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신1장, 호렙산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하여 호렙산을 거쳐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였습니다. 출애굽하여 ‘가데스 바네아’까지는 약 13개월이 소요되었습니다(민33:3, 민10:11).
그런데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을 파송하고, 보고를 받고 하는 기간을 합치면
이래 저래 출애굽해서 ~ 가네스 바네아까지를 '2년'으로 잡습니다.
신1:2절에, 호렙 산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는 열 하룻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데스 바네아’에서 일어났던 사건(정탐꾼의 부정적 보고)을 계기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1:40의 표현대로 방향을 돌려 광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본론 : 신2장,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 시내까지의 여정 회고 (2장 내용 설명)
<개요> 1~8절, 북쪽으로 올라가라, <에돔>과 다투지 말고 통과해라 9~12절, <모압>과 싸우지 말고 통과해라 13~15절, <세렛 시내>를 건너다 16~23절, <암몬> 남쪽 국경을 싸우지 말고 통과해라 24~37절, <헤스본> 왕 시혼이 길을 터주지 않아서, 그들과 싸워 취함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38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신2:14)”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 시내까지 거리로는 약 130km정도인데 1주일이면 족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7일 길’이 ‘38년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렛 시내’는, 사해 남동쪽에 동서로 뻗어 있어 에돔과 모압의 경계선을 이루는 와디(wadi)이죠. 즉 세렛 골짜기(민21:12)에 비가 내리면 5~6km 정도의 긴 시내가 형성되는 와디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세렛(Zered) 시내를 건너므로 비로소 광야 38년 간의 지루한 방랑생활을 종결 짓고, 본격적인 가나안 진입 여정에 돌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출애굽 2세대들이 ‘가데스 바네아’를 떠나면서 본격적으로 가나안 입성을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의 경험이 있는 1세대 장정들이 다 죽고 전쟁의 경험이 없는 2세대들만 남았는데 문제는 ‘다른 족속과 분쟁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에돔, 모압이 여전히 필요했다'는 거시巨視적 이유가 있습니다.
2:5 '그들(에돔)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하나님은 광야 40년이 끝날 무렵, 북진해 들어가는 이스라엘에게 첫째, 에서의 후손들과 다투지 말라, 싸우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2:9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신명기 2장에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어떤 기억을 회상토록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에돔 족속, 모압 족속과 다투지도 말고, 싸우지도 말 것을 명령합니다. 사실 이 족속은 역사상 없었으면 이스라엘 공동체에게는 더 편한 족속입니다.
그래서 이참에 그냥 싹 정리하고, 처치하고 가면 후대를 위해서 훨씬 더 편하고 좋을 것 같은데
무슨 까닭인지 하나님은 '그들과 싸우지 말라, 다투지 말라' 이 말은 정확히 얘기하면 '그냥 두라'는 말이에요.
여러분, 신약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종이 밭에 나갔다가 가라지를 발견했어요. 주인에게 이거 뽑을까요? 주인은 그냥 두어라. 추수 때에 골라서 뽑으면 되니까, 지금 그거 괜히 뽑다가 알곡도 다친다.. 그러니 그냥 두어라'고 하셨죠.
그럼 하나님이 에돔과 모압을 '그냥 두어라'고 하신 이유는 뭘까요?
민24:16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말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18 '그의 원수 <에돔>은 그들의 유산이 되며 그의 원수 세일도 그들의 유산이 되고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발람의 예언인데요, 옳은 말 할 때도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면, 위 구절에 모압과 에돔이 등장을 하죠. 거시적으로 보면, 그들이 결국은 다 멸절될 것을 이미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어요.
그러니까 에돔, 모압은 그냥 둬도 마지막 날에는 다 멸절될 나라들이니까 너희들이 괜히 손대서 싸우지 마라, 건들지 마라 ... 그 말이에요. 그런 사전 지식을 갖고서 신명기를 다시 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모압과 에돔을 향하여 그냥 두라고 하셨을까요? 2:5, 2:9 그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영적인 훈련을 위해서, 이 족속들을 그냥 두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먼 바다를 건너서 그물로 잡은 청어 떼를 배로 수송하는데 그때 청어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배 밑의 수조에 청어의 천적을 일부러 집어넣는 답니다.
청어를 수송하는데 청어끼리만 두면, 운송 도중에 많이 죽는데요. 그래서 손실이 굉장히 크답니다. 그래서 청어와 가장 원수지간인 천적을 집어 넣으면,
그러면 먼 바다를 건너는 내내, 그 청어들이 살려고,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긴장해서 잘 버텨서 그 신선도를 유지한다는 거예요. 물론 몇 마리는 잡아먹히지만요. 그렇지만 대부분의 청어는 살아서, 신선도를 유지한 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세계 역사에 유례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분단 기간이 길고 북쪽을 우리 민족 곁에 이렇게 아픔으로 두었어요.
그래서 매일 전쟁의 위협, 특별히 핵의 위협으로부터 불안한 채 이 민족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625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죠. 휴전상태일 뿐인데 그 휴전상태가 상당히 길어지고 있는 것뿐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두셨을까요? 이 남쪽의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 기도 하는데도 북쪽집단을 처치하지 않으시고 말도 안되는 북한 정권을 몇 대에 걸쳐서 저렇게 유지하게 하신단 말이죠.
그 밑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지하에서 신앙생활 하는 우리 형제들이 아직도 살아 있는데 왜 북쪽에 정권을 그대로 두실까?
우리가 그 하나님의 경륜을 헤아릴 수는 없으나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영적으로 긴장하고 하나님께만 집중토록 하기 위해서 에서와 모압을 그냥 그대로 두도록 허용하십니다.
그런데 결국 이 족속은 마지막 때 민24장에 보니까 멸절토록 돼 있어요. '너희가 그 (에돔, 모압) 족속과 전쟁하느라고 에너지 소비하지 마라' 그 말이에요.
이게 이제 적합한 예일지는 몰라도, 목자의 목적은 양떼를 지키는 거예요. 목자는 총을 들고서, 이리가 공격할까, 곰이 와서 잡아먹을까 밤새 불철주야 양떼를 지킵니다.
그러다가 한 새벽 두 시쯤 이리 한 마리가 와서 양떼를 공격하려고 할 때 준비된 총으로 탕 쏴서 죽였어요. 한 마리 죽여 보니까 이거 재미가 있거든요.
'아유 재밌네?' 그래서 목자는, 양들을 전부 팔아치워 가지고 더 좋은 총을 사서, 온 산을 헤매면서, 사자도 잡고, 곰도 잡고.. 이 재미에 빠져 있다면, 그게 뭐가 잘못됐죠. 이게 본말이 뒤집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에돔하고도 싸우지 말고, 모압하고도 싸우지 마라. 그들은 내가 다 이유가 있어서, 역사 속에서 너희들 곁에 둔 것이다..' (이스라엘이 에돔, 모압과 전쟁하다가.. 본말이 전도될 수도 있었다는 거죠)
그 후에 모압과 에서가 이스라엘 역사에 계속 등장할 때마다 이스라엘 나라를 괴롭혀요. 이스라엘 나라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져서, 늘 힘들게 만드는 족속이 에돔과 모압 족속입니다. 근데 왜 싸우지 말라 그래요?
이번 기회에 그냥 싹 청소하고 가면 제일 간단할 텐데...
그 이유는, 에돔과 모압이 도발할 때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적으로 게으릅니다. 정말 아닌 말로, 애가 감기라도 앓아봐야 '주여!' 하고 기도 한 마디라도 더 하거든요. 이게 우리의 영적인 게으름의 본성이에요.
근심거리라도 하나 있어야, 겨우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우리가 본성이 그래요.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 하나님이 가끔은 우리 인생살이에 정말 피하고 싶고, 치워버리고 싶은 에서나 모압 같은 존재들을, 항상 떨쳐내지 못하게 하세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에돔 족속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행군을 가로막고
방해한 것으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즉 에돔 족속은 가나안 거민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출애굽으로부터 광야를 거쳐오는 동안
권능의 신 여호와가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것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여
사력(死力)을 다해 이스라엘에 대항하려 한 것이었다.
사실 당대의 강대국 애굽의 모든신들을 일거에 여지없이 깨뜨리고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는, 당시 수호신 개념을 가진 고대인들의 눈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5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다투지 말라’ - 원어 '가라'는 스스로 '화를 자초하다'(왕하 14:10)는 뜻도 있어,
이스라엘이 에돔 족속과 싸우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시사해 준다.
‘세일 산을 에서에게...주었음이로다’ - 하나님께서 에돔 족속이 이미 거주하고 있던 세일 산지경을
그들의 기업으로 인정하고 이스라엘이 침범치 못하도록 막으신 까닭은,
에돔 족속은 야곱의 형인 에서의 후손들로서(창 36장) 이스라엘과는 평화로이 공존해야 할
형제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민 20:21 주석 참조.
6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고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
‘돈(케세프)’ - '카사프'(희다, 창백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은'(silver)을 가리킨다.
은이 당시 화폐로 통용되었기 때문에(창 23:15) '돈'으로 번역되었다.
‘양식을 사서 먹으며’ - 즉 에돔 땅을 통과할때 침략자들 처럼 무례히 행동하지 말고,
지나가는 여행자 처럼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물을 사서 마시라’ - '사다'에 해당하는 원어 '카라'의 기본 의미는 '우물을 파다', '구멍을 뚫다'(창 26:25)는 뜻이다.
따라서 본절은 단순히 돈을 주고 식수(食水)나 다른 생활 용수를 사라는 뜻이 아니라,
물을 공급받기위해 우물을 팔 수 있도록 허락을 받고 그 허락 대가를 지불하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
‘여호와가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의 반역과 불신앙 때문에 비록 형벌로 주어진 유랑 기간이긴 하나,
그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처럼 늘 이스라엘과 동행하였기 때문에(시 23:1-6),
광야 40년은 결코 헛되고 무익한 기간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을 연단하고 앙육시킨
또 다른 은혜의 기간이었음을 일깨워 준다. 아울러 이스라엘은 그 기간 동안 목축 및 경작,
교역 등을 통해 물질적인 축복도 풍성히 받았음을 암시해 준다.
‘사십 년’ - 이스라엘이 애굽의 라암셋을 떠나온 때는 출애굽 제 1년 1월 15일이며(민 33:3),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선 때는 출애굽 제 41년 1월 10일이니(수 4:19),
그들이 광야에 머문 기간은 정확히 5일이 부족한 만 40년이다.
8 우리가 세일 산에 거주하는 우리 동족 에서의 자손을 떠나서 아라바를 지나며 엘랏과 에시온게벨 곁으로 지나 행진하고 돌이켜 모압 광야 길로 지날 때에
‘아라바’ - '사막', '대초원'이란 뜻을 지닌 지명으로, 넓은 의미로는 갈릴리 호수 남쪽으로부터
요단 골짜기를 지나 사해 너머 아카바만까지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가리킨다(수 11:2).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사해(死海) 남쪽으로부터 에시온 게벨까지 이르는 메마른 사막지대를 가리킨다(11:30, 삼하 2:29).
여기서는 좁은 의미의 아라바(Arabah)로 사용되었다. 한편 '사해'(Dead Sea)는
이 지역에 속한 관계로 때로 '아라바 해'라고도 지칭된다(수 11:2).
‘돌이켜 모압 광야 길로 진행할 때에’
에돔 족속에 의해 가데스에서 가나안으로 직행하는 길(왕의 대로, King's Highway)이
봉쇄되었기 때문에(민 20:14-21). 이스라엘이 홍해 길<1:40>로 다시 남하한 후
에돔 땅을 완전히 우회하여 요단 동편의 모압 땅을 향해 북상하였음을 알려 준다.
이 길은 소위 '에돔 광야 길'(Way of thewilderness of Edom)로 불리우는 세일 산지의 도로와
'모압 광야 길'이 상하로 연결된 것인데, 다메섹으로 가는 대상(隊商)들의 주요 도로였다.
9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괴롭게 말라’ - '괴롭히다'에 해당하는 원어 '추르'는 '에워싸다', '속박하다'는 뜻으로,
적대적인 행위로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을 가리킨다.
‘싸우지도 말라’ - 에돔족속과 다투지 말라고 했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5절>.
즉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19절)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자신의 딸들을 통해 낳은 아들의 후손이므로,
에돔 족속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과는 공존 공영(共存共榮)해야 할 형제국이었던 것이다.
‘아르’ - 모압의 북방 변경 성읍으로 사해 동쪽 아르논 강 부근에 위치하였다(민21:15).
10 (이전에는 에밈 사람이 거기 거주하였는데 아낙 족속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크므로
11 그들을 아낙 족속과 같이 르바임이라 불렀으나 모압 사람은 그들을 에밈이라 불렀으며
‘르바임’ - 이스라엘 민족 훨씬 이전에 가나안 땅에 거하던 원주민들을 가리키는 인종학상 용어이다.
영역본 KJV나 RSV는 '거인족'이란 뜻의 'giants'로 번역하고 있는데 아낙 족속도 이에 속한다.
12 호리 사람도 세일에 거주하였는데 에서의 자손이 그들을 멸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으니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의 땅에서 행한 것과 같았느니라)
‘호리 사람’ - 여기서 '호리'란 '구멍'을 뜻하는 '호르'에서 파생한 말로 '동굴'을 뜻한다.
따라서 '호리 사람'이란 동굴에 거주하는 사람, 곧 '혈거인'(穴居人)이란 뜻이다.
실제 이들은 세일 땅(에돔 산악 지대) 주변의 석회암 동굴을 거쳐 삼아 살던 원주민인데,
코카사스 남방에서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팔레스틴으로 흘러 들어온 '후리 족속'(Hurrians)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들은 에돔 족속에게 정복당해 완전히 동화되고 말았다(22절, 창 36장). 창 14:6, 36:20 주석 참조.
‘이스라엘이...기업의 땅에서 행한 것과 일반이었느니라’
에돔 족속과 모압 족속이 행한 과거의 정복 사건과 이스라엘이 행할 미래의 정복 사건이
시차적으로 구별없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에 대하여선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으나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대변된다.
1)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의 길르앗과 바산을 정복한 후 그 땅을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할시켜 준 사실(24절-3:17)을 가리킨다는 해석
2) 미래에 분명히 일어날 사실을 이미 일어난 것처럼 표현하는
'예언적 완료형'(prophetic perfects) 용법으로,
이스라엘도 에돔과 모압 족속처럼 장차 약속의 땅 가나안을 성공적으로 정복할 것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것을 취하여도 본문과는 크게 상치되지 않으나,
성경에 예언적 완료형 용법이 종종 사용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민 24:17, 시 67:7,
사 9:5, 6, 암 5:2),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13 이제 너희는 일어나서 세렛 시내를 건너가라 하시기로 우리가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세렛 시내 - 사해 남동쪽에 동서로 뻗어 있어 에돔과 모압의 경계선을 이루는 와디(wadi)이다. 즉 세렛 골짜기(민 21:12)에 비가 내리면 5-6km 정도의 긴 시내가 형성되는 와디(wadi)이다. 이스라엘은 이 세렛(Zered) 시내를 건너므로 비로소 광야 38년 간의 지루한 방랑생활을 종결짓고, 본격적인 가나안 진입 여정에 돌입할 수 있었다.
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삼십 팔 년 동안이라’ -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까지의 직선 거리는 약 130km로서
보통 1주일 정도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8년 동안이나
헤맨 사실을 특별히 강조한 것은 그 모든 유랑과 고난이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었음을 명백히 상기시키기 위함이다<1:2>.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 - 출애굽 제 2년 2월 1일. 시내 광야에서 행한 1차 인구 조사시
20세 이상된 자로 전쟁터에 나가 싸울 수 있었던 모든사람을 가리킨다(민 1:3).
그런데 이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 광야에서 38년 동안 유리하던 끝에
다 죽고 말았다(민 14:26-35).
즉 이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향해 진격하라'는 이스라엘의 총사령관 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로 광야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던 것이다.
비록 이들이 아말렉과의 르비딤 전투(출 17:8-16)등 전쟁경험을 터득한 세대라 할지라도
지휘관의 명령을 거역한 세대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미련 없이 버리시고
전혀 전투 경험이 없는 새로운 세대에게 가나안 정복사업을 맡기셨다.
실로 출애굽 사건과 여호와의 10대 재앙을 친히 목도하고서도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삼상 17:47)임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구세대(舊世代) 군인들은
여호와의 군대의 자격을 상실함과 동시에 가나안 정복의 영광도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여호와께서...맹세하신 대로’ - 그 맹세의 내용은 민 14:28-35 부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5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 이것은 구세대가 38년 동안 광야에서 모두 죽어간 그 일이
결코 자연사(自然死)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징계로 인한 것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16 모든 군인이 사망하여 백성 중에서 멸망한 후에
출애굽 제 1세대는 애굽에서의 노역(勞役) 및 광야에서의 많은 경험, 아말렉과의 전투
(출 17:8-16) 등을 겪은 자들로 가나안 정복에 적합한 군사적 조건을 갖춘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들이 광야에서 멸절하기까지 내버려 두셨다가,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새 세대들에게 가나안 정복의 대업을 명하신 것은
1)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과 다르며(사 55:8, 9)
2) 전투 경험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믿음과 순종이 보다 중요한 것임을 교훈해 준다(삼상 17:47).
17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 네가 오늘 모압 변경 아르를 지나리니
19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본절은 12절 상반부 내용의 반복이다. 즉 이스라엘의 형제국들 중 암몬 족속이
가나안의 원주민 족속인 르바임 족속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한 것처럼,
에돔 족속이 호리 족속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한 사실을 거듭 밝힌 내용이다.
20 (이곳도 르바임의 땅이라 하였나니 전에 르바임이 거기 거주하였음이요 암몬 족속은 그들을 삼숨밈이라 일컬었으며
21 그 백성은 아낙 족속과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컸으나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 앞에서 그들을 멸하였으므로 암몬 족속이 대신하여 그 땅에 거주하였으니
‘그들을 멸하셨으므로’ - '거인'이란 뜻을 가진 르바임(에밈, 삼숨밈) 족속은
원래 요단 강 양편의 르바임 골짜기에 거주한 그 땅 원주민들이었으나(수 17:15),
후일 암몬 족속에 의해 쫓겨났으며, 또한 가나안 진격중의 이스라엘에게 패퇴하여
결국 바산왕 '옥'(Og)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멸절된 족속이다(3:11).
22 마치 세일에 거주한 에서 자손 앞에 호리 사람을 멸하심과 같으니 그들이 호리 사람을 쫓아내고 대신하여 오늘까지 거기에 거주하였으며
‘갑돌’ - 여기서 '갑돌'(Caphtor)은 에게해 연안의 큰 섬 그레데(Crete)를 가리킨다(딛 1:5).
‘갑돌 사람’ - '갑돌 사람'(Caphtorites)은 그레데에서 팔레스틴의 남서부 해안 지방으로 이주해 온
해양 민족인 '블레셋 족속'을 가리킨다(창 10:14, 렘 47:4, 암 9:7).
사실 '블레셋'(Philistines)이란 말 자체가 '이주자'(immigrant)란 뜻인데,
이것은 곧 이들도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가나안 지역으로 이주해 와서
그 땅의 원주민인 '아위' 족속을 쫓아내고 대신 그곳에 정착한 사실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한편, 그런데 아브라함 시대에 이미 이들이 팔레스틴에 거주하고 있었던 사실로 보아(창 21:32-34),
이들의 이주(移住)는 B.C. 2000년경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23 또 갑돌에서 나온 갑돌 사람이 가사까지 각 촌에 거주하는 아위 사람을 멸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거기에 거주하였느니라)
24 너희는 일어나 행진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은즉 이제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하라
25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말미암아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
‘천하 만민으로...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 가나안 본토 정복 전쟁에 앞서 그 전초전(前哨戰)
격이 된 아모리 족속 시혼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거둔 대승리에 대한 소문은 즉시 온
가나안에 널리 퍼져, 주변 국가들에게 이스라엘은 한결같이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11:25, 수 2:9-11).
이것은 두 가지 교훈을 시사해 준다.
1) 여호와를 대장으로 삼는 여호와의 군대에게는 결코 패배가 없다는 사실과
2) 세상 권세는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백성, 곧 성도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이다.
‘네 명성’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군대가
어떠한 적과도 싸워 능히 이긴다는 전쟁의 소문을 가리킨다.
‘근심하리라’ - 원어 '훌'은 해산의 고통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마음의 병이 될 정도의 큰 걱정거리를 의미한다.
26 내가 그데못 광야에서 헤스본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평화의 말로 이르기를
‘그데못 광야 - 아르논 강의 북쪽 상류에 위치한 평지인데,
그곳의 성읍 '그데못'(Kedemoth)은 훗날 므라리 계통 레위인들의 성읍이 되었다(수 21:37).
‘사자를 보내어 평화의 말로 이르기를’ - 교전(交戰)하기에 앞서 먼저 화친을 제의하는 것은
율법이 명하고 있는 전쟁법(20:10)으로, 합법적인 싸움에 있어서도 될 수 있는 한 폭력과
피흘림을 삼가하기 위한 조처이다.
특히 이 지역(요단 동편)은 본래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가나안 지경에 포함되지 않았던 관계로
(창 15:18-21). 이스라엘이 정복하고자 했던 땅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모세가 시혼에게 평화의 사절을 보내그 땅의 한 길로만 진행할 것이며,
모든 필요한 물건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사서 쓰겠다는 조건으로 겸손하게 통과 허용을 청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청원은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시혼이 군대를 이끌고 나와 이스라엘을 대항하였기 때문에 모세는 이들을 진멸하고 말았다.
27 나를 네 땅으로 통과하게 하라 내가 큰길로만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라
‘대로’ - 민 20:17, 21:22에 나오는 '왕의 대로'(King's Highway)를 가리키는데,
요단강 동편의 북쪽에서부터 아모리와 모압, 에돔을 거쳐 아카바 만 부근의 에시온 게벨<8절>에까지 이르는
국제 도로와 그 지로(支路)를 말한다.
한편 여기서 '대로(大路)로만' 행하겠다는 말은 직역하면, '길로만 길로만'(바데레크 바데레크)
행하겠다는 의미로서, 곧 계속해서 큰 길로만 진행하고 결코 다른 길은 일체 침범하지 않겠다는 표현이다.
28 너는 돈을 받고 양식을 팔아 내가 먹게 하고 돈을 받고 물을 주어 내가 마시게 하라 나는 걸어서 지날 뿐인즉
이 전언은 이스라엘 군대가 에돔 족속에게 보낸 평화의 메시지와 동일하다. 6절 주석 참조.
29 세일에 거주하는 에서 자손과 아르에 거주하는 모압 사람이 내게 행한 것 같이 하라 그리하면 내가 요단을 건너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르리라 하였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