셨습니다.

 

구원은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지 않으셨는데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요6: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오늘 가족의 권유로 이 예배당에 나왔든, 친구의 권유로 나왔든,

직장동료의 권유로 나왔든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르셨기 때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택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범할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합니다.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너 모세만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24:1~2).

 

하나님은 백성의 중보자인 모세 이외에 그 누구도

하나님과의 간격을 범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도 백성들에게 이 간격을 말씀하셨고,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출19:12절에도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이 간격은 인간이 자의적으로 침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마음대로 침범하게 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아주 무서운 간격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간격을 범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인간은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간격은 한 마디로 ‘죄의 간격’입니다.

 

이 간격이 생겨나게 된 이유가 바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 간격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지음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사야 59:2절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인과 하나님은 직접 소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스스로의 힘으로 건널 수 없는 넓은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도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된 존재이며,

하나님의 원수이고,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엡2:3절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고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원수는 아무리 키 크고 잘 생겼어도 원수이고, 공부를 잘하고 똑똑해도 원수입니다.

 

또한 미국 사람, 한국 사람 할 것 없이 국적을 불문하고 원수는 원수입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이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자기의 능력과 지혜로 직접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중보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요14: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 언약의 중보자로 등장하는 것은 일종의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보고 모세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출 20:19).

 

모세는 하나님이 세우신 중보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것이 실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입니다.

다른 많은 종교에도 창시자가 있고, 탁월한 지식과 수완으로 종교를 만들었지만,

그들이 아무리 머리가 좋고 훌륭해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출24장은 우리에게 첫 번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분리된 채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살기로 고집하겠습니까?

그렇게 계속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살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기를 고집하겠습니까?

아니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과 화목하여 살겠습니까?

 

출24장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첫 번째 질문이 이것입니다.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은 중보자를 통해 택한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침묵하는 분이 아니시고 말씀하는 분이십니다.

대한민국 정치와 미국 정치가 서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미국은 국가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대통령이 국민들을 향해 직접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대통령의 견해를 듣기가 좀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무엇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인 것과 무엇을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중보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3절에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중보자 모세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율례를 백성에게 고했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모든 말씀은 ‘십계명’을 의미하고,

모든 율례는 출애굽기 21~23장까지 ‘언약의 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7절에 보면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낭독합니다.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 24:7).

 

하나님이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백성들에게 설명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본문을 낭독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증거하신 말씀을 설명하게 하고

낭독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출24:4절은 굉장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구약학자들은 구약성경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다양한 주장을 펼칩니다.

그 가운데는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을, 그 당시 학자들이 한데 모아 편집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꽤 많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모세는 단순히 ‘구전’(Oral Tradition)만으로 우리에게 성경을 전해 주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결코 말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지 않고 이 모든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명하셨고,

그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선지자들도 계시를 받아 기록한 것이지, 구전으로 남긴 것이 아닙니다.

말이라는 것은 한 두 사람을 거치면 내용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모든 말씀을 기록하게 해서 남겨 둘 것을 명하셨습니다.

 

고대 중동지방에서는 한 나라의 왕이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할 때

언약의 내용을 백성들에게 공포하였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그 언약의 내용을 듣고 받아들임으로써

언약이 체결되는 시스템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중보자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예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너희는 죄인이고 나와는 아주 큰 간격이 있는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힘으로는 내게 올 수 없지만 중보자 예수를 세웠으니

내가 세운 중보자 예수를 믿고 내게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결코 흐릿하거나 희미하지 않습니다. 명확하고 분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을 보니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3.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그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적인 반응을 보인다

 

다시 3절에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이처럼 신속하게 준행하겠다는

순종적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 앞에 꼼짝없이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은 바로를 이긴 분이시다!”,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 200만 명을 건너게 하신 분이시다!”,

“애굽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키신 분이시다!”, “매일 만나를 주시는 분이시다!”,

“반석을 쳐 생수를 공급하신 분이시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한 지 불과 한 두 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과 한두 달 사이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를

경험으로 알게 되었고, 엄위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거부할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합니다.

“예수님만 중보자가 된다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 “다른 종교도 다 좋은 의도 아니냐?”는 식입니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입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합니까?

아니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있습니까?”

 

잠1: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사람은

절대로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솔로몬 왕이 했던 말입니다.

나이가 많아 90세가 넘고 심지어 100세가 넘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열 살 짜리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지식의 근본이 있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게 되고

경험하게 되어 높은 지식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고 판단하고 거부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신문기사는 같지 않습니다. 신문기사는 비판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기자가 자기 생각을 바탕으로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자 중에는 말도 안 되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기자가 쓴 글들을 액면 그대로 다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에 비판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믿고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거부하면 자기가 손해 보는 것이고, 믿고 받아들이면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희생제물의 흘려진 피로 인해 택한 백성들의 죄를 사하신다

 

출24장에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제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피로써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4~5절에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는 언약을 체결할 때 단을 쌓았습니다.

단은 희생제물을 잡아서 불로 태워 제사를 드리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단을 쌓은 이유는 희생제물을 드리기 위해 쌓은 것입니다.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해 돌을 쌓아 그 위에 제물을 태워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웠습니다. 기둥이라는 것은 흔적의 증거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명소에 왔다가며 꼭 바위 같은 것에 낙서를 해 두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흔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둥을 세워 이 일에 참여했다는 증거를 삼았습니다.

 

열두 지파가 기둥을 세워 증거로 삼은 후에 청년들을 보내어 소를 잡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청년들을 보냈을까요? 이때는 아직 제사장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이 제사장이 된다는 원리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을 때였기에

청년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소를 잡아 단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6절에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청년들이 잡아온 제물의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그릇에 담고 반은 단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8절에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리며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운 ‘언약의 피’(Blood of the Covenant)니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모세는 희생제사의 피를 두 개로 나누어 하나는 단에 뿌리고

다른 하나는 백성들에게 뿌렸습니다.

단에 뿌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뿌렸다는 의미이고,

백성들에게 뿌린 것은 사람에게 뿌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단에 뿌린 것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해 주시도록 간구하는 목적입니다.

 

또 백성들에게 뿌린 것의 구체적인 의미는

백성들이 지은 죄를 사해 주시도록 간구하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대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통치하시는 대 원리가 히9: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율법을 준행하겠다고 했어도

그들 속에 있는 죄성으로 인해 그들은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갈3:10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모두 다 지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십계명을 다 준수하셨습니까? 아니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저주를 희생제물의 피로써 제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희생제물의 피는 예표에 불과합니다.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삼으시고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그 피를 단에 뿌리시고 백성들에게도 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제거해 주시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엡1: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진리는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까?

아무리 예배당에 앉아 있어도 “나는 예수를 믿지 않아!”,

“난 예수가 내 죄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

“예수는 그냥 훌륭한 선생님일 뿐이야!”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마음에 피 뿌림이 없는 사람이고 죄 사함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고 천국에 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까?” 이것이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흘리심이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지에 대해

확실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우리의 죄 때문인 것을 믿으십니까? 이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서 확실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5. 하나님은 죄 사함을 받은 백성들과 교제하기를 기뻐하신다

 

11절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죄인이 하나님을 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 뿌림을 받은 이후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백성들을 손대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도 아무 두려움이 없게 되었고,

먹고 마시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먹고 마신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고 교제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시고 함께 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주의 만찬을 행함으로

늘 기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해 주신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는 성도가 죽어 육신을 떠난 후에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계19:9절에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에서 혼인잔치를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주례를 많이 하다 보니 혼인예식이 기쁘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신랑 내지 신부를 사위와 며느리로 삼는 부모님의 경우

혼인이 꼭 기쁜 것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신랑 신부는 언제나 기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부모님이 반대한 결혼이지만 반대를 무릅쓰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부부로 공포되는 이 날을 그들은 엄청나게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천국의 기쁨도 혼인잔치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된 성도들이 혼인잔치를 하는 기쁨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은 사람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고 죽으면 천국에 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천국에서 복을 누린다는 것은 단순히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복’(Blessing)을 조금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복’(Bliss), 즉 말로 다할 수 없이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살아도 복되고, 죽으면 더 복이 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살아도 비참하고 죽으면 더 비참한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12~18절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시내산 정상에 오르게 되는데,

이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이것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왜 오셨다가 다시 가시고, 또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실까요?

요14:3절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우리가 갈 자리를 다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처소에 있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결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신이 아니고 피조물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만들지 못합니다. 자식은 부모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참으로 신묘막측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사람이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아 죄 사함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제거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분과 동행하게 되고, 죽어도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이 인간에게 세워놓으신 구원의 중보자는 오직 한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그 몸을 찢으시고 모든 피를 흘리시고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마련해 주셨습니다. 여호와 이레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부르셔서 “너희는 내가 세워놓은 예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단 한 분도 예수님을 믿지 못해 멸망 받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