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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책임과 공동체적 책임

LNCK 2022. 6. 8. 19:08

https://blog.naver.com/karamos/222138893778

 

개인적 책임과 공동체적 책임     출23:1~19       2015.03.22.

 

서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신정통치국가라는 독특한 나라로 만드셨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놀라운 능력으로 건져내셨을 뿐만 아니라

시내산에서 법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법에 다스림을 받는 법치국가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왕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신정통치국가로 만드셨을까요?

 

그 당시 이스라엘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이 한 나라만 하나님이 여호와이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신정통치국가로 삼아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나라 민족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로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악으로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삶은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신정통치국가로 삼으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21세기에는 신정통치국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존하는 이스라엘도 신정통치국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 보여주어야 할 책임은

정치적인 어떤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왕국, 영적인 하나님의 신정통치국가인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치적인 왕국은 현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나라는 존재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영적인 나라로서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책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로서의 개인적인 책임교회로서의 공동체적인 책임입니다.

 

◑1. 성도의 ‘개인적인 책임’ (23:1~9)

 

하나님은 성도들이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것을 잘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출23:1~9절에는 성도들이 의롭고 자비로운, 이 두 가지 성품을 겸비한 사람이 되어야

이 세상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 전반에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허망한 풍설’이라는 것은 ‘아무 근거가 없는 헛된 소문’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거짓된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보지도 않은 근거 없는 소문을 퍼트리고 다닙니다.

 

또는 사람의 앞뒤 말을 다 자르고 중간의 내용만 가지고 자기의 목적에 맞도록 조작한 말,

또 실제 사실이라 할지라도 앞뒤 정황을 고려하지 않은 소문 등

허망한 풍설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 모세를 부르셔서

“네가 나 여호와를 세상에 나타내려면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첫째가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지하철 안에서 마구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닙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 아이의 부모를 욕하는 것입니다.

“저 아이의 부모는 어떻게 저런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있느냐?”,

“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길래 저렇게 아이를 방치하느냐?”며 수군댑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아버지가 지하철 한편에 앉아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아이의 엄마가 오늘 아침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앞뒤 정황을 알지 못하면, 허망한 풍설을 전하고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허망한 풍설을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나 세상 정치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 중 절반은 줄어들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성도들은 허망한 풍설에 귀 기울이지도 마시고 전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잠16:28절에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잠18:8절에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 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잠26:20절에는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첫 번째로 원하시는 것은

“허망한 풍설을 전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1절 후반에는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악인과 연합하는 것도 나쁜 일이지만 무함하는 것도 좋지 못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는 것’은 ‘악의를 가지고 증언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아합의 아내는 이세벨이었습니다. 아합은 우상숭배를 많이 했던 악한 왕이었는데,

그는 나봇이 소유한 포도원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신 땅을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하기 때문에

왕이라도 함부로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합이 나봇에게 가서 땅을 팔라고 해도 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궁으로 돌아온 아합이 포도원을 사지 못해 투정을 부리고 있었는데,

아내 이세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왕상 21:7).

 

그러더니 비류를 동원하여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거짓 증언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나봇을 붙잡아 성 밖으로 데리고 가 돌로 쳐 죽였고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왕상 21:19).

 

“네가 나봇을 억울하게 죽여 개가 나봇의 피를 핥게 한 그 곳에

너와 네 아내도 죽어 개들이 그 피를 핥을 것이라”고 하셨고,

이 예언은 열왕기하 9장 8절 이하에 등장하는 예후에 의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악인과 연합하지도 말고 거짓으로 증언하지도 마시길 바랍니다.

 

출23:7절에도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연합하여 거짓 증거하는 모든 자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2절에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다수결의 원칙을 따릅니다.

그러나 다수결의 원칙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다수가 그릇될 때도 있습니다.

 

소수가 옳고 다수가 그릇된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면 다수의 편에 서지 말고 소수의 편에 서라는 것입니다. 다수라고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중도에서 눈치를 보고 있다가 한쪽에 사람이 몰리면 그 쪽으로 갑니다.

그런 사람을 기회주의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기회주의적인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진리의 사람, 의의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역대하 18장에는 유다의 네 번째 왕 여호사밧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아주 의로운 왕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이 부유해지고 명예도 얻게 되자 한 가지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북쪽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과 사돈을 맺은 것이었습니다.

 

아들 여호람과 이스라엘 왕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을 시킨 것이었습니다.

정략결혼을 한 것이죠. 그리고 여호사밧은 쓸데없이 하지 않아도 될 남북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스스로 북쪽에 올라가서 아합과 정상회담을 하는 중에

요단 동편 땅 길르앗 라못을 함께 탈환하자는 제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뜻을 묻기 위해 선지자들을 찾았고,

아합은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올라가기만 하면 승리할 전쟁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이 보기에 믿음직스럽지 못했는지 다른 선지자를 찾아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고 해서

아합은 항상 자기에게 불리하게 예언하는 선지자 미가야를 데려오게 합니다.

 

미가야는 400대 1의 상황에서 “아합은 이 전쟁을 통해 죽을 것이고,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선지자 미가야를 붙잡아 고생의 떡과 물을 먹고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합은 400명 거짓 예언자의 말을 듣고 전쟁에 나갔다가 죽고

개들이 피를 핥게 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으며,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성도는 다수라고 무조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소수라 할지라도

진리의 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절에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또 6절에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이 비슷한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3절은 재판할 때에 가난한 자라고 무조건 편을 들어주지 말라는 의미이고,

6절은 가난한 자라고 해서 억울하게 대우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재판할 때는 가난한 자든 부자든 관계없이 무조건 공정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재판에 편파, 편벽성이 조금이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편파성은 인간 사회를 병들게 하는 아주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하면 로맨스고 네가 하면 불륜이다!”

남과 자신에 대해서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재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편파성이 없이 사람을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8절에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절대로 뇌물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에 성경의 이 한 구절만 제대로 지켜졌어도

엄청나게 깨끗한 정치가 되었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뇌물을 받은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꽤 많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결코 그 사람 개인의 윤리 도덕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다 저렇구나!”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절대로 뇌물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22장에는 브올의 아들 선지자 발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모압 왕 발락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명을 따라

이스라엘을 저주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입을 움직여 도리어 이스라엘에게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받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재차 권유하는 뇌물을 받고 저주를 하게 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발람은 세 번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는 거짓 선지자요, 불의의 삯을 사랑한 선지자요,

어그러진 길로 간 선지자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발람은 타고 가던 당나귀에게도 야단을 맞고 천사에게도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뇌물 때문에 거짓 선지자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 공의로운 사람이 되어야만

세상을 향해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공의로운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동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23장 4~5절에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돌아다니고 있으면 설령 원수의 것이라도

주인에게 데려다 주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나귀가 주저앉아 버렸으면

평소에 미워하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짐을 나눠지고 계속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잠언25:21~22절에도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2:20~21절에도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가 악을 행한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니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은 원수라도 자비를 베풀고 살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공의로울 뿐만 아니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나타내려면 공의로워야 하고 자비로워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세상에 나가 살아갈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예수 향기가 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성도의 ‘공동체적인 책임’ (23:10~19)

 

10~13절에는 안식년과 안식일의 원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의 제4계명을 적용한 것입니다. “너는 육년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제칠년에는 갈지 말고 묵여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너의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내가 네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말지니라” (출 23:10~13).

 

농사를 짓더라도 계속해서 짓지 말고 6년은 짓고 1년은 그냥 내버려 두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쉬는 동안 자생하여 맺히는 열매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도 먹고 배부르면 남은 것들을 들짐승들로 먹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7년 째 되는 해는 경작하지 않으니 토지의 산성화를 막을 수 있고

생산력도 높일 수 있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 심지어 들짐승까지 먹고 살 수 있도록 하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자비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12절은 안식일의 원리입니다.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출 23:12).

 

쉬는 동안 다시 일할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인, 종, 짐승도 6일 동안 열심히 일했으면 하루를 쉬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시는 삶의 리듬은 6:1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애굽에는 이런 안식일이나 안식년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일하다가 병들면 버리는 삶의 싸이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애굽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6일을 일했으면 하루는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날은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선진국 사람들은 약 4일을 일하고 거의 3일을 쉽니다.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쉬면서 4:3의 삶의 리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산력을 비교해 보았을 때,

3일을 쉬는 것보다 하루를 쉬는 것이 훨씬 좋다고 합니다.

 

성경적이면서도 가장 효율적인 삶의 리듬이 바로 6:1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원리입니다.

 

▲또 14~19절에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3대 절기(무교절, 맥추절, 장막절)를 지켜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하나님께 얼굴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규칙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리듬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릅니다.

이방 나라 민족들은 7일을 계속 일합니다.

일 년 내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6일 일하고 하루 쉬고, 또 일 년에 세 차례

예루살렘에 다녀오며 하나님께 예배하고 살아가는 삶의 리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과 삶의 리듬이 다릅니다.

물론 밤 열시에 출근해서 아침 다섯 시에 퇴근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은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밤에는 조금 일찍 자는 리듬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삶의 리듬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올바른 삶의 리듬,

즉 6:1의 리듬을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하나님의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개개인의 책임이 있고 교회 공동체로서의 책임도 갖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책임의 중요성을 깨닫고 항상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