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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계승에 질문과 대답이 중요합니다

LNCK 2022. 6. 28. 11:09


◈신앙의 계승에 질문과 대답이 중요합니다         신6:20, 수4:4~7         출처의 34분 이하 정리   

 

신6:6~9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위 구절들은 무엇보다 먼저 "가정에서"

신앙교육이 선행되고 이루어져야 된다는 말이죠. 


◑질문과 대답을 통해서, 세대간 신앙 계승이 이루어지다

▲1. 먼 훗날에 가나안에 들어가고 나서도 '질문과 대답'이 있었습니다.

신6:20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

여기 20절에 보니까, 후일에 자녀들이 '왜?' 라는 질문을 하리라고 
모세가 내다보고 있습니다. 

기독교 교육의 출발은, 성경에 "외우라고, 반복하라"고 했다고 해서
우격다짐 식의 외움과 반복을 강요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합리적 질문"과 "합리적 대답"의 시대입니다.
이게 되지 않으면, 기독교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과거에 1970~80년대에 학교를 다니거나, 군대에서 복무하던 시절에는 
모든 한국 사회의 가치관이나 문화가 
그냥 군대 말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분위기였어요. 당시는 그게 사회의 지배적인 분위기였어요. 

거기에 이유를 단다, 의품을 품는다...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어요. 
그런 문화가 고스란히 그 당시 교회 안에까지 팽배해 있어서 
'교회에서 질문을 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냥 믿는 거였어요.
교회에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면, 아주 회의론자로 낙인이 찍히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시대가 완전히 변했습니다. 
요즘은 청년들에게  '너 이거 해 봐!' 그러면 
대번에 이런 응답이 옵니다. '그걸 제가 왜 해야 되는데요?'

이건 반발이라기 보다는, 합리적인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근데 거기다 대고 우격다짐으로 '야, 뭐 그렇게 말이 많냐, 하라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그러면 당장 날아드는 반응은 '꼰대 짓 한다'는 소리 듣습니다. 
그리고 그런 꼰대들을, 무시해 버리거나 등을 돌려 버립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는, 과거 방식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교육이 한 단계, 한 단계 넘어갈 때마다
반드시 뭐가 있는지 아세요? 
합리적인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 있었어요. (여기서 1, 2, 3의 예를 들었어요)

▲2. 첫 유월절 때도, '질문과 대답'
출12:26~27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본문은 유월절 제사와 절기를 제정하는 구절인데,
출애굽 백성들이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 질문은 무엇을 새롭게 깨닫고 창출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신 내용들을 
'왜 그래야 되는지'에 대한, 이해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자녀들은 질문을 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애굽 땅에서 400년 종살이를 했단다. 
근데 어느 날 하나님이라는 분이 모세라는 훌륭한 우리 믿음의 선조를 세우셔서 
우리를 거기에서 건져내실 때, 

그 오실 메시야에 대한 표징으로 
어린 양을 잡아서 죽여서 흘린 피의 공로로...' 

자연이 이런 질문에 대응을 하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그분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우리의 과거는 어땠는지... 

이런 것들이 자녀들에게 설득이 되고, 설명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3. 요단강을 건넌 후에도 '질문과 대답'

수4:4~6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준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가져다가 어깨에 메라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6절에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자손들이, 즉 자녀 세대가 '왜?' 라고 질문한다는 것입니다.

'왜?' 라고 질문하는 건, 이상한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이렇게 자녀들은 질문하게 되어 있다는 거죠.

:7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니라'

여기서 자연스레,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건지셨고 
어떻게 우리를 구원 하셨는지에 대한 복음의 내용이 
설명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교육이
질문과 대답을 통해서
세대로, 다음 세대로 계승되었다는 것이죠.


◑오늘날 '다음 세대'가 던지는 합리적인 질문

▲교회를 떠난, 또는 떠나고 싶어하는 청년들의 이야기 베스트 5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청년세대 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의 교회에 염증, 그 중요한 속내 입니다. 

아래는 설문 조사를 통해 드러난 결과입니다.

그들의 마음 현주소라는 것이지, 이게 꼭 성경적인 정답이다.. 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고할 필요는 있습니다. 5번부터 1번까지 역순으로 살펴보겠습니다.

5) 성경이 믿어지지 않는다.. 성경에 모순이 너무 많다..

 

과학적, 역사적 모순 뿐만 아니라, 
'사랑' '정의' 같은 개념도 앞뒤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여기서는 이 말했다가, 저기서는 저 말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짐승과 젖먹이까지 다 죽이라고 하고
성경이 뭐 이러냐? ... 하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는 것입니다.

4) 네 번째로 많이 나왔던 대답은
'교회와 목사들의 비윤리적인 삶'을 들었습니다. 
교회의 세습, 목사의 성비위, 그외 재정의 불투명한 사용 등을 들었습니다.

이런 것들 (1~5번의 이유들) 때문에 청년들의 한 세대가 훅 가 버렸어요. 

3) 세 번째는 '관계의 문제'였어요. 
공동체 안에서 경험한 인간관계의 상처! 

친구, 선생님, 교역자, 청년들, 성도들 간의 갈등... 
왜냐하면 요즘 교역자 개념과, 또 한 세대 전에 교역자 개념이 많이 틀려요. 

이런 것들로 인해 기독교인이지만, 교회 가기 싫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많이 나왔던 대답이 "자신들의 주장을 억지로 강요한다"
이게 문제입니다.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에 대한 반발입니다. 

요즘은 설교를 하고 난 다음에 '무조건 믿으세요! 믿으면 됩니다!' 이게 먹히지 않는다는 거죠.
'먼저 믿고, 이해는 나중에 하는 거야!' 이 말도 맞지만, 요즘 시대에는 안 통한다는 거죠.

1) 그런데 과연 1위가 뭘까요? 
'경제 활동으로 인한 불참'입니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한가하게 교회를 다닐 형편이 아니라는 거죠.
이게 정답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요즘 청년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죠.

뜻밖에도 우리 청년들 세대에 경제적인 빈곤의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는 거예요. 
'청년 빈곤'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대학 졸업하면 다 빚지고 나와요. 다 학자금 대출 받아서 다녔거든요.
우리나라 대학 등록금이 세계 평균치로 볼 때 비싼 게 아닌데도 
등록금 대느라고 청년들이 전부 알바하고, 졸업 후에도 갚아야 하는 거죠.
이런 상황이에요.

▲자 그러면 이 다섯 가지 고민을 놓고 
교회는 어떤 대답을 줘야 될 것인가요? 

여기에 대해 오늘은 2)번 5)번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5) '성경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 교회가 어떤 대답을 줘야 할까요?

2)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지 말고, 
합리적인 질문을 하면, 합리적인 대답을 이제는 교회가 해야 된다는 거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래도 역시 이 방황하는 교인들이나 청년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복음 밖에 없다는 거죠. 

▲하지만 이제는 진리 전달에도 순서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첫 번째, 청년들의 합리적인 질문과 의문에, 우선 동의를 해 줘야 돼요. 

'네가 그 질문과 그 의문을 품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그건 당연한 거다.' 
그들이 교회 또는 기독교를 향해 품는 의문에 공감하고, 
어디서부터 시작된 의문인지.. 함께 해답을 찾아가려는 배려가 좀 필요해요. 

두 번째, 그 과정을 통해서 합리적인 대답을 건네 줘야 돼요. 
그들의 시선에서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통하여 
합리적인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 줘야 돼요. 

'이제는 교회 다니는 사람, 자기들만 잘랐다는 거지?'
우리가 어쩌다 이런 색깔로 비춰지는 동떨어진 시람들이 되고 말았어요. 
이걸 상당히 우리 교회가, 스스로 한국 교회가 게토화 되어 있는 아주 비정상적인 상황이니다.

세 번째, 복음을 다시 말해줘야 돼요. 
궁극적인 목표는, 그들의 마음에 다시  복음의 씨앗을 뿌려 주는 거예요. 

로마서가 왜 다시 쓰여졌어요?
로마서는 바울이 '흩어져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다시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필요성에 따라서 
쓴 책이 로마서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알 때까지 
첫 번째, 세상 사람들이 '너희들만 잘났냐?' 하는 
이런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왜 기독교, 예수가 절대적인지 합리적인 대답을 해 줘야 돼요. 

지금 종교다원주의 시대예요. 
그러면 그 속에서 고리타분하게 배타적으로 '예수만이 길이고, 예수만이 진리다' 라는 주장을 하려면 
거기에 대한 변증적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그 말이에요. 

두 번째, '진화론과 과학은 진리야!' 이게 세상의 주장입니다. 
요즘 훨씬 과학적인 진화론에 대한 설명이, 설득력이 있는 세상이 되고 말았단 말이에요. 

거기다 대고 자꾸 우리도 역시 과학적 논리로 그 갈등에 불을 붙여요. 
그래서 창조과학이 진화론과 격렬하게 붙었죠. 

여러분, 교회에서는 "창조 과학"도 일면 설득력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창조 신앙"을 가르쳐야 돼요. 
창조 과학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창조 신앙을 가르쳐야 된다고요. 

세상의 프레임에, 교회도 같은 동일한 프레임을 만들어서 싸우자고 하면
이 전쟁은 안 끝나요. 설득 되지도 않습니다. 
창조과학이 아니라, 창조 신앙을 가르쳐야 돼요. 

세 번째, '성경은 오류투성이 책이잖아?' 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우리의 동의가 아닌 
합리적인 변증적인 논증을 통해서 밝혀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고민해야 될 신학의 영역이 뭐냐면 
변증학이 좀 발달이 돼야 됩니다. 

근데 한국의 신학에 여러 장르가 있지만 
가장 약한 영역이 변증학이에요. 

과거 우리 세대들은, 어릴 적부터 귀신 이야기를 귀따갑게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기적, 과학적이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도 별 거부감없이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으셨다든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는 이야기들도
별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또한 믿어집니다. 딱히 뭐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의식구조가!

그런데 서구사람들은 달라요. 논리적이지 않고 과학적이지 않으면.. 거부합니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의식구조가 동양인과 다릅니다. 그래서 거기는 변증학이 발달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한국도 달라졌어요.
어릴 적부터 과학적 사고구조로 단련되어 성장한 요즘 청년들은 그렇지 않다는 거죠. 
부모 세대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믿으라는 우격다짐 식이 아니라, 이런 변증학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나는 신이 없다고 생각해!'라는 무신론자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신이 없다고 여기기에, '절대적인 도덕규범'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십계명도 무시하는 거죠. 하나님이 없다는데, 십계명도 당연히 없는 거죠. 

우리는 이 시대의 무신론을 냉정하게 비판할 수 있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요즘 청년들을 만나보면, 인류 자체가 '신 인류'을 출현입니다.
그런데 그 달라진 아이들의 그 생리에다 대고 

과거에 우리의 신앙 패턴과 그런 교회 메카니즘과 그런 원리로는
접근 자체가 안 돼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옥에 대한 그들의 거부감입니다.
'아니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데, 왜 지옥을 만들어?' 

현대인들이 지적하는 기독교에 가장 큰 모순인 
지옥에 관한 논증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지옥은 존재합니다. 근데 그냥 성경에 쓰여 있으니가 믿어라!'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에요. 

이게 전부 변증학적인 접근으로 
우리가 새롭게 청년세대에 대한 준비를 해야 되는데, 

그들이 적어도 지금 합리적인 질문을 하는 세대라면 
우리는 합리적인 대답을 준비해야 된다는 말을, 제가 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긴 시간을 여러분들과 말씀을 나누었는데 
우리 삼일교회가 가진 3대 비전 중에 하나가 
"다음 세대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물론 교육하면, 일반교육 과 기독교교육을 합해서 세 가지가 필요해요. 

첫째는 내용, 뭘 가르치느냐? 
당연히 성경이죠. 

두 번째 누가 가르치느냐? 
이것은 좋은 선생님들이 준비해야 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교재를 가져와서 들이대도 
교사의 전달이 이상하면, 이건 문제가 생기는 거에요. 

그리고 세 번째가 시설입니다. 
이 세 가지는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우리 삼일교회가 강력하게 온 힘을 쏟아야 될 우리 교회의 꿈이요. 
다음 세대에 대한 준비입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 계속 기도해 주시고, 동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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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인, 신앙 훈련에는 다섯 가지 요소가 있어요. 

T - Time (시간)
R - Repetition (반복)
A - Acceptance (인정)
I -  Intentionally (의도적 개입)
N - Never Ending (끝나지 않는 관심과 대화) 

첫 번째는, 시간 Time 입니다. 
신앙 교육에는 시간이 걸려요. 
갑자기 막 불 받아 가지고, 급속도로 신앙이 성장하는.. 그런 것은 없어요. 
크로노스의 시간 없이 카이로스의 시간은 오지 않아요. 

두 번째는, 반복 Repetition 입니다. 
신명기의 신자도 '재 신, 다시 신'입니다. 헬라어/라틴어/영어로 Deutro 가 '두 번째'라는 뜻이죠.
그래서 신명기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의 반복 복습입니다. 
성경이 그러하듯이, 신앙교육도 계속 반복해서 해야,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는 거죠.

세 번째는, 인정 Acceptance 입니다. 
자녀들이 연약해도, 부족해도, 실수할 수도 있는 거죠. 
그게 옳기 때문에 인정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의 연약함을 공감해 주라는 말이죠. 

뭐 우리 청년들이 무슨 인정받을 구석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최고로 공감해 준 사건이 뭡니까? 
십자가에서, 내가 죽을 죄인인 것을, 나와 같은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구원하시고, 
나를 하나님 자녀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나의 연약성을 공감해 주신 거예요. 

네 번째로 의도적 개입 Intentionally Interruption 입니다. 
이게 쉬운 게 아닌데, 우리가 청소년들을 훈련 하는 과정에서 방치하지 않는 겁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꼬치꼬치 간섭해도 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멀리서 방치해도 안 되는 거죠.

의도적인 개입은, 영적인 문제에서부터 육신의 문제까지 기도로 개입해야 되고...
우리의 가장 적극적인 개입은, 기도로 개입하는 것입니다. 
그 자녀들에 대해서 기도로 개입해야 돼요. 

그리고 우리가 지혜롭게 대화의 창을, 커뮤니케이션을 열어야 돼요. 
주님이 십자가를 위해서 이 땅에 찾아오신 사건도, 인카네이션 입니다. 
즉 우리의 삶에 개입해 들어오시고, 의도적으로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다섯 번째, 결코 끝나지 않는 대화 Never Ending Conversation

신앙적인 부모가, 자녀를 기도로 포기하지 않으면, 
그 자녀는 절대로 잘못될 리가 없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