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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1장 데살로니가에서 선교가 성공한 이유

LNCK 2022. 5. 23. 20:15

◈살전1장, 데살로니가에서 선교가 성공한 이유       살전1:1~10      여러 설교 정리

 

◑데살로니가서의 배경

 

데살로니가 전서는, 바울서신 13권 중에 가정 먼저 쓰였습니다.

로마서가 제일 먼저 쓰여진 게 아닙니다.

그 이유는, 지리적인 이유 때문이라 볼 수 있는데요.

 

빌립보와 골로새는 같은 지역이라고 봐도 무방하거든요. 인접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이 2차전도여행 때, 빌립보에 갔다가 그 다음에 간 곳이 데살로니가인데

 

행16장의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히게 되죠.

옥에서 온몸에 매질을 당하고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가운데서 밤 중에 찬양을 합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옥문이 열리게 되고, 그래서 나오게 되죠.

나와서 자결하려고 하는 간수를 오히려 제지하고, 그 가정에 세례를 주죠.

그 가정을 구원시키고 나서, 이제 바울 일행은 빌립보를 떠나서

 

그 다음에 간 곳이 어디냐? 거기가 바로 데살로니가 였던 거예요.

그래서 데살로니가에서 어떻게 사역했는지는 행17장에 이렇게 나옵니다.

 

행17: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여기서 '그들'은 원래 4명입니다. 바울, 디모데, 누가, 실라

누가는 빌립보에 남고, 지금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 3명이 길을 떠났습니다.

 

지금 바울과 실라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입니다.

빌립보에서 매를 맞은 것이 아직 회복이 덜 되었을 거거든요.

 

그런데 그들은 치료와 휴식을 택하는 대신, 그 상처투성이 몸을 이끌고

아침부터 밤까지 걸어서 전도의 여정을 떠난 거에요.

 

행17:1에,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빌립보에서 암비볼리까지가 지금 유적이 다 있는데 약 65킬로 정도 됩니다.

 

암비볼리에서 아볼로니아까지 또 50 킬로가 돼요. 합하면 1백 킬로가 넘고

약 나흘길 정도 됩니다. 낮에는 더워서 못 걷고, 아침 저녁으로 걸으면, 나흘 길이죠.

 

그렇게 나흘 길을 걷고, 아볼로니아에서 또 데살로니가까지 55킬로 가량이에요.

이틀 길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총합하면, 빌립보 부터 데살로니가까지 165킬로가 넘는 그 길을

매일 걸어서 165킬로를 간 겁니다. 어마어마한 길을 간거죠.

 

게다가 아볼로니아에서 데살로니가 까지 가는 길에는 늪지대가 있어요.

굉장히 큰 늪지대가 있는데, 이 늪지대에는 말라리아 모기가 있습니다. 굉장히 많이 힘들었겠죠.

 

이 길의 마지막에,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야 됩니다.

가파른 언덕을 숨을 몰아쉬고 올라가면, 눈앞에 데살로니가 도시가 펼쳐지고,

그 뒤로 가장 높은 산, 그리스 지역에서 가장 높은 해발 2917미터의 올림포스 산이 나와요.

 

올림포스 산은 그 당시에 그리스의 신들이 산다고 믿었던 그 산이에요.

거기에 제우스도 산다고 믿었죠. 그 산이 딱 보이고, 그 아래에 데살로니가 시가 펼쳐지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바울도 아마 올림포스 산을 처음 봤을 거예요.

그리스의 모든 신들이 모여 산다는 올림포스 산을 딱 쳐다보는 순간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그 밑에서 올림포스 산의 신들을 두려워하면서,

그들을 섬기며 살고 있는 데살로니까 사람들을 딱 보는 순간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하나님이 지으신 이 멋진 산을, 저들은 어리석게도 신들이 산다고 믿고 있구나!

저들은 지금 헛된 신화에 빠져가지고, 지금 하나님을 모른 채 살고 있구나!'

 

그러니까 그들을 생각하면, 바울은 1주일을 걸어서 온몸이 피곤하고

특히 매질을 당한 곳이 아직 아물지도 않은 상황이었지만

바울은 선교적인 뜨거운 감동을 가지고 그들을 찾아간 것이에요.

 

데살로니가 도시는 그 당시에 20만명이 살고 있던 어마어마한 큰 도시였습니다.

이 그리스를 우리가 둘로 나누잖아요.

북부를 마게도냐라고 하고, 남부를 아가야 라고 하는데

이 북부의 수도가 바로 데살로니가 였어요. 남부의 수도는 고린도.

 

'데살로니가'는 사람의 이름을 딴 이름인데,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누이 입니다.

그 당시에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장관으로 카산더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카산더의 아내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누이가 데살로니가였고, 그 이름을 땄어요.

그래서 지금도 이 지역 이름이 데살로니가로 남아서 계속 불려지고 있어요. *데살로니키

 

게다가 데살로니가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굉장히 중요한 거점도시였고요.

그래서 여기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사도바울 여기를 빌립보에서부터, 그 상처받은 몸을 이끌고 간 겁니다.

 

자, 데살로니가로 갔는데 얼마간 복음을 전했냐 하면

행17: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세 안식일'은 3주간 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딱 3주간 바울이 머물렀던 교회입니다. 짧은 기간이죠.

 

그런데 이 교회가 나중에 어떻게 되냐면, 그리스 전 지역에서 가장 본받을 만한 교회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굉장히 모범적인 교회가 되요.

 

요즘도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분들이, 교회 십 년 이상 다닌 분들보다

굉장히 신앙생활을 잘 할 때가 있어요. 그런 분들을 보면

'아 데살로니가 교인 같다'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행17: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울은 3주간 바로 이걸 전했어요. 이게 복음의 핵심이죠.

자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4절을 보십시다.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그 당시에 똑똑하다는 헬라인들, 철학으로 무장한 헬라인들이

그 복음을 믿기 시작했고,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설득)을 받고 믿게 되었어요. 놀라운 일이죠.

 

자 그런데 그걸로 끝나면 좋은데 5절에 보니까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유대인들이 시기해서 불량배를 동원했어요.

종교계에 불량배들이 동원되는 일이 얼마나 이게 참 불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 당시 2천년 전부터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거에요.

 

야손은 아마도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그 야손의 집에 들어갔는데, 6절에 발견하지 못했어요.

 

: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천하를 어지럽게 했다'는 말은, 비록 고소하는 말이었지만, 진실이었어요.

복음이 들어가니까 데살로니가 라는 그 엄청난 도시가

온통 막 정말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과연 예수가 누구냐?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분은 누구냐? 그리스도가 맞냐?'

하면서 사람들이 흔들리기 시작한 거에요.

 

:7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가이사가 당시 임금인데, 다른 임금인 예수가 있다..

정말 정확하게 알고 있었죠.

 

:8~9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야손에 집에 들어가보니, 바울과 실라를 못 잡았고, (앞서 피했어요)

그래서 야손을 대신 잡았다가, 결국 야손을 풀어줬다는 거에요.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그러니까 데살로니가를 떠나서 베뢰아로 갔습니다.

이게 데살로니가에서 있었던 일의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3주 동안 거기서 열심히 증거했는데

그랬더니 경건한 유대인들과 귀부인들이 많이 마음을 열었는데

유대인들이 시기해서 불량배들을 동원했고, 그래서 도망쳐서 베뢰아로 떠났습니다.

 

자 그런데 베뢰아로 갔는데, 거기서 또 똑같은 유대인들의 방해가 있어서

아덴으로 갔다가, 그 다음에 아덴에서 또 고린도로 피합니다.

(이게 주님의 섭리죠. 피하여 방문하게 되면서, 그곳에 복음이 전해지는 거예요)

 

※여정 : 빌립보 → 데살로니가 → 베뢰아 → 아덴 → 고린도

 

그런데 바울은 아덴에서, 또한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교회 소식을 듣는 거예요.

디모데가 아덴에 와서, 또한 고린도에 와서, 데살로니가 교회 소식을 전해주는데,

데살로니가 교회가, 삼 주밖에 안 있었는데, 굉장히 정착이 잘됐다는 거에요.

너무너무 이들이 지금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

 

폭도들을 피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약 400km 정도 떨어진 아덴에 이르렀을 때(행17:15)

디모데는 아덴에 있는 바울에게 달려가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여러 가지 일을 보고하였고

이를 들은 바울은, 디모데를 다시 그곳으로 보내어 계속 목회 사역을 하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고린도로 가서 1년 6개월을 머물며 주의 복음을 전하였는데(행18:1-4, 11),

이때 디모데는 다시 고린도로 바울을 찾아가 데살로니가 교회가 짧은 역사에 비해

신앙 생활에 모범을 보이며 박해를 받는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믿음을 지켜나간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들 사이에 종말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만연함으로써

신앙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였어요.

 

이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더욱 열성적으로 신앙 생활을 할수 있도록 격려하고,

동시에 재림과 종말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그들이 보다 건전한 신앙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입장에서 데살로니가전후서를 기록했습니다.

고린도에서요!

 

 

◑적용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의 선교가 성공한 이유"

 

데살로니가 교회의 특징은 한 마디로, 바울이 단 3주간 머물며 전도했는데, (매우 짧은 기간이었는데도)

그리스 전체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 복음의 거점 도시가 되는, 혁혁한 선교적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1.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열매가 있음을 알았던 다윗

바울 일행(바울, 실라, 디모데)이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여정이 행17장에 이렇게 나옵니다.

 

행17: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그러니까 빌립보에서,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에 이른 것입니다.

이 페이지 위의 "데살로니가서의 배경"에서 살펴보았지만,

빌립보에서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까지는 약165킬로 거리입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죠.

 

이때가 바울이 40대 후반입니다. 한참 젊었을 때는 아닙니다.

이 정도 연세면, 하루에 25킬로 이상 걷기는 힘듦니다.

그러니 수원, 천안 거쳐서 대전에 갔는데, 연속해서 갔다면 1주일을 걸어서 간 것입니다.

 

길이 평지였는지, 산길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요즘처럼 잘 닦인 길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리고 낮에는 햇볕이 작열하면 못 걷습니다. 아침과 저녁에 이동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무척 힘들었다는 얘기죠. 게다가 누가 월급 주는 일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사서 고생'입니다.

그럼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사서 고생'을 하게 만들었을까요? 그를 움직이게 한 동기가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여러 동기가 있었겠지요. 그 중에 한 가지는 '앞서 빌립보에서 거둔 열매' 때문일 것입니다.

앞서 아시아 드로아에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고서

다윗은 희망에 부풀어 유럽으로 바다를 건너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바울 일행(바울, 실라, 디모데, 누가)을 맞이한 것은

극렬한 핍박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혀서 매를 흠뻑 맞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간수의 집안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고,

거기서 만났던 자주 옷감 장사 루디아의 집과 더불어, 거기서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로마감옥에서 바울은, 빌립보서를 써서 보내게 되지요. 

 

뭐든지 '첫 인상'이 기억에 강력하게 남는다고 하지요.

바울이 유럽 선교(2차 전도여행)에서 받았던 첫인상은 '빌립보 교회 개척의 성공'입니다.

'아~ 유럽 선교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가면 열매는 주님이 주시는구나!'

아마 이런 인상을, 바울은, 유럽의 첫 선교지 빌립보에서 강렬하게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배경에서 이제 두 번째 선교지인 데살로니가로, 165킬로 여정을 힘들지만 떠난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지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거둘 날이 올 것을 내다 본 것입니다.

앞서 빌립보에서 그 승리와 열매를 체험했으니, 

미래가 비관적이지 않고 희망적이었을 것입니다.

 

중간에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같은 작은 지역들이 있었지만,

바울은 (빌립보, 에베소, 고린도와) 데살로니가 같은 큰 도시 중심으로 선교를 했습니다.  

작은 지역은, 그 큰 도시의 교회가 맡아서 해 줄 것을, 머리에 그린 것입니다.

 

과거에 길에서 노방전도 하던 시절에, 전도를 나갈 때는 다들 억지로 나간다고 합니다.

거기까지 가기도 싫고, 사람들의 냉대와 무시도 당하기 싫고, 이런 저런 이유로 썩 내키지는 않죠.

오늘날에도 단기선교나, 또 병원심방, 교도소 전도도 다 마찬가지로.. 발걸음이 썩 내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갔다가 돌아올 때는, 기쁨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 전도와 수고와 희생에서 오는 기쁨이 있죠.

 

과거에 이런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해마다 여름수련회를 하는데, 가장 은혜스런 여름수련회는

"전도하는 수련회"였다고요.

그러니 바닷가에 가서 찬양집회를 하든지, 시골지역에 가서 축호전도를 하든지

그게 제일 하기 싫은 거고, 제일 힘든 거고, 제일 껄꺼러운 일인데.. 하고 나서는 제일 기쁜 일이었죠.

무슨 기도회를 하고, 내적 치유 집회를 하고, 어떤 프로그램을 하는 것보다 더 은혜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매를 맞아서 성한 몸도 아닌데, 그 165킬로 길을 걸어서,

육신적으로는 썩 내키지도 않는 길을 가게 한 동기는, '빌립보에서 거둔 십자가 후에 오는 열매' 때문입니다.

 

그 길을 떠난다는 것 자체가 고생길이요, 미래에 대한 어떤 안전과 보상에 대한 보장도 없었지만,

'십자가 뒤에는 영광이 있다'는 주님의 약속 하나 믿음으로 붙들고, 그는 고생길을 내디딘 것입니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리스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 거점 교회가 되었고,

거기로부터 그리스 전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게 된 것입니다. 단 3주만에 이룬 복음의 쾌거 였습니다.

 

살전1:7~8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데살로니가 교회)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2. 말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한 복음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은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능력과 성령과 확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첫번째 요소인 '능력'(두나미스)은 '기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을 동격으로 볼 때 '말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죠.
마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그래서 오순절 교회 설교자들은, 설교하기 직전에 30분~1시간 이렇게 기도를 하고 단에 올라갑니다.

설교하기 전에 기도를 오래 한 것과, 안 하고 올라간 것의 차이를..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설교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물론 설교하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한 설교 듣는 청중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 다음 구절과 문맥과 흐름이 일치해야 합니다. 그 다음 구절은 이렇죠.

1:5b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무슨 뜻인지 명확하게 이해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을 봅니다. 이렇게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새번역,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하여, 어떻게 처신하였는지를,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공동번역,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여러분을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바울이 단 삼주 동안에 전한 복음은, 그 말에도 능력과 성령의 힘과 전파자의 확신이 느껴졌지만,

그 삶에도,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삶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죠.

 

다음 절에서 이 내용이 더 확증됩니다.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1:6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복음은, 아예 '삶으로 전하는 복음, 삶의 변화를 목적으로 한 복음'이었고,

데살~ 교인들은 '말씀을 듣고, 거기서 그친 게 아니라, 우리와 주를 삶으로 본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땅 끝까지 내 증인들이 되리라'고 하셨는데, 행1:8  *마르투스 

여기서 증인 witness 라는 말의 뜻이, '목격자, 목격한 것을 증언하는 자'라는 뜻의 그 이상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자'로서의 증인의 뜻을 포함합니다.

말로만 아니라,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이 의도하신 '증인'이었고, 바울이 순종한 거죠.

 

'적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에 관한 글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도전되는 내용입니다.

그는 1875년 독일에서 태어나, 신학을 전공하고, 20대 때는 목사로 또한 신학강사로 섬긴 적도 있었죠.

그런 그가 10년이 지난 후에, 30대에 이르러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 가봉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이 슈바이처에게 물었죠. '왜 당신은 독일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아프리카로 갑니까?'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것은 한계를 느꼈습니다.

말로는 사람이 도무지 변화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직접 내 삶으로 보여주기 원합니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기억에 이런 내용이었죠)

 

어느 총각 신학생 전도사가 참한 자매가 마음에 들어서, 그녀의 부모를 만나 허락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부모를 만나서, 여러 가지 말로 자기가 그 자매를 얻어야 되는 이유를 설득했습니다

그러자 다 듣고 나서, 나중에 장모가 된 그녀의 엄마가 하는 말.. "귀동냥은 많이 해서 말은 잘 하시네요!"

 

물론 복음은, 제일 먼저 '말로써' 전해집니다.

바울도 데살~에서, 다른 도시도 마찬가지지만, 먼저 '말로써'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데살~ 교인들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온 지방에 (북부와 남부 그리스 지역에) 복음을 전했는데,

그것도 '말로써' 전한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8

 

그런데 그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의 말씀'뿐만 아니라 :5

바울이 자기 삶으로 복음을 보여주고,

데살~교인들은, 그런 바울의 삶을 본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주님의 삶을 본받는 것이었죠.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6

 

더 신기한 것은, 데살~ 교인들이 그 삶을, 주변 각지 사람들에게 전도하면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1:7

 

이것이 바로, 데살~ 교회를 중심으로,

인근 마게도냐와 아가야 전 지역에 복음이 흥황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바울의 선교가 성공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물론 성령의 능력 가운데 그 일이 일어났던 것이죠!

 

오늘날 교회 목회자는, 식당을 가더라도 그 도시에서는 못 가고 (다들 쳐다보는게 부담스러워)

다른 도시의 식당에 간다고 합니다. (요즘은 인터넷 시대라서 그것도 이제 힘들게 되었네요)

 

목회자가 제일 힘들어 하는 것이 '유리 상자 속의 삶'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목회자를 주시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걸 너무 부담스럽게만 여겨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자기 삶을 보여주는, 그래서 복음의 증인이 되는' 적극적인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성도님들도 직장에서 자기가 성도인 것을 커밍아웃(드러내기) 하기가 꺼려지는 것은,

그로 인해 받게 될 불이익 때문인데,

오히려 '나는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다!' 이런 자기 정체성이 있으면,

세상에서 성도로 살아가는 삶이, 힘든 게 아니라, 오히려 기회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데살~에서 사도바울의 선교가 성공한 이유입니다.

오늘날 이런 '유리 상자'가 아니고, '검은 천이 덮어씌워진 상자'인 상태로

선교나 목회가 성공했으면.. 그건 성경적인 성공이 아닐 것입니다.

말로만 전해서 성공했다는 얘기인데... 회중가운데 진정 삶이 변화되기는 아마 어려울 것입니다.

 

 

◑절별 해석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

세 사람의 이름은 데살로니가 후서의 인사에서도 나타난다.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들에서처럼 서두 부분에서 그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인사를 표하고 있다.

(고전1:1, 고후1:19, 빌1:1, 골1:1, 몬1:1).

 

실루아노(Siluanus)는 '실라'(Silas)의 로마식 표기이다.

실라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으로서(행16:20, 37), 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신실한 그리스도의 일꾼이었으며, 예루살렘 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높이 존경을 받았다(행15:22, 32).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 하면서, 빌립보에서 혹독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으며(행16:23-25),

데살로니가에서는 교회 설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바울과 함께 성난 폭도들에게 쫓기어 도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행17:5).

 

디모데는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회심한 자로서,

바울이 '믿음 안에서 참 아들'(딤전 1:2)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깊이 사랑하였던 자이다.

 

그는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중 루스드라를 다시 방문하였을 때 복음 사역에 동참하였으며,

바울과 실라가 폭도들에게 쫓기어 데살로니가를 떠났을 때에도

디모데는 그곳에 계속 남아 복음을 전하였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

본 서신의 수신인에 관한 언급이 나타난 본문에는 다음 세 가지 사항이 주목된다.

 

'하나님 아버지'(데오 파트리)와 '주 예수 그리스도'(퀴리오 예수 크리스토)라는 두 가지 표현이

등위 접속사인 '카이(그리고)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다.

이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되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임을 시사한다.

이로써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강조하고 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본서를 비롯한 그의 서신들의 인사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카리스)와 '평강'(에이레네)이 수신자들에게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롬1:7, 고전16:23, 골4:18, 살후3:18).

 

여기서 '평강'은, 마치 '기쁨'이 일상적인 헬라인들의 인사말이었던 것처럼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인사 용어이다(삿19:20). *히, 샬롬

 

그러나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평강'은 구약 시대 유대인이 의도했던 것보다 더깊은 의미를 갖는다.

본절이 의미하는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 관계가 화합의 관계로 해결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지는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마음의 평안함'인 것이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비록 복음의 역사는 짧으나 성도들이 복음에 근거한 바른 신앙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날마다 성장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처럼 성장하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바울은 '말함' (므네이안 포이우메노이)이란 말을

오직 기도와 관련된 부분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바(롬1:9, 몬1:4),

이는 자신이 세운 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복음 위에 바로 서서 신앙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렸음을 의미한다.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본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삶속에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기뻐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 나오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초대 교회 당시 널리 사용되던 어휘로서

자주 한 단위로 결합되어 언급된다.

(5:8, 롬5:1-5, 고전13:13, 갈5:5~6, 골1:4~5, 히6:10-12, 10:22-24, 벧전1:21~2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궁극적인 승리의 날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은

현실속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를 지니고 있다.

 

본절의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스'는 진취적이고 용기있는 그리스도인의 특질로서

용감한 군인이 극한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버텨나가는 기상(氣像)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결코 낙심치 아니하고 인내로써 전진gks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본절은 2절에 나오는 바울의 중보기도의 때를 말해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 대한 기억이 매우 자주 떠올랐던 까닭에 '쉬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특히 바울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기도가 신실함을 나타내준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떤 자들은 자신들을 대하는 바울의 동기(動機)에 대해

의심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2:5, 2:10)

그리하여 바울은 본 서신의 서두에서부터 그러한 의혹을 일소하고자 한다.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바울은 2절에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함을, 3절에서는 감사의 구체적인 원인을

그리고 본절에서는 그러한 감사의 긍극적인 동기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바울은 '형제들아'(아델포이)란 호칭을 즐겨 사용하였는데,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만도 21회나 사용하고 있다.

 

'성도'란 말이 하나님과 관련된 표현이라면, '형제'란 말은 인간 관계에 대한 표현으로서

예수를 중심으로 모든 성도들이 하나되어 있음을 나타내준다. (마12:46-50, 막3:31-35, 눅8:19-21)

 

본절에서 '형제들아'라는 호칭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이란 말과 연결됨으로써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음을 보여준다.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택하심'(에클로겐)이란 신구약 전체에 면면이 흐르는 성경의 위대한 개념으로서,

인류의 조상 아담이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의 신자들과

그 외의 모든 신자들을 그의 주권으로 택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엡 1:4).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본절에서부터 2:16까지는 바울이 처음으로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의 상황을

회고한 부분이다.

 

‘이는’ - 접속사 '호티'는 앞에 있는 절을 받아 그 근거를 밝힌다.

즉 바울이 데살로니가인의 피택을 확신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보여준 신실한 신앙을 때문이었다.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바울은 아덴에서 웅변적인 설교를 했으나 냉담한 반응을 체험한 적이 있었다(행17:16-33).

그 후로 바울은 결코 인간의 지혜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는 결의를 굳게 하였다(고전2:4, 5).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능력과 성령과 확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능력은 외적 현상이고, 확신은 내적 요소이며, 성령은 능력과 확신의 원동력이다.

 

첫번째 요소인 '능력'(두나미스)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력'(靈力)을가리킨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을 동격으로 볼 때 그렇다.

사람의 마음속까지 변화시키는 성령의 감화력을 의미한다.

 

두번째 요소인 '성령'(프뉴마티 하기오)은 앞에 있는 수어인 '능력'의 출처(出處)이다.

성령은 언제나 능력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실체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능력을 채험한 자들은 궁극적으로 성도의 신분으로 변화된다.

 

세번째 요소인 '큰 확신' 역시 성령의 활동하심에 기인한다.

본절에 '확신'으로 번역된 헬라어 '플레로포리아'는 문자적으로 '충만', '풍부'의 의미를 가지며,

이는 데살로니가 교회 가운데 내적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을 말한다.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본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2:1-12에 나온다.

이 구절을 통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내에 숨어있던 바울의 적대자들을 경계하고 있다(2:2, 5:3:5).

 

이들은 동방의 신비주의 사상을 가지고 자기들만의 독특한 교회를 세운 '시몬'(행 8:9)과

'엘루마'(행 13:8) 등으로서, 항상 말로써 사기적 수법을 행하며,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복음의 진리 가운데 서지 못하도록 방해하곤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문을 퉁하여 자신이 전하여 준 능력의 복음과 성령과 큰 확신을

간직할 것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바울은 이제 본절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이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또한 바울과 그 일행의 신앙의 모범을 따랐음을 말하고 있다.

즉 전도를 받은 그들이 복음으로 인해 받은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에는 처음부터 복음에 대한 반대가 강하게 일어났으며,

이러한 환난은 바울이 떠난후에도 계속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받은 환난에 대해서는 살전2:14과 행17:1-10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이 주시는 기쁨으로 환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었다.

혹자는 본절과 관련하여 '신자는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허락된 정도만큼 기쁨을 누린다'고 말하였다.

 

‘도를 받아’ - '도'(톤 로곤)는 '복음' 즉 '말씀'을 의미한다.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복음을 받기 전에는 죄의 세력에 매이는 생활을 했으나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는 전혀 다른 삶,

즉 성령의 능력에 힘입은 삶을 살았다.

 

여기서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라는 사도 바울의 표현의 순서를 주의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신앙은 주(主)를 믿는 것이나 신앙 생활은 보다 앞선 성도를 본 받는 데서 향상된다.

 

그러므로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자는 말뿐 아니라, 자신의 생활에서 모본을 보여주어야 한다.

만일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 전도자의 삶을 통해서 성도의 삶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무의미한 것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의 신앙을 본받는 자들이 되었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들이 되었다. 한편 바울은 그의 서신서 곳곳에서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는 자들이 될 것을 권면하고 있다(고전4:16, 11:1, 빌3:17).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앙의 본이 되었던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전(全)헬라에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본이 되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는 B.C. 146년 이후 헬라 지경의 두개의 거대한 주로서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북부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는 데살로니가이며, 남부 아가야 지방의 수도는 고린도였다.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 교회의 진보를 본 바울의 기쁨의 상태는 그가 그들을 칭찬하는 정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특히 바울이 한 교회를 향하여 다른 교회들의 모본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곳은

오직 여기 뿐이므로 그 기쁨의 정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주의 말씀이...들릴 뿐 아니라’

먼저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로부터 각 곳으로 전파된 사실을 지적한다.

'주의 말씀'(호 로고스 투 퀴리우)이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의 예언서에 자주 나오는 말로서

바울 서신에서는 본서(4:15)와 후서(살후 3:1)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사람들이 굳게 믿고 있는 바가 무엇임을 잘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즉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자신들이 선포하고 있는 말씀이 인간 지혜의 산물(産物)이 아니라

신적 기원을 가진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 말씀은 데살로니가를 출발점으로 하여 온 헬라 경내에 계속 퍼져 나갔다.

 

한편 '들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세케타이’는 '소리를 울려낸다'는 뜻으로 계속해서 퍼져

나가는 반향(反響)을 의미한다. 이는 나팔 소리가 울려나가는 것처럼

또는 우뢰소리가 울려나가는 것처럼 크고 분명하게 선포되는 것을 암시한다.

즉 복음이 데살로니가인들로 말미암아 온 헬라 경내에 힘있게 전파된 사실을 말한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바울은 후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데살로니가교인들의 모범적인 신앙 생활에 대해 자랑한 바 있다(고후 8:1-5).

그러나 본 서신을 기록할 당시 그들에 대해 자랑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들의 믿음에 대한 훌륭한 소문이 널리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그들이’ -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위시한 각처의 교인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문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2:1 이하에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로 들어간 날은 그에게 있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비방과 훼방, 박해 등 많은 고난을 당하였던 것이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회개를 묘사한 말이다.

 

'돌아와서'에 해당하는 '에페스트 렙사테'는 완전히 전환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서

헬라어에서 '마음을 고침'을 의미하는 '메타노이아'와 함께 회개를 나타내는 중요한 단어이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옛날의 악습들에 대한 단호한 단절,

즉 생(生)의 근본적이고도 전인격적인 전환을 수반한다.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

하나님은 죽은 우상과 대조되는 살아계신 분이며,

허탄하고 비실재적인 것과 대조되는 참되신 분이다.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본절에는 그리스도의 부활, 삼위 일체 하나님, 그리스도의 재림, 최후의 심판 등의 중요한

교리들이 제시되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둘러싼 종말의 사건들이 강조되고 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도에서 역설한 바 있거니와 (행 17:3),

그들은 이를 그들의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였다.

 

사실 초대 교회에서 언제나 강조하였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부 하나님의 역사에 직접 기인하는 것으로서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중요한 변증이었다.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그리스도의 '재림'은 본서와 데살로니가후서의 중요한 주제이다.

바울은 재림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경계하였으나(살후3:10, 11)

재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 재림의 때는 아버지 외에 아무도 알지못하나(마 24:36),

분명한 것은 이때 신자의 구원이 완성되고 불신자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4:13-17)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이제 그의 재림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성도가 갖는 최고의 소망이며,

아울러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믿음과 인내가 요구된다.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장래 노하심'은 '오고 있는 진노'(the coming wrath, NIV)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임하게 될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뜻한다.

 

여기에 사용된 '노하심'(에르코메네스)은 현재 분사형으로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이미 진행되고 있으며 확실히 이루어질 사건임을 나타낸다(렘14:10,암3:2, 롬1:18).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은노하심 이전에 있어야 할 예언된 사건들이

그때 당시에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2:15, 16).

 

그러나 성도들은 이때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오히려 구원의 때라고 생각하여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