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옆에는 이 청년을 파송하고 나서, 누군가가 조각에서 걸어놓은 한국 지도 모양의 태극기가 걸려 있는 거예요.
1백 여년 전 역사인데, 제게 확 이렇게 덮쳐오는 느낌이 있었어요. 이 새파란 미혼의 청년을 저 극동의 이름도 모를 나라에 파송해 놓고 온 교회 성도들이 더운 기도의 입김을 뿜어가면서 기도했을 백여년 전 이 교회,
당시 뜨거웠던 그 복음의 열기... 그것을 기억하고 회고하며 생각하니까 제 가슴에 뜨거움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랬던 교회가, 지금은 잡초가 무릎까지 차 올라 있고 저 교회 마당 끝에는, 앞서 소천한 그 선배 목회자들의 아주 퇴락한 석관 무덤이 쓸쓸이 놓여 있고.. 그런 모습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 날 너무 하루종일 충격을 받아서 숙소로 돌아와서 저녁을 함께 먹는데 그때 저와 함께했던, 유학 중에 종교개혁사를 공부하고 있던 후배들에게 물어봤어요. (그분들이 지금은 다 들어와서 교수들을 하고 있죠)
'당신들은 여기 와서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교회사 분야에, 특별히 종교개혁사에 대해서 연구하는 전문가로서, 영국 뿐만 아니라 이 유럽교회의 퇴락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제가 물었어요.
그랬더니 아주 즉답을 해요. '선배님, 그건 우리가 자료를 보면요, 간단히 대답이 나옵니다.' 하면서 두 가지를 얘기해요.
첫 번째는, 영국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도 있다' 라면서 서서히 신학이 혼합주의로 빠져든 겁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 보십시오. 가르치는 자 입장에서도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가르치는 것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도 있다' 라고 가르치는 것은 그 교육이 임팩트가 같겠습니까?
그러면서 성경의 정경성과 그 권위에 대해서 신학적인 혼합주의가 뒤섞여지면서 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이것이 영국 교회가, 청교도들의 개혁주의 입장을 내려놓고 이제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근간을 허물어뜨렸던 것이 뭐냐 하면 '성경의 권위' 였어요.
▲성경의 권위가 아래로 떨어지니까, 여기에 맞물려서 자연스럽게 나타났던 현상이 침례교를 중심으로 해서, 각 영국의 교단들이 (아마 맞물려 헌금이 줄어들었겠지요)
그래서 교회의 모든 예산 중에 어디를 제일 먼저 삭감해 들어갔는가 하면 기독교 교육의 예산을 삭감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통계나 그래프를 보면 그대로 증빙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기독교 교육에 대한 예산이 삭감되어지니까 각 교단에 교회들이 상실감을 가지고 투자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투자하지 않으니까, 교회는 그때부터 그래프를 보면 아주 수직 상승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수직 강하(낙하)하는 그런 그래프의 흔적을 가지고 있어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성경의 권위를 내려놓는 순간부터, 영국과 유럽의 교회는 몰락을 시작했고 -그 몰락의 증거가, 각 교단마다 절대 필요한 예산을 투자하지 않기 시작한 겁니다. 이것이 영국교회 몰락의 현실적인 증거이에요.
▲자 그렇다면, 우리 한국교회는, 여기에 대해 반면 교사를 가져야 합니다. 문제는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떨까요? 거의 비슷한 형국을 따라가고 있어요.
지금 이나마 한국교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지금 잘해서가 아니에요. 죄송한 얘기지만...
한 세대 전에 30~40 년 전에, 한국교회는 아무리 어려워도 본당을 먼저 짓고, 그 다음에 반드시 시골 교회도 교육관 이라는 걸 지었어요.
본당도 장년 성도들이 많이 앉아 있었지만, 교육관에도 오히려 더 많은 숫자의 아이들이 정말 바글바글하게 교육관을 가득 매워져 있었습니다.
지금은요. 완전히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어느 교회든 마찬가지죠.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이런 현상은 더 심화 되고 역전 됐어요.
예를 들어, 본당에 1천명 앉아 있으면, 교육관에는 그 10%만 앉아 있어도 그나마 유지가 되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 한국 교회가, 이 나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근본 원인은 30~40 년 전에 교육관을 메우고 있던 그 주일학교 아이들이 자라서 이나마 지금 자리를 메꿔주고 있는 거라고요.
그러면 이것이 오늘의 고민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요 현상 그대로 한 세대만 지나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정확하게 한국교회는 이대로 가면, 다음 세대에 십 분의 일 토막이 납니다. (현재의 10%만 남습니다) 이건 아주 간단한 산수에요.
여러분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지금 '청년교회'를 넘어서서 모든 대한민국의 존재하는 교회들이 '어린이 교회'로 바꿔어져야 합니다.
아이들이 키워지지 않고, 아이들이 길러지지 않는데 무슨 다음 세대를 기대할 수 있거나,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사사기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400년에 걸친 가장 끔찍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2백년 설도 있습니다)
사사기는 아시는 것처럼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시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때는 왕 제도도 없었고, 당연히 왕도 없던 시대예요.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시고, 친히 신정정치로 백성들을 목양하시고 인도하시던 때이기 때문에 왕제도도 필요없었고 왕이 존재할 수가 없었어요.
아시는 것처럼 사사기 21:25절에 사사기의 어두운 역사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라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워드 플레이 입니다. 현실적으로 왕이 없었지만, 이것은 영적으로 그 시대를 고발하는 히브리어의 특유의 워드 플레이 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왕이었으나, 이스라엘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대접하지 않았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이스라엘은 이런 끔찍한 역사를 남기게 되었을까요? 그 원인이 오늘 본문 10절에 고스란히 담아져 있죠.
삿2: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세대란, 바로 출애굽 세대입니다. 광야 세대입니다.
자연의 섭리를 따라서 이들은 조상들에게로 다 돌아갔죠. (문자적으로, 히브리 문화적으로 조상들의 뼈가 보관된 동굴속 가족 묘에 그 뼈가 같이 보존되었다는 뜻)
그런데 그 다음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 이 한 글자, '다른'이 '다음'으로 바뀌어야 옳은데, '다음 세대'가 일어나지 못하고, 끔찍하게도 '다른 세대'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세대의 특징을 두 가지로 표기하고 있어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다른 세대'의 특징을 이렇게 두 가지로 규명했어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은, 출애굽의 구원을 뜻합니다. 그 일을 알지 못했다는 얘기에요.
그렇다면 왜 '다른 세대'는 그걸 알지 못했을까요? -왜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신앙 계승의 실패를 얘기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고, 말하지도 않았다는 뜻이에요.
교회 학교는 율동도 해야 되고, 공작 놀이도 해야 되고, 레크레이션도 해야 하지만 전국의 노회 교사강습회를 다녀보면... 제가 참 많이 다녔어요.
이 다음 세대를 위한 현장이라면, 제가 거리를 마다않고 다녔어요.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 거기에 전체 시간표가 나와 있고, 이렇게 내용을 보면
이름은 '여름 성경학교 준비 강습회'인데 성경을 가르치는 내용은 하나도 없어요.
저녁에 그냥 강사 불러다가 부흥회 한 번 하는 걸로 땜질하고 전부 율동, 또 레크레이션, 아이스브레이킹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일) 이런 테크닉 위주로 교사들한테 공부를 시키는 거예요.
그것도 필요한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건 아니에요. 정말 아이들에게 시대적으로 절실한 것은, 성경말씀을 가르쳐야 돼요.
듣든지/ 안 듣든지 성경을 말하고, 성경을 가르쳐야 돼요.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왜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그분의 죽으심의 의미는 뭔지...
이 복음의 액시스를 전하고, 가르치고, 말해야 되는데 교회학교 현실을 보면, 프로그램으로 가득합니다.
아이들이니까 그게 다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정작 felt need에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real need를 잃어버리는 아이러니를 겪고 있어요.
▲그래서 연세대 명예교수이신 은준관 박사님은 그의 은퇴 논문에 끔찍한 자아성찰적 고백을 하나 남겼어요.
이분이 기독교 교육학의 대가이십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교육 분야에서는 어른이에요.
그런데 그분이 은퇴할 때, 소논문에, '자기가 평생 기독교 현장에 가까이 들어갈수록 기독교 현장은 사라졌다'고 말했어요.
그게 무슨 아이러니를 고발하고 있는 건지 아십니까? 너무 기독교 교육을 방법론으로만 접근을 했다는 말이에요.
기독교 교육을 방법론으로만 접근하다 보니까 정작 현장은 사라지더라고 하면서 뒤늦게 참회에 가까운 고백을 했어요.
그 소논문을 통해서 그분이 설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이들에게 예수를 말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이 누군지를 말해야 된다는 거죠.
이거 알지 못하는 세대를, 성경은 본문에 '다른 세대'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삿2:10 우리 교회의 큰 두 번째 비전으로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교회'로 비전을 자리매김한 이유가 뭐냐 하면 다음 세대가 준비되지 않으면, 교회 존립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삼일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어린이 교회로 가야 돼요.' 너무 극단적인 표현일까요? 아닙니다. 절대 극단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사회지표를 얘기해요. '목사님, 요즘은 저출산율에다가 집집마다 자녀가 많아야 둘밖에 없는데 과거에 자녀들을 여럿 낳던 시대보다는 교회학교가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왜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어린 영혼들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해요?' 복음을 아직도 듣지 못하면 어린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회 지표가 교회 정책에 근거가 되고, 우선이 되어서 되겠습니까?
저출산율을 말하기 전에, 뭘 생각해야 돼요? 이 땅에 아직도 온 사탄의 영향력에 매여서 예수 이름 한번 들어 보지 못 하고 망가져가는 영혼들을 봐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 아이들이 얼마나 많아요? 우리 주변에!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복음을 듣지 못한 아이들, 복음을 듣지 못한 청년들 여기에 우리의 모든 타깃이 집중되어야지요..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울에게 바울의 복음이 디모데에게, 디모데이 복음이 충성된 사람들에게, *딤후2:2 그 충성된 사람들에게 전해진 복음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가도록 해야 됩니다.
우리 삼일교회는 당연히 청년들을 일으켜야 하지만 더 근본적인 대안은, 온 교회가 "교회 학교 교회"방향으로 가야 돼요.
좀 무리가 되더라도, 그것은 교회가 이 땅에 선교의 기지로서 존립하느냐/ 못하느냐의 중요한 선포힙니다. 이것이 우리 온 교회 성도들의 마음속에 중요한 붙잡힘과 꿈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쓰여지고, 또 쓰임 받는...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