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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1편 터가 무너질 때

LNCK 2022. 4. 24. 08:50

◈터가 무너질 때                   시11:1~7                  여러 설교 정리

 

표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본문 말씀은 다윗의 시입니다.

시편 11편은 내용상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3절에서는 다윗의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4~7절에서는 다윗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각각의 목소리는 분명히 다릅니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한쪽은 불안해하고, 한쪽은 평안해 합니다.

한쪽에서는 두려워하는데, 한쪽에서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절별 해석

 

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팔레스틴의 광야에는 적들을 피할수 있는 안전한 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친구들은 다윗더러 산으로 도망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친구들의 말을 불신앙적인 권고로 생각하였습니다.

산으로 피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믿은

다윗의 위대한 신앙을 엿볼수 있습니다.

 

한편, '새같이'라는 말은 다윗의 위기 상황을 적절히 비유한 말입니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가련한 새와같이 다윗이 적들에게 쫓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도망하라'(누디우)는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너는 도망하라'는 말이 아니고 '너희는 도망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곧 다윗이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도망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2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 하는도다

 

본래 원문에는 '보라'(히네)라는 감탄사가 맨 앞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본절은 다윗이 자신의 위험스런 상황을 설명하는 구절이라기 보다는

그의 친구들이 다윗더러 산으로 도망하라고 한 권면의 근거로서 제시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이 역시 다윗의 친구들이 그에게 권고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터'의 히브리어 '솨트'는 국가의 기강, 곧 법률과 질서(law and order)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국가의 법률과 질서가 지금 현재로서는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현 상황하에서 다윗의 친구들은 다윗이 그곳에 남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지적합니다.

 

4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친구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주는 다윗의 말입니다.

그의 눈은 공격해오는 적들에게서부터, 이 세상 주관자이신 하나님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성전'(헤칼)에 계시는 동시에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을 통해 볼 때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이중적인 인식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운 백성 중에 임재하여 계심을 나타낸 것이요

 

또한 여호와의 보좌가 하늘에 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을 나타내는 구절로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보다 위대하시고 초월하여 계신 분임을 묘사한 것입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중에 내재하여 계시는 동시에

모든 인간들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으로서

그 어떠한 피난처보다도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되심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특히 여호와의 보좌가 하늘에 있다는 다윗의 인식은, 위기 중에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왜냐면 그 보좌는 모든 인간을 심판하실 심판의 보좌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미1:2, 합2:20)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이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을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감찰하시도다'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한'은 '시금(試金)하다', '분석하다'는 뜻으로

인생의 그 인간됨을 자세히 알아본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해치려고 하는

악인들의 행위(2절)를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감찰하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4절에서와 같이 '바한'입니다. examine, scrutinize

이 용어가 악인에게 적용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행위를 살펴보시고

그 행위에 대해 심판하신다는 의미이지만(10:13),

 

의인에게 적용되었을 때는, 의인을 단련하시고 그들을 세심하게 돌보신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

포괄적 의미에서는 율법과 질서를 파괴한 자들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다윗을 은밀히 죽이려 한 자들입니다.

 

※4절과 5절에 ‘감찰하신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 시10편의 ◐적용을 참조하세요.☞ https://blog.daum.net/rfcdrfcd/15979977

 

6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새번역) ‘불과 유황을 악인들 위에 비오듯이 쏟으시며,

태우는 바람을 그들 잔의 몫으로 안겨 주신다.’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당시의 현장과 유사합니다. (창19:24)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 이 불과 유황을 피하지 못하였듯

악인들도 하나님의 형벌의 비를 결코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태우는 바람'은 팔레스틴 남동편의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동풍)을 가리킵니다.

이는 악인에게는 이와같이 하늘로부터 임한 불에다 자연적인 재앙까지 겹치는 무서운 형벌이

임하게 된다는 뜻으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형벌의 참상을 묘사한 것입니다.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이 '잔'은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다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지는 것은 각기 다릅니다.

 

즉, 악인의 잔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담겨져 악인은 그것을 마실 것이나

의인의 잔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져 의인은 그것을 마실 것입니다. (시116:13)

이 잔은 자유롭게 마시는 연회석의 잔이 아니라 반드시 모두 다 마셔야하는 운명의 잔입니다.

 

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이는 5절 하반절과 대조적인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의로운 일 행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하나님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문맥상 후자의 해석이 더욱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이는 '정직한 자'(의인)가 위기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안전한 보호를 받게될 것을 의미합니다.

위기 중에 있는 다윗은 바로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여호와께 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 “터가 무너질 때”             시11:1~7                2020.11.27. 출처

 

문제가 많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문제 없을 때가 없습니다.

날마다 문제가 생깁니다. 사고가 발생합니다. 별 일이 다 일어납니다.

그런데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어떻게 행동하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사람들은 어려움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생겼을 때, 피할 곳이 있습니까? 어디로 피해야 합니까?

어려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곳으로 피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려움이 생겨도 피할 곳이 없습니다.

어려움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피하지만,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곳으로 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상한 곳으로 도피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칠 때에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이 어려움을 겪었을 때에 어디로 피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문제가 생기면, 다윗은 하나님께 피했습니다.

 

다윗은 피할 줄 알았습니다. 다윗은 광야로 피했습니다. 왜 광야로 피했을까요?

팔레스타인의 광야에는 숨을 곳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광야는 위험합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윗은 광야를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신비로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다윗은 하나님과 마주쳤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다윗에게 광야는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윗을 비난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사람들은 다윗을 가리켜 새 같이 도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려움 속에 있을 때에 사람들의 비난을 들으면 더 아프게 느껴집니다.

어려움 때문에도 힘들지만, 사람들의 비난은 더 힘들게 합니다.

가까운 사람의 비난은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광야로 피한 다윗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피하는 모습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비겁하고 초라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피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없어 도망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많은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복잡한 문제가 있어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문제를 가지고 교회에 가면 문제가 해결되냐,

먼저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에 가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에 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 간다고 문제가 해결되냐?’고 말합니다.

 

우리는 도망자가 아닙니다. 현실의 문제를 피하려고 하는 도망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달려가는 것과 도망가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완벽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피합니다.

 

하나님을 무너뜨릴 만큼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능력 중의 능력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이라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피하면 아무도 손댈 수 없습니다. 원수의 손이 닿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완벽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우리는 상황의 통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통제를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통제하십니다.

 

하나님은 요새 중의 요새이십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인생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살아오면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로 피한 사람은 하나님께로 피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습관처럼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평소에 기도하던 사람은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를 구합니다. 은혜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살다 보면 어려움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거센 풍랑을 만났을 때에는 항구로 피해야 합니다. 피하는 것도 실력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는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피하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신자 중에도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 하나님께 피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자라고 해서 모두 피난처를 발견하는 것은 아닙니다.

 

피난처를 경험한 사람은 피난처를 찾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 하나님께 피합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압니다.

 

세상에서 살다 보면, 공격을 받습니다. 위협적인 일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어디로 피해야 하는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장 안전한 피난처는 하나님의 품입니다.

 

찬송가 419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1.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밤 깊고 비바람 불어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켜 주시니 거기서 편안히 쉬리로다

 

2. 주 날개 밑 나의 피난처 되니 거기서 쉬기를 원하노라

세상이 나를 위로치 못하나 거기서 평화를 누리리라

 

3. 주 날개 밑 참된 기쁨이 있네 고달픈 세상 길 가는 동안

나 거기 숨어 돌보심을 받고 영원한 안식을 얻으리라

[후렴] 주 날개 밑 평안하다 그 사랑 끊을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히 거기서 살리

 

우리는 피할 곳을 발견했습니다. 피할 곳을 아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광야로 피했습니다. 다윗은 광야를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를 경험했습니다.

다윗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께 피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지만,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께 피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면 됩니다.

 

은혜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이 하나님께 피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자리, 기도의 자리,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리,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자리가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입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근심이 사라집니다. 기쁨이 회복됩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에 두려움이 떠납니다. 의심과 절망, 낙심이 사라집니다.

 

▲2절,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악인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악인은 남을 죽이는 일에 집중합니다.

악인은 사람을 죽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다.

 

악인은 다윗을 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악인은 다윗이 피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면,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에게 시선이 고정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시편 11편 2절에 보면,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악인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속입니다.

악인은 은밀하게 사람을 공격합니다. 매우 비겁합니다.

악인은 뒤에서 말로 사람을 죽입니다. 사람을 공격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디에나 항상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 아내 미갈,

아들 압살롬을 통해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3절에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다윗은 압살롬에 의해 자신의 왕권이 흔들리는 것을 탄식했습니다.

 

다윗은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최고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다윗의 왕권이 무너질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것도 아들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에 대한 압살롬의 반역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것입니다. 압살롬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사람의 방법으로 왕의 자리에 오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왕권에 대한 역모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흔들립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기초가 흔들립니다. 질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기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캐논(canon)’이라고 합니다. *표준, 기준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오늘날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디자인을 거부합니다.

이것을 문화적 현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것에 대해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문화의 흐름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내가 좋은 대로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기준(캐논)입니까?

개인이 기준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좋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개인이 기준이 되고,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질서와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있습니다.

공의와 진리가 사회를 바치고 있습니다. 터가 안정되어야 질서와 안정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기초가 흔들립니다. 법이 흔들립니다. 도덕이 무너졌습니다.

불법이 성행합니다. 이것은 코로나19보다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망가뜨렸습니다.

 

오늘날을 가리켜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기본 질서가 무너진 것이 이 시대의 특징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고, 불륜을 행하고도 그것을 죄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뒤집혔습니다.

 

죄를 짓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죄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캐논)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기준이 사라집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기본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창세기 1~11장에 보면, 핵심적인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오묘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죄가 모든 것을 망가뜨렸습니다. 터가 흔들리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터가 흔들리는 사회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됩니다.

가치가 흔들립니다.

 

세상의 기준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기준이 흔들립니다.

이런 사회 구조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기준을 낮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몸부림쳐야 합니다.

 

 

▲4절,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다윗은 하나님께 시선을 돌렸습니다. 여기서 성전은 흔들리는 터와 대조됩니다.

터는 흔들려도, 성전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보좌로 삼으셨습니다.

다윗은 요동하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은 혼란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는 우리는 요동하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동하지 않는 하나님께 삶의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사는 삶이 가장 안전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터가 무너져도 요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전 중심의 신앙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면,

언제 어디서든 안정감을 누립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사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감찰하십니다.

 

▲4~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의롭게 살아가려고 하다 보면, 억울하고 힘든 일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만,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외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은밀하게 선을 행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은밀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것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과 상황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악인인가를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불의를 행하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동자 같이 지키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을 감고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를 꿰뚫어 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삽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야 합니다.

 

악인들이 어떻게 살든 악을 행하는 악인들로 인해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도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롭게 판단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세상에서는 판단이 굽을 때도 있습니다. 불공평할 때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의로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의롭게 판단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치우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준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6절,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십니다.

그리고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 무서운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 악인은 피할 수 없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의인은 하나님께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피할 곳이 없습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맹렬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7절,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세상에 악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악인들에게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악인은 끊임없이 악을 도모하는데도 세상이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끊임없이 심판하십니다.

 

지금 악인들은 악랄한 짓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악인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악인은 끊임없이 악을 도모합니다. 그럼에도 세상이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계속될 것입니다. 악인은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유지하고 계십니다. 세상은 악인에 의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세상이 악인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염려하지 마세요.

 

세상은 하나님의 의에 의해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로 이 세상을 움직이십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사는 사람이 반드시 승리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악인들이 힘을 합하여 실력을 행사할지라도 짓눌리지 마세요. 두렵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힘이 없어 보이고 유약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의 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의가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울을 가지고 계십니다. 공의가 서지 않고, 공평이 행사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의가 운행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가 반드시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꽃 같은 눈으로 이 세상을 지켜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만 감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도 지켜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한 타이밍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의인을 구분하실 것입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마치 드라마를 보는 듯합니다.

하만과 모르드개 두 사람이 대치하는 모습은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이 다 죽을 것 같았습니다. 하만은 지혜를 동원하여 각본을 치밀하게 짜놓았습니다.

누가 봐도 하만이 이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는 장대에 매달려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왕이 잠을 이루지 못하여 왕의 실록을 보았습니다.

왕은 실록에서 모르드개의 업적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우연이겠습니까.

 

상황이 뒤집혔습니다. 의인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의인이 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행하십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우리가 방어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7절에 보면,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의를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일을 즐겨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를 행하는 것을 즐거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의를 행하십니다.

 

7b절에 보면,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영광입니다. 영광 중의 영광이요, 최고의 특권입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정직한 것도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거짓으로 뒤덮여있습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리스도 바깥에서 사는 삶은 거짓으로 가득합니다.

모든 것이 거짓으로 포장되어있습니다.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마5: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것은 최고의 축복입니다.

 

본문 시편 11편은 ‘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져야 하고, 사람과 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의롭게 살려면,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가 온전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의를 구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마6: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22:37~4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롭게 살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견고해야 합니다.

 

주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마세요. 하나님께 민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기준을 지키는 것이요,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역류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세상 문화와 싸워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터를 흔듭니다. 기준을 흔듭니다. 의가 사라졌습니다.

 

롬12:2절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르게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다르게 산다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에 뒤떨어져도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것이 우리의 실력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 때, 거룩하게 살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준 없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근본이 무너지면 안 됩니다.

의가 무너지면, 기준 없이 살게 됩니다.

우리는 작은 일에서부터 기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 안에서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제

 

세상은 혼란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의롭게 살아갈 때, 사람들이 비난하고 핍박하고 욕한다 해도,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사람들의 말에 반응하지 마세요. 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불의한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타협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문화에 흡수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문화에 저항하지 않고 세상의 문화를 따라가는 것은 터가 무너진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에게는 피난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피하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의를 이루기 원하시는 하나님,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축복하시고

우리를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께 피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문화와 타협하지 마시고,

말씀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