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15 시17:1~15 여러 설교 정리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따라 산다고, 그 인생길이 꽃길이나 비단길처럼 평탄하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영달을 위해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악인들의 표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악인들의 준동이, 단순한 견제가 아니라 의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이라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악인들의 자리까지 내려가서 함께 악다구니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삶의 자리를 내팽개치고 정처 없이 숨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본문 시17편은 바로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흠이 없고, 입으로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았음에도(3b절)
그를 대적하는 악인은 압제를 넘어 생명까지 빼앗으려 합니다(9절).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게 되는데,
이 시의 배경은, 다윗이 마온 황무지와 엔게디 요새를 전전할 때(삼상 23-24장)로 추정합니다.
1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다윗은 먼저 자신의 정직함을 내세워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정직함이란 '의'(체데크)를 의미합니다.
다윗이 여기서 먼저 자신의 의를 언급한 까닭에 대해 다음 두가지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1) '의의 하나님'(4:1)께서 인생을 공평하고 의롭게 판단하신다는(2절) 사실에 근거해서
그는 자신의 무죄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다윗이 부당한 핍박을 당하고 있는 당시의 상황 속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다윗은 아무런 연고없이 악인(사울 일당)들에게 쫓김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다윗은 이러한 부당한 사실을 하나님께 호소하기 위해 자신의 무죄함을 언급한 것이죠.
따라서 다윗이 자기의 어떠한 의를 자랑하기 위하여 이 말을 언급한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의 불합리한 환경을 호소하기 위해 언급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2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이는 자기에 대한 판단, 곧 심판이 주 앞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악인들에게 그룻된 판단을 받아 지금 계속되는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으로 자신의 순수성을 입증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한 의로운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이 말은 실제적으로 다윗이 밤에 여러 시간을 기도하며 자기 자신을 성찰한 사실을 암시합니다.
4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앞서 마음의 순수함을 호소한 다윗은
이제 자신의 일상적인 삶의 순수함을 호소하려고 합니다.
5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는 4절의 내용을 보충하는 구절입니다.
다윗은 소극적으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의 길을 굳게 지켰습니다.
여기서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라는 말은
신명기 등에 언급된 율법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의 길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은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입니다.
이러한 두 길은 시편의 서론격인 1편에 이미 언급된 것으로 시편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6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다윗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다윗의 확신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정직함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7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8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이 표현은 신 32:10의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와 일치하는 구절입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본 구절 역시 신 32:11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이로 볼때 다윗은 신명기의 기록에 근거해 본절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신명기의 기록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광야의 40년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고 볼 때
다윗은 이 구절에서 그와 같은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9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지금 다윗이 사방에서 생명을 위협받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10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
저들은 자신의 행하는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악한 일인지도 깨닫지 못한 채
다윗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죄악은 저들의 영혼을 무감각하게 만들어
더욱더 큰 죄악들을 두려움없이 행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11 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우리의 걸어가는 것’
이 표현은 주의 길을 걸어간 것을 의미합니다(5절).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다윗과 동행한 추종자들을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이는 다음 절과 연결해서 해석해야 할 구절입니다.
본 구절은 사자가 먹이를 잡아먹기 위한 1차 행동을 가리키며 원수들의 잔인성을 암시합니다.
12 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다윗의 원수가 사자에 비유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원수들의 잔인성 때문입니다.
다윗은 또한 이러한 비유를 통해 자신이 당하고 있는 위기의 급박성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13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본 구절에서부터 마지막 절까지 다윗은 원수들의 파멸과 자신의 구원을 간구합니다.
‘주의 칼로...구원하소서’
하나님께서 악인들과 대항하여 싸워달라는 호소입니다.
'주의 칼'은 하나님께서 악인에 대항해서 싸우실때 사용하시는 무기로서 심판의 칼을 의미합니다.
14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이 세상에서 악인이 번영하는 모습을 묘사한 구절입니다. (73:3~12, 욥12:6, 21:7~13)
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히브리 원문에서 강조형으로 쓰여졌으며 *인칭대명사 나(아니)가 나옴
이로써 다윗은 14절에서 묘사한 악인들의 번영과 자신의 형편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다윗은 악인들의 번영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고
그보다 훨씬 좋은 신령한 복을 받고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는 것은
가장 큰 은혜 중의 은혜요, 복 중의 복이었습니다. (민12:8, 신34:10).
또한 인간이 그러한 상태에 이른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여졌음을 의미합니다. (마5:8, 요일3:2)
다윗은 이러한 신령한 복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일시적인 복을 누리는 이 세상의 악인들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입니다’
‘주의 형상’에 대해, 2가지 해석으로 갈라집니다.
1) 주의 형상을.. 주님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임재)으로 보는 해석
2) 주의 형상을..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된 다윗으로 보는 해석
1번이 맞습니다. 왜냐면 본 절에서
‘주의 얼굴’과 ‘주의 형상’이 병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얼굴’을 반복해서 다시 쓴 것입니다.
‘주의 형상’으로 표현만 살짝 바꾼 거죠. *병행법
형상 (히, 트무나)가 쓰인 용례를 보면,
출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어떤 형상(조각물)도 만들지 말며’
민12:8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모습)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모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깰 때에’
단순히 잠에서 깨는 것을 의미하기보다
부활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됩니다. (사26:19, 단12:2)
혹은 더욱 영안이 밝아진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적용
▲1. 밤에 조사해도 흠이 없었던 다윗
3절.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이 말은 실제적으로 다윗이 밤에 여러 시간을 기도하며, 자기 자신을 성찰한 사실을 암시합니다.
여기에서 ‘마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레브"는
단지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 곧 전인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외양이 아닌 다윗의 내면까지도 하나님께서 시험하셨고,
사람의 진면목이 확인되는 밤에 직접 방문하셔서 감찰하셨는데도
흠을 찾지 못했다는 다윗의 고백에는
올곧게 말씀 따라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다윗의 자신감이 묻어납니다.
이 자신감은 한낱 한 남자의 만용이 아니라,
말씀을 따르는 삶을 목숨처럼 여겼던 그의 신앙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삶은, 하나님 앞에 강력하게 호소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말씀에 순종해서 살기 위해 생명을 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히12:4
생명을 걸고, 말씀 지키며, 내가 올곧게 말씀 지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라고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는 자신감이 오늘 나에게는 있습니까?
그렇다면 문제를 앞에 두고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약함까지도 넉넉히 품고, 긍휼히 여겨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기댈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시편에서 종종 ‘자기 의’를 강조합니다.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17: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4:1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4:3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4:5
‘(내가)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17:15
‘내가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40:7
적어도 다윗이 밧세바 사건 이전까지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았다는 것이죠.
이것을 신약적 용어로 바꾸면 ‘경건’입니다.
(‘예수님의 의’에 반하는, 사람의 ‘자기 의’는 안 돼죠.
그러나 복음을 올바로 믿는 사람은 의롭게 살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마5:6)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신 (벧전2:21)”
나는 이렇게 예수님을 닮아 마음 다해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요?
▲2. 주의 날개 아래 피하는 기술
아래 ▲3의 설명이 길어서, 주1)로 줄입니다. 점프 가능.
▲3. 주님을 쳐다보고 만족하는 다윗
15절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주의 형상’에 대해, 2가지 해석으로 갈라집니다.
-주의 형상을.. 주님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임재)으로 보는 해석
-주의 형상을..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된 다윗으로 보는 해석
1번이 맞습니다. 왜냐면 본 절에서
‘주의 얼굴’과 ‘주의 형상’이 병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얼굴’(야곱도 얍복강에서 주의 얼굴을 뵈었죠)을
다시 한 번 표현을 달리해서 반복해서 쓴 말이 ‘주의 형상(모습)’입니다. 병행법이죠.
그래서 ‘주의 얼굴’이 곧 ‘주의 형상’이고,
‘주의 형상’을 ‘다윗이 변화된 모습’으로 해석하기엔.. 좀 무리입니다.
1) 내가 너희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다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15
다윗은 자다가 깨어나서.. 주님의 얼굴을 보고, 주님의 형상을 뵙고서 (주의 임재를 체험하고서)
자기 심령에 큰 만족을 얻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겪는 고난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죄했으나 악의를 품은 자들이 그를 모함했고,
그의 생명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위험에 빠졌고,
원수들은 사울의 궁정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으나
그는 광야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복합적인 고난을 당한 가운데서도 다윗은 희망을 잃지 않았고,
자기를 버림받은 자처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의 생활과 비교해 보면, 썰물처럼 모든 것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그들의 행복과 자신의 행복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노래로 마치면서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그는 자기가 훨씬 행복한 자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15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16:11
‘의로운 중에 (내가) 주의 얼굴을 보리니’
다윗은 악인들의 번영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고
그보다 훨씬 좋은 신령한 복을 받고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는 것은
가장 큰 은혜 중의 은혜요, 복 중의 복이었습니다. (민12:8, 신34:10).
또한 인간이 그러한 상태에 이른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여졌음을 의미합니다. (마5:8, 요일3:2)
다윗은 이러한 신령한 복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일시적인 복을 누리는 이 세상의 악인들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얼굴을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오늘 나는 누구의 얼굴을 주로 보고 있습니까?
2) 영안이 깨어나 만족한 다윗
‘깰 때에’도 두 갈래의 해석이 모두 다 가능합니다.
①깜빡 잠들었다가 깰 때, 혹은 밤잠을 자고 새벽에 깰 때에 *1차적 해석
②죽었다가 깨어났을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죽어도 구원받을 것입니다’
라는 고백도 됩니다. *2차적 해석
①번으로 해석하면,
내가 깨어났을 때, 주님의 형상을 보고서 만족했다는 것은
주님의 모습을 보고, 그 외모의 영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감상했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그 분을 뵙고 크게 깨닫게 된 게 있었고, 그래서 만족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면, 그 어떤 압도되는 경외감도 있지만
보통은 ‘어떤 깨달음과 거기서 오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때에 ‘나는 만족하리이다!’ 라는 고백이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다윗이 더욱 영안이 밝아진 것, 어떤 영적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 큰 은혜를, 신약적으로 해석하면, 십자가의 주님으로부터 발견합니다.
십자가로 인해 주님을 바로 알게 되고
주님 안에서 우리를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바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15절 말씀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면,
십자가의 의를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내 마음 속에 혼미하게 하던 세상 것들이 사라지고 확 밝아지면서
복음의 신비, 십자가의 신비가 깨달아지게 된 것입니다.
고후4:4절에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러다가 이제 어느 날 복음을 깨닫게 된 것이죠.
그때는 기쁨도 함께 동반됩니다.
그때는 온 세상이, 늘 다니던 길거리도 새롭게 보인다고들 말하죠.
②번으로 해석하면
‘잠에서 깨는 것’은 성경에서 부활에 대한 비유로 종종 사용됩니다(사26:19, 단12:2).
앞에서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것에 대해 말했다면,
이제 그 정반대에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할 때 부활의 삶을 말합니다.
의롭게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형상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의로운 사람의 모습입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의 삶을 기다리며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이 의인들입니다.
그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그 안에 기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우리가 살아도 기쁘지만 죽어서 더 좋은 것은
주님을 죄악된 모습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모습으로 만난다는 것 때문입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15
천국에서 누릴 영생과 구원은 복음서에서만 계시된 진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구약의 성도들에게도 어렴풋하게나마 계시가 되었고, 그들은 이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영광 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거할 것을 믿었습니다.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시17:15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시73:24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19:25~26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듯이, 구약의 그들은 더 나은 도시를 바라보았으며,
가나안 땅은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11:16
그들은 악인을 위해 영원한 형벌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도들이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도 알았습니다.
그들은 구약 시대에 이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죽었다가 어두움을 떨치고 일어나 하나님의 빛 앞에 나타나는 것은
밤에 잠을 자다가 깨는 것과 비교하는 것은 적합합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에서 일어나는 것은, 거추장스런 밤의 베일을 걷어 버리는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이 되면 이 일은 더욱 완전하게 일어납니다.
그날이 되면 사망은 생명에 삼킨 바 되고, 사망의 그림자는 모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악인과 의인, 두 종류의 사람을 비교할 때
이보다 더 확실하게 그 차이를 나타내는 것은 없습니다.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이고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들"입니다. :14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그분의 형상으로 만족하는 것은
오는 세상에서 누릴 축복입니다.
의인이 깰 때에, 즉 그가 이 세상에서 죽고 다시 살아날 때에, 그 분깃을 확실히 받습니다.
이런 '내세 신앙'도 우리가 늘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주1)
8절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이 표현은 신32:10의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와 일치하는 구절입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본 구절 역시 신32:11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이로 볼때 다윗은 신명기의 기록에 근거해 본절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윗이 (성경의 개인적 소지가 어려웠던 시절임에도) 상당한 성경적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마 성전 제사 때 귀로 들은 것을, 자기 머리로 기억했던 것입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다윗은 지금 어미새가 새끼새를 그 날개 아래 두고 보호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룻기 말씀에도 이 표현이 두 번 등장합니다.
룻기 2:12에서 보아스가 룻에 대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이 자신의 신과 민족을 버리고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섬기러 이스라엘 땅으로 온 것을,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왔다고 말합니다.
룻기3:9에서는 룻이 시어머니의 말에 따라서 보아스의 발 밑에 눕는 장면입니다.
보아스가 놀라 묻자 룻은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옷자락”이 바로 “날개”와 같은 단어입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날개를 펴서 보호해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에서도 이러한 표현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시 36:7).
예수님도 이스라엘을 향하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마 23:37)고 말씀하십니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 갓 태어난 아기새들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아기새는 어미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미가 없는 사이에 적이 공격하면 반항 한 번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 아기새입니다.
스스로 보호할 수 없고 자랄 수 없습니다. 어미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께 당신의 날개 아래에서 보호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