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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2편 사람의 말과 여호와의 말씀

LNCK 2022. 4. 26. 07:14

◈사람의 말과 여호와의 말씀             시12:1~8              여러 설교 정리

 

본시는 애가 형식으로 쓰여진 다윗의 시입니다.

이 시는 경건한 자와 충실한 자가 사회에서 점점 사라지고 반면에

속이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의 본시에서는 '우리가 애통하나이다'라는 직접적인 애가 형식은 발견되지 않지만

아마도 다윗은 괴로워하는 당시의 경건한 자들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께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두 개의 말을 듣습니다. 하나는 악인들이 하는 말이고(“그들이 말하기를”), 1~4절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여호와의 말씀에”)입니다. 다윗은 그 두 말에 대해 다르게 반응합니다. 5~8절

 

 

◑시인의 탄원 (1-4절)

 

1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 '여호와여 구원하소서'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이 말은 *히 ‘야샤’

여호와 하나님의 즉각적인 개입을 요청하는 말입니다. (3:7, 6:4, 7:1)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 혹자는 이 구절을 경건한 자가 악인들에게 멸절당하는 상황으로 해석합니다.

마치 사울왕이 놉의 제사장들을 도륙한 것과 같이(삼상 22:18, 19)

악인들이 경건한 자들을 살해한 것으로 봅니다.

 

이에 반해 혹자는 이 세상에서 경건한 자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당시 사회가 극도로 부패해 있었습니다고 해석합니다.

 

아마도 후자의 해석이 옳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시를 기록한 당시의 사회상은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 사회와 유사했을 것입니다(왕상19:10).

그런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다윗 통치 시기 중 어떤 때를 지칭하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다윗은 충실한 자를 찾으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당시의 사회는 극도로 부패하여 있었습니다.

 

여기서 '충실한 자 the faithful'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모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는 자를 가리킵니다. 

 

2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거짓'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웨'는 '공허'(emptiness), '허무'(vanity)를 의미하기도 하나,

회칠한 무덤처럼 겉만 번드르르하고 속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허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가치 없고 의미 없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가치 없는 것을 가치 있다고 말합니다.

 

‘아첨하는 입술’

사람들은 이런 말 듣기를 좋아합니다. 옳고/그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들었을 때

내가 좋다/싫다가 중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들어서 좋으면 거짓말이어도 상관없는 것입니다.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두 마음'이란 저들의 정신이 심히 혼란한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 마음'은 통일된 온전한 정신을 의미합니다.(렘32:39, 겔11:19, 행4:32)

 

혹자는 '두 마음'을 '두 가지의 기준'으로 봅니다.

즉, 악인은 속과 겉이 다른 두 기준을 가지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4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 - 악인들은 그들의 거짓된 말이나 협박의 말을 통하여

자기들의 목적을 이룰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악인이 온 몸을 더럽히고

생(生)의 바퀴를 불사르는 혀에 (약 3:6) 전혀 재갈을 먹이지 않은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이 표현은 악의 극치를 보여 줍니다.

이 말을 함으로써 저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 (5-8절)

 

다윗의 탄식에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여호와의 밀씀에’ - 이는 다윗의 간구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윗이 직접 받았든지, 아니면 다윗이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을 것입니다.

 

‘내가 이제 일어나’ 

하나님께서 일어나신다는 표현은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다.

  

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다윗은 그 응답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순결함이여'는

악인들의 말(2-4절)과는 정반대로 신뢰할 만한 것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용어는 순금 또는 깨끗한 향품(출 30:35)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며 완전한 말씀인 것을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단어는 '단련한'이란 표현과 함께 사용되어

찌꺼기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은을 가리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찌꺼기가 섞여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찌꺼기라 함은 악인들의 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거짓으로 아첨, 헛된 것 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런 것들이 전혀 섞여 있지 않으므로

절대적으로 신뢰할 만한 완전한 말씀인 것입니다.

 

7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이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응답)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신뢰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앞으로 곧 나타나게 될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 중에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악이 판치는 세상을 바벨탑처럼 무너뜨리겠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노아 때의 홍수처럼 세상을 수장시키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말씀을 좇으며 핍박받고 궁핍해진 경건한 사람(충실한 사람)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8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악을 자행함을 나타냅니다.

당시의 사회는 이러한 자가 인생들 가운데 높임을 받는 불의한 사회였습니다.

곧 악한 자가 곳곳에서 득세하여 권력을 장악하는 악한 사회였던 것입니다.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악인들이 당시 사회의 구석구석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한편, 본절은 독립절이 아니라 7절에 귀속되는 종속절입니다.

따라서 본절은 '비루함...횡행할지라도'라고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7절과 본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악인이 처처에 횡행할지라도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영영토록 보존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적용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본문 시12편은 ‘사람의 말(1~4절)’과 ‘하나님의 말씀(5~8절)’로 나눌 수 있는데

말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의 시대적 배경이나 정황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조하고 있는 바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는 당시 사회 풍조, 또는 종교적 풍토에 대해

말씀을 사랑하는 다윗이 비탄하여 부르는 노래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21세기 오늘날 우리 현실과 너무 잘 드러맞습니다.

마치 다윗이 21세기 우리 세대를 바라보며, 노래(비통해)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모든 시대에, 이러한 사회적/종교적 경향이 농후했다는 것이죠...

 

▲1. 사람들의 말 (1~4절)                 주1)

 

▲2. 이런 현실에 "탄식"이 있으십니까? (5절)

 

5절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사회의 분위기나 교회 강단의 설교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지 않고, 사람의 말이 차고 넘칠 때 (1~4절의 상황)

 

하나님의 말씀을 올곧게 전하는 자들은, 마치 아합 시대에 엘리야처럼

가련해지고, 눌리고, 궁핍한 자같이 됩니다. :5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탄식했던 적이 있었죠. 왕상19:10

 

때가 되면, 여호와께서 그 택한 백성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응답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탄식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탄식하며, 고통을 표현할 때에야 비로소 일어나십니다. '내가 이제 일어나' :5

어쩌면 내게 오늘 탄식이 없는 것은, 이런 세상에 나도 동화되어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탄식"에 대해서, '주여, 비통함을 내게 주소서 A call to anguish' 라는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의 유명한 설교가 있습니다. 꼭 참조해 보세요! ☞ -클릭- 

 

"큰 통 안의 포도주를 한 주둥이를 통해 모두 쏟아낼 수 있는 것처럼,

한 가난한 영혼의 탄식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위로와 은총을,

천국에서 이 땅으로 다 이끌어낼 것입니다"

 

한 사람의 탄식이, 그 공동체 전체를 살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탄식하는 한 사람이 없다면.. 그 공동체 전체는 깊은 영적 침체, 영적 수면에 빠지는 거죠.

 

겔 22:30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한)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 (그래서 그 성은 망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5:4

이런 의미에서 다윗은 그 시대의  영적 지도자가 분명했습니다.

온갖 사람의 말들이 횡횡하고 난무하는 시대에 "탄식하며 기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탄식하며 기도하는 자들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 공동체는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3. 성경 전체를 설교하고 가르치려 했던 찰스 스윈돌 목사 

 

다윗은 이제 6절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6절).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하는 것은, 가장 철저하게 순수한 은을 만들어내는 과정입니다.

모든 찌꺼기는 불에 타고 순수한 은만 남는 것입니다.         주2)

 

하나님의 말씀이 이와 같이 순결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말은 때로는 진리를 말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거짓을 말할 때가 많습니다. (1~4절)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진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6절)

 

본문 직전에 시편 11: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는 말씀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클릭- 

거기서 '터'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오늘날도, 다윗의 시대에도, 매 시대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이 (터가) 무너지던 때가 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매 시대마다 당신의 '말씀의 종'을 세우십니다.

그래서 '말씀 회복 운동'이 매 시대마다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본문에서는 '다윗'이 그 주인공이요, 자기 시대적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제사장도 선지자도 아닌 이가, 정치가요 장군이었던 그가

'말씀 회복 운동'의 주인공이 된 것은, 상당히 센세이셔널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라도 불러 쓰시는 것입니다.

 

이 시대 최고의 강해 설교자이자 성경 교사로 손꼽히는 찰스 스윈돌은 (척 스원돌 이라고도 함)

지난 50여 년간의 깊고도 진지한 성경 연구를 그의 필생의 결실로 담아내기 위해 

신약 전권에 대한 통찰력 넘치는 해석서를 만들었습니다.

신약 전권 뿐만 아니라, 구약 전권도 출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확인요

 

그는 성경 본문에 대한 분명한 해석과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고,

흥미롭고 풍성한 이야기로 성경을 전달할 수 있도록, 어렵고 난해하지 않은 언어로 독자들을 인도합니다.

 

학문적 이론과 살아 있는 설교를 위한 적용, 모두를 만족시키는 이 시리즈는

신학생을 비롯한 성경 연구자들과 설교자 그리고 평신도 리더들에게 유용한 안내서 라고 합니다.

 

성경은 수 십권이 아니고, 한 권이라서 (66권의 모음집이긴 하지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깁니다.

그런데 설교자들이 일평생 설교사역을 했다 하더라도,

성경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가르치고 사역을 마감한다면.. 그 보다 더 후회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요!

방대한 성경을 극히 일부분만 가르치고 사역을 은퇴한다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설 때, 죄송하겠습니까!

 

찰스 스윈돌 목사는, 일찍부터, 성경 66권을 모두 가르치기로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자기 혼자서!

그의 영어 설교는 30년 전에 극동방송 FEBC 에서 'Insight for Living' 이란 시간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꽤 알려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인터넷이나 유튜브를 기반으로

성경 전체 66권, 전장 1,189장을 다 설교하려는 분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단히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오늘날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젊은 사역자들은 한 번 도전해 볼 만한 과제입니다. 오랜 세월의 준비 과정이 필요하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은 흙도가니에서 7번 연단한 은처럼 순결하다고 했는데,

이 좋은 말씀, 이 순결한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고, 전부를 가르쳐야 하는 것이

주의 종들의 마땅한 사명 아니겠습니까!  그 좋은 것을 그저 일평생 밭에 깊이 감춰두고만 있겠습니까!

 

 

.......................................

 

본문의 표제어는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스미닛(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이는 성경에 총 세 번 기록되었는데, 시편 6편과, 본문. 역대상 15:21절입니다.

 

왕이었던 다윗이 자신의 시를

지휘자를 세워 여덟째 음에 맞추어 부르게 했습니다.

호소력있게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마음은 오늘 본문을 통해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주1) 

2절,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악인들은 서로서로 거짓을 말합니다.

여기서 “거짓”은 사실이 아닌 것 뿐만 아니라 ‘가치가 없는 것’, ‘헛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가치 없고 의미 없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가치 없는 것을 가치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참인지/거짓인지.. 그것은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전도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없이는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어도 세상에는 의미 있는 것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고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 나의 가족과 이웃을 돌아보는 삶,

돈, 명예, 권력을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그 모든 것들은 이 땅에서 끝나버리는 헛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거짓, 헛된 것들을 말합니다.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2b

또한 사람들은 아첨하는 말을 합니다.

“아첨하다”는 매끈하고 부드럽다는 의미입니다.

아첨하는 입술은 상대방이 듣기에 거칠 것이 없는 말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상대를 통해 뭔가를 얻기 위한 의도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 듣기를 좋아합니다.

옳고 그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들었을 때 내가 좋다 싫다가 중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들어서 좋으면 거짓말이어도 상관없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너희는 바른 길을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사 30:9-11).

 

사람들은 선견자들에게 선견하지 말라고 하고 선지자들에게 옳은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저 잘 될 것이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잘 될 것이다’, ‘너는 소중하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다른 사람에게 아첨하는 말입니다.

 

사회 지도자들도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말하지 않고 절대 진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거리낄 만한 것,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빼내고 복음을 전합니다.

죄의 문제, 심판, 회개, 치러야 할 대가를 빼내고 ‘예수님께서 너를 사랑하셔서 다 해 주셨으니

믿기만 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아첨하는 말로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강하게 전해지는 말씀은 사라지고, 사람들의 상한 감정을 ‘위로하는’(아첨하는) 말만 남습니다.

눈물은 참된 회개가 아닌, 자신의 잘못에 대한 후회와 안타까움에서 그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모두 아첨하는 말을 교회가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2b

“두 마음으로 말한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마음과 속마음이 다른 것, 속이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사기도 문제지만 드러나지 않는 속임도 많습니다.

사람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진짜 의도를 숨기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미안해”라는 말을 난감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자녀에게 공부를 시키면서 “다 너를 위한 거야”라고 말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두 마음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남을 속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을 속이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 속이는 말은, 성경에서 죄라고 하는 것을 다른 말로 바꾸는 것입니다.

죄가 아닌 어떤 문제, 병, 또는 취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동성애에 대해 성경은 분명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예전에는 이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병’으로 본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개인의 취향’의 문제로 봅니다. 그것은 취향의 차이이고 나의 취향이 존중받기 원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취향도 존중해야 하는 관용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유럽의 많은 국가가 낙태를 허가합니다. 과거에는 생명을 죽이는 일이라 하여 반대했지만

오늘날에는 여성의 선택권,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이유로 낙태를 허용합니다.

좋은 말로 속이는 것입니다.

 

교만, 분노, 원망, 불평은 성경에서 죄라고 규정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죄를 살인, 간음과 같은 수준의 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누구나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문제로 생각합니다.

 

화를 내지 않으면 병이 된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의 욕도 좀 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고 다른 말로 바꿔서 사람들을 속이고 나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세상이 하고 있고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3-4절을 통해 악인들이 자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4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자랑한다”는 것은 큰 것을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혀로 이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헛된 말, 아첨하는 말, 속이는 말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강력한 무기이고 아무도 그것을 건드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높은 자리에 오르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말입니다.

 

주2)

첨언하여, 저는 시편 12편을 깊이 묵상하는 중에 예기치 못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펀 글)

6절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찌꺼기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수함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저 자신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가에 대하여 깨달아졌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주 사역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놀라우며 완벽하며 순수한가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나는 얼마나 순수하고 온전한 사람인가를 
별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못하였습니다.


도가니에 은을 7번 단련한 것같이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서 전하는 순결한 '그릇'들이 될 때,

그 말씀은 더욱 살아서 역사하는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이 되어서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것입니다. 히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