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낭비적 사랑 눅15:11~24 -출처보기-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시라
어느 날 그가 아들 삼남매 중 한 자녀를 잃어버렸습니다.
"너희의 생각은 어떠냐?...."고 다시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목자(예수님)의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
저도 얼마 동안은 잃어버린 자식의 모습 말고는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 아이에게만 매달릴 수는 없었습니다.
저에겐 두 아들이 남아있으니까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냉혹한 현실로 돌아와야 합니다.
무정한 아비라고 비난받아도 어쩔 수 없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자신이, 깊은 산 속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가시나무 우거진 바위 벼랑에 매달려 그는 하늘을 향해 소리 질렀습니다.
"당신은 양 99마리를 버려두고, 1마리를 찾아 나서겠다고 하셨지요?
당장 이리로 와 주십시오. 결코 중도에서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어리석은 목자, 무정한 아비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제발, 저를 버려지는 마십시오."
<이현주,「한송이 이름없는 들꽃으로」 284쪽에서
(99마리를 놔두고, 잃어버린 1마리를 찾아 나서는 일이)
비합리적인 것 같고 낭비적인 것 같은 것 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게 '남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내가 위기를 당할 때는
사람들은 저마다 차가운 이성적인 판단을 뛰어넘는 혜택을 받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대우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해, 원망과 미움까지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누가 나를 회복시키기 위해
비상식적이고 비효율적인 선택을 감행하겠습니까?
오직 부모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이 땅의 아버지의 사랑과
하늘의 하나님의 사랑의 회복시키는 독특한 사랑이 하나로 느껴지게 나와 있습니다.
그 은혜로운 사랑을 받으며 우리는 스스로 회복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사랑의 특성이 무엇일까요?
◑1. (아낌 없는) 낭비적 사랑 (11-13절)
첫째, 부모님의 사랑의 특징은 아낌없이 주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엄청난 낭비처럼 여겨질 정도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달라고 하니
어떤 책망이나 훈계도 없이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12절).
그리고 그 후 며칠이 안돼 둘째 아들이 그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버립니다.
그 아들은 돈이 있으니, 아버지가 필요 없는 것이지요.
아버지를 떠난 그곳에서, 아들은 간섭하는 이 없이 눈치 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낭비하며 지냅니다.
마치 자기 인생은 자신이 주인이라는 식입니다.
목사가 어린 소녀에게 물었다. "누가 너를 만들었는지 아니?"
그러자 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들고는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나를 조금 만드셨어요."
"너를 조금 만들었다니, 그게 무슨 뜻이냐?"
"무슨 뜻이냐고요? 하나님이 나를 아기로 만드셨잖아요. 그 나머지는 내가 자란거고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모님에 대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교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 혼자 자란 듯이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가 맡겨놓은 물건 달라는 식으로 요구하고.. 성질까지 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둘째 아들이 모은 재산입니까?
아버지는 왜 한마디 말씀도 없이, 아들이 달라고 한다고 평생을 모든 귀중한 재산을
이렇게 선뜻 내어준 것일까요? 아깝지 않을까요?
아버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들과의 관계이지, 돈이 아니었습니다.
평생을 투자해서 얻고 싶은 것은 아들의 마음이지.. 물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재산을 미리 나누어 달라고 할 정도면
이미 그 아들의 마음에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는 상태이고,
마음이 이미 아버지를 떠나 있는.. 삐뚤어진 병든 상태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아들이, 집 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자발적인 순종이 아니면 의미가 없기에.. 위험을 감수한 것입니다.
그 아들에게는 다른 세계에 대한 경험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진실한 사랑을 얻기 위해.. 마음의 고통과 번민을 각오한 것입니다.
재산을 가져가서 그 아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얼마나 걱정이 되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사랑은, 번뇌를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아마도 삶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대가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얻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뜻 재산을 나눠줄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당연한 듯 요구하는 그 못된 성격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이 언젠가 돌아올 줄 믿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물질과 시간이 낭비되는 것 같았지만,
아버지가 보기에는 가능성을 믿기에 투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사랑의 투자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이 사랑으로 느껴지고 믿어지는 것은.. 그것이 낭비라고 생각할 만큼
아낌없이 주어도 아깝지 않을 때입니다.
아니 물질의 낭비뿐 아니라 목숨이라도 내어주는 사랑의 허비
그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부모님의 사랑은 ‘여기까지만’ 이라는 선이 없습니다.
목숨까지 아낌없이 주기 때문입니다.
에스키모족은 남을 위해서 살신하는 의로운 사람을 남자일 경우 ‘펭귄 아버지’,
여자일 경우 ‘연어 어머니’라 부른다고 한다.
5월의 남극은 해가 뜨지 않는 암흑의 대빙원이다.
펭귄의 암놈은 이 5월을 기다렸다가 내륙 깊숙이 들어와 알을 낳는데 하나만 낳는다.
얼음 바닥이 아닌 곳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알이 얼어붙어 버린다.
그 알을 지키고 품는 것은 수놈 담당이다.
알이 깨기까지 먹지도 못한 채 꼬박 품고 있어야 한다.
그동안 암놈은 먹이를 구하기 위한 기나긴 장정을 떠난다.
바다에 이르러 새우 류의 먹이를 잔뜩 뱃속에 저장시킨 다음
빙원을 가로질러 되돌아온다.
돌아오면 새끼가 부화되어 있고 아빠와 교대해서 뱃속에 저장해 온 양식을
소처럼 반추하여 새끼에게 먹인다.
달포 남짓 꼬박 굶은 상태에서 눈보라와 폭풍 속에서 시달려
체력 소모에 영양실조가 겹친 수놈은
아내가 마련해온 먹이가 못내 먹고 싶었겠지만.. 애써 외면을 한다.
그리하여 굶주림에 비틀대며 바다를 향하는 수놈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필사적으로 걷지만, 다리 힘이 빠져 미끄러지고 나뒹굴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만다.
이렇게 새로운 생명을 위해 버림 받고서 눈을 감는다.
본능적인 새끼 애정은 이처럼 아름다우면서 처절하다.
남극에서는 아버지 펭귄들이 가혹한 시련을 겪고 있는 5월이다.
새끼만 먹이고 기진맥진한 아비는 그 곁에서 굶어 죽어간다고 한다.
연어는 바다에 가서 살다가 알을 낳고자 하천으로 회귀하는데
섭씨 7도의 청정수를 찾아 하루 14㎞씩 급류를 역류한다.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에는 기진맥진하여 낳은 알을 보고 서서히 죽어간다고 한다.
이런 숭고한 희생적 낭비의 사랑이 과연 어디서 생겨났다고 생각하십니까?
펭귄이 연어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한답니까?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 창조한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고
이렇게 그의 속성을 그의 만드신 만물 중에 밝히 알도록 표시해 두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한단다!”
◑2. 풍족한 사랑 (14-19절)
둘째, 부모님의 사랑은 풍족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부자의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의 하나는 풍족한 사랑의 경험에 있습니다.
아들이 객지에서 주려 죽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아버지의 집이 생각났습니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가 품꾼들에게 풍족한 사랑을 베풀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16-17절을 읽어보십시오. 아들은 아버지의 넉넉한 사랑의 품을 이미 경험했습니다.
그 풍족함은 세상의 인심의 야박함과 그 궁핍 그리고 기근이라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봉착했을 때.. 더 빛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풍성한 사랑의 확신이, 발길을 아버지 짐으로 돌릴 수 있는 용기를 아들에게 준 것입니다.
그 풍성함이 회복을 위한 저력이 된 것입니다.
풍족한 사랑을 베푼 사람은, 상대편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헛되지 않아 마음이 돌아올 것을 믿습니다.
아주 망하지 않고 제기할 수 있는 힘과 저력은.. 근본적으로 부모님께 받은 사랑입니다.
어버이에게 받은 사랑은 결코 헛되지 않고, 인생에서 가장 큰 저력이 됩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이 세상과 비교되는 그 사랑의 풍성함에
마음이 녹아내린 것입니다.
밑바닥에서도 그 사랑은 느껴질 정도로 풍성한 것이었습니다.
뻔히 알면서도 베풀어준 아버지의 사랑은
내가 어떤 형편에 있어도 결코 변치 않을 사랑인 것을 믿게 했던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면 반드시 열매를 맺을 날 있습니다.
여류 문학가 매컬리는 어린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했다.
"사랑하는 아이들아, 어머니의 인자한 눈, 부드러운 손,
친절한 음성이 존재하는 동안 이것들을 존귀하게 여겨라.
사랑하는 어머니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머니를 특별히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일생 동안 아무리 많은 친구들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해도
지금 어머니에게 받는 사랑만은 못할 것이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어머니에게 아버지에게 평생을 받은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것입니까? 그런데 친구가 당신에게 준 사랑과 비교를 합니까?
또는 심지어 아내와 남편에게 준 사랑이 비교 가능하겠습니까?
그 사랑은 너무나 풍성한 것이기에 세상의 어떤 것과도 타협할 수 없는 큰 것입니다.
그 마음에 아픔과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가 나중에 감격하여 아들을 안고 축복한 이유는
이 아버지의 사랑을 믿어준 아들이 고마운 것입니다.
살아서 돌아와서 그 사랑을 헛되지 않게 한 아들의 믿음이 고마운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님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어도
여전히 우리는 그분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감당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풍족함은, 우주 만물을 다 창조하신 능력에도 있지만,
자기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부어주신 사랑의 질적인 수준에도 있습니다.
귀한 독생자를 아낌없이 우리 죄인을 위해 부어주실 만한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어떤 형편이든지 어떻게 절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뜨겁고 풍성한 사랑을 믿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회복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세워주는 사랑 (20-24절)
셋째, 아버지의 사랑은 세워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기대감이 이 아들을 회복시킨 것입니다.
아버지는 거지인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오히려 그 진심을 꿰뚫어보고
세워주는 사랑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믿었고, 아들은 아버지를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위대한 회복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의 진가를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아들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재산을 탕진하고 창기와 함께 모든 것을 날려버린 사람이라고
그 하나 밖에 없는 형도 멸시하고 미워했습니다.
사방에 어떤 사람도 이 아들에게 가능성을 둔 사람은 없었습니다.
기대하지 않으면 회복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만은 그 아들의 진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 아들이 얼마나 훌륭해져서 왔는지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인품의 변화였습니다.
아버지는 놀랍게도 아들의 변화를 감지합니다.
내면의 변화와 성숙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은 자신을 스스로 죄인으로 인정하는
깊이 있는 영성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자격을 스스로 감당치 못할 것으로 여기고
품꾼의 하나로 여겨 달라고 할 정도로 그의 마음은 겸비해졌습니다.
이것은 큰 아들 보다 더 훌륭한 내면의 인격적 성숙을 이룬 모습이었습니다.
돌아온 것만으로 아들은 충분히 아버지께 보답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모험이 성공으로 끝나게 한 것입니다.
결코 낭비가 되지 않게 했고 오히려 위대한 교육적 투자로 바꾸어 준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의 금의환향을 축복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보기에 아들은 비록 거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세상적인 성공이 아닌 진정한 영적인 성장을 이룬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부모님이 우리들을 보시는 눈길입니다.
늘 세워주시고 축복하시고 믿어주시는 마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우리들은 오늘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는 늘 자식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생각하고 자랑을 합니다.
남들이 예의상 한번 자식에게 예쁘다고 하면 미스 코리아감이라고 착각하고,
조금 똑똑하다고 하면 천재라고 영재교육이라도 시키려고 합니다.
부모님들을 보면 모두들 자기 자식이 최고인줄 압니다. 그렇게 봅니다.
그 미래를 보고 그 내면의 착한 면들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된 것입니다.
부모님의 기대감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부모님을 연로하실지라도 다시 세워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를 팝니다.”
어느 날 신문광고에 아버지를 판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그 광고에는 아버지는 지금 노령이고 몸이 편치 않아서
일금 일 십만 원이면 아버지를 팔겠다고 적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광고를 바라보고 혀를 끌끌 차며
"세상이 말세다"라고 하는 이도 있었고 다 늙은 할아버지를 누가 사겠냐고 쑥덕거렸다.
이 광고를 보고 부모 없는 설움을 지녔던 한 부부가 새벽같이 그 곳으로 달려갔다.
대문 앞에서 몸매를 가다듬은 부부는 심호흡을 하고 초인종을 누른다.
넓은 정원에서 꽃밭에 물을 주고 있던 할아버지가 대문을 열고서는
어떻게 왔냐고 물었다.
부부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신문광고를 보고 달려왔다고 말씀을 드리자
할아버지가 웃음을 지으며 집안으로 안내를 한다.
그 곳은 아주 부잣집이었다. "아버지를 파시겠다는 광고를 보고 왔습니다."
젊은 부부는 또박또박 뚜렷하게 이야기를 한다.
할아버지는 빙긋 웃음을 지으시더니 "내가 잘 아는 할아버지인데
그 할아버지 몸이 좋지 않아요. 그런 할아버지를 왜 사려고..."
젊은 부부는 모두가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고아처럼 살다 결혼했기 때문에
부모 없는 설움이 늘 가슴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아프거나 집안이 어렵지 않은 가정이라면
누가 아버지를 팔겠다고 광고를 내겠느냐고....
비록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지만 작은 가운데서도
아기자기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도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싶어서 달려왔다고 하였다.
이들 부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돈을 달라고 한다.
젊은 부부는 정성스럽게 가지런히 담은 흰 봉투하나를 할아버지에게 내어놓는다.
할아버지는 돈 봉투를 받아들고 나서 그 할아버지도 정리할 것이 있어서 그러니
일주일 후에 다시 이 곳을 오라고 하였다.
일주일 후 젊은 부부는 다시금 그 집을 찾았다.
기다리고 있던 할아버지가 반갑게 맞이하면서
"어서 오게나 나의 아들과 며느리야"하시면서
"사실 내가 너희에게 팔렸으니 응당 내가 너희들을 따라가야 하겠지만
너희가 이 집으로 식구를 데려 오너라"고 하신다.
깜짝 놀란 부부는 양자를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지만
요즈음 젊은이들이 돈만 알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서 이해가 되었다.
젊은 부부는 "저희에게 아버지로 팔렸으면 저희를 따라 가셔야지요,
비록 저희들은 넉넉하게 살지는 않지만 그 곳에는 사랑이 있답니다."라고 고집했다.
할아버지는 진정 흐뭇한 마음으로 "너희는 참으로 착한 사람들이다.
너희가 부모를 섬기러 왔으니 진정 내 아들이다.
그러하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곧 너희 것이며
너희는 나로 인해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운 마음 때문에 복을 불러들인 것이다."
라고 기뻐하시며 자식들의 절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자라면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을
부모님처럼 공경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으로 존경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면 모든 어른들이
이렇게 풍성한 사랑을 베푸시는 부모님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사랑의 회복의 역사가 성도들을 통해서 일어나길 축원드립니다.
기도
(작자미상)
아주 오래전, 내가 올려다본 그의 어깨는 까마득한 산처럼 높았다.
그는 젊고 정열이 있었고,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나에게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가족에게 소외받고, 돈 벌어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데기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 어느 곳에서도 그가 앉아 쉴 자리가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들 앞에서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이란 침묵뿐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아직 수줍다.
그들은 다정하게 뺨을 부비며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를 흉보던 그 모든 일들을 이제 내가 하고 있다.
처음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처럼 나는 아직도 모든 것이 두렵다.
언젠가 내가 가장이 된다는 것.
내 아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무섭다.
이제야 그 의미를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그 두려움을 말해선 안 된다는 것이 가장 무섭다.
이제 당신이 자유롭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나였음을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