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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3 시28:1~9 여러 설교 정리
오늘 본문의 시편도 표제어가 <다윗의 시>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언제 이 시를 짓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쿠데타를 당해서,
이리 저리 도망을 다녔을 때에 지은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주1)
27편의 끝절에서 다윗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기다리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27:14
이어지는 28편은 다윗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중의 모습이 드러나 있고 (특히 1~2절에)
기다림의 끝에 다윗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6~9절)
다윗은 그 기다리는 중에 간절한 마음으로 도우심을 구하고
기다림을 끝났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기도응답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절별 해석
1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나의 반석’
영국의 경건한 목회자인 윌리엄 에반스 목사에게, 어느 날 한 성도가 방문하여,
목사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에반스 목사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연약함 그 자체이지만,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 다윗은 상당 기간 기도하였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도 이에 대한 응답을 받지 못했다는 거죠.
그래서 그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웅답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기는 자와 같을까 하나입니다’
여기서 '무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보르'는 '수렁', '구덩이'를 의미하며,
'쉐올'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2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다윗이 피난처에서 예루살렘 성소를 사모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요즘도 회교도는 메카가 있는 동쪽을 향하여 기도했고,
다니엘도 바벨론에서, 먼 고국 성전을 향하여, 그 방향으로 문을 열어놓고 기도했습니다. 단6:10
3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그들은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여기서 '끌지 마옵소서'란 멸망시키기 위해 끌고 가지 말아 달라는 애원입니다.
이러한 그의 애원 가운데는 자신의 무죄함에 대한 변론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지금까지 그는 악인이나 행악자들 같이 범죄하며 살아오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저들 악인들에게 형벌하시는 것과 같이 자기 자신을 멸망으로 끌고 가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애원한 것입니다(26:9-11).
4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 - 본 구절은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는 말입니다.
공의는 시편 전체의 한 주제이자(1:6) 하나님의 통치의 원리이며,
사람이 구체적으로 행한 대로 거두게 하는 원리입니다.
5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의 의미에 대해 크게 세 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1) 혹자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신 행위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악인들이 다윗을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인식하지 못하고
지금 그를 핍박하고 있다는 해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 혹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같이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은 영원불변하며 반드시 성취되고야 마는 속성을 지니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주목하지 못한 저들이, 언약 백성을 괴롭히고 있다는 해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3) 어떤 학자는 인간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로운 행사, 또는 공의로운 섭리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인간의 역사속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사역들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악을 행하였죠.
3, 4절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요청하고 있기에 3)의 해석이 가장 무난합니다.
여기서 '손으로 지으신 것'이란 4절의 '저희 손의 지은 대로'와 대조적인 개념으로
악인들의 악한 행위와는 반대되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6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6절부터는 다윗의 기도가 탄원과 간청에서 찬양으로 변경됩니다.
본 절은 탄원하던 다윗이 갑자기 하나님을 찬송하게 돤 주된 이유를 나타냅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응답 받았음을 의미하지 않고
다만 기도 중에 그 실제적인 응답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다윗은 성소를 향해 부르짖던 중(2절) 드디어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를 찬송함이여”와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사이에
우리말 성경에는 아무 것도 없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유’를 뜻하는 접속사 ‘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다윗은 2절에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기도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라며 시제가 완료형으로 바뀌었습니다.
응답의 확신이 찬양이 솟아나게 했던 것입니다.
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즈'는 군대 또는 용사들의 군사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움을 이미 받은 것처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가 바로 믿음의 기도입니다.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은 아직 실제로 나타나지 아니한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해 기뻐하며 감사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태도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신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8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여기서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분명히 다윗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죠.
혹자는 '다윗의 군사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9절의 '주의 백성'이라는 말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은 '백성'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또한 본절에서 '그들'과 '기름 부음 받은 자'(왕)가 병행되어 있는데
이러한 사실도 저희가 백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왜냐하면 신정(神政) 국가에서 기름 부음 받은 왕은 즉위할 때
백성들과 언약을 맺는데(삼하 5:3),
이 언약으로 말미암아 왕과 백성은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왕의 승리는 백성의 승리가 되고,
왕의 패배는 곧 백성의 패배가 되는 연합 관계에 있게 됩니다.
이러한 신정국가의 특별한 관계에서 볼 때
다윗 왕의 승리는 개인의 승리이면서 동시에 백성들의 승리였습니다.
9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그는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보다는 백성들을 위해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기원은 그가 자신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福)에 모든 관심을 기울였음을 잘 보여 줍니다.
한편, '산업'이란 표현은 '백성'과 같은 뜻입니다.
왜냐하면 '산업'이 '주의 백성' 과 병행 대구를 이루어 의미가 강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인도하소서’
다윗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는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진실로 안전하게 인도하실 분은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적용 “악인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3
▲1. 들으소서, 들어셨음이로다!
2절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6절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다윗은 2절에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기도했었습니다.
그런데 6절에는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라며 시제가 완료형으로 바뀌었습니다.
응답의 확신이 더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셨음을 우리가 확실히 느낄 때,
내 기도는 8부 능선을 넘은 것입니다.
감기약을 먹으면, 그 효과가 3시간 후에, 6시간 후에, 혹은 사흘 후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효과가 나타날 것을’ 기대합니다. 과거의 경험 때문이죠.
기도의 응답은 ‘주님의 들으심’부터 시작됩니다.
그 응답은 앞으로 천천히 나타날 것입니다.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나타나겠죠.
그러나 제일 먼저 우리가 확인할 것은 ‘주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나?’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들으셨다’는 확신이 들면, 그 다음부터는
집에 빚이 쌓여도, 몸에 질병이 있어도, 자녀에게 문제가 생겨도.. 차츰 다 해결됩니다.
‘주님이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한나가 성소에 가서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 ‘주님의 들으셨음’을 확신했어요.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삼상1:18
아직 아들을 임신한 아무 기미가 없었지만, 한나는 얼굴이 벌써 활짝 펴진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주님 앞에 나와서, 자기 딸의 병고침을 구할 때,
"주님이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라고 되어 있을 뿐,
그가 한 마디도 듣지 않으셨다고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여인의 호소를 다 듣고 계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종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으나.. 묵묵히 듣고는 계십니다.
때로 그분의 무응답 자체가 응답이며, 침묵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하라, 계속해서 부르짖으라!‘
왜냐면 여호와께서 천국 성소의 문을 단단히 잠가두신 것은
여러분을 배제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여러분으로 하여금 두드리고 또 두드리게 하여 그 문이 열려지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2. 악한 자를 닮지 않으려 했던 다윗
3a절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다윗은 자신을 악인들과 함께 '끌지 마옵소서'라고 했는데,
여기서 '끌고 가다 drag'란, 멸망시키기 위해 끌고 가는 것이며,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는 애원입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은 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왜냐면, 내가 악인을 대적하다가, 나도 꼭 같은 악인이 되어버리기가 정말 쉽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부당하게 대우 받는 직원이 있습니다.
그 상사를 뒤에서 흉보고, 욕함으로써.. 방식은 다르지만, 그 직원도 상사와 똑같은 악을 행하는 거죠.
오늘 우리는 악한 세상에서 산다고 말합니다.
악한 사람들에게서 어려움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악한 환경에서 악한 자들을 만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악한 세상만 탓하고, 악한 사람만 원망하여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서서히 악해지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면서 닮는 것입니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안에서 ‘반인종차별정책’ 운동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을 복역했다가 대통령까지 지낸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그가 남아공 첫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취임식 때, 자신을 가뒀던 교도관들을 초대한 일은 유명합니다.
빌 클린튼 미국 대통령이 그를 만나 물었습니다.“정말 그들이 밉지 않았습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미워했지요, 그러나 어느 날 채석장에서 바위를 깨다,
문득 그들이 내 정신과 마음 말고는 모든 걸 뺏어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만은 절대 내주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빌 클린튼 대통령이 이어서 물었습니다. "감옥 안에서는 그렇다 치고, 감옥에서 나올 때
다시 증오가 솟구치지 않던가요?" "맞습니다, 그랬지요. 하지만 다시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나를 27년이나 감옥에 가뒀는데, 그들을 증오한다면
내가 계속 갇혀있는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는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증오를 털어버리기로 했습니다."
정연희 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시가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여라
무슨 말씀입니까, 이 무슨 말씀입니까.
내게는 그리도 엄격하시면서 어찌 내 원수에게 그리 관대하십니까.
보아라, 나와 함께 하는 것아
네가 원수와 똑같은 얼굴이 되는 것을 나는 참을 수가 없구나..’
다윗은 악한 자들로부터 말할 수 없이 시달리면서도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윗이 마음껏 퍼부은 저주의 기도 때문에 마음의 응어리가 풀렸고,
또 응답도 받았다고 해석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다윗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러 달려들었던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자를 자신이 죽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후에 자신을 철저히 무시한 나발에 대하여 크게 분노하여 죽이러 가다가도
결국 죽이지 않고 돌아섰습니다.
다윗도 분노할 때가 있었지만 항상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이것이 다윗을 위대한 삶을 살게 만든 것입니다.
다윗이 악한 자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리면서도 그 영혼이 고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마음으로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원수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극복한 다윗은,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7절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함의 비밀이요 열쇠입니다.
시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것이 다윗의 삶의 원칙이었습니다.
악한 자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우리 책임이 아니지만
악한 자를 묵상하는 것은 우리 책임인 것입니다.
우리가 악한 일을 당하여도 얼마든지 영혼은 고결할 수 있습니다.
악한 자를 묵상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저희가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4절,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
애굽인들이 히브리인 남자 아이들을 죽이자, 하나님은 애굽의 장자들을 치셨습니다.
자신의 철 병거들로 이스라엘을 멸하려 했던 '시스라'는 쇠말뚝으로 살해당했죠.
사사기1:5-7에 수록된 '아도니 베섹'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기드온'은 숙곳의 장로들 사십 명을 멸하였고, 기브의 아들들은 아비멜렉에 의해 살해당했죠.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아들들 70명을 한 반석 위에서 죽였으며,
그 자신의 머리는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부숴졌습니다.
'삼손'은 '안목의 정욕'으로 인해 타락했고, 죽음을 당하기 전에 블레셋인들에 의해 그의 두 눈을 뽑혔죠.
삼상 20:33의 '아각'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은 언약을 어기고 기브온 인들을 학살하였고,
그의 일곱 아들들은 여호와 앞에서 나무에 달려 처형되었죠(삼하21:1-9).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살인을 저지른 '아합'에 대한 예언은(왕상 21:19)
왕하9:24-26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제단을 향해 뻗은 '여로보암'의 손이 말라버렸습니다(왕상13:1-6).
아브넬, 아마사를 죽였던 '요압'은 솔로몬에 의해 죽음을 당했고요.
'다니엘을 중상했던 자들'은 다니엘이 던져졌던 바로 그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매달기 위해 세워진 교수대에 달렸죠.
'유다'는 피밭을 구입하고 나서 스스로 그곳으로 가서 목매달아 자살했습니다.
2천년 역사속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찰스 9세'는 파리 거리를 개신교도들의 피로 얼룩지게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온 몸에 피땀이 범벅이 되어 흘러내렸습니다.
추기경 '비턴'은 조지 위샤트에게 사형 언도를 내렸으나,
얼마 안 있어 그 자신이 비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는 침상에서 살해되었고,
그의 시신은 위샤트의 처형 장면을 내다보던 바로 그 창문에서 입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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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는 20대 때였습니다. 그 때 쫓겨 다니는 삶은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버텨볼 수 있고, 그 가치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다닐 때는 인생의 황혼을 오래 전에 넘어서고,
죽음도 몇 년 남기지 않은 60대 초반 경이었습니다.
그 때의 서글픔은 20대 때와는 정말 많이 다를 것입니다.
만약 이 시편이 그 때의 상황 속에 있을 때 지어진 것이라면,
다윗은 깊은 절망감 속에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편의 색깔은 짙은 회색으로만 점철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먹구름만 가득하여 금방이라도 천둥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질 것이라며 하소연만 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짙은 구름을 뚫고 내리 비치는 한 줄기의 햇살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건져 올려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자리,
찬양을 올려드리는 자리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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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글시28편 악인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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