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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3편 고통을 통해서 다윗이 되다

LNCK 2022. 4. 27. 17:24

◈고통을 통해서 다윗이 되다                   시13:1~6                     여러 설교 정리

 

오늘 본문 시편 13편의 표제어가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는 찬양대 지휘자의 인도(지휘)를 따라서 노래했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의 이 시는 다른 시들과 비슷하게, 사울왕에게 쫓겨 다닐 때에 지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내용 분해>

주께 버림 받은 자의 탄식 (1~2절)

주께 버림 받은 자의 간구 (3~4절)

주께 버림 받은 자의 찬송 (5~6절)

 

 

◑주께 버림 받은 자의 탄식 (1~2절)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다윗은 처음부터 탄식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라는 말은

본절과 2절에 모두 네 번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고통의 실상을 능히 짐작케 해줍니다.

(6:3, 35:17, 74:10, 79:5, 80:4, 94:3)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다윗은 그의 대적들이 득세하고 자신은 극심한 질병에 걸린 고통스런 현실을 보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어버리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심이 영원히 지속될 것에 대해 크게 염려하며 부르짖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다윗이 탄식했던 가장 큰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으로서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그것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22:1)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이는 바로 앞구절과 병행구입니다.

얼굴이 숨겨졌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다윗은 이처럼 자신의 고통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해 보았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노력이었고 그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었습니다.

 

‘종일토록’ - 이 말에서 그는 끊임없이 근심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자신의 딱한 형편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다윗의 비참한 형편을 보고 다윗의 원수는 크게 기뻐한 것이 분명하다.

그 원수는 고통당하는 다윗을 향해 온갖 독설로 비난했을 것입니다.

 

1~2절의 다윗의 호소을 요약하면,

첫째로, 어느 때까지입니까? 나를 영원히 잊으셨습니까? :1

다윗은 가장 먼저 자신의 잊힘에 대해서 하나님께 호소를 합니다.

 

둘째로, 어느 때까지 주님의 얼굴을 숨기시겠나이까? :1b

신명기 31:18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외면하여 얼굴을 돌리심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징계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고 계시는 듯하게 느껴지는 것이,

자신이 부지불식간에라도 하나님 앞에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은 아닌가 하고 눌려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어느 때까지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 마음에 근심하리이까? :2

 

넷째로, 어느 때까지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리이까? :2b

 

 

◑버림받은 자의 간구 (3~4절)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다윗은 회의와 탄식에서부터 → 간구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란 질병과 슬픔으로 흐려진 눈을 밝게 해 달라는 간구로서

건강의 회복과 탄식으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말입니다.

눈의 밝음은 구약에서 건강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신34:7, Craigie)

 

이 눈의 밝음, 곧 건강의 회복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근본적인 면에서 볼 때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는 말은

'나의 눈으로 하나님의 얼굴의 빛을 보게 하소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얼굴을 숨기셨을 때 그의 건강이 쇠하여졌던 것처럼(1절)

주께서 얼굴을 보여주실 때 그의 건강이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민 6:25).

그러므로 이를 알기 쉽게 번역하면, '나의 눈으로 당신의 생명의(얼굴의) 빛을 보게 하소서'가 됩니다,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하오며’

다윗의 극도로 악화된 건강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다윗은 죽음 가까이에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죽음이 종종 '잠'에 비유되었습니다.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나의 원수가...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입니다’

여기서 '나의 원수'는 단수형이며, '나의 대적들'은 복수입니다.

혹자는 전자와 후자 모두 다윗의 정적들을 가리킵니다고 보나,

여기에서 단수와 복수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즉, 단수로 언급된 '나의 원수'는 인생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의인화한 것이라고 보며,

복수로 언급된 '나의 대적들'은 다윗의 일반적인 정적들을 의미하는 것이라 봅니다.

 

한편, '요동될 때에'란 말은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짐작됩니다.

왜냐하면 본절은 분명히 죽음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4절을 요약하면, 그는 세 가지를 말하는데,

 

1)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으시면(나를 그냥 두시면) 내가 사망의 잠을 잘 것이고,

2) 다윗의 원수들이(악인들) 다윗을 이겼다고 말하고 자랑할 것이며,

3) 그것으로 인해서 그들이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께 버림받은 자의 찬송 (5~6절)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다윗은 자신의 전형적인 서술 방식을 따라 간구에서 또다시 확신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인자하심'(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그 큰 고통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이는 다윗의 확고한 소망을 나타낸다. 주의 구원이 아직 임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너무나도 확고한 소망 가운데 이 구원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롬 4:18)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졌기에 다윗은 극한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 말은 1절 상반절의 '어느 때까지니이까'와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그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대한 확신을 얻고 탄식에서 찬송으로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과거에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이라고 번역했죠.

여기서 '은덕, 후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말'은 '보상하다', '갚다'라는 뜻으로

선과 악 모두에 적용되는 말입니다.

즉, 선이든 악이든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갚아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선으로 보상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인간의 어떠한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다는 뜻은 아니며,

다만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단순한 사실을 나타냅니다.

 

 

◑적용 “고통을 통해서 다윗이 되다”

 

▲1. 당신이 고통 당하는 시간을 통해서 누군가는 구원 받는다!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다윗은 처음부터 탄식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라는 말은

본절과 2절에 모두 네 번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고통의 실상을 능히 짐작케 해줍니다.

다른 시편에도 이런 표현이 종종 등장합니다, ☞ 시6:3, 35:17, 74:10, 79:5, 80:4, 94:3 등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시6:3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려 하나이까’ 시35:17

 

그럼 왜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러한 절망적 고통을 겪게 하시나요?

한 마디로 말하면, 오늘 우리 세대를 포함해서, 그 후 모든 세대들을 위하여

시편을 쓰게 하시기 위하여

어쩌면 시편 기자가 아니었으면 안 겪어도 되는 고난을,

다윗으로 하여금 겪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시편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시편이 나오지 않았다면, 오늘날 고통을 겪는 신자들이, 성경에서 위로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고 오는 고통 받는 신자들을 위하여, 다윗이 먼저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그럼 다윗만 그럴까요?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럴까요? (다른 사람도 그렇습니다)

 

당신이 고통 당하는 시간을 통해서 누군가는 구원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를 통해서, 누군가가 구원받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위 명제에서 ‘당신’과 ‘다윗’은 호환해서 쓸 수 있는 말입니다.

 

비단 본문 시13편 뿐만 아니라, 시1권(1~41편)이 거의 다윗의 시인데,

거의 대부분이 ‘비탄시’입니다. 고통의 나락 가운데 떨어져서,

울부짖으며 기도하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마치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말처럼, 오늘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다윗이 먼저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실한 엄마가 어느 날 아주 어려운 중병에 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일은 정말 고통스런 일이지만, 그 일로 인해,

남편이나 어린 자녀들이.. 모두 철이 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엄마가 몸져 누워있으니, 온 가족이, 아이들까지 매일 저녁마다 가정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 엄마의 질병과 고통을 통해서

남편과 자녀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열매가 맺어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좀처럼 변화되지 않습니다.

변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교회에서 말썽을 일으켜며 목회자를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목회자는 묵묵히 참으며 날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 고통이 지난 후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말썽을 피우고 목회자를 괴롭히던 성도가,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소금 3%가 모든 물을 짜게 하듯이

나머지 모든 성도들이 은혜받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으면서

본문의 다윗처럼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라고 탄식하며 기도한다면,

이 말을 꼭 명심하십시오!

‘당신이 고통 당하는 시간을 통해서 누군가는 구원 받는다!’

 

‘생명의 탄생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말도 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고통이 없이는 생명의 탄생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은 그 열매를 바라보며, 오늘의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진정 ‘영혼을 구원하는 목자’가 되기를 간절히 마음으로 소원한다면

당신은 앞으로 더욱 많은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고통 없이는, 생명의 탄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산고에 빗대어

 

▲2. 죽고 나서 부활 온다

우리는 처음 시작부터 승리해서, 끝 마치는 시간까지 계속 승리하는 것을 바랍니다.

운동경기에 비유하자면, 초반 상승세를 타다가.. 그게 끝까지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승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거의 지다가.. 막판 뒤집기(씨름), 9회말 역전(야구),

후반 인저리 타임에 극적 골로 인한 승리(축구) .. 이렇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3절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거의 죽게 되었으며)

4절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거의 지게 되었으며)

 

처음부터 승리를 주시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을 터인데..

아마 대적들에게도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충분히 회개할 기회, 돌이킬 시간을 주시나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개입이 그렇게 지체되시나 봅니다.

 

이렇게까지 하나님이 ‘늑장을 부리며 늦게 늦게 만만디’ 개입하시면서,

-우리의 믿음이 키워집니다.

-우리의 인내심, 끈기, 버티는 능력이 더욱 강해집니다.

 

다윗이 (다른 믿음의 조상들도 마찬가지지만) 태어날 때부터 ‘믿음의 엄친아’로 난게 아니라

그도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사람이지만 *엘리야에 빗대어

하나님이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통과하게 하심을 통해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3

이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용사가 된 것입니다.

 

다니엘도 사자굴에 던져지지 않았습니까!

엘리야도 850명의 거짓선지자들과 맞서지 않았습니까! 8명도 두렵습니다.

모두가 ‘목숨을 잃는 듯한’ 사망의 위기를 통과했다는 뜻입니다.

 

‘차라리 확 죽어 버리세요! 철저히 절망해 버리세요!’ 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을 위기가 닥쳤는데, 죽지 않으려고 하니까.. 괴롭고 힘든 것입니다.

죽을 위기가 닥치면.. 차라리 제발로 나가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비하게도 생즉사, 사즉생(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의 결과가 나타나는 겁니다.

 

부활을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먼저 죽어야 합니다!

먼저 죽지 않고는.. 절대 부활의 역사가 안 일어납니다. 일어날 수가 없지요!

 

이게 말은 쉽지만 실행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매일 일어나는 일은 아니겠지만, 몇 년에 한 번씩이라도 생명의 위기가 닥칠 것입니다.

그때는 어떻게 하라고요?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차라리 확 죽어 버리세요! 철저히 절망해 버리세요!’

그러면 신비하게 삽니다! 부활합니다. 다윗처럼!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1

이렇게 기도를 시작했다가

이렇게 기도를 마칩니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