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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8편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LNCK 2022. 5. 5. 08:26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3    시18:1~50      여러 설교 정리

시편 18편의 표제어는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은 사무엘하22장에도 거의 흡사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표제어와 사무엘서의 배경을 고려해 본다면,
-본문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시이기도 하지만
-혹은 다윗이 죽기 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지금까지 함께 해 오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드리는 찬양시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망의 위기에서 부르짖는 다윗 (18:1~6)

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과 하나님간의 밀접한 관계를 충분히 잘 보여주는 것으로 본시 전체의 주제입니다.

♬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시라♬ ..는 사랑 받는 복음성가가 있죠. :1~2

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2절에는 하나님이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반석, 요새,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

뿔은 승리와 권능의 상징입니다. 다윗은 모든 싸움에서 승리한 자이며
환난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뿔'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그의 생애의 경험,
특히 사울의 핍박으로부터 구원받은 그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3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4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불의의 창수'는 문자적으로 '벧리알의 창수'입니다.
'벧리알'은 '무익한 것', '무가치한 것'을 의미하나 '파멸', 또는 '죽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본절이 대귀법(병행)이므로
‘사망의 줄’과 ‘불의의 창수’는 같은 것입니다. 그럼 ‘죽음의 창수(넘치는 물)’이란 뜻이죠.

5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스올의 줄’과 ‘사망의 올무’ 역시 병행법입니다.
그러므로 ‘스올의 줄’은 ‘사망의 줄’입니다.

6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여기서 '전'이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왜냐면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건축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전'은 여호와께서 우주를 다스리기 위해 앉아 계신
하늘의 거처를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강림, 임재 (18:7~20)

7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강림하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강림은 하나님께서 대적들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종종 묘사되었습니다. (68:7~8, 신33:2~3, 삿5:4~5)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의 장면과 유사합니다(출19:18).
이같은 표현은 대적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강림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두렵고 엄한 분이신지를 암시합니다.

8 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고대 사람들은 코나 콧구멍을 분노의 중심지로 알았습니다.
여기서 '연기'는 명렬히 타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합니다(창19:28, 출19:18).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불은 대적들에 대한 진노의 불로서
이는 실제적으로 뇌성 벼락 또는 지진과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라는 표현은
이 진노의 불이 어떤 것도 태울 수 있는 맹렬하고 뜨거운 불임을 묘사합니다.

9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 이는 하늘을 구름으로 덮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시는 가운데 강림하셔야 했기 때문에
짙은 구름으로 자신을 두르시고 강림하십니다. (11절, 97:2, 출19:16, 18, 겔1:4)0

‘그 밭 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 - 이러한 현상은 짙은 구름이 깔려있어 해를 가렸기 때문이죠.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을 나타냅니다(마24:29).

10 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도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 구약에서 여호와께서는 이 그룹(체루빔) 천사 위에 앉아 계신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80:1, 99:1, 삼상4:4).

11 그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사’ - 하나님께서 빽빽한 구름 가운데 숨으신 것을 묘사합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면 죽게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 자신을 감추지 않으시면 악인뿐 아니라 의인들도 죽게 되죠.

12 그 앞에 광채로 말미암아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광채’는 구름 속의 번개를 묘사하고있습니다.
이 번개가 구름 속을 가로지르면서 하나님의 강림을 알립니다.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 번개가 치자마자 우박과 숯불이 내린 것입니다.
아마도 번개가 구름을 갈랐을 때에 구름이 우박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출9:24에 보면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린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고
지존하신 이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을 내리시도다

14 그의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그들을 깨뜨리셨도다

'그의 화살'이란 벼락을 의미하며, '그들'은 다윗을 핍박한 모든 대적들입니다.
‘화살’과 ‘번개’가 병행법입니다.

이는 다윗의 대적되이 인간의 손에 의해 멸망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로 멸망당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자신이 대적들과 싸워 승리를 했으나 그 승리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굳게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15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16 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많은 물'이란 4절의 '불의의 창수'와 비슷한 표현으로 사망의 위기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이 사망의 위기에서부터 건져내셨습니다.

17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로다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는 대표적으로 사울 왕을 지칭하는 듯합니다.

18 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의지’란 원어적으로 지팡이를 뜻합니다.

19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 '넓은 곳'이란 안전과 자유와 구원을 상징합니다.
구약에서 협착한 장소는 고통과 비애를 상징하고(23:4)
넓은 장소는 기쁨과 자유 등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좁은'이란 의미의 히브리어 '차르'는 고통과 재난을 상징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풍요로운 복은 '넓게 하셨다'(히르하베타)는 의미로 표현되었습니다.

20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여기서 물론 의(義)라 함은 죄가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함이 아닙니다.
이 '의'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는 오직 이러한 의인만이 하나님의 보호를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 진술되고 있습니다(15:1-5).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 구약에서 '손'은 행위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다윗의 행위의 깨끗함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에 상응하는 좋은 것으로 보답해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의로움(21~28절)

21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 이는 율법에 기록된 여호와의 명령을 지켰다는 말입니다.

22 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규레...율례’는 21절의 '도'와 같은 의미로 보다 구체적으로 '율법'을 가리킵니다.
119편에서도 이 용어들은 '율법'이나 '계명'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23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다윗은 그가 쉽게 범하는 경향이 있는 죄악에서 자신을 지켰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자신을 죄악에서 지켰는가요?
다윗은 지속적으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도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이 죄악을 향하지 않고 우리의 어리석음과 위험을 감지하도록 도와주실 것을 간구해야 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완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완전성이란 도덕적으로 전혀 죄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
다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실 만큼 순수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2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내 손의 깨끗한 대로’ - 이 표현은 20절의 '내 의를 따라'와 평행 대구를 이루고 있으므로
그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자신이 완전한 의를 소유하고 있다고 고백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켰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25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보상들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마음가짐과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원리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확신하고 있습니다.

‘자비한 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시드'는 *하시딤이 바리새인의 기원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룩한 사랑의 사람, 곧 경건한 사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26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깨끗한 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바르'는
자신을 세속으로부터 분리시켜 날마다 그 순수함을 유지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사특한 자’ - 이는 생각과 행동이 왜곡되고 비뚤어진 자를 말합니다(욥9:20, 잠28:18).

27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본절에는 곤고한 백성과 교만한 눈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곤고한 백성은 핍박을 받으나 의롭게 살고자 하는 경건한 무리를,
교만한 눈은 부요하나 경건치 못한 악의 무리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들은 각기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그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너무나도 확실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28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 이와 병행 구절인 삼하22:29에서는
'주님 자신이 나의 등불'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등불은 흑암을 물리친 등불임이 분명하죠.

즉,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을 때 다윗을 괴롭힌 흑암이 물러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등불은 또 영광과 존귀의 상징입니다(삼하21:17).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깨서 다윗을 영화릅게 하셨다는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전쟁터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도우심(구원)을 노래함 (18:29~51)

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사울을 비롯한 대적들의 핍박에서 구원받은 사실을 노래한 다윗은
이제 본절에서 부터 보다 구체적으로 위태로운 전쟁터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입니다’
담은 적군의 최종적인 수비선으로 이해합니다.

30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31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결코 실망하지 않으리라는 확신 가운데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32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며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 허리띠를 단단하게 맨 전사를 연상하게 합니다.
다윗의 허리띠는 하나님의 힘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33 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암사슴은 민첩하기로 유명한 짐승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힘을 입어 암사슴같이 민첩하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 '높은 곳'은 다윗이 쫓은 적의 요새를 의미하기보다는
다윗이 모든 대적을 물리치고 난 후에 얻은 존귀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34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가르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마드'는 '단련시키다', '훈련시키다'는 뜻이며
하나님은 실제로 모든 전술을 다윗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단련된 다윗의 팔은 영웅적인 힘으로 놋활을 당길 수 있었습니다.
이 놋활은 보통 사람의 힘으로서 당길 수 없는 금속 무기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것을 당길 수 있었다는 것은 그에게 놀라운 힘이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요.
이는 또한 전쟁에서의 승리를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힘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35 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입니다‘
여기서 '온유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는 응답이란 뜻입니다. (창23:14, 욥1:7)
본시에는 환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은 다윗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는데
다윗의 승리는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낮은 마음 또는 관대함’(잠 15:33;습 2:3)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한편,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응답이 그분의 관대하신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도 있죠.
‘주님께서 이토록 보살펴 주시니, 나는 큰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새번역)

36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넓은 곳'이란 안전과 자유와 구원을 상징합니다.
구약에서 협착한 장소는 고통과 비애를 상징하고(23:4)
넓은 장소는 기쁨과 자유 등을 상징합니다.

다윗은 이전에 대적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가 없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대적들을 물리침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
문자적으로는 '나의 발목이 흔들리지 않게 하셨다'입니다.

37 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가리니 그들이 망하기 전에는 돌아서지 아니하리이다
38 내가 그들을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리이다

37~38절은 원수들의 완전한 파멸을 보여준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완전한 승리를 부각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현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39 주께서 나를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허리띠를 단단하게 맨 전사를 연상하게 합니다.
다윗의 허리띠는 하나님의 힘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40 또 주께서 내 원수들에게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을 내가 끊어 버리게 하셨나이다
41 그들이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그들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부르짖어도 대답지 아니하셨나이다’
지금 다윗을 쫓고 있는 원수들이, 이방인이 아니라
여호와께 부르짖는 이스라엘(사울의 추종자) 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패하게 되자, 여호와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42 내가 그들을 바람 앞에 티끌 같이 부서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쏟아 버렸나이다

'티끌'이나 '진흙'은 허무함과 공허함을 상징하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창3:19, 욥7:21, 16:15, 20:11, 사41:25)

43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여러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백성의 다툼'이란 다윗이 통일국가의 왕이 되기 전까지의 북왕국(이스보셋 왕조)과
남왕국(유다 왕조) 간의 대치 상황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유다 지파의 왕이 된 이후 무려 7년 동안이나 이스보셋과 대치하였으나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전쟁을 치르지 아니하고도 통일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삼하5:1-3).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백성이 나를 섬기리입니다’
이 구절은 다윗이 통일된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이방 나라를 정복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당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주변의 모든 이방 나라들을 정복하고
그들과 종주권(宗主權)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이방의 나라들은 다윗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등 다윗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44 그들이 내 소문을 들은 즉시로 내게 청종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이는 다윗과 정면으로 싸우지 아니했던 이방 나라들이 연전연승(蓮戰蓮勝)하는 다윗의 명성만을
전해 듣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즉, 다윗 왕이 아람 동맹군인 하닷에셀의 군대를 크게 파하였을 때(삼하 8:9)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하맛 왕과 그밖의 많은 왕들이 다윗 왕에게 항복하고 화친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삼하8;10, 10:19)

45 이방 자손들이 쇠잔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이는 이방민족들이 다윗의 세력 앞에서 전의(戰意)를 상실해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쇠잔하다’의 '나벧'은 '어리석다', '바보짓을 하다'(잠17:7, 30:32, 렘17:11)는 뜻도 있죠.
이 의미를 취할 경우 저들이 다윗왕 앞에서 우둔해지고 바보처럼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 '그 견고한 곳'이란 이방인들의 요새를 뜻합니다.
따라서 저들은 요새에서 나와 다윗 왕에게 항복한 것입니다.

46 여호와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47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해 주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해 주시도다
48 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나를 대적하는 자들의 위에 나를 높이 드시고 나를 포악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여기서 ‘원수들’이란 특별히 다윗을 핍박했던 사울왕과 그의 무리들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다윗에게 대적한 모든 이방 민족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49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들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50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영영토톡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의 인자 또는 구원의 역사가 자기 당대(當代)로 끝나지 아니하고
앞으로 자기 후손들에게도 계속 이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확신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얻은 것이었습니다(삼하7:12-16).

즉,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 왕조가 앞으로 계속해서 견고할 것이라고
다윗에게 계시해 주셨던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후손'은 다윗 왕의 후손들,
곧 다윗 왕조의 왕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합니다.


◑적용/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3 

이 시는 "장엄한 감사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온전하신 하나님, 기자 다윗에게 도움을 주셨던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체험했던 위험, 원수들의 힘과 이 위험에서 속히 구원하셨던 하나님의 도우심,
그리고 심판에 나타난 구원자의 진노와 능력을 묘사합니다.

그는 이러한 것을 생생한 색깔로 묘사하며, 이것을 읽는 동안 사람들은 번개를 보고,
천둥 소리를 들으며, 지진을 겪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 전투를 직접 목격한 자로서, 그리고 이 전투에 참가한 자로서 그가 얻은 승리를 묘사합니다.
그는 왕국이 널리 확장되는 것을 노래하고,
그를 구원하고 승리하게 하신 여호와께 감사의 찬양을 돌리는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이 시의 문체는 지극히 수사적이고 시적이고 장엄하며, 여러 가지 진귀한 수사법이 동원됩니다.
빼어난 지적 능력을 가진 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에 대한 감동과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심에 대한 경외심에 차서 이 시를 지었습니다. -존 브라운

▲1.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1
사랑한다는 말의 명사형은 히브리어로 ‘레헴’이라고 하며 이는 '자궁'이란 뜻이죠.
이는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내장으로부터 또는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사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사람의 내장을 움직이는, 그런 동정심과 자비를 함축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나의 깊은 곳에 있는 내장으로부터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는 말이, 성경에 여러 가지가 나옵니다.
-(주님을) 믿는다
-(주님을) 사랑한다
-(주님과) 교제한다
-(주님의) 신부가 된다
-(주님의) 증인이 된다
-그 외 의지한다, 신뢰한다, 예배한다, 경외한다...

그 중에 우리가 가장 잘 사용하는 말은 ‘믿는다,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이렇게 우리 ‘믿음’을 표현하는 말이
약 60가지가 나온다고 합니다.

즉 믿음=사랑=교제=신부되기=증인되기=의지=신뢰=예배=경외 라는 의미이죠.
그 의미의 근원을 올라가면.. 다 똑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직 ‘믿음’이란 말, 한 가지만 알고 씁니다.
자기가 주님을 믿는데,
자기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교제하지 않고, 신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증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 일변도’ 신앙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말이, 오늘날 많은 신자들에게 오용, 남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란.. 어떤 사실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신앙생활을 통칭하는 말이 ‘믿음’인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그리스도의 신부이며=주님의 증인이며...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데,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은 주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거죠.
진짜 주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다윗처럼 고백하는 거죠.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1

또 한 가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믿는) 증거로서, 시편에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119:97)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시119:127)
"내가 주의 법도 사랑함을 보옵소서"(시119:159)

연인사이가 있다고 칩시다. 두 사람이 연인인 증거는,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고, 주의해서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도 사랑하고, 기쁘게 지키는 거죠.

나는 정말 주님을 제대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나는 정말 주님을 제대로 믿고 있습니까?

부부가 결혼해서, 신혼 때보다 사랑과 관계가 해를 더할수록 더욱 깊어지듯이
성도가 주님과 혼인해서, 해를 더할수록 그 사랑과 교제가 더욱 깊어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혹시 ‘나는 그런 것을 못 느끼겠어!’ 하는 신자가 있다면..
애당초 처음부터 믿은 게 아닙니다. ‘지적 동의’한 것이죠.
믿으면 반드시 ‘변화’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주님을 사랑’하게 돼죠.

▲2.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3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3
다윗은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1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킨 것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자기 일생을 되돌아보면 지은 시라고 보는데,
하나님이 산성, 방패, 요새가 되어주셔서 다윗을 일평생 지켜주신 이유도
그가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때문일 것입니다. :23

다윗은 어떻게 자신을 죄악에서 지켰는가요?
다윗은 지속적으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도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이 죄악을 향하지 않고 우리의 어리석음과 위험을 감지하도록 도와주실 것을 간구해야 합니다.

오늘날 신앙이 극단주의(익스트림)에 빠지면 ‘자기 책임성’이 관과될 수 있습니다.
일례로 ‘하나님의 주권, 예정, 은혜로 구원받음’ 이런 (칼빈주의) 신앙이 극단주의에 빠지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 주시고
즉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택해 주시고, 은혜로 믿게 해 주시고, 은혜로 성화도 이루어주시고..
그러면 ‘자기 책임’이 필요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택해 주시고, 은혜로 믿게 해 주시고, 은혜로 성화도 이루어주시고..
이런 칼빈주의 신앙이 틀린 것인가요? 아니요, 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칼빈주의 신앙은
모든 면에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노력으로 하려는 알미니안 신앙을 보완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지요..

정리하면, 칼빈주의, 알미니안 주의가 성경에 둘 다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를 버리고, 하나만 강조하면.. 극단적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한국은 장로교 칼빈주의 신앙이 강한 토양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신앙의 자기 책임성’이 약화되는 (치명적) 단점이 있습니다.

다윗은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3
물론 성령님이 인도해 주시죠, 물론 하나님이 다윗을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역할은 ‘코치’로서 도와주시는 역할이고요,

필드에서 뛰는 ‘선수’는 다윗 자신이고, 우리 각자 자신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 자신을 (의지적으로) 스스로 지키는’ 신앙도 꼭 필요하다는 것이죠.

오늘도 하루에 약 30만명씩 전세계에서 사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중 다수가 지옥에 가는 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그건 하나님이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자기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2021년 통계를 보니, 한국에서 1년간 약 10만쌍이 이혼했다고 합니다. (결혼은 19만쌍)
하나님은 그들이 이혼하는 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그건 하나님이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자기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혼해놓고, ‘하나님이 나를 막아주시지 않았다’고 원망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신앙의 자기 책임성’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의지적 신앙’입니다.

지성적 신앙, 감정적 신앙, 의지적 신앙.. 이 신앙의 3영역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쪽은 ‘지성적 신앙’입니다.

1) 지적인 신앙인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신앙에 대해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고, 신앙서적도 읽고..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배우고 공부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들이 있고,

2) 감정적 신앙인 (감성적, 감수성.. 다 같은 뜻)
이들은 뜨거운 것을 선호합니다.
뜨거운 통성기도, 뜨겁고 열정적인 찬양, 심금을 감동시키는 설교...

그런데 뜨겁게 눈물지으며 손을 들고 찬양하다가도
설교시간이 되면 또 졸기도 합니다.

3) 의지적 신앙인
이들은 ‘순종, 실천’을 강조합니다.
제대로 지키지도 못할 많은 성경구절, 성경지식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예배 드리는 것보다,
거리에 나가서 불쌍한 사람 도와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힘주어 실천합니다.

오늘날 1)번이 제일 강조되고 *주로 장로교
2)번도 어느 정도 강조되고 있는데 *주로 은사주의, 오순절파
3)번이 간과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주 일부 사람들만 이 영역을 강조합니다.

물론 3)도 단점이 있는데, 그것은 1)과 2)영역을 너무 무시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다윗은 ‘신앙의 자기 책임성’, ‘의지적 신앙’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3

다윗은 지적인 신앙, 정적인 신앙, 의지적 신앙 즉 1) 2) 3) 신앙의 균형을 갖추었습니다.
1)그의 시편은 모세오경의 성경구절을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에도 능통했고,
그는 언제나 주의 법과 율례를 강조했습니다. 그의 시편에.

2)본문 1절을 보십시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는 감정적으로도 뜨거웠습니다. 법궤를 가져올 때, 그가 몸이 드러나도록 힘껏 춤을 추었습니다.

3) 그는 의지적으로도 균형을 잃지 않았습니다.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3
우리도 지/정/의의 이런 균형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그가 진정 '믿음 있는' 신앙인입니다.
   
△영혼이 건강하지 못한 자는
자기가 특별히 범하는 경향이 있는 죄에 대한 계명에 주의하지 않습니다.
크게 괘념치 않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영혼은 그렇지 않죠.
그는 자신이 자주 범하는 경향이 있는 죄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리고 그런 죄에 대한 계명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애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5:19)

경건하고 신실한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에서 크고 작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할 것으로 알고 열심히 지킵니다.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시119:6)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23a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완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완전성이란 도덕적으로 전혀 죄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
다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실 만큼 순수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나의 죄악"
사람마다 특히 범하기 쉬운 죄가 있죠. 사람마다 취약성을 보이는 죄악이 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나의 죄악"이라고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마치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바로 이 죄악"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사람들은 자신이 별로 유혹을 느끼지 않는 죄를 극복했다고
자신이 성장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마음속으로 연모하는 죄악을 극복한 것으로 자신을 측정해야 합니다.
의사가 위암 이라고 판정하면 (다른 암도 마찬가지지요)
몸의 다른 부위들이 건강해도, 위가 병든 사람은.. 그는 암 환자인 것입니다.

어떤 질병을 진단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부분은 건강하더라도,
그들은 질병의 특유한 증상을 보고서, 환자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측정합니다.
혹시 나는 영혼의 암환자는 아닙니까?
다른 부분은 다 건강해도 '나의 죄악'을 극복하지 못하면.. 영적으로 암 환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