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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딛1장, 교회 지도자의 자질 여러 설교 정리
<딛1장의 개요>
1~4절, 인삿말
5~11절, 감독의 자질
12~16절, 그레데 인에 대한 기대를 버리라
◑적용 "교회 지도자의 자질"
※데이빗 파슨의 성경개관 시리즈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P2>에서 발췌 -이 단락 출처-
디모데전서 3장과 더불어 본문 디도서 1장에 장로(또는 감독)의 자격, 이어서 집사의 자격 등
교회의 지도자의 자격 조건에 대해서 나옵니다. 만민제사장 설에 의하면, 성도 모두가 제사장(지도자)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모든 성도에게 해당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을 차분히, 곰곰히 읽어보시면,
그 교회 지도자의 자질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개개인의 업무 능력 ability 을 뜻하지 않고, 인격적 자질 character 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의 기업이나 기관에서 성공한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는 일이 많은데... 재고해야 됩니다)
교회에, 교회 일에 적합하고 유능한 사람이 많이 있을 수 있지만,
신약성경이 택하라고 지시한 사람은
그의 '사역 수행 능력'이 아니라 '신앙 인격'을 보고 가늠하고, 그를 택하여 세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제 데이빗 파슨이
도시들을 순회하면서 <목회자와 교회지도자를 위한 세미나>를 여는데
제가 항상 그 지도자들에게 '여러분이 교회에서 섬기는 그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는
지도자를 따르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성도들은 지도자의 장점만 따르면 되는데,
문제는 단점까지도 다 따른다는 것이지요, 다 닮아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세미나에서 만나는 교회 지도자들은
항상 제게 불평하는데, 성도들이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여러분의 말에는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분의 행함을 보고 따릅니다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자기 지도자를 따르게(즉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그들은 지도자의 말에 따르지 않고,
지도자의 행위를 보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교회 지도자의 놀랍고도 무서운 책임은,
교회에서 지도자의 강점과 단점이 자연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인 지도자 체제의 위험입니다
왜냐면 그 한 명 지도자의 성격이, 교회 전체의 성격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수 지도자, 복수의 장로(목회자를 뜻함)가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강점들이 더 많아지고 또 여러 지도력의 균형이 더 잘 이루어집니다
어쨌든 성도들은
지도자의 말을 닮는 것은 아니고, 그 지도자의 사람됨과 인격과 그 행함을 닮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목회서신에는 교회 장로와 집사의 자격에 대해 나옵니다
딤전3장, 딛1장에서 여러분이 파악하셨겠지만
그 자격요건은 은사나 능력이 아니라, 성숙한 인격입니다
딛1: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위 리스트를 보십시오
지도자가 뭔가를 할 수 있는 어떤 능력 ability 을 보고서,
유능함 competent, capable, talented 을 보고서 그를 지도자를 세우는 게 아니라,
지도자의 신앙 인격을 보고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가 가정에서는 어떻게 행하며, 또한 사회에서는 어떻게 행하는지...
또한 사회와 세상은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여러분의 교회가 장로를 선택할 때,
여러분은 교회 바깥 불신자들에게 그의 추천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래본 적이 있습니다 한 번 그렇게 해 봤어요
우리가 장로 후보자의 직장 동료에게 그의 견해를 받아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동료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이 사람을 장로로 세우게 되어 참 행운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 사람을 선발하는데 매우 큰 신뢰를 갖게 하였습니다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딤전3:7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바깥에서도 증거를 얻어야 합니다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집사와 여집사 모두 언급했고, 그들은 교회에서 봉사로 섬기는데
하지만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그들의 인품이 중요합니다
재정 집사도 인격적인 성품을 갖추어야 하고, 식사 봉사하는 집사도 성품을 갖추어야 합니다
왜냐면 교회에서 봉사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고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 relatinship 입니다
능력은 당연히 도움이 되겠지만,
흥미로운 것은 성경에, 지도자의 자질이 능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 예방 및 해결은 오직 참된 복음의 선포에 달려 있습니다
디모데와 디도의 마지막 한가지 임무는 진리를 전하는 것이었는데,
왜냐면 진리만이 이런 문제들로부터 교회를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회는 모든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모두 반드시 진리로 대항해야 했습니다
제가 이미 말씀드렸는데, 하지만 제가 다시 한번 더 강조하겠습니다
잘못을 교정하는 가장 좋은 해독제는.. 진리입니다
나쁜 가르침을 교정하는데 가장 좋은 해독제(대책)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을 교정하는데 가장 좋은 해독제는.. 바른 신앙을 가르치고,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씀 연구에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제 시간표를 보시면,
저는 제 모든 시간을 설교나 강의를 준비하는데
최우선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준비 없이 강단에 서지 못합니다
제 David Pawson 가 강단에서의 5분 메시지를 위해 대략 1시간을 읽고 연구합니다
40분 설교한다면 대략 8시간을 준비하는 거죠
저는 현재 교계에서 가장 급한 것이
바로 성경 전체의 조직적인 가르침이라고 믿습니다
정확한 가르침만이 성도에게 배의 밸러스트(균형잡는 장치)를 줍니다
그래서 전체 성경을 가르침은
거짓 교사와 그의 가르침을 대항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이단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은 거의 기독교 신자들이지, 불신자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적절히 가르침을 받지 못한 기존 신자들이
성경을 잘 가르쳐 준다는 이단의 말에 꾀임을 받아서, 이단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잘 하는 말은 '우리는 계시록을 가르친다'
그러면 교회 신자들은 계시록을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거기 이단에 빠지는 것입니다
왜냐면 신자들은 계시록에 대해 건전한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잘 가르치는 것, 성경 전체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주 필요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말로써 뿐만 아니라 삶의 본보기로 가르쳐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귀로 들을 뿐 아니라 그 진리를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진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전달됩니다
'디모데야, 네가 선포해야 할 메시지가 있는데,
하지만 동시에 네가 반드시 그 말씀대로 사는 모델이 되어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성경 교사들의 도전입니다
우리는 메시지를 전해야 되고, 동시에 그 말슴대로 사는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모델이 되지 못하면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자들은 들을 뿐 아니라 진리를 눈으로 봐야 됩니다
그러면 양떼들은 모든 침입하는 왜곡된 가르침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질 것입니다
오늘날 ‘교리 doctrine’라는 단어가 너무 협의적 의미로 쓰이며 '정확한 신념'만 가리킵니다만
성경에서 말하는 '건전한 교리'는 신념과 아울러 올바른 행위도 포함하며
신념이 행위로까지 연결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른 교훈(교리)'을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sound doctrine '바른 교훈' 딤전1:10, 딛2:1
▲교회의 위기는 언제나 내부에 있다
마지막 한 가지 원칙이 가장 중요한데, 제가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결말을 짓겠습니다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우리가 대면하는 가장 큰 전쟁은 <교회 내부>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전쟁은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교회 바깥에서의 전쟁도 안 중요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 바깥의 전쟁이 교회가 맞서야 하는 가장 주된 전쟁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대면하는 가장 큰 전쟁은 참 복음과 복음의 진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즉 복음이, 정치 이념이나 페미니즘, 상대주의, 시대사조와 뒤섞이는 것을 보호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지금 우리나라(영국) 교회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디모데처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딤후1:7
우리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이런 공격들에 맞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앞서가신 성도들이 전해준 신앙을 수호하고 다음 세대에 물려주기 위해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딤전1:18, 6:12, 딤후4:7
우리의 가장 큰 전쟁은
바로 교회 안에 있으며, 복음의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보호하기 위한 싸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서 세상 사람들을 구하는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반드시 교회 내부에서 싸워야 하는데 '복음의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왜냐면 만약 사람을 자유케 하는 진리를 잃게 되면, 교회는 세상 사람들을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가 이 몇 권 서신에 대한 마지막 결론입니다
만약 당신이 오늘날의 디모데나 디도라면, 복음의 진리를 위해 싸우십시오
또한 교회적으로는 복음이 매력적으로 보여서,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이끌려오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보여줌을 통해서요! 아멘!
▲성도에 대한 기대치를 버려라!
1:12~13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그런데 위 12~13절은, <그레데 인에 대한 차별>로 들립니다.
그레데인들은 자신들에게 혹평한 사도바울을, 자손 대대로 존경하고 따를 것 같지 않습니다.
바울이 이런 권면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사도가 해서는 안 될 말처럼 들립니다.
그게 아니라, 본절의 진의는, '그레데 인(성도들)에 대한 기대치를 버려라' 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입니다.
사람은 원래 거짓말 잘 하고, 악한 짐승 같으며, 게으른.. 전적 타락한 존재이니
그걸 미리 알고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그레데 인에 대해 너무 기대를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내가 누군가에게 실망했다는 것은, 그만큼 평소에 기대치가 컸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밤에 공원에서 남녀 청년들이 술마시고 담배피며 놀아도, 화가 안 납니다.
왜냐면 그들에 대한 나의 기대치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러므로 (그 사람을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지만)
사람에 대해, 성도에 대해 기대치를 높이지 않는 것은.. 여러모로 유리한 '삶의 지혜'가 됩니다.
참고로, '엄히 꾸짖으라(:13)'고 했는데, 이런 책망하는 권한은 그레데 장로들에게도 부여되었습니다. :9
◑사도, 장로, 감독.. 의 구분
성경을 읽을 때마다, 사도, 장로, 감독 등 직분은 늘 이해가 쉽지 않고 까다롭습니다. 명확하게 짚히지 않거든요.
그래서 이 주제에 관해, 지금까지 배운 지식을 한 번 총정리 해 보았죠. 이제 윤곽이 눈에 들어옵니다.(수정 예정)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
처음에 12사도들과 맞먹는 위치에서 '장로' 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교회에 야고보는 장로였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이었죠. 행21:18
성경에 보면, 다른 사도들과 야고보 장로는 (12 사도가 아니었지만)
12사도와 권위적으로 보나, 영향력 면에서나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같아요.
행15:22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갈1:19참조
그리고 베드로도 자기가 '사도' 이면서, 동시에 자기를 '장로' 라고 불렀어요. 벧전5:1
그러니까 그때 초기에는 장로와 사도가 큰 차이가 없었던 것 같아요.
교회의 초창기에는 그만큼 장로직 이라는 것이 엄청난 영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바울이 선교를 통해서 아시아와 유럽에 지역교회들이 계속 개척되고
지역교회 안에서 이제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니까
교회마다 장로들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디도서 1:5절에 보면, 바울이 디도에게 명령을 하죠.
'각 성에, 즉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세우라' 딛1:5
그래서 그 교회를 책임지는 지도자로서 장로들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디모데도 에베소 교회에서 장로들을 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이때부터 ‘장로’들은
‘사도’보다는 그 아래 권위로 세워지는 것을 봅니다.
왜냐면 사도가 그 장로들을 세우니까요! (마치 당회장과 부목사의 관계)
이때 장로는 오늘날의 목사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사도의 개념의 변화
'사도'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파송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고전15:8, 9, 갈2:8)
처음에 사도는 예수의 공생애 기간에 함께 생활한 제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눅6:13)
나중에 사도의 조건이 예수의 생활과 죽음과 부활을 전할수 있는 사람으로 발전했어요. (행1:22참조)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디모데에게 맡겨진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딤전4:14에, 디모데가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았다고 했는데, 이때 사도직을 받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즉 디모데 스스로 내가 사도라고 천명하지 않았을 것이며,
바울이 단독으로 임직시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즉 디모데, 디도 등은
에베소, 그레데, 데살로니가 등지에서 ‘장로’들을 세우고(임명하고), 치리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는 등.. 어떤 ‘사도적 권위’를 행사한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처음엔 12제자만 ‘사도’이었으나,
'사도적 권위'는 당시 바울 외에 복음 사역에 헌신하였던
바나바, 디도, 아볼로, 실라, 디모데에게도 동일하게 사용되었음을 보게 됩니다(행14:14, 고전4:6, 빌2:25, 살전2:6).
나중에 사도는, ‘속사도’(사도직을 계승한 자) 또는 ‘교부’ 등으로 계속 변천해 갔습니다.
▲감독과 장로의 구분
'감독'은 신약 성경에서 이방인 교회에만 관련되어 나타납니다. (행20:28, 빌1:1, 딤전3:1).
이 직분은 '장로'와 동일한 직분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서 작별할 때, 에베소 장로들을 '감독'이라고 불렀죠. (행20:28).
다만 이 두 명칭의 차이점은 '장로'가 '나이나 위엄' 즉 '지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면,
'감독'은 그 직분의 '기능'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딤전3장에서는 ‘감독’의 자격에 대해서 논하면서,
바울은 딤전5장에서는 ‘장로’에 대한 송사를 논합니다. 딤전5:17, 19
그러므로 ‘장로’나 ‘감독’은 같은 직분인데, 다만 기능에 따라서는 다르게 부른 것입니다.
디도서 1장 5절과 7절에서도 보면, 장로와 감독이 호환해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나 ‘감독’은 같은 직분인데, 다만 기능에 따라서는 다르게 부른 것입니다.
즉 장로는.. 교회의 어른, 지도자란 뜻이고
감독은.. 말 그대로, 교회를 감독하고 다스리는 자라는 뜻이죠.
▲나중에 ‘다스리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로 구분됩니다.
나중에 성경을 보면,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가 구분이 되고
이렇게 장로가 역할분담을 하는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딤전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그래서 이때부터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가
기능상 구별이 되기 시작한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점점 이제 신약 서신서를 뛰어 넘어서
교회가 자꾸 부흥하고, 나중에 제도화 되고, 그 다음에 국교가 되는 와중에서
'가르치는 장로'의 전문성을 중요시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가르치는 장로는, 좀 전문적인 소양을 가져야 되겠다..
또 어떤 면에서는 여러가지 면에서 좀 다른 자격 여건을 가져야 된다.. 하는 인식에서
'가르치는 장로'를 특별히 좀 차별화 시키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세상 직업을 갖지 못하게 하고, 성직 개념을 도입한 거죠.
교회 안에서 전문적으로 사역하게 하고, 적절한 신학 교육을 받도록 하고
지역교회를 책임지게 하고... 이렇게 해서
가르치는 장로가, 이제 다스리는 장로와는 성격이 구별되는 단계로 접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가르치는 장로'를 목사 혹은 교사 라는 말을 붙이기 시작하고
'감독' 이라는 말도 붙이기 시작하고
이러면서 <성직화> 되어서,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장로 라도
'가르치는 장로'는 성직에 해당하고
'다스리는 장로'는 평신도에 해당하는 개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분리가 되었습니다.
◑절별 해석
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바울은 두 가지로 자신을 소개한다.
1)하나님의 종. 바울은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소개한다.
이 호칭은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 모두를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특별한 직책이나 직무를 부여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구약 시대의 '선지자'와 같은 경우를 가리킨다(수 1:2, 렘 7:25, 암 3:7).
바울은 그레데에서 복음 전파를 방해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14절)
바울 자신이 구약 성경에 나타난 '선지자들의 계승자'임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사도'에 해당하는 '아포스톨로스'는 '보냄을 받은 자'의 의미로
'전령'이나 '전달자'를 가리킨다. 이는 바울 자신이 구약 시대선지자들의 계승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하신 복음의 '전달자'임을 시사한다.
바울은 위의 두 가지 호칭을 통해서 유대인에게는 물론 이방인에게까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권위를 변호하고 있다.
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거짓이 없으신'(히 16:18)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은 '영생'을 약속하신 자의 불변성
곧 영생의 확실성을 나타낸다.
한편 '영원한 때 전부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 크로논 아이오니온'에서
'크로논'은 '지속되는 시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프로 크로논 아이오니온'은 문자적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시간 이전에'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창세 전에 이미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 '자기 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이스 이디오이스'에서
'카이로이스'는 앞절의 '크로논'과 대조적으로 '결정적 시점이나 기회'를 의미한다.
즉 '카이로이스'는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생애를 통해서 인류에 대한 구원 계획을
계시하신 결정적 때를 의미한다.
한편 '자기의 말씀'은 앞절에서 언급한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성취하신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소식을 가리킨다(요 1:1-4, 요일 1:1,2).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바울은 본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사도인 자신에게 위탁되었음을 밝힌다.
이는 바울 자신의 사도직과 사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위 있는 것임을 나타낸다(갈 1:1).
한편 본절의 '우리 구주'는 바울의 신앙 고백적인 문구로서
하나님(2:13, 딤전 1:1)과 그리스도(2:13)께 함께 적용된 호칭이다.
바울은 이 호칭을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자로서 영생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 분임을 상기시킨다.
4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바울은 '나의 참 아들'이라는 호칭을 디모데에게도 사용한 바있다(딤전 1:2).
이것은 바울 자신이 개종시킨 자들을 부르는 호칭이다(고전 4:14, 갈 4:19).
그런데 특별히 디도가 본절에서 '같은 믿음을 따라 된 참 아들'이라고 소개되는 것은
그가 단순히 개종한 자의 차원을 넘어서 바울의 믿음을 물려받아 공유하고 있는 자임을 나타낸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디도를 '형제'로(고후 2:13), '동역자'로(고후 8:23) 소개하였으며,
실제로 디도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바울의 복음 사역을 도와
바울의 권면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잘 전달 되도록 수고하였다(고후 7:5,6, 8:16,17, 12:17,18).
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 본절은 바울이 그레데에 체류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바울의 그레데 체류에 대해 혹자는 로마로 끌려가다가 풍랑을 만나
그레데에 체류한 것(행 27:7-9)이라 주장하며
혹자는 로마에 갇혔다가 (1차투옥) 풀려난 기간에 그레데에 체류했으리라고 가정한다.
바울이 언제 그레데에 체류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후자의 견해가 유력하다고 본다.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장로들을’
아마도 '부족한 일'이란 거짓 교사들의 미혹이 심하여 교회가 혼란한 상태에 있었던 점과(10, 11절),
믿음에 수반되는 선한 행실이없는 그레데 교인들의 신앙 상태(16절) 등과 관련될 것이다.
한편 '장로'에 대한 언급은 신약성경에서는 행 11:30에 처음 나타난다.
행 14:23에 보면 바울은 전도여행 중 바나바와 함께 장로들을 임명하였었다.
초대 교회의 장로된 자들은 '감독자'(행20:28) 혹은 '수고하는 자'(고전 16:16) 등으로 불린 자들과
동일한 직책을 맡은 자들이다. 이들은 주로 설교, 교훈, 치리, 훈련 등 교회의 성숙을 위해
여러가지 필요한 봉사를 감당했다. '장로'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행 6:1-7 주제 강해 '교회의 직분'을 참조하라.
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본절은 장로의 자격 조건을 설명한다.
‘책망할 것이 없고 - 이는 장로의 도덕적 인격이나 신앙 생활에서
타인에게 흠잡힐 데가 없어야 함을 시사한다(딤전 3:2).
‘한 아내의 남편이며 - 이는 당시 일부다처제의 관습에 반대하는 것으로
결혼 생활이 성적 문란함에 빠지지 않아야함을 의미한다(딤전 3:2).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장로의 직분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가족 전체의 바른 신앙 생활이 요청된다.
그래서 바울은 장로들의 자녀는 믿는 자이어야함을 지적한다(딤전 3:4).
그 믿는 자녀에게는 두 가지 조건이 따른다.
1)방탕하다는 비방을 듣지 않아야 한다. '방탕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소티아스'는
'아소토스'('환락')에서 유래한 것으로 무절제한 생활과 쾌락의 추구로 말미암아 삶을 허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2)불순종하지 않아야 한다. '불순종하는'에 해당하는 '아뉘포타크타'는 부정 접두어 '아'와
'휘포탓소'('순종하다')의 합성어로서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7-9절에서는 감독의 조건이 설명된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 '감독'은 신약 성경에서 이방인 교회에만 관련되어 나타난다(행 20:28, 빌 1:1, 딤전 3:1).
이 직분은 5절에 언급된 '장로'와 동일한 직분이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서 설교를 할 때 에베소 장로들을 '감독'이라고 불렀다(행 20:28).
다만 이 두 명칭의 차이점은 '장로'가 '나이나 위엄' 즉 '지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면,
'감독'은 그 직분의 '기능'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본절의 '하나님의 청지기'는 그 기능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서 '청지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몬'은 재산을 관리하는 종을 의미한다.
즉 '감독'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딤전 3:15)를 관리하고 통치하는 직분이다.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 '고집대로 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우다데'는
'아우토스'('스스로')와 '헤도마이'('즐겁게 하다')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 '자기 만족을 즐기는' 혹은 '거만한'을 의미한다.
이는 자기 만족을 위해서 타인을 희생시키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를가리킨다.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 '분내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르길론'은 '오르게'('노여움')에서 유래한
고대 헬라어로서 신약 성경에서는 이곳에만 사용되었으나 70인역(LXX)에서는 자주 나타난다.
이 단어는 '쉽게 흥분하는', '열정적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 '더러운 이'란' 부당한 거래를 통한 이익'으로서
감독은 언제나 정당한 거래를 해야 함을 의미한다.
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 '소프로나'는 '자신을 조절하는'이라는 의미이다(self-controlled, NIV).
특별히 그레데 교회는 자신을 조절하는 덕목이 필요했다(10-14절).
따라서 바울은 본서에서 이 덕목을 다섯 차례나 언급하고 있다(2:2, 5, 6, 12).
‘의로우며 - 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기준을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하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시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올바른'이라는 뜻이다.
즉 감독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합당한 신앙 생활을 해야한다.
‘절제하며’ - '엥크라테'는 앞서 언급한 '소프로나'보다 강한 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disciplined, NIV). 이는 성령의 열매 중하나이다(갈 5:23).
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미쁜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투로구'는 '신실한 말씀', '참된 말씀'의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감독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을 이단등의 공격으로부터 파수할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그 가르침대로 행해야 한다. 자신이 이처럼 솔선 수범할 때,
비로소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바로 책망할 수 있다.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은 '히나'('하기위하여')를 사용해서,
감독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야 하는 목적을 말한다.
첫째, 감독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잘 위로하고 권면하여
성숙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둘째, 감독은 거스려 말하는 자를 책망해야 한다. '거스려 말하는 자'는 말씀을 왜곡하고,
사도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자들로서 그레데에 만연했던 거짓 교사를 말한다.
그런 거짓 교사들을 징계하고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 감독의 기능이다.
10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앞절에서 언급한 감독의 책망의 기능을 정당화한다.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많은 중'이란 그레데에 수많은 이단들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레데에 있는 이단들의 특성은 세 가지로 해석된다.
1)복종치 않는다. 이는 앞절에서 언급한 '거스리다'와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행위이다.
2)헛된 말을 한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타이올로고이'는 아무 유익도 없고 행위도 따르지
않는 말을 화려하게 구사하는 것을 뜻한다.
3)속인다. 이는 헛된 말을 통해서 사람들을 현혹시켜 잘못된 길로 가게 하는 것을 뜻한다.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 '할례당'은 유대인들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로서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던 자들이다(행15:1, 롬2:25-29).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들도 유대인과 같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논박하면서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짐을 선포하였다(롬 10:9, 갈 5:6).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간에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빌 3:3).
그런데 그레데에는 육체의 할례를 고집하여 속이는 이단들이 특히 극심하였다.
11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 본절은 9절에 언급된 감독의 기능 중 하나인 '책망'의 구체적 실천 사항이다.
'막을 것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토미제인'은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으로
'출교'(딤전 1:3,4, 딤후 3:5)나 '정죄'(딤전 6:5)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엎드러치는도다’
할례당은 물론 그레데에 있는 '이단'들의 목적은 교리나 진리를 전하는데 있지 않다.
그 표면상의 목적은 그렇다할지라도 그들의 내면적인 목적은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것
즉 타인을 속이거나, 희생시킴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한편 '엎드러치는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트레푸신'은 '전복하다', '뒤엎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허물어 뜨리는 것을 의미한다(딤후 2:18).
12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 - '어떤 선지자'는 주전 6세기의 시인이며 그리스의 7대 현인 중
하나인 크노수스(Cnossus) 출신의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로 추정된다.
'에피메니데스'는 후대의 작가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나 '키케로'(Cicero)에 의해서
선지자로 불리었다. 그런 '에피메니데스'는 그레데인을 세가지로 비판하고 있다.
‘거짓말장이’ - 그레데인들이 지독한 거짓말장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크레티제인'이라는 단어이다. 곧 '크레티제인'은 '그레데화(化)하는 것'
곧 '거짓말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시 '그레데인'은 '거짓말장이'의 대명사로 인식될 정도였다.
‘악한 짐승’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카 데리아'는 '광포한 맹수'를 의미한다.
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의 희생을 아랑곳하지 않는 잔인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레데인의 악한 본성을 의미한다.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 - 이는 그레데인들이 부당하고 안이한 방법으로 자신의 쾌락과
만족을 추구하는 탐욕스런 사람들임을 시사한다.
13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이 증거가 참되도다’ - '이 증거'는 앞절에서 언급된 선지자의 말을 의미한다.
바울은 자신이 듣거나 경험한 바에 의해, 그레데인의 선지자 즉 에피메니데스의 증거가 정확한 것임을 밝힌다.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 '엄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토모스'는 '아포템노'('자르다')
에서 유래한 것으로, 연장을 사용하여 '예리하게 자르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해서 디도가그레데인, 특히 거짓 교사들을 징계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런 징계의 권한은 디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로'에게도 부여되었다(9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 본절은 '히나'('위하여')로 시작한다.
이는 본문이 앞에서 언급한 징계의 목적임을 시사한다.
바울이 디도에게 그레데인의 나쁜 본성(12절)을 징계하라고 하는 목적은
그레데인들의 믿음을 온전케 하는데 있다.
'온전케 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기아이노신'은 '건강하다', '잘지내다'는 뜻이다.
이는 '참된 믿음'을 묘사한 것으로 디도에게 부여된 징계의 직무가 '심판자'로서가 아니라
'엄격한 외과 의사'로서의 직무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징계'는 단순한 판단이나 심판이 아니라 '치료를 위한 판단'이어야 한다.
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 - '허탄한 이야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도이스'는 '신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유대주의'와 '영지주의'의 혼합에서 생겨난 것으로,
구약의 말씀들을 영지주의적 관점으로 바꾸어 만든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명령한 것과 같이(딤전 1:4) 디도에게도 그레데인들에게 팽배해 있던
유대인들의 신화를 주의시키라고 권고한다.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배반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트레포메논'은 '돌이키다'의 뜻을 가진 '아포스트레포'의
현재 중간태 가정법으로서 '자의로 거역하는', '습관적으로 거부하는'의 의미를 지닌다.
한편 '사람들의 명령'은 유대인들의 유전 즉 정결례 같은 것을 의미한다(골 2:20-23, 딤전 4:1-5).
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 유대인 거짓 교사들이 그레데인들에게 전한 오류는
'외적인 것'에 의해 부정(不淨)의 여부를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 유대인들의 오류에 대해 바울은 예수께서 정하신 원리를 다시 천명하고 있다.
그 원리는 부정의 여부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문제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마15:11,15-20, 막 7:14-23, 눅 11:28-41, 행 10:9-16, 11:1-18, 롬 14:14,20, 갈 2:11-21, 골2:16-23).
그래서 바울은 '깨끗함'이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해서 죄와 결별하고 성령과 동행함으로써
새롭게 변화된 마음의 내면적인 깨끗함임을 강조한다.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유대인 거짓 교사들을 지칭한다.
그들은 외적인 정결여부에 관심을 가진 자들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향해 '더러운 자'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외적인 것이 아무리 정결하다 할지라도 '믿지않음'으로 해서
이미 '죄'로 물들었기 때문이다(롬1:18, 2:29).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외모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과 '양심' 즉 내면이 더러움을 지적한다.
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헬라어 본문에는 '하나님을 시인하나'가 '하나님을 안다고 시인하나'로 되어 있다.
여기서 '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데나이'('알았다')는 '오이다'('안다')의 과거 완료능동 부정사로서
'직관적 지식'이나 '체험한 지식'을 의미한다.
유대인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을 체험해서 잘 안다고 떠들어대지만,
실제적 행위로는 하나님을 부인하였다. 그들은 신앙을 입으로 시인하나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바로 알지 못하였다.
진정한 신앙의 고백은 그 가치를 드러내는 행위를 동반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내면적인 문제를 저버리고
외면적인 면에만 치중하는 우를 범하였다.
‘가증한 자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델뤼크토이'는 '혐오스럽고 위선이 가득찬 자'를 의미한다.
이는 거짓 교사들의 말과 행위가 다름을 암시한다.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고집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정한 뜻에 귀를 기울이거나 순종하려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내면의 죄를 정죄하신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허탄한 이야기에 빠져 외면적인 문제에만 착념하였다.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 '버리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도키모이'는
문자적으로 '동조하지 않는 자'를 의미한다(롬 1:28, 고전 9:27).
유대인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생각과 고집을 앞세우는 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