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최고의 동역자이고 믿음의 아들이었죠.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픽업해서, 자신의 제자이자 동역자로 삼았던 사람입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어 있고,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죠.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최대 도시요, 로마제국의 5대 도시 중에 하나이고 계시록 2~3장에 보면 소아시아 7교회 중에서 센터 역할을 했던, 그 지역에 가장 중요하고 큰 교회였습니다.
그러면 왜 내향적이고 심약했던 디모데에 이런 큰 목회를 맡겼을까요? 사도 바울에게 동역자들이 디모데만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오른팔 왼팔 역할을 했던 사람이 디모데 와 디도 입니다. 그런데 왼팔 역할을 했던 디도는 크레타섬으로 보냈어요. *그레데
크레타 섬은 상당히 골치아픈 지역이었죠. 소돔과 고모라처럼, 또 고린도처럼 굉장히 도덕적 타락이 심각한 동네였습니다.
디도는, 우유부단했던 디모데와는 달리, 굉장히 내면이 견고하고 또 문제를 잘 풀어낼 수 있는 그런 리더십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디도에게 오히려 어려운 크레타 섬 목회를 맡겼고
그리고 유약한 디모데에게 에베소 목회를 맡겼어요. 본문 딤후1장에도, 그가 받은 은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디모데전후서를 통틀어서 볼 때, 디모데는 말씀의 은사를 받았던 사람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를 맡았던 거죠)
어떻게 보면 큰 교회, 굉장히 여러 리더십들 간의 힘겨루기나 갈등이 일어날 수 있는 그런 교회지만 그런 교회를 디모데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의 말씀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그런 성품을 가진 온유한 디모데가 목회를 하도록 바울이 그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런 배경지식을 갖고 본문을 보겠습니다.
◑딤후1:1 '하나님의 뜻으로 인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우리말 성경)
서신서를 읽을 때마다 발신인과 수신인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 이를 때마다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이런 정체성에 대한 묵상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울의 자기 정체성은, '하나님의 뜻으로 인해 이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다. 내 인생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1 이 고백은 아주 중요하죠.
내가 세운 계획이면 내가 책임을 져야 되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심을 받아서 가는 일이면, 그분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고난이 있을지라도, 또 세상의 유혹이 있을지라도 이 부르심이 명확한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디모데전후서를 볼 때마다 상당히 은혜를 많이 받는 것은 '제 기질이 디모데와 비슷한 유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상당히 내향적이고, 우울기질이고, 완벽주의 기질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게 좀 심하게 내향적인 기질이 발동되거나, 완벽주의 기질이 발동되면 그럴 때는 별로 이렇게 제가 집회 인도를 하거나, 설교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냥 어디 가서 조용히 혼자 있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근데 그럴 때도 단에 서서 메시지를 해야 될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어느 날부터 스스로 제 자신에게 하는 말이 있어요. '나는 하나님의 메신저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고, 남들이 볼 때는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지만, 근데 제게는 굉장히 중요한 선포입니다.
'오늘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될 사람이 있다. 나는 그것을 전해야 되는, 전달해야 되는 하나님의 메신저요,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자주 확인합니다.
이런 자기 정체성이, 우리 내면이나 삶이 흔들릴 때 명확하게 우리 자신을 붙잡아 주는 거죠.
본문 1절에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명확한 자기정체성'을 보면서, 우리도 그렇게 자기 정체성을 매일 확인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설교자들에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하는 설교법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저는 오래도록 하나님 앞에 묵상하면서 기도한 것을 나누는데요.
저는 '설교는 악기 연주와 같은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바이올린, 첼로 등의 현악기도 그렇고, 또한 관악기도 그렇고 악기의 소리는 울림통을 통해서 나오는 원리이거든요.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울림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인격, 경험, 신앙고백... 그걸 다 하나님 쓰시거든요. (성경의 유기적 영감설과 비슷한 거죠)
베드로같은 유형, 이 분은 좀 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베드로같이 그냥 담대하게 선포하는 유형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디모데같이 섬세하게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 말씀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디모데의 설교가 성경에 안 나오지만, 그의 성품을 보고서 그렇게 추정하는 거죠)
◑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네게 베푸시기를 빈다'
'나는 누구인가?'가 점검이 되면 '너는 누구인가?'를 살펴봐야죠.
바울이 매우 일 중심적이고, 사명 지향적인 사람이죠. 그러나 참 감사한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명은 영혼을 사랑하고 건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일 중심적인'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 분들은, 스스로 가끔 '내가 너무 인간미가 없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여러분의 최고의 사명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를 명심하셔야 됩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디모데에게 '사랑하는 아들아'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도, 이런 좋은 믿음의 동역자, 믿음의 관계를 만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심 없이 서로가 정말 잘 되기를 바래주는 그런 마음, 디모데가 바울을 향해서, 바울이 디모데를 향해서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면 축복이죠.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야' 이렇게 그에게 인삿말이자 축복을 해줬는데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
보통은 바울이 서신서 서두에 인사말을 쓸 때 "은혜와 평강"이라고만 했어요. 근데 여기서는 "긍휼"이 더 들어갔어요. 추가되었어요. 왜 긍휼이 더 들어갔을까요? 뭐 우연일수도 있겠지만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내용에 보면 '기도 하며 너를 생각할 때...' 바울의 마음 가운데 디모데에 대해 굉장히 안쓰러운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만 이게 바울의 마음이기도 한 거예요.
디모데 은혜를 끼치고 싶고,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의 삶이 흔들리는 자리를 평안케 하고 싶은 게 이게 바울의 마음이에요.
즉 하나님의 마음과 바울의 마음이 같은 거죠. 바울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했지만, 이게 또한 바울 자신의 축복인 거죠.
정말 누군가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심 없이 정말 잘되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가 특별히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되기를 바랬던 마음이, 본절의 서두 인삿말에 투사되어 나온 것이죠.
◑1:3 '나는 밤낮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항상 너를 기억하며 깨끗한 양심으로 조상 때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바울이 매일 자신의 기도 시간에 디모데를 위해서 중복기도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깨끗한 양심으로 조상때부터 섬겨오는 하나님' 이 얘기를 왜 이 맥락에서 했을까요?
디모데가 그런 청년 이잖아요. 어려서부터 깨끗한 양심으로 쭉 선대로부터 이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순전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
제가 이 구절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죽음을 앞두고, 물론 나이도 꽤 들었죠. *약66세 '디모데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던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대단했던 유대인이었죠. 바리새파에서 열심히 수학을 할 정도로, 랍비가 되려고 어려서부터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인생을 묵상하면서, 상당히 감정이입이 되고 자기 동일시가 되는 마음이 아니었는가 싶어요.
자 그렇게 디모데를, 자기 자신의 분신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잘 되기를 바라고 '나는 지금 떠나지만 너는 잘 돼야 된다. 잘 가야 된다..'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에는 사도바울과 같은 양육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디모데와 같은, 미래 세대를 책임질 수 있는 소망을 주는 다음 세대가 일어나야 될 줄로 믿습니다.
◑1:4 '네 눈물을 기억하며 너를 만나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러면 나는 기쁨이 가득할 것이다.'
디모데의 에베소에서의 목회는 결코 쉽지가 않았습니다. 디모데가 왜 눈물을 흘렸을까요? 두 가지 때문이겠죠.
-현재 디모데의 에베소 목회가 너무 힘들고 버거웠기 때문에 그가 굉장히 버거워했다는 것은 디모데전후서를 통해서 알 수가 있고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자기의 영적인 멘토, 영적인 아버지 바울이 곁에 있으면 얼마나 힘이 되었겠어요. 그런데 바울이 지금 로마 감옥에 투옥됐고, 위태위태한 상황이잖아요.
그러니까 그가 눈물을 흘리고 슬퍼했던 것이죠.
그래서 '너를 만났으면 좋겠다..' :4 딤후4:9에도 '속히 내게 오라'고 이야기를 했고
디모데후서를 서신을 보낸 후에, 디모데가 로마에 방문해서 바울을 만난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나서 바울은 순교하게 되죠.
그래서 본문은, 임종을 앞두고 있는 아버지가 '아들아 보고 싶다' 이런 뉘앙스의 말을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를 보면서, 저희 어머님이 생각이 났어요. 저희 어머니는 좀 일찍 돌아가셨는데, 생전에 초신자들 양육을 참 열심히 하셨어요. 전도도 열심히 하셨고, 양육도 열심히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밴쿠버에서 목회할 때 돌아가셔서, 제가 급히 한국에 와서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어머님이 전도했고 양육했던 그 분들이 집사님이 되고 권사님이 되어서, 많이 조문을 오셔서 그렇게 우시더라고요.
▲여러분이 정말 사심 없이 '내가 저 사람한테 잘 해주면, 저 사람도 나에게 잘 해주겠지' 이런 기대있는 사람들 말고요,
우리가 어린 자녀를 양육할 때 '이 아이가 앞으로 자라서 성공해서, 나한테 잘해줄 테니까 내가 지금 아낌없이이 투자를 해야지...' 이런 생각으로 자기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없잖아요.
정말 사심 없이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 그런 마음으로 서로를 양육하고 동역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바울을 만나고, 이런 디모데를 만난다면 축복인 거죠.
◑1:5 '나는 네 안에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을 기억한다. 그것은 먼저 네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안에 있던 것으로 지금 네 안에도 있는 줄을 내가 확신한다.
디모데의 신앙을 '거짓이 없는 믿음이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5 디모데에 대한 묘사를 보면, 그는 실제로 아주 순전하고 깨끗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사심, 욕심, 개인적인 야망이 없는 정말 순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고, 충성했던 사람이죠.
그런데 디모데가 그런 거짓 없는 순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그 순전한 신앙의 영향이다' 라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남성중심 사회이고, 가부장적인 문화가, 한국의 유교문화에 못지않게 아주 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 유전은 모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어요.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이방인이고, 아버지가 유대인이다... 그러면 그 자녀는 이방인으로 봐요.
근데 아버지가 이방인이더라도,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그 자녀는 유대인으로 봐요. *디모데의 경우
그러니까 어머니 품안에서, 그 자녀에게 기도해주고, 찬양을 부르고, 말씀을 읊어주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하다는 거예요. 어머니들의 사명이 정말 중요합니다.
디모데와 같은 자녀, 순전한 신앙의 자녀 세대를 일으킬 수 있는 부모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1:6~7 '그러므로 내가 너를 일깨워서 내 안수를 통해 네가 받은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 듯 일으켜 주고자 한다. 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이다.'
자 안수를 통해 디모데가 받은 하나님의 은사가 무엇입니까? 딤전4:12~16절에 보면, -'네가 젊다고 해서 누구라도 너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 바울이 젊은 목회자인데, 큰 교회 목회를 했기 때문에 상당히 부담이 많았다고요.
이어지는 4:13절에 '내가 갈 때까지 너는 성경 낭독과, 설교와,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라' 이게 디모데에게 맡겨진 아주 중요한 부르심이고, 사명이었죠.
4:14절에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들의 모임에서 안수받을 때 예언을 통해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말라'
이게 오늘 본문 딤후1:6절에서 이야기하는 '안수받을 때 받은 은사'입니다.
그런데 사실 어떻게 보면 그가 이미 받은 기질, 성품, 기름부으심이 그때 안수받을 때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죠.
그러면서 이어지는 15절에 '이것들을 실천하고 꾸준히 행하라. 네 진보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4:16절에 '너 자신과 가르침에 주의하고, 이 일들을 계속 하라' 그러니까 디모데 네 자신을 잘 케어하고 티칭하는 일에 있어서 정말 세심하게, 주의 깊게 노력을 다하고 정진하라는 이야기를 해준 거예요.
그러니까 디모데는, 사도 바울처럼, 담대하게 선교사역을 추진해 나가는 탱크같은 그런 기질은 아니죠. 그러나 섬세하고 순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깨우치고 가르치고 그래서 영혼들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그런 일을 했던 사역자인 것입니다.
롬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후회하시지 않으면, 여러분이 후회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이 표현은 뭐냐면, 하나님은 취소를 안하신다, 번복하지 않으신다, 후회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야기할 때,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이지만 개인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베드로같은 다혈질의 사람들, 좋은 측면도 있지만 '왜 난 차분하지 못할까, 섬세하지 못할까?' 이런 고민에 빠질 수 있죠.
바나바 같은 점액질의 사람들, 굉장히 이타적이고 관계 중심이기 때문에 결국 자기를 돌보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을 때는, 마음의 문을 닫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디모데같은 우울질, 예술가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완벽주의를 지향하고, 그러다 보면 인생이 늘 피곤할 가능성이 큽니다.
사도 바울과 담즙질,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탱크와 갖고 공격적인 스타일이죠. 그러다 보면 너무 기계적인... '나는 왜 이렇게 인간미가 없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각자 다 장점이 있고, 동시에 단점이 있는데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줄로 믿습니다.
▲최근에도 어떤 한 초등학생이 '제가 숙제인데요. 목사님은 성경에서 어떤 구절을 제일 좋아하세요?' 질문을 해 왔습니다.
그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3:16절을 대답합니다. 저는 창1:1절로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이미 모든 복음의 출발점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다'는 이 선언은, 너무나 중요한 거예요. 할렐루야! '나를 창조하시고 세상에 보내신 것을,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10대 때 하나님 뜨겁게 만나고도, 20대 때에도 여전히 '아~ 나는 왜 이래야 될까?' 30대에 목회를 하고 있으면서도 '왜 나는 캐릭터가 이럴까? 왜 하나님은 저를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하는 살짝 탄식이 있었어요)
그런데 30대 후반이 넘어가면서 '아~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그냥 하나님 말씀을 계속 묵상하고 그 깊이를 보도록, 하나님이 나를 내향적인 우울기질로 만드셨구나!'가 깨달아졌어요.
제 자신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 내 성품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그 섭리를 인정하게 되고, 이제는 찬양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자아도취가 아니고요. 하나님이 나를 나로 만드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여러분으로 만드신 것을 감사하고 찬양하십시오!' 그 자리까지 가셔야 돼요.
요즘 권사회 사진첩을 만든다고 해서, 제가 어제 회의 때 물어봤어요. '20년 전 사진 좀 내지 마시라고' 그랬더니 안 된데요.
여러분의 현재 모습, 여러분의 머리가 하얗게 되고, 몸의 기력이 떨어지고 건강에 적신호가 여기저기 나타나고 그런 모습일지라도... 얼굴에 주름이 지고, 기미가 올라오더라도...
여러분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안에서 긍정하십니까, 찬양하십니까? 그게 신앙이고 믿음이에요.
그게 없으면 그게 어떻게 자유하는 신앙입니까? 내가 주님과 지금까지 동행하며 살아왔고,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면서 생명도 바치고, 내 시간도 드렸고, 내 건강도 드렸고, 내 재능도 드렸고... 그렇게 부르심을 따라 살아왔다면
내가 주님 앞에 더 가까워져 가는데, 뭐가 그렇게 부끄러우세요? 노화든지, 자기 기질이든지... 자랑스럽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데, 주를 위해서 나이 들어가고 주님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나이 들어가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셔야 돼요.
여러분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내 육신의 연약함, 부족함, 기질적인 불완전함...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들어서 아름답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데 쓰시는 줄로 믿습니다. 네, 부르심을 따라가셔야 돼요.
7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이다.'
그래서 이것은 심리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이것은 영적인 문제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 영혼의 아버지이시고, 내가 영적인 자녀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는 거예요.
단순히 기질, 기독교 심리학.. 이런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고요.
▲사단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나는 마음에 안 드는데...' 계속 그 생각을 하게 만들 거예요.
광야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계속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던 것은 3번 모두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겁니다.
'야 너 그 꼴을 하고 너가 그런 앞으로 고난을 당할 건데, 십자가의 수치를 당할 건데, 그러고도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야?' 그거를 아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어요. 진짜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에게도 그렇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공격을 당하면, 여지없이 픽픽 쓰러져요. 오늘 제가 나눈 것은, 딤후 1장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과연 누구인가?' 이 내면적 질문에,
'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가, 평생의 그 마지막 지점에서도 하나님 앞에 설 것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천국으로 들어갈 사람입니다!' 고백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자랑스러워하십니다.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롬11:29 주님은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분명한 이유가 있으십니다.
어떠한 고난에도, 어떠한 유혹에도 부르심을 따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삼창하고 이 시간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