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와 메추라기'에서 메추라기에 관한 오해
출처 '만나와 메추라기'에서 메추라기에 관한 오해 - 레마(Rhema) - CPUU의 로고스와 레마 (postype.com)
성경에서 신구약을 가리지 않고 신학적으로 공통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내용이 있다면 단연 출애굽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를 통해서 이집트의 430년 노예 생활에서 구출하여 해방하신 이야기다. 이스라엘 백성은 대대손손 계속해서 그 사건을 회상했다. 시편 기자도 출애굽 시절을 노래하고, 복음서의 예수님의 사역도 모세의 출애굽 과정과 밀접한 구조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서술되었다. 그만큼 유대교 배경에서 출애굽 사건은 굉장히 중요했다. 출애굽 과정을 다룬 본문은 모세오경 중 창세기를 제외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전부이다. 이 내용 중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하게 인도하신 이야기, 그 백성이 불평한 이야기, 진노하셔서 백성을 벌한 이야기, 모세가 중재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백성을 품으시는 이야기 구조가 반복된다.
모태신앙으로 자란 사람들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관용어구가 있다. 바로 ‘만나와 메추라기’이다. 이 표현은 광야생활을 하던 백성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그래서 장로님들과 권사님들께서 기도하시는 중엔 반드시 ‘만나와 메추라기를 허락하여 주시옵고’ 와 같은 문장이 등장하곤 한다. 또는 “아…. 취업이 잘 안 된다…. 나에게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시려나?” 와 같은 상황에서 응용할 수 있다. 실제로 방금 이 글을 쓰며 구글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검색을 했더니, 수많은 설교 본문들이 이 제목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이처럼 [만나와 메추라기]가 너무나 익숙한 표현이어서 습관처럼 사용하고 있었는데, 성경을 통독하다가 문득 이 표현이 잘못된 것 같은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이에 그 근거를 나열해보고자 한다.
만나와 메추라기에 대한 첫 언급은 출애굽기 16장에서 시작된다. 이스라엘 회중은 광야에서 굶어 죽겠다며 그들을 인도해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사실 이 원망은 모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줄 것이다. 저녁에는 먹을 고기를 주고, 아침에는 배불리 먹을 빵을 줄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나를 인정할 것이다.”(16:4, 8, 12)]
뒤이어 출16:13절에 처음으로 ‘메추라기’(Quail)가 먼저 등장한다.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가 날아와서 진 친 곳을 뒤덮었고, 다음 날 아침에는 진 친 곳 둘레에 안개가 자욱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메추라기가 내려왔다. 그런데 백성이 그 메추라기를 잡았는지, 먹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일단 이어지는 본문을 계속 읽어본다. 이제 ‘만나’(Manna)가 처음 등장한다. [안개가 걷히고 나니, 이럴 수가, 광야 지면에, 마치 땅 위의 서리처럼 보이는, 가는 싸라기 같은 것이 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 자손이 그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서로 "이게 무엇이냐?" 하고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입니다.”] 여기에서 ‘이게 무엇이냐?’라는 단어가 ‘만 후’이고 여기에서 ‘만나’라는 말이 파생되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본문은 16장이 14절부터 36절로 끝낱때까지 ‘만나’를 어떻게 먹는지에 대한 규칙을 설명한다. 언제 어떻게 얼마나 자주 만나를 먹을 것인가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메추라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메추라기를 어떻게 먹을지, 언제 먹을지에 대한 설명도 없으며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물론, 배고픈 백성이 갑자기 내려온 메추라기를 당연히 먹었는데 다만 기록이 되어있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좀 더 관련 근거가 필요하다. 앞서 말했듯이, 출애굽사건은 유대교와 기독교 배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슈였기 때문에, 신구약 저자들은 그때의 사건을 자주 인용했다. 다음은 성경에서 ‘만나’에 대한 언급을 찾아서 모아보았다.
(출애굽기16:31, 35) 이스라엘 사람은 그것을 만나라고 하였다. 그것은 고수 씨처럼 하얗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와 같다. 이스라엘 자손은 정착지에 이를 때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를 때까지 만나를 먹었다.
(민수기11:9) 밤이 되어 진에 이슬이 내릴 때면, 만나도 그 위에 내리곤 하였다.
(신명기 8:3)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 5:12)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날부터 만나가 그쳐서,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만나를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 해에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을 먹었다.
(느헤미야 9:15, 20) 굶주릴까봐 하늘에서 먹거리를 내려 주시고, (생략) 그들의 입에 만나가 끊이지 않게 하시며, 목말라 할 때에 물을 주셨습니다.
(시편 78:24, 25) 만나를 비처럼 내리시어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으니, 사람이 천사의 음식을 먹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풍족할 만큼 내려 주셨다.
(요한복음 6:31) '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서, 그들에게 먹게 하셨다' 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히브리서 9:4) 거기에는 금으로 만든 분향제단과 온통 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생략) 돌판이 들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7)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감추어 둔 만나를 주겠고, 흰 돌도 주겠다.
위와 같이, 단순히 키워드 검색만 해봐도 신구약을 통틀어 ‘만나’는 약 20회 정도 인용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 어떤 저자도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표현을 쓴 적은 없다. 쓰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만나’라고만 표현했을 뿐이다. 이에 비해, 메추라기가 등장하는 본문은 성경 전체에서 딱 3번뿐이다. 그 중 첫 번째는 위에서 설명한 출애굽기 16장의 첫 등장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번을 찾아보자.
메추라기가 등장하는 두 번째 본문은 민수기 11장이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가 먹을 것 때문에 탐욕을 품으니, 이스라엘 자손들도 또다시 울며 불평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이집트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다.” (11:4-6)] 이 본문을 보면 위의 출애굽기 16장에서 그들은 메추라기를 먹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제 '만나만 먹는 것이 지겨우니' 제발 고기를 달라고 원성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백성의 불평을 들은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심지어 ‘한 달 내내, 냄새만 맡아도 먹기 싫을 때까지, 줄곧 그것을 먹게 될 것이다.’(20절)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신다. 왜냐하면, 그 백성의 불평에 대단히 노하셨기 때문이다.(10절) 그리고 실제로 메추라기 기적이 일어난다. [주님께서 바람을 일으키셨다. 주님께서 바다 쪽에서 메추라기를 몰아, 진을 빙 둘러 이쪽으로 하룻길 될 만한 지역에 떨어뜨리시어, 땅 위로 두 자쯤 쌓이게 하셨다. 백성이 일어나 바로 그날 온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그리고 그 이튿날도 온종일 메추라기를 모았는데, 적게 모은 사람도 열 호멜은 모았다. 그들은 그것들을 진 주변에 널어 놓았다. (민11:31-32)]
그토록 고기를 원하던 그들은 드디어 메추라기를 먹게 되었다. 아니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길래 이 긴 글을 적었는가? 그 이유는 이어지는 다음 절에 나온다.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주님께서 백성에게 크게 진노하셨다. 주님께서는 백성을 극심한 재앙으로 치셨다. 바로 그곳을, 사람들은 기브롯 핫다아와(탐욕의 무덤)라 불렀다. 탐욕에 사로잡힌 백성을 거기에 묻었기 때문이다. (민11:33-34)] 그렇다. 메추라기를 먹은 백성은, 행복하고 맛있게 냠냠 쩝쩝한 게 아니라, 먹고 죽었다. 심지어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그들의 불평과 원망에 대한 대가였던 것이다. 그들은 극심한 재앙 때문에 죽고 말았다. 그들이 메추라기를 먹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재앙을 받은 이후에 다시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여호수아서에서 출애굽이 끝난 후 가나안에 도착하자 이제는 '만나'가 멈추었다고만 말한다.(수5:12)
성경에서 메추라기를 언급한 마지막 세 번째 본문은 시편 78편 27-29절이다. 사실 이 본문은 민수기 11장의 내용으로 지은 시편이다. "고기를 먼지처럼 내려 주시고, 나는 새를 바다의 모래처럼 쏟아 주셨다. 새들은 진 한가운데로 떨어지면서, 그들이 사는 곳에 두루 떨어지니, 그들이 마음껏 먹고 배불렀다.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넉넉히 주셨다." 비록 '메추라기'라는 단어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만나와 함께 '하늘의 새'를 내려주셔서 먹었다는 점에서 민수기 본문의 메추라기로 간주할 수 있다. 그들은 분명 메추라기를 먹긴 먹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30-31절의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먹을 것이 아직도 입 속에 있는데도, 그들은 더 먹으려는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 마침내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셨다. 살진 사람들을 죽게 하시며,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을 거꾸러뜨리셨다.] 결국 이 시편은 민수기 11장에서의 사건을 그대로 요약한 것이며, 결말은 동일하다.
메추라기를 먹은 백성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욕망에 진노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메추라기를 먹었던 사건은 결코 ‘긍정적인 예화’로 사용될 수 없었던 것이고, 신구약 모든 저자들도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표현할 때 ‘메추라기’를 언급하지 않고, ‘만나’만 언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나’와 ‘메추라기’는 함께 사용하기 상당히 민망한 단어의 조합이며,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제목으로 간증을 해서는 더더욱 안되겠다는 결론을 내려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