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창2장 18~25 가정의 기초 세우기

LNCK 2022. 6. 2. 09:09

◈가정의 기초 세우기       창2:18-25, 엡5:33            2022.05.08.출처

 

 

요즘 사람들은 결혼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합니다.

“왜 결혼하느냐?”라고 물으면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설계도 없이 집을 지을 수 있을까요?

지을 수는 있겠지만 금방 무너질 것입니다.

 

신자들마저도 ‘전통적 결혼관’ 그리고 ‘세속적 결혼관’의 영향을 받는 시대입니다.

결혼관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잘못된 도면을 가지고 집을 짓는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습니다. 결혼은 인간이 만든 문화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섯째 날까지 창조의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의 사역은 완전했습니다.

창조가 하나씩 이루어질 때마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마지막 하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게 있었습니다.

본문 18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좋지 아니하니’라는 말은 원문으로 보면 굉장히 강한 표현입니다.

 

오늘날 혼자 사는 문화를 강조하고 미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거리가 멉니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혼자 살거나 독신의 은사를 받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결혼을 거부합니다. 결혼을 일종의 굴레로 여깁니다.

이것 역시 이 시대의 문화가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연 혼자 살면 자유로울까요?

핵심은 혼자 사느냐, 함께 하느냐가 아닙니다. 더 본질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그 계획에서 멀어질 때 불행해집니다.

그 불행의 깊은 곳에는 죄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죄성을 극복한다면

결혼 제도를 통하여 주시는 축복이 얼마나 큰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가정 안에는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이, 가정과 부부 관계 안에 있습니다.

 

세상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함께 할 때의 행복은 혼자만의 행복과 차원이 다릅니다.

혼자 산다고 해서 자유가 오는 게 아닙니다.

자유와 행복은 부부의 진정한 연합을 통해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준은 언제나 성경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주는 환경이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마귀는 가정이 별 볼 일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가정이 우리의 삶을 속박하고 힘들게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이것은 가정 제도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아 보이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배필을 짓기 전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각종 동물과 공중의 새들에게 이름을 짓게 하십니다.

 

아담은 이름을 짓기 위해 동산을 거닐며 동물들을 유심히 관찰했을 것입니다.

이름을 짓는 일은 일종의 창조 행위입니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를 때마다 각각의 생김새와 디자인에서 오는 오묘한 멋들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언가 부족합니다.

동물들과 함께 거니는 동안에 즐거웠지만 무언가 아쉬움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애완동물을 많이 키우는데 특히 애완견을 참 좋아합니다.

동물병원들도 많아졌고, 슈퍼마켓에 가면 개나 고양이에 대한 것만 취급하는 코너가 따로 있습니다.

 

어떤 여성분은 남편보다 반려견이 훨씬 더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강아지 때문에 남편과 다투어 이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동물이지만 완전한 가족으로 여깁니다. 유산이라도 남겨줄 분위기입니다.

강아지를 보면 분명히 즐거움을 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도 수준은 강아지입니다.

 

외로움을 달래주기는 하지만 영혼의 깊은 것을 나눌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고독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강아지나 고양이가 아닙니다.

 

아담이 외로우니까 더 멋진 강아지를 붙여주신 게 아닙니다.

돕는 배필 하와를 지어주셨습니다. 영혼을 함께하는 파트너를 세우신 것입니다.

 

▲1. 부부가 함께 할 때.. 온전해집니다.

하와를 지으신 첫 번째 목적은 ‘돕는 배필’입니다.

가정에서 아내의 역할을 정의해줍니다.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남편은 아내의 도움 아래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은 혼자 이루는 게 아니라 함께 이루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이란 단순히 외로움을 달래주는 정도나, 아이를 길러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은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돕는 배필은 조화와 상호보완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대치하고 갈등하는 관계가 아니라

돕고 조화를 이루며 함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로 만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1:27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만의 역할과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2. 사명이 있는 가정이.. 행복합니다.

이어서 28절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문화명령, 선교적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큰 뜻이 가정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가정을 만드신 게 아닙니다.

두 사람이 알콩달콩 사는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목표가 없는 결혼과 가정은 늘 헷갈립니다.

뜨거운 사랑만으로 채울 수 없는 허전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는 가정이 행복합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동물적인 삶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미션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 복이 무엇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게 아니라, 다스리며 사는 권세를 부여해주셨습니다.

피해를 볼까 두려워 소극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복음 안에 있는 가정은 행복이 목표가 아닙니다. 행복은 수단일 뿐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뜻이 가정 안에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함께 그 미션을 위해 살아갈 때 아름다운 가정이 됩니다.

 

▲3. 부부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서로에게 기쁨이 주어집니다.

결혼은 서로를 기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부부가 깨어져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습니다.

 

결혼 관계 안에서 성숙함에 이를 때, 그 가정을 통해서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 가정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찾아보십시오.

행복은 덤으로 주실 것입니다.

 

가정에서 하나 됨은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결혼은 완전한 연합입니다. 부부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 됨의 결합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인류 최초의 중매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본문 22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가정을 이루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둘이 좋아서 결혼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십니다.

내가 찾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끌어 오는 사람을 내가 만나는 것입니다.

 

▲결혼의 출발이 너무 중요합니다. 둘만의 애정으로만 결혼하면 위험합니다.

둘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결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이 좋아서 결혼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공동운명체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잘못했다는 말은 아내가 잘못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한 사람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와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 모두에게 심판을 내렸습니다.

하나로 묶여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의 흉을 보면 결국 그 흉은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가끔 속아서 결혼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속은 게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결혼은 연약한 두 남녀의 결합입니다. 부부란 세월이 가면서 조금씩 알아가고 배워가는 관계입니다.

온전한 사람을 만났으면 문제 될 게 없겠지만, 온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연약함으로 시작해서 완성으로 가는 게 결혼입니다.

 

상대의 연약함을 내가 끌어안아 주라고 부부로 만나게 하셨습니다.

서로에게 있는 약점을 내치면 안 되고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싸울 수도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싸움의 횟수가 조금씩 줄어들고,

싸워도 가볍게 싸웁니다. 또한 싸웠다고 할지라도 빨리 화해하는 법을 익혀갑니다.

 

▲이런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십자가가 답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십자가로 화해케 하셨습니다.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배우자의 실수에 대해서 조금씩 둔감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루아침에 한 몸이 되는 게 아니라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부부관계 안에서 만족을 얻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정 안에서 최상의 행복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다른 곳에서 만족을 얻고자 하면 불행이 시작됩니다.

가장 위험한 발상은 가정 바깥에 기쁨이 있는 줄 알고 기웃거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한 번도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부부관계는 상호보완적인 면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33절에는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서로가 필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부부관계는 지배관계가 아니라 섬김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지배의 원리가 아닌 섬김의 원리가 작동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잘 섬길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미숙합니다. 사랑을 주기보다 상처를 줄 때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부부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가정들이 깨어지는 배경 한가운데는 죄의 문제가 있습니다.

죄의 뚜렷한 특징은 이기심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내적인 부분입니다.

 

죄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이기심입니다. 이기주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요즘은 문화적으로 이기주의를 더 부채질합니다.

 

아이들도 함께 공유하는 개념보다는 혼자 독점하는 환경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런 이기주의는 결혼하기 전까지는 괜찮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면 달라집니다.

이기심과 또 다른 이기심이 만나면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의 특징을 이야기합니다.

딤후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병적인 자기애에 빠져 나만의 삶을 고집하면 답이 없습니다.

결혼은 ‘나’라는 사람을 해체하고 ‘우리’로 가야 합니다.

 

결혼한 이후에는 자기 자신이 아닌 배우자에게로 관심을 옮겨야 합니다.

행복을 빼앗기는 것은 외적인 조건 때문이 아니라 이기심 때문입니다.

 

이기심을 붙잡고 있는 동안에는 행복도 기쁨도 다 깨어지고 맙니다.

이기심을 그대로 두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기심을 극복하는 게 매우 어렵습니다.

결혼하기 이전에는 내가 그렇게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모릅니다.

함께 살다 보면 내 이기심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성숙이란 무엇입니까? 무엇을 하든지 상대편을 먼저 고려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것이 아니라 상대가 좋은 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작은 이기심을 이기고 나면 거기서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은 말이나 노래가 아닌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상대에 대한 요구는 조금씩 줄고 상대를 향한 헌신은 더 깊어져 가야 합니다.

자기의 만족을 위해 상대 배우자에게 계속 무엇인가 요구하고 있다면

이미 관계가 틀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를 바꾸려고 하기보다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배우자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합니다.

 

상대를 불행하게 하면 나도 불행해집니다.

가족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부부관계는 명령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자기 자신이 우상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이후부터는 달라져야 합니다.

 

남편이 편안한 소파에 앉아 아내에게 이것저것 요구한다면

그리스도가 교회에 보여준 모습과 다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조금 더 편안할까가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상대를 돕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상대에 대한 요구만 많아집니다. 요구가 많아지는 순간부터 불평불만이 늘어납니다.

 

우리의 초점은 나의 만족이 아니라 배우자의 만족이어야 합니다.

종일 직장에서 일하고 돌아온 남편이 집안일을 돕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종일 아이들을 돌보며 집안일을 한 아내도 저녁이면 지쳐있습니다.

이때가 중요합니다. 집안일을 도우려는 남편, 조금이라도 더 쉬게 하려는 아내라면 최상의 관계입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희생이라는 단어에는 ‘대가 지불’이 들어있습니다.

대가 지불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일상에서도 이타적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몸은 조금 불편할지 모르지만 용기를 내어 아내를 돕고,

남편을 도울 때 밀려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상대를 섬기기 위해 나의 불편함을 받아들여 보십시오. 그것이 성숙으로 가는 길입니다.

 

배우자를 위해 수고한다고 해도 자랑하거나 생색낼 수 없습니다.

아내에게 한 것은 내 몸에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기심의 극복은 어디에서 가능합니까? 십자가로 일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섬기기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철저히 상대를 위해 죽어줄 수 있는 것은 십자가 정신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가 없는 가정은 궁극적으로 진정한 가정을 이뤄낼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신 황금률은 부부관계 안에서도 발견됩니다.

마7:12절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배우자가 나를 위해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면 내가 먼저 실천하면 됩니다.

휴일에 아내는 멋진 브런치 카페에 가고 싶은데 남편은 선지해장국을 먹자고 합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좋아하는 곳이 아니라 배우자가 가고 싶은 곳을 가는 게 사랑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것을 따라갈 줄 아는 것, 그것이 성숙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상대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됩니다.

 

그렇기에 서로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어야 합니다.

남자의 남자다움은 결국 아내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여자의 여자다움도 남편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남자는 남자다워지고 여자는 여자다워지는 것입니다.

 

▲결혼생활을 할수록 상대를 더 알아가게 됩니다.

알아가면 장점도 보이지만 사실 단점이 더 많이 보입니다.

단점이 보이면 비난하거나 지적하지 말고 서로 보완해주면 됩니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것도 많지만 다른 것이 더 많습니다.

대화의 방식, 관심, 정서적인 부분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고 특히 기질의 차이가 큽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다는 것은 각각 다르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서로 조율을 해나가야 합니다. 절충하고 협상을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서로 이기려고 하다가 점점 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지는 것이 이긴다는 것을 발견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갈등은 줄어들고 조금씩 배려가 많아집니다.

양보하면서 주어지는 기쁨을 알아가게 됩니다.

 

내가 상대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잘남이 아니라 상대를 잘나게 하는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나의 똑똑함을 주장하다가 상대를 바보로 만드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상대를 더 돋보이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신앙이 좋아져 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주변의 사람들을 더 존귀한 존재들로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

가정 안에서 그 존재의 가치를 느끼게 할 때 삶의 의욕은 넘칩니다.

 

가장 존귀한 남편, 아내로 인정받을 때

그 가정 안에는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큰 힘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존귀한 가치를 발견해주는 것이 부부간의 역할인 줄 믿습니다.

 

▲마치는 말

결혼, 부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결합을 통한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 부부관계가 갈수록 복되고 풍성함을 경험하는 은혜의 장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부관계를 통해서만 성숙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완성된 그림이 나오지 않습니다. 긴 싸움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인격도, 가정도 시간을 통해 조금씩 익어갑니다.

성숙에 이를 때 이전에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결혼 안에는 하나님이 감추어놓은 비경들이 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그 가정 안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운 비밀과 신비를 숨겨놓으셨습니다.

 

흔들림에 고통하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가정이 어떤가를

세상에 증명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에덴에서 설계하셨던 그 축복된 가정, 그 가정 속에서 나오는 행복과 기쁨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혼을 통하여 우리를 성화에 이르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며 가정이라는 집을 세워가시길 바랍니다.

 

가정이 점점 완성되어 갈 때 하나님은 더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누리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