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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5장 22-29 십계명을 주신 네 가지 목적

LNCK 2022. 6. 26. 07:27

◈십계명을 주신 네 가지 목적             신5장 22-29             2017.12.10.출처

 

우리가 십계명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십계명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Ten Commandments’(열 가지 명령들)라고 되어있지만

사실은 ‘Ten Words’(열 가지 말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합니다.

 

구약시대 모세에게 주신 세 가지 율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의식법’(Ceremonial Law)입니다.

의식법은 ‘제사를 어떻게 지내며 제사장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하는 문제들을 다루는 법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와 절기와 의식은 ‘예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림자와 같은 예표를 모두 ‘실체’로 완성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의식법이 폐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의식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둘째는 ‘시민법’(Civil Law)입니다. 시민법은 이스라엘의 나라법인데 의식법과 같이 모두 다

폐지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서구의 형법과 민법 같은 법이, 십계명을 바탕으로 재해석한 경우가 많습니다.

 

셋째는 ‘도덕법’(Moral Law)입니다. 17세기에 나온 신앙고백서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입니다. 이것은이 1689년에 나온 ‘제2차 런던 침례교 신앙고백서’를

모체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고백서는 거의 똑같습니다.

 

이렇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만들고 또한 신앙 교육을 하기 위해서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을 만들었습니다.

대요리문답은 주로 목회자들이 설교할 때 참조하라는 문답이고 (*요리 : 성경의 중요한 교리)

소요리문답은 주로 평신도들이나 어린 아이들을 교육하고 암송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문답인 것입니다.

 

웨스터민스터 대요리문답 문93항에서 ‘도덕법이란, 인류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의지’라고 했습니다.

또 문94항에 보면 ‘인간은 타락한 후에는 도덕법에 의해서 의와 생명에 이를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한 자와 중생하지 못한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크게 소용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구원받지 못한 자나 구원받은 자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의지인 것입니다.

 

▲도덕법은 십계명으로 요약이 될 수 있고, 신약시대에도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인 것입니다.

십계명은 법을 공부하는 것인데 실제로 고시공부하는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히 괴롭고 딱딱하고 지루한 공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시편 119편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다는 것을 계속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은 176절이 모두 다 ‘하나님의 율례, 주의 법도, 주의 증거의 도’를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119:103절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들이 성경을 읽게 하기 위해서 꿀을 옆에다 놓고 성경을 읽게 했는데

나중에는 꿀 보다도 성경을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시119:92절을 보면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주의 법이 즐거움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망하였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저 (피영민 목사) 자신이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말씀도

시119:165절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리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입니다.

 

인생에 큰 평안을 하나님이 주시는데 누구에게 주시는가하면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앞에 큰 장애물이 있을때 우리는 근심하며 염려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다 없애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공부하는 것을 축복으로 여겨야합니다.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인가?

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시1:1~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계명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셨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네 가지 대답을 하고자 합니다.

 

 

◑1. 십계명은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to show sins)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십계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칼빈과 루터는 이것을 율법의 ‘제1일 용도’라고 했습니다.

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롬3: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죄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롬7:7절에도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요일3:4절에도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했습니다.

불법을 행한다는 것은 ‘Break the Law’(법을 거역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엇이 죄냐하면 십계명을 거역하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죄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죄에 대한 개념을 수평적인 사람과의 관계로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저 사람은 교회만 안 나갔을 뿐이지,

예수만 안믿었지 아주 착하게 살았다”고 죄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교회 안나가는 것이 죄가 아닌가요? 교회 안나가는 것이 죄입니다.

왜냐면 제4계명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는데 주일날 안식일을 안지키는데 죄가 아닙니까?

그래서 4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6계명(살인)을 지키지 않는 것과 같은 죄입니다.

 

예전에 모방송국에서 방영된 ‘유나의 거리’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극중 한 여자는 남자를 유혹하는 꽃뱀 역할이었고, 또 한 여자는 소매치기였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가 참 인상깊었습니다.

“나는 소매치기니까 8계명을 어겼지만 그런데 너는 간음했으니까 7계명을 어긴게 아니냐

그러면 누가 더 나쁘겠냐?”고 하면서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저렇게 죄인들도 십계명을 다 알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름은 곧 명예요, 그의 본체입니다. 주기도문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했지요.

주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그 어떤 일도 큰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왜 회개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대인관계’에서만 생각하지 ‘대신관계’에서는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십계명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계명을 어기는 것은 죄이고 이 죄는 무서운 결과를 낳습니다.

죄를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한 가지라도 어기게 되면 죄를 짓는 것이고

죄를 짓게 되면 지옥에서 영원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암4기 판정을 받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얼마나 심각한 것입니까?

왜냐하면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통해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과 그것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루터와 칼빈이 말한 ‘율법의 제1용도’라고 한 것입니다.

 

 

◑2. 십계명은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사람은 십계명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얻고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존 칼빈은 칼빈주의 5대교리를 말하면서 첫 번째가 ‘인간의 전적 무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전적 무능력’(Total Inability)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십계명을 지켜서 의를 이루어 영생을 얻을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롬7: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죄의 노예가 되었다’(I am slave to sin)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의 노예이기 때문에 아무리 십계명을 지키고자 해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롬7:19절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망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모두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을 보고 선을 행하고자 해도 도리어 악을 행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전적무능력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가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믿고 붙잡고 의지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라고 말해도 그것은 표면적으로만 지킨 것이지

그것을 온전히 다 지킨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인 마음도 규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6계명과 7계명을 가지고 설교를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5장 27~28절에서는 7계명에 관해서 설교를 하시면서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지속적으로)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6계명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5:21~22절에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라가’(Raca)라는 말은 번역이 안되서 그대로 쓴 것인데

그 뜻은 ‘멍텅구리, 어리석은 자’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형제를 보고 이렇게 욕을 하면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행위로서 살인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살인죄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이라는 것은 사람이 다 지켰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깊고 너무나 어려운 것이

십계명인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에서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을 보게 되면

십계명이 93항부터 152항까지 무려 59개항이 십계명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전체가 200개항이 안되는데 거의 1/3이나 십계명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요리문답의 제일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17세기의 청교도들이 십계명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심각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 문145항의 질문을 보면 ‘제9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무엇인가?’라고 되어있는데

그 답을 보게 되면 굉장히 깁니다.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9계명에서 금지된 죄는 우리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이웃이 지니고 있는 진실과

좋은 평판을 특히 공적 재판 사건에서 해치는 모든 일이나...

비진리를 말하고 거짓말하고 중상하고 험담하고 훼방하고 고자질하고 수군수군하고

냉소적이고 욕설함이며 조급하고 가혹하고 편파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또 남의 약점을 쓸데없이 찾아내는 것이며 거짓 소문을 내는 것이며

나쁜 보도를 받아들이고 동조하는 것이다”

 

이만큼 자세하게 진지하게 계명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평판을 깍아내리는 것이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상대방을 욕설하고

수군수군 하는 것이나 그것을 듣고 맞장구 치며 동조하는 것들이 다 9계명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제가 중간중간 간략하게 말해서 그렇지 그 안에 다른 내용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계명 하나하나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문149항의 질문을 보면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가?’라고 되어있는데

답은 “아무도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고 언행심사 간에 매일 계명을 범할 뿐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누구라도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완전히 지킬 수 없으니까, 안 지켜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3. 십계명은 인간에게 ‘구주’(Savior)가 필요함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인 것이다.

 

내가 십계명을 지켜서 천국에 갈 수 없다면 나를 구원해주고 용서해 줄 수 있도록

남의 힘이라도 빌려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에게 힘을 빌려 줄 수 있는 분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람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이라는 것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몽학선생’이란, 주인의 아들이 학교에 안가려고 하면 몽둥이 들고 때려가며 학교에 데려다 주는

힘센 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실제로 선생은 아니지만 선생이라 불렀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夢學先生)인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스스로 구원할 능력은 없지만 구원할 능력이 있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식법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도덕법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두 가지 일을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살다가 죽으신 것입니다. 사는 것도 중요하고 죽으신 것도 중요합니다.

죽으신 것은 율법을 어긴 죄값을 대신 갚으시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사신 것은 의가 없는 죄인들에게 완전한 의를 나눠주기 위해서,

십계명을 100% 다 지키시는 완전한 의를 주시기 위해서 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통해서 자신의 죄와 무능력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그분을 믿고 영접하게 되면 두 가지 축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십계명을 범한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대신 죄값을 갚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완전한 의를 우리에게 전가 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의인(義認) 전가’ (Justification)를 받아서 그 의를 예복처럼 입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 천국에 들어갈지 안갈지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거나 가짜일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어 언제 죽어도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6절에 하나님은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했고

3장 28절에도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의 전적 무능력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서

결국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도록 인도하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4. 십계명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살아가야할 ‘삶의 기준’(Standard of the Life)이다.

 

모든 인간은 십계명을 다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간에 십계명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십계명과 아무 관계가 없는 존재가 되었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문96항 ‘도덕법이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은

“도덕법은 그들의 양심을 그것으로 일깨워 장차 임할 진노를 피하게 하며...

죄의 길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경우 그들로 하여금 핑계할 수 없게 하여

그 저주 아래 있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은 불신자들에게도 죄를 억제하고 죄의 심판을 받을 때에

핑계될 수 없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루터와 칼빈은 ‘율법의 제2용도’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죄를 억제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대요리문답 문97항 “도덕법이 중생한 자들에게는 무슨 특별한 소용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더 감사하게 하며 이 감사를 표시하려고 그들의 생활법칙으로서

도덕법을 더욱 더 조심하며 따르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이 구원받은 성도에게 생활법칙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31절에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칼빈과 루터는 이것을 ‘율법의 제3용도’라고 불렀습니다.

십계명은 성도의 생활 법칙으로서의 용도라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제3용도가 십계명의 가장 기본적인 용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구원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삶의 기준을 보여주고 가르치기 위해서 십계명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왜 한국에는 십계명을 무시하는 ‘율법폐기론’(antinomianism)이 나오게 되었는가?

만약 제가 십계명을 설교하는데 누군가 “목사님은 율법주의자”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이 율법폐기론자나 이단사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단을 퍼뜨리고 설교하는 종을 비방하는 사람입니다.

 

율법폐기론은 왜 나오는가? 그것은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6:14절과 갈라디아서 3:25절을 잘못 해석합니다.

 

로마서 6:14절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you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우리 성도들은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쓸데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 (we are not under the condemnation of the law),

‘우리가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다’ (we are not under the the curse of the law)

이런 말씀이지, 십계명이 쓸데없다 이런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신약성경에 구약의 계명들이 다 반복되어 있습니까?

그래서 이러한 율법폐기론적인 것은 이단사설과 같은 아주 잘못된 해석인 것입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3:25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몽학선생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에는 도덕법도 있고 의식법도 있는데

이러한 법들이 다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율법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의식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얘기이고,

도덕법에서도 도덕법의 제2기능 즉 몽학선생으로서의 기능은 더이상 우리에게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1기능과 제3기능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성도의 삶의 기준, 생활법칙이 되는 것이고

율법적인 기능이 모두 끝났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십계명을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결과로서 십계명을 생활법칙으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우리 성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축복받을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내가 구원 받으려면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그리고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축복하시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축복메뉴얼’입니다.

 

십계명은 성도들을 제한하고 속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우리에게 행복과 자유를 주고 축복을 줍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축복의 법칙이지 속박의 법칙이 아닙니다.

 

 

결론

 

십계명은 하나님의 축복의 메뉴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세의 인도로 시내산 기슭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큰 음성으로 들려주시자

두려워 떨며 모세에게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달라고 하자

하나님은 이것을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신명기 5:29절에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의 말씀과 명령을 지키겠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5절에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십계명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지켜나갈 때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 지키지도 못할 것을 지키라고 하십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키지 못해도 십계명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십계명이라는 완전한 법을 모범으로 삼고 살아갈 때에

비록 다 못지켜도 그대로 사랑하고 살아가면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공부하는 동안 이것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되고 기쁨이 되고 축복이 오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