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전2장, 말씀의 역사와 그 반대 급부인 고난 살전2:1~20 여러 설교 정리
데살로니가 전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도시를 방문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나서 *행17장
디모데를 거기에 남겨두고 떠났는데,
그후 바울이 베뢰아,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도착해서 1년 6개월을 머무를 때, *행18:11
디모데가 고린도에 와서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을 보고했고, *살전3:6
그 상황을 듣고,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이 떠난지 약2년 가량 지났다고 보죠.)
1장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을 칭찬>
2장은, <바울이 전에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의 일을 회상>
3장은, <디모데의 보고를 듣고서 데살 교인들을 격려>
4장과 5장은, 이 편지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울의 설교죠.
특히 4:13절~5:11절은 <주님의 재림에 관한 설교>입니다.
나머지는 마지막 인삿말이죠.
디모데가 와서, 주님의 재림에 관해 데살 교인들이 좀 아리송해 한다고 보고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전서를 써서, 그에 대한 설교문을 보낸 것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 살전2장은, 그 배경이 <바울의 회상>입니다.
약 2년 전에, 데살로니가를 방문해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울 때의 회상인 것이죠.
본문 살전 2장을 분해하면,
1~2절 바울의 데살로니가 전도가 헛되지 않았음
3~12절 성도를 대했던 바울의 세 가지 자세 (청지기, 유모, 아버지)
13~16절 고난에 동참했던 데살로니가 교회
17~20절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방문하기를 원함
여기서 우리는 2가지 적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적용1.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대했던 바울의 세 가지 자세 살전2:3~12
3-6절 복음의 청지기, 또는 사신
7-8절 유모
9-12절 아버지
▲1. 복음의 청지기, 또는 사신 :3~6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바울은 자신을 '복음을 위탁받은 자'로 소개하는데,
쉽게 말하면 '복음의 청지기, 또는 사신'입니다.
'위탁 받았으니'의 헬라어 '피스튜데나이'는 '믿는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바울을 전도자로 신임하시고 복음을 맡기셨음을 뜻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은 후에,
'인정을 받은 후에'(공동번역), '검정을 받은 후에'(새번역) 합격하여
복음을 전하도록 위임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아마 행9장의 다메섹 도상에서 위임 받았을 것임)
'옳게 여기심'으로 변역된 '데도키마스메다'는 금과 은의 제련에 사용되는 말로서
시험을 통해 그 진가를 알아내는 것을 가리킵니다(벧전 1:7).
'복음을 위탁 받은' 자는 어떻게 행하게 됩니까?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4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 :5
'복음을 위탁 받음'이란, 바울이 하는 전도가,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는 일이란 뜻입니다.
예를 들면, 옷 가게에 사람들이 4~5명 우루루 들어왔습니다.
가게에는 일꾼이 2명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일꾼들은, 그저 구경하러 온 사람은 제외하고, 옷을 살 사람에게 가서 응대해야 합니다.
바울이 지금 응대해야 될 대상은, 먼저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을 시키신 것이니까요!
바꾸어 말하면, '복음을 위탁받지 못하면'
늘 사람에게 신경 쓰고, 사람에게 응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대신,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고 :4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말아야 되는데 :5
아첨의 말을 하게 되어 있고, 탐심을 품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도 자기를 변증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누가 네(바울)게 이런 일 하라는 권세를 주었니?'
라고 당연히 사람들은 질문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았다' 라고 대답하는데, 그것은 사실이었죠. *행9장
오늘날 우리가 '저 분이 복음을 위탁받았는지/아닌지' 분별하는 기준이, 본문에 명확히 나오죠.
-저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는가?
-저가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가? .. 이 점을 유심하게 살펴보면 됩니다.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6
바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음을 위탁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을 신경쓸 이유가 없죠.
바울은 갈1:10절에도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라고 말씀했죠.
베드로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하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행 5: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2. 유모 :7-8
바울은 복음을 위탁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먼저 신경을 쓰지만,
그러면서도 성도들에게 신경을 쓰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명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데살~ 교인들을 대했던 두 번째 이미지는 유모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7
사도와 유모가 대비되고 있습니다. '유모 같은 사도'란 뜻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이미지는 '유순한 gentle'입니다.
그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유모'라는 비유를 든 것입니다.
여성이 가지는 '모성애'를 예로 든 것입니다.
바울이 '유모'를 말한 것은 앞서 '위탁 받았다'(:4)와 관련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탁 받은 것입니다.
'내 자녀다, 내가 엄마다!' 하고 너무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나는 돌보는 자이다' .. 이게 건강한 마인드입니다.
그의 양육은, 기름(:7)은 ..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심지어 '목숨까지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말합니다. :8
신자들이 목회자를 따르는 것은 '저가 목숨까지 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저도 자기 먹고 살려고 목회/선교하는 거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목회자/선교사를 따르지 않습니다.
▲3. 아버지 :9~12
세 번째 이미지는 아버지입니다.
유모로 족할 것 같은데 왜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도 함께 지녀야 할까요?
1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한다’라고 말합니다.
유모가 먹이고 입히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아버지는 교육하고 가르치는 이미지입니다.
목회자는 성도를 책임지는, 아버지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진리에 거스리는 행동을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단호하게 지도해야 합니다.
중동에서 아버지는, 사랑하면서도 '단호한' 이미지입니다. 본문에 '경계'라는 말을 썼죠. :11
위로하고 격려도 해야 하지만 *유모의 이미지
때로는 단호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미지
바울은, 자기가 데살로니가에 3주 동안 머물 때, 그렇게 했다는 것이죠.
또한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복음을 위임받은 자로서
-유순한 유모처럼
-단호한 아버지처럼.. 그들을 양육하겠다는 것입니다.
◑적용2. “말씀의 역사와 그 반대급부인 고난” 살전2:13~16
▲1. 말씀은 역사를 일으킵니다.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살전2:13
바울은 자기가 전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고 못을 박습니다.
데살로니가인들이 칭찬을 듣는 것은 바울이 전한 말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죠.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역사하시면
사람들은 그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주일 설교를 듣고 나서, 1주일 동안 그 말씀이 전혀 생각 나지 않으면,
사람의 말을 전했고, 또한 들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 속에서 역사(役事, 에네르게오)합니다. :13
그렇게 들어간 하나님 말씀이 데살로니가 신자들 속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에너지'(에네르게오)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복음, 즉 하나님 말씀은, 듣는 사람이 그것을 믿을 때,
믿는 자 속에서 에너지가 되어 내적 운동을 일으킵니다. '역사'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이 가져야 할 기대입니다.
비슷한 희망이 골로새서에도 발견됩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1:6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기를,
‘여러분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로부터
열매를 맺고 자란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하나님의 말씀에는.. 역사하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골로새 교회뿐만 아니라, 온 세상(천하)에서 다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 말씀이 일으키는 반대급부의 역사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난입니다. :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2:14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가
실제로 작용했다는 것에 대한 검증이 될 수 있는 일이 있었는데,
바로 '고난중에서 견딤'입니다.
이어지는 14절은, 헬라어 '가르'로 13절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언급하는 하나님 말씀의 역사의 증거로서 14-16절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죠.
*가르 - 그런고로, 왜냐하면, 영어성경엔 모두 For로 번역. 여기서는 '그런고로'
그들이 믿음을 가졌을 때
복음이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는
반대급부를 낳았는데, 그것은 '고난 중에 견딤'이었습니다.★
복음이 역사하는 곳에는, 선한 역사, 성도의 변화만 일어나는게 아니라,
반드시 마귀도 대응해서 역사하게 되어 있는데, 바로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복음이 참되게 역사하고 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대인의 복음은, 복음이 역사하는 증거로 ‘번영/성공/부흥’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고난, 핍박’이 빠진 ‘번영/성공/부흥’은 참된 복음의 역사의 증거가 아닙니다.
이 점에 있어서 데살로니가의 신자들이
유대의 신자들을 본받았다고 쓰고 있습니다. :14 *행8:1 등
유대의 신자들은 동료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 신자들도, 예수 믿음 때문에 동족들에 의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이야말로 말씀이 역사하는 증거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핍박의 필연성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핍박은 천국 일꾼에게 의례 있는 것이고 그것을 복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핍박이 오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권면했습니다(마5:10-12).
현대인들이 듣기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은 것에 대한 보상의 한 부분도 핍박이었습니다(막10:29-30).
내세에 영생을 받을 사람이라면, 현세에 핍박을 받아야만 하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막10:30).
또한 예수께서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핍박을 받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했습니다(요15:20).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보자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고난을,
하나님 말씀이 역사했다는 증거로 이해한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겪은 고난은, 바로 그들이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증거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예수 믿어서 받는 그 고난 때문에, 정말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었죠.
물론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고난을 당하면서 믿음을 버렸다면
이런 칭찬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칭찬은 그들이 고난 중에도 믿음을 지켰다는 점을
당연한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오늘날 유행하는 성공주의, 기복신앙에 너무 심취하면,
참된 성도가 복음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을,
그들의 잘못의 결과이거나
하나님께서 같이 하시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으로 오해할 수 있으므로
그런 신학적 오해를 조심해야 합니다.
말세가 될수록, 핍박이 증가할 것입니다. 마24:10
그래서 그런지, 세계적으로 '반 기독교 정서' 와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6세기에 발흥한 회교가, 아마 지금처럼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인 때는, 과거에 없었을 것입니다.
마치 '종교전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지금 중동에서는 기독교를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앞으로 일어날 3차대전은 '종교전쟁'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미래학자도 있습니다.
(회교와 기독교의 대결)
이런 '기독교 혐오' 현상은 기독교권인 구미 선진국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낙태와 동성연애 반대, 결혼과 출산을 통한 전통적 가정 세움.. 등을 강조하는데,
세속 사회는.. 자유로운 성생활, 동성연애 인정, 결혼 파괴, 독신주의 등을 추구하기 때문이죠.
꼭 그런 표면적인 이유를 따지지 않더라도,
이 세상은 영적으로 '마귀의 세력'과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영적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각축장이므로
역사상 기독교인이 핍박을 받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고,
심지어는 기독교회 내에서,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던 시절도 계속 있었습니다. 종교재판, 신구교간 갈등 등.
오리지널 한국인이 김치 안 먹고 살 수 없듯이,
참 기독교인은 핍박을 겪지 않고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핍박이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런 소리를 이제는 하면 안 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세상과 잘 타협해서 예수 믿고 있다'하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죠.
오히려 핍박 받은 것을 '참 기독교인이 된 증거'로 여기고, 기뻐하는..
'핍박을 통과해 나가는 크리스천'으로, 그 방향으로, 양떼들을 인도해 나가야 합니다.
그게 성경적인 방향이요, '핍박에서 승리한 후에 오는 성령의 기쁨과 감동'이 넘치거든요!
마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절별 해석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1절은 접속사 '가르'(왜냐하면)로 시작된다.
이는 2:1-16절의 내용이, 1:5-10절 내용의 확대임을 나타낸다.
2장에는 바울의 복음 전파 이면에 악한 동기들이 슴겨져 있다고 주장하는 바울의 적대자들
(거짓 사도들, 유대주의자들, 영적 열광주의자들 등)에 대한 그의 변호가 함축되어 있다.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행 16:19-34을 참조하라.
빌립보는 데살로니가와 같은 마게도냐에 있는 성이고
바울은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곧바로 갔으므로
당시 바울이 겪은 고난에 대한 소식은 데살로니가인들도 확연히 아는 사실이었다.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 바울은 언제 어느곳에서나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용기와 확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영적인 힘이었다.
‘많은 싸움 중에’ - 바울이 당한 고난과 능욕은 그가 데살로니가에 왔을 때에도 끝나지 않았다(행17:13).
거기서도 역시 전도할 때에 많은 싸움(고난)이 있었으며, 이 싸움은 특히 유대인들로 인한 것이었다.
'싸움'의 헬라어 '아고니'는 운동 경기에서 경기자가 일등을 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을 묘사하며,
이 말에서영어의 '고투'(苦鬪)를 뜻하는 'agony'가 파생되었다.
‘하나님의 복음’ - 바울은 1:5에서 자신이 믿음 가운데서 확신있게 증거한다는 의미로
'우리 복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복음의 신적 기원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바울이 빌립보나 데살로니가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담대하게 복음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지식이나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한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증거하기 때문이었다(롬1:1, 고후11:7).
3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권면'의 '파라클레시스'는 ‘파라칼레오’에서 파생된 말로 *'파라'(곁으로)와 '칼레오'(부르다)의 합성어
'곁으로 부름'을 의미한다. 이것은 '격려'의 뜻도 가지며,
개역에 '권면'이라 번역한 것은 ‘격려’의 뜻이다.
*파라클레토스 (보혜사) 역시, 파라칼레오에서 파생된 말이다. 비슷한 말로 보면 된다.
‘부정’ - 이것의 헬라어 '아카다르시아스'는 당시 이교 사상들에게 만연하였던 '성적 부정'을
가리키는 말로서, 바울도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비난받았음을 암시한다.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오직’ (알라) - 이 말은 바울이 앞절에 열거한 것과 같은 이교도들의 중상 모략에 대하여
더욱 강한 어조로 상세하게 변호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옳게 여기심'으로 변역된 '데도키마스메다'는 금과 은의 제련에 사용되는 말로서
시험을 통해 그 진가를 알아내는 것을 가리킨다(벧전 1:7).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은 후에 합격하여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위임되었음을 강조한다(행 9:1-31).
'부탁을 받았으니'의 헬라어 '피스튜데나이'는 '믿는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바울을 전도자로 신임하시고 복음을 맡기셨음을 뜻한다.
분명 복음은 신적 기원을 가진것이기에(2절)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법을 통해 그의 사신(使臣)을 선택하실때에만 복음의 위임이 가능하다.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갈1:10절에도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라고 말씀했다.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6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바울이 자신을 ‘유모’라 표현한 것은 (아비나 어미로 표현하지 않은 것은)
‘사도’와 대비되는 겸손한 표현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11절에서 바울은, ‘아비’가 자녀를 대하듯이 너희를 대했다고 말했다.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너희를 사모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호메이로메노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동사로
간절한 마음의 깊이를 의미한다. 이 동사의 시제가 현재 분사형인 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애정이 복음 전할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본절의 '목숨'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는 '생명', '영혼'을 의미하나
이는 한 사람의 전인격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RSV는 본절의
'우리 자신을'(our own selves)이라고 번역하였다.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장애도 받지 않으려 한 사실과
그의 사역에 추호의 이기심이나 탐심도 개입되어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처럼 자급 전도하였다(행20:34, 35, 고전4:12, 고후11:8).
한편 바울은 전도자가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말하였으나(고전9:14),
그는 결코 전도함에 있어서 이 권리를 요구하지 않았다.
때때로 그는 회심자들로부터 선물을 받기도 했고(고후11:8)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는 빌립보의 형제들에게서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빌4:16).
종일토록 복음을 전파한 바울은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남은 시간을 손수 노동함으로써
그의 회심자들이 자신의 생활비를 보조하는 부담을 갖지 않게 하였다.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증인인 것은,
그가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였기 때문이다. 살전1:5~6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권면하고 위로하고’ - 두 단어는 거의 같은 뜻을 내포한다.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복음의 ‘행함’의 측면을 말씀한다.
우리는 복음을, 너무 믿음과 행함으로 나눠서는 안 된다. 둘은 하나이다.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는데 요10:17
여기서 ‘말씀이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한다’고 했다.
말씀의 능력이다.
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너희가...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는 자되었으니’
1:6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은 사도들을 본받은 자들로서 칭찬을 받았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식이었다.
그리고 본절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이 유대에 있는 교회를 본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의 진정성을 보다 확고히 해준다.
그것은 유대 교회에서일어난 것처럼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됨으로써
자연히 수반되는 박해를 견뎌내고 믿음을 지킨 일이었다.
특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동족에게 핍박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개종함으로 인해 이전의 관습과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방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로서 온갖 수난과 고통이 뒤따르게 마련이다(딤후 3:12).
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실로 유대인들은 모든이방 민족을 증오하여 적대시하였다.
A.D. 1세기 경의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유대인들이 자기 민족 이외의
모든 이방인들을 증오하여 적대시 하였다'고 말한다(Historiae, 5권, 5장, 2절).
또한 타키투스 이전에 바울과 동시대에 살았던 이집트인 에이피온(Apion)은 말하기를
"유대인들이 모든 이방인들을 증오하며 대적할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였다"고 한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적대의식은 궁극적으로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대항함으로써 비롯된 것이었다.
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유대인(신자)들이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하여 반대한 것은
그것을 자신들만의 전유물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 이것과 유사한 구절이 마23:32에 나온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을 둔 자들로
그들의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완성하고 있는 셈이었다.
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 데살로니가에 가고자 하는 바울의 열망을 가로 막은 것은 사단의 방해였다.
사단의 활동목적은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로부터의 방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바울의 몸에 있는 질병일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사단의 사자'라고 표현한 바 있다(고후 12:7).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세운 계획들에 대한 차질이 단순히 사단의 방해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거기에는 성령의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을 바울은 인식하고 있었다(행 16:6-10).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들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확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