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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4편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LNCK 2022. 4. 29. 07:47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5        시14:1~7            여러 설교 정리

 

1~4절에서는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의 어리석음’,

5절에서는 ‘그들에게 임할 두려움과 심판’,

6~7절에서는 ‘주의 백성에게 있는 소망’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의 어리석음 (1-4절)

 

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어리석은 자'는 다윗이 본시에서 자세히 규명하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어리석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발'은 그저 지혜가 부족한 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1) 나발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이 표현은 10:4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악인들의 말로 진술되었습니다.

따라서 본절의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는 악인,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주2)

 

‘부패하고’ - 곧 저들의 심령이 부패하여졌다는 말로서(창6:12, 출32:7, 렘13:7)

영적 생명력이 전혀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행실이 가증하니’ - 무신론 사상의 결과로 저들의 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증오의 대상이 될 만큼 타락하였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인격에서 선한 행위가 나올 리 없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선'에 대해 혹자는 구체적으로 이웃에 대한 선행을 의미합니다고 주장합니다만,

본절의 '선'은 포괄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윗은 본 구절의 시를 쓸 때, 노아 홍수 때나

소돔과 고모라 당시의 부패상을 연상했을 것으로 짐작되어집니다.

그 시대와 비슷하다는 거죠.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다 치우쳤으며’ - '치우쳤으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르'는 '제 고집대로 행하다',

'완고하고 반항적입니다'라는 뜻입니다(출32:8). 저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제 고집대로 행한 것입니다.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 '없다'는 말이 두 번 반복되어

이 세상에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는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내 백성을 먹으면서’

본 구절은 떡 먹듯이 백성들에게 악을 행한 것에 대한 표현으로 봅니다.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 이 구절은 앞의 구절과 연결시켜 고찰해야합니다.

즉, 그들은 오직 떡 먹듯이 쉽게, 그리고 항상 악을 행하는 데 익숙해 있기에

하나님을 원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5절 ‘그들에게 임할 두려움과 심판’,

 

5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12편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절에 이르러 본시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고 있습니다.

다윗은 아마도 이 순간에 환상을 보았거나 아니면 특별한 계시를 받은 것 같습니다.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두려워한다’는 말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두려움에 대한 강조입니다.

 

'거기서'

어리석은 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의 백성을 압제하던 곳에서.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에게는 심판의 형벌을 내리시지만

당신의 모든 백성들(의인의 세대)에게는 자비로 함께 하십니다.

 

 

◑6~7절 ‘주의 백성에게 있는 소망’

 

6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여기서 '계획'이란 악인들의 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자 하는 의인의 의도나 계획을 의미합니다.

악인들은 이러한 의도조차 처음부터 방해하고 나선 것입니다.

 

여기서 '부끄럽게 하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보쉬'는 '창피를 주다'라는 뜻이나

그밖에도 '박살내다', '분쇄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아마도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7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12편과 같이 탄식으로 시작한 다윗은 구원에 대한 확실한 소망으로 본시를 마무리 짓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여기서 '포로된 것'이란 바벨론 유수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악인들에게 억압당하는 상태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억압의 상태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주실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나니” :5

 

▲1.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사람은 죄를 밥먹듯이 짓고 부패하게 됩니다. :1~4

 

본문 1절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 하는 사람들은 진짜 하나님의 존재를 안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입니다. 전 국민이 신자화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회의 주류가, 소수가 아니라 주류가, '실제적 무신론자'   주3)

로 살아간다는 다윗의 탄식이죠. 

즉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불신자와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자들을.. 다윗이 일컬어 말하는 것이죠.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1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 하는 이유는, 실제로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롬1:28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 맨 것과 속박을 끊어버리자’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법을 싫어하고, 하나님이 율법으로 자기를 괜히 옭아맨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시2:3

 

그 결과는, 소돔과 고모라이며

노아의 때이며,

본문의 다윗의 때이며,

모든 시대, 모든 세대의 현상입니다.

 

불신 이방세상에도 하나님이 주신 마음 속의 도덕률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들'은, 그런 것을 다 무시하는 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본문을 인용해서 자기 시대에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3:10~12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삶은 부패하고, 가증하며,

선을 행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죄인인 인간의 본질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짓밟는 삶을 사는 것을 밥을 먹는 것처럼

죄와 악을 익숙하게 행하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찾지는 않습니다. :4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교도소 선교회’를 설립해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킨,

한 때 미국의 3대 영적 지도자에 속했던 찰스 콜슨은 (2012년 80세로 소천)

1973년에 친구가 선물해 준, C.S. 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라는

책을 읽고 회심했는데, 그는 이 책의 첫 장에서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에

교만(Pride)은 죄악’이라는 내용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닉슨 대통령의 법률보좌관으로서

항상 ‘대통령이 나를 찾고 있다’는 말에 자만했던 자신의 과거 모습들을 떠오르며

그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음을 회개하고 기독교인이 됩니다.

 

하나님이 없다하는 사람의 특징은, 밥먹듯이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그 결과

들키지만 않으면, 자기 본성에 따라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데 말입니다.

나중에 그 죄값을 다 치러야 하는 날이 오면...

그래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5

 

▲2.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는, 두려워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5절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두려워하다'는 말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두려움에 대한 강조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큰 두려움 속에 있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두려움에 압도를 당한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 가운데 '정신병원'의 도움을 받는 일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정신과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는 일은 더 이상 흉이 아니다'는 말도 생겼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가장 큰 정신적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두려움'일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은 약 75가지나 되는

각종 공포증으로 두려워하면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폴레옹 힐은 두려움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습니다.

“두려움은 모든 논리를 무력하게 만들고 모든 상상을 파괴하며,

자신감을 꺾어버리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 열성과 의욕을 없애 버리는 힘을 지닌다.

그리고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나태와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이 세상에 마귀가 살아서 역사하는데, 마귀의 공격무기 중에 제 1번이 ‘두려움’입니다.

마귀가 세상 사람들을 각종 두려움으로 휘어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실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큰 자로부터 작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마귀가 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어갈수록, 사람들은 수명, 건강에 파르르 떨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도, 대적에 대한 두려움, 경제에 대한 두려움, 사회(범죄)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그 결과 점점 더 ‘불신 사회’가 되어 가고 있고,

그 반작용으로 각종 보험사업과, 보안사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마음의 스트레스는, 모든 평안과 행복을 빼앗고

심신을 병들게 하며, 생활에 낭패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이상 스트레스를 전혀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공포의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길은 알아야 합니다.

 

사실 그 두려움은 그 인생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오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하면, 나머지 모두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나머지 모두를 두려워하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입니다.

 

하나님만 신실하게 믿었던 다윗은 이렇게 담대하게 고백했습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시27:3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4:8 

오늘날 사람들이 어쩌면 제일 바라고 원하는 것일 것입니다. '평안히 눕고 자는 것!'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그런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눅4:18절에 예수님의 사명선언문에 이렇게 나옵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예수님은 마귀가 주는 두려움에 포로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부디 이 자유를 아직 누리지 못한 분은, 예수님을 진실로 만나서, 두려움에서 자유케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5b

 

하나님이 없다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성도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핍박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의인된 성도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성도들을 싫어합니다.

아이들이 이웃집 엄친아(엄마 친구의 아들)를 싫어하듯이, 그런 심리로 성도를 싫어하는 거죠.

 

그들이 아무리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고 해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풍기는 하나님의 형상을 느낄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5b절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이 성도를 두려워한다고.. 다윗이 말씀하는 거죠.

5절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해야 될 터인데, 도리어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했습니다.

삼상18: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또한 하만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모르드개와 같은 자들을 보고,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며 떠는 것입니다.

 

비록 성도들이 비천한 처지에 있다 해도, 박해자들이 득세하는 가운데 성도들이 탄식한다 해도,

세상 죄인들은, 성도들이 진실로 고귀하다는 것을 느끼고 기가 죽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의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회에 '안티 기독교'가 많은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는 이유와 같고, 하만이 모르드개를 박해하는 이유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직장에서도, 한 성도, 한 의인은 무리들로부터 왕따 또는 이지매를 당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들은 압니다. '저 성도 직원이 없으면, 그 부서가 원활히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상급자라도, 결국은 그 성도 직원에게 조용히 찾아와서 부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때문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도의 '영적 권위 spirittual authority' 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아무런 세상 권위가 없으셨어요. 무학에, 무직위에, 무자본..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으셨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당대의 권력층인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하는 영적 권위였습니다.

 

다윗도 사울에게 쫓길 때, 무학에, 무직위에, 무자본..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에게 고백했습니다.

삼상24:20~21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그래서 사울 왕은,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추격하면서도

때로는 비굴하게 아주 찌글어들어서, 자기 가문과 후손의 안위를, 다윗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하는 다윗의 영적 권위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스펙 쌓기에 분주한 현대인들이 가져야 하는 '영적 권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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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시편 14편은 13편과 표제어가 동일합니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에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표제어가 붙여진 시편은 모두 53편이 있습니다.

‘인도자’는 찬양대의 책임자(지휘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시편들은 개인들이 불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찬양대가 불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윗시대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가대 대원이 무려 4000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가대원들에게 찬양을 가르치는 지도자(표제어의 인도자들_성가대 지휘자)들만 해도,

24반차에 12명씩, 도합 288명이나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 시편을 찬양할 때에 얼마나 웅장했겠습니까?

 

세상에는 온통 하나님의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들, 나발들이 가득하지만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기 백성들이 피난처가 되신다고 할 때는 가슴이 뛰었을 것입니다.

 

 

주1) 나발

 

‘어리석은 자’가 히브리어로 ‘나발’인데, 그 의미는

‘어리석음과 악함, 하나님이 없음’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사무엘상 25장에는 ‘나발’이라는 실제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옵니다.

마온 지방에 한 목장주가 살았는데, 그에게는 양 떼가 3000마리, 염소 떼가 1000마리가 되는

목장을 가진 부자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치안이 몹시도 불안하였기에,

여러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 그 지역을 지켜주고, 보수를 받곤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과 함께한 600명이 그 지역을 지켜주고서, 양털을 깎는 때(목축업의 추수 때)

에 사람을 보내서 양 떼를 지켜준 대가로 먹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음식은커녕 다윗과 다윗의 부하들에게 모욕하고서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분노를 참을 수 없어서 그의 부하 4백을 데리고 가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에 그의 아내 아비가일이 음식을 급하게 준비해 와서 다윗이 노를 누그러뜨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무엘상 25:25절입니다.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그 사람의 이름이 바로 ‘나발’이었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발 ‘어리석은 자’와 같은 단어입니다.

나발은 수천 마리의 가축을 기르는 농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여러 종들도 있었습니다.

그 재산과 종들을 잘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그를 향하여 동네 유지라 불렀을 것이고, 어르신이라 불렸을 것입니다.

그의 종들은 ‘주인님’이라 불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나발_어리석은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눈도 없었고,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보는 눈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병든 이기심과 완고함만이 있었습니다.

 

주2) ‘하나님을 없다 하는 자’ :1

성경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20).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피조물 속에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어리석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주3) ‘실천적 무신론자, 또는 실제적 무신론자 practical atheist’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안 믿는, 무신론자가 아닙니다.

모태교인이고, 세례도 받고, 어릴 적부터 교회도 다니고, (커서는 잘 안 다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자기 마음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자기 삶에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삽니다.

자기는 명목상 크리스천이라고 여기지만, 실제 삶에서는 안 믿는 사람과 구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실천적 무신론자’보다는 ‘실제적 무신론자’로 번역해야 쉽게 이해됩니다.

 

본문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 하는 사람들은 진짜 하나님의 존재를 안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입니다. 전 국민이 신자화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회의 주류가, 소수가 아니라 주류가, '실제적 무신론자'로 살아간다는 다윗의 탄식이죠.

즉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나이롱 신자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을.. 다윗이 일컬어 말하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이런 ‘실제적 무신론자’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 시대에도 주류 였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들은 언제나 모든 시대의 주류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