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아름다운 인생 히3:1~6 출처
▲도입 : 인생의 시작보다 끝이 중요합니다.
인생을 종종 마라톤에 비유하지요.
왜냐면 마라톤이, 단거리경주 100미터 달리기와 다른 점은
얼마나 빨리 출발 했는가, 누가 잘 출발 했는가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잘 마쳤는가? ...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죠.
우리 인생에는 '좋은 출발'이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마쳤는가?'하는 것이죠.
불행하게도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출발은 참 잘했는데, 끝이 아름답지 못한 인생들이 안타깝게 많이 있습니다.
뭐 성경에서는 아마 대표적인 인물이 솔로몬 왕이죠.
아버지 다윗을 이어서 좋은 출발을 했죠.
많은 기반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인생을 마치면서 그는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 했죠.
그래서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는 말로써, 자기의 삶을 결론지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죠.
우리 주위에도 그런 분들이 참 많습니다.
월마트를 시작한 샘 월튼, 월마트 사업이 한참 번창할 때
그분이 자기 삶을 마치면서, 가장 친한 친구에게 했던 유명한 말 한 마디가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 'I blew it, 나는 내 인생을 잡쳤어!' *직역하면, 헛되게 날려버렸다는 뜻
그것이 그의 인생에 대한 자기 자신의 평가였지요.
늘 사업에 바빠서, 한 평생 일만 하고 돈만 벌며 살다가
갑자기 찾아온 죽음 앞에서, 그가 남긴 말이었습니다. (1918~1992)
그는 정말 어마어마한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지만, 자기 인생에 대한 평가는 '망쳤다' 였습니다.
유명한 영화배우의 남편이었던 팻 터너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의 인생을 당신이 평가한다면 어떻게 묘사를 하겠습니까?'
팻 터너가 이렇게 말했다고 그래요.
'내 인생은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삼류영화와 같습니다!'
모든 인생에 시작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잘 마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 시작보다도 끝이 더 아름다운, 그런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우리가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지요.
하나님 스스로 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기 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 될 때,
시작보다 끝이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 그들의 삶의 공통점은 시작보다 끝이 아름다웠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들,
남편을 잃고 시댁에서 버림받았던 다말,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기구한 기생의 인생으로 시작했던 라합,
그들이 예수님을 이 땅에 오게 하는 소중한 역할에 쓰임 받았고요.
예수님의 족보는, 이런 분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 되지 못했다면, 그냥 평생 생선만 다듬다가 끝나야할 인생인데
하나님께 쓰임 받고, 아름다운 인생들이 되었지요.
마태 같은 사람을 봐도, 손가락질 받고 인간 대접 받지 못했던 세리가
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을 쓰는, 그런 아름다운 삶으로 마쳐지지 않았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바람이 있지 않나요?
시작은 어쨌든지 간에, 삶을 마치면서 후회하지 않고 마치는
아름다운 인생이 나의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바램이 우리 모두에게 있지요.
<<어떻게 살면 시작보다 끝이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그 답을 오늘 본문 히3:1~6절에서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좋은 시작이었어요.
원래는 유대인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끝을 망칠 수 있는 위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쓰여진 서신이 히브리서죠.
왜냐면 당시에 기독교인으로서 산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가족들과 친척들에게 버림을 받고요, 당시에 왕이었던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그 방화범으로 기독교인들을 몰아세웠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박해받는 상황이었어요.
사업체가 문을 닫아야 했고, 손님들이 오지 않는 그런 상황들,
그런 상황을 틈타서 주변에 있던 유대인 친구들이 유혹하는 것이죠.
'유대교로 돌아와, 다시 돌아와!'
그래서 히브리서를 보면, 그런 마음이 흔들리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앙 여정의) 시작은 잘 했지만, 끝을 망칠 수 있는 그런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기록한 편지이기 때문에
히2:1절에 '혹 흘러 내려갈까 염려하노라' 하는 말을 히브리서 기자가 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그들 (히브리서 수신자)과 꼭 같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도 여전히 비슷한 영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잠시 편안함을 위해서, 인생을 아름답게 마치는 축복을 포기하라는 유혹이
어느 때보다 더 심한 때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나요?
'꼭 그렇게 극성스럽게 믿어야 돼?' 하는 목소리를 여러분은 자주 듣지 않나요?
'세상 흘러가는 대로 살면 되는데, 꼭 그렇게 바보스럽게 살아야 돼?' 하는 그런 소리들..
혹시 여러분은 주위에서 듣지 않나요?
그래서 오늘, 신앙을 포기하고 돌아서고 싶은 히브리서의 독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1. 시작보다 끝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꼭 기억해야 되는 첫 번째는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소명자" 라는 의식입니다.
히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
우리는 아무 목적 없이, 아무 의미 없이 우연히 이 땅에 던져진 그런 존재가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명자' 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죠.
그래서 영어성경을 보면 이런 표현을 썼어요. 'holy brothers, who share in the heavenly calling'
우리는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heavenly calling, 하늘나라의 소명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명받은 자라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얼마나 큰 영광인지를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말하기 위해서
3:1절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이셨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b
성경 전체에서 이 구절만이, 유일하게 그리스도를 '사도' 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사도'라는 칭호에 담겨 있는 의미는, '보냄을 받은 자' 라는 것이요. ('대제사장'은 뒤에 설명)
예수님이 '보냄을 받은 것'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보냄받은 자' 라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히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왜냐면 자기가 받은 소명의 가치를 바로 인식할 때
우리는 지불해야 될 소명의 대가를 기꺼이 지불할 수 있기 때문이죠.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도 생명을 기꺼이 내어주는 그런 희생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냐면
자기의 소명의 가치를 아셨기 때문이다.. 라고 히12:2절에서 말합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이 마음에 두셨던 소명의 가치는 뭐냐면요.
'그 앞에 있는 기쁨'이라는 것이죠.
그 앞에 있는 기쁨에 대한 확신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수치와 십자가의 고통을 기쁨으로 넉넉히 감당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마음에 두신 그 앞에 있는 기쁨'이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하나님 아버지와 다시 연합하는 기쁨도 분명히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하늘보좌에 다시 영광스럽게 앉으시는 기쁨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근데요. 저는 이 세 번째 해석이 가장 마음에 와닿는 것 같아요.
예수님의 '그 앞에 있는 기쁨'은 뭐냐면
-저와 여러분의 구원,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 받은 우리들의 인생,
변화 받을 그 인생들을 바라보시는 그 예수님의 기쁨,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막대한 대가를 치르실 수 있었다는 것이죠.
▲여러분, 소명 따라 사는 삶(하늘의 부름을 받은 삶)에 희생이 따르잖아요. 우리가 다 알죠. 히3:1
그래서 우리가 소명자 라는 말을 들을 때, 그게 우리에게 굉장히 반갑게 다가오기 보다는
자칫 잘못하면 두려움으로 다가오기가 잠 쉽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이 읽는 많은 전기들, 기독교 신앙의 선배들의 스토리를 보면
소명받은 자들의 삶이 참 어려운 거 같아요.
저도 목회자로 부름을 받으면서 너무 망설였던 이유가 뭐냐면
보니까 뭐 선교사님들, 선교지에 나가가지고, 애들 다 죽고 아내도 죽고
저드슨 선교사 같은 분은 아내 무덤 옆에서 뭐 천막을 치고 살고...
그런 얘기를 접하면 '아 이거 나는 못 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사실 소명은 사람 사람마다 다 달라요.
(무지 고생한) 그런 사람들은 특별한 소명이고요.
제가 저희 교인들 한테 종종 그렇게 얘기 합니다.
'그거 염려하지 마세요. 아무나 선교사로 부르지 않아요.'
소명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소명이 아닙니다.
소명은,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그 일을 함을 통해서,
의미를 찾고, 기쁨을 찾게 해서, 그 일을 자원하게 하는 것이 콜링, 즉 소명입니다.
그래서 소명을 따라 살아가면, 삶이 오히려 의미를 회복하고 기쁨을 누리게 되는 거죠.
▲저는 리처드 스턴스 라는 사람의 스토리를 읽었어요. Richard Stearns
그는 굉장히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알콜중독자 였어요. 아버지가 술만 드시고 오면, 집에 그냥 대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어린 시절의 삶에 대한 그의 기억은,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서 부부싸움이 일어나면
이불 속에서 귀를 막고 숨어 있던 것이.. 그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습니다.
그래서 리처드가 어릴적부터 그런 생각을 한 겁니다.
'내가 우리 부모를 믿어 가지고는 내 삶에 소망이 없구나. 내가 알아서 살아야 되겠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코넬이라는 아이비리그 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진학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그다음에 유펜에 비지니스 스쿨에 장학생으로 들어가서 MBA를 마치고
30세에 세계적인 게임기 회사인 '파터스 브라더' 에서 최고경영자가 됐어요.
그리고 11년 후에는, 최고급 주방용기 회사인 'OOO 차이나 크리스탈'의 CEO가 됐어요.
안정된 직장, 최고급 주택, 사랑스러운 아내, 그리고 아이들... 부족한 것이 없는데
항상 마음에 텅 빈 구석을 채울 길이 없었어요.
그가 특별히 결혼할 때 자기 아내에게 딱 한 가지 부탁을 했다고 그래요.
가난하게 자랐으니까 '여보, 세상에 굶주린 아이들이 많은데
우리는 쓸데없이 비싼 돈 주고 비싼 도자기 그릇이나 크리스탈 식기를 사지 맙시다.'
그 약속하고 결혼했는데
아이러니컬하게 자기는 그런 거 만드는 회사의 CEO 가 된 거예요.
그래서 고민 고민하면서 조기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찾아와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자네, 조기 은퇴하고 미션 간다며?'
'무슨 얘기야?'
'자네 아내가 그러는데, 자네가 은퇴하고 나면
어디 선교지에 나가서 섬겼으면 좋겠다고.. 자네 아내가 그렇게 기도한다던데?'
그래서 그가 웃었대요.
'내가 선교에 대해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어?
나는 그냥 견적 내고, 예산 작성하고 경영하는데,
이런 걸 써 먹을 수 있는 미션 필드가 어디 있어?' 하면서 피식웃었다는 겁니다.
근데 얼마 가지 않아서 <월드비전>에서 전화가 왔어요.
<월드비전>의 경영을 맡아 주지 않겠느냐고...
근데 계산이 돌아가잖아요.
계산을 해 보니까 월급이 현재보다 75%가 삭감 돼요.
그리고 자기가 그동안 몸담고 살아왔던 필라델피아를 떠나서, 시애틀로 이사를 가야 되는데
이건 미국의 끝에서 끝으로 이사를 가는 거예요.
그래서 '못 하겠다'고 정중하게 사과를 했는데
자기 주변에 있는 영적인 멘토가 되는 분들이 자꾸 도전을 하는 겁니다.
'계속 그렇게 살 거냐?'
그래서 마침내 그가 결정을 하고 직장을 옮겼죠.
근데 그 마음 속에 두려움이 많았어요.
뭐 먹고 사는 거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혹시 나 같은 사람이 그 일을 맡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망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근데요, 하나님께서 놀랍게 를 쓰셨다는 거예요.
그 사람 이름이 리처드 스턴스 Richard Stearns 이죠.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친구가 물었답니다. '새 직장이 어떠냐고?'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제야 정확하게 내가 가야할 인생 길을 찾은 것 같습니다.
매일 아침 옷을 갈아입고 회사를 나갈 때면, 숨 막히게 멋진 풍경이 내 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그런 기분으로 살아갑니다.'
리처드 스턴스가 즐겨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렘29:11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우리를 소명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담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리처드 스턴스가 월드비전을 맡고 나서, 월드비전이 두 배 이상 성장했다고 그렇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어봤어요.
'소명을 생각지도 않고 살았던 과거의 삶을 돌아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글쎄 말입니다. 어쩌자고 23년을 낭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소명받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 전문 직업을 바꾸는 것을 꼭 의미하지 않습니다.
근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것입니다.
'내 인생을, 하나님의 부르심과 아무 상관 없이 살면, 아름다운 마침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름과는 상관없이 내 인생을 살아가면
인생을 마칠 때 누구나 후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 의미 있는 인생, 가치 있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조각 그림이 맞춰져야 된다고 얘기 합니다. three pieces of puzzle
1) 첫 번째 조각은 '사랑 받음' 이라는 조각, need of love
인간은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것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김춘수 씨의 <꽃>이라는 씨가 그렇게 애송되는 게 아닐까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에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사람에게는 사랑 받는 게 참 중요하지요.
2) 두 번째 퍼즐 조각은 "인정 받음"입니다.
내가 필요한 존재, 내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린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저도 2남1녀가 있는데
어릴 때 보면, 아빠인 제가 뭘 하고 있으면, 애들이 자꾸 와 가지고 뭘 도와주겠다고 그래요.
애들이 도와줄 게 사실 뭐 있나요?
근데 그들에게, 그래도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뭔 가를 맡겼을 때
그들의 눈빛 속에서 '나도 뭔가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그런 기쁨을 느끼는 모습을 봅니다.
그게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인정 받는 것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하면
'계속 지속되지 않는다'는 거에요. 오래 갈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미국 말에 이런 표현이 있거든요.
'been there done that - 나도 그런 자리에 있어 봤고, 나도 그런 거 해봤어!'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세 번째 퍼즐이 꼭 필요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사랑 받고 있고 인정 받고 있는데
왜 내 삶이 뭔가 이렇게 허전할까? 하는 느낌이 있다면
더 사랑받아야 하고, 더 많은 것을 성취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꼭 있어야 되는 한 가지의 조각 퍼즐 없기 때문입니다.
3) 그 세번째 퍼즐은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 빠진 상태에서
인생이라는 그림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소명과 상관없이 살면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육신의 자녀가, 육신의 부모에게 인정 받는 것이 굉장히 소중하듯이
영적인 자녀인 우리가, 영적인 아버지에게 인정 받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일평생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 아픈 얘기가 우리 주변에 많이 있어요.
저도 그런 분의 한 스토리를 읽었어요.
▲미국 골프 선수인데 다나 퀴글리는 Dana C. Quigley
어릴 때부터 골프의 재능이 있어서 선수 생활을 했는데
한 번도 자기 아버지의 마음에는 흡족하지 않았어요.
그래서인지 그는 대학시절에 알코올 중독에 빠져서 헤매다가
나이가 들어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재기해서
미국의 50세 이상 '챔피언 리그' 라고 그러지요. 거기에 가서 그가 우승을 합니다.
그리고 우승을 한 첫 날, 막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밤에
우승 트로피를 들고 그가 운전을 해서 달려갔던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자기 아버지가 있었던 양로원이었어요.
근데 불행하게도 아버지가 그 아들의 우승 트로피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지요.
(부모에게 인정 받고 싶은 자녀의 욕구가 그많큼 크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이런 청년도 만난 적이 있어요. 예일 대학 출신이에요.
그런데 자기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살아요.
왜냐면 예일대학에 입학 되었을 때, 너무 기쁜 마음으로 자기 어머니에게 달려가서
'엄마, 내가 예일 대학에 입학했어요!' 그렇게 말했는데,
엄마의 돌아온 말이 뭐냐면 '근데 예일 대학은 하버드는 아니잖아!'
그 말이, 그렇게 자기에게 상처가 되었다는 것이죠.
자녀가 육신의 부모에게 인정 받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죠.
그래서 그거 받지 못한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끊임없이
자기 가치를 증명하려는 짐을 지고 살아가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자녀는, 영적인 부모에게 인정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정한 축복을 누린 인생이 어떤 인생인가를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정말 진정한 행복을 누린 사람인가요?
그리고 마지막 결론절인 6절에서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그렇게 마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인생이 되었을 때, 삶의 진정한 행복을 누린다는 것이죠.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가장 소중한 축복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면, 소명자로 살아야 합니다.
소명은 누가 받는 것일까요? *부를 소, 명령 명
소명은 뭐 목사 선교사 이런 부류의 사람들만 받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진정 회심하고 구원을 받으면, 모두 소명을 받는 것입니다.
구원 받았는데 소명을 받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진정 구원을 안 받은 것입니다)
◑2. 끝을 아름답게 마치려면 '제사장(다리 놓는 자)'으로 사는 것입니다.
엡2:8절부터, 우리 구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10절에 가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구원받은 그 삶과 함께, 우리의 부름이 있다는 것이죠.
그게 뭐냐면,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는" 그런 인생이 되게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에게 남아있는 질문은, '그럼 그 선한 일이 뭔가요?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그 선한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요?'
오늘 히브리서가 그 답을 한 가지, 우리에게 해 주십니다.
히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여기서 히브리서가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보냄을 받은 사명자 입니다.
그 말씀을 하신 후에 곧 이어서
'예수님이 대제사장 이십니다'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근데 이 말씀 속에 오늘 본문 히3:1~6절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정말 하고 싶은 한 마디가 있어요. 그게 뭐냐면
'우리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땅과 하늘에 다리를 놓는 분인데,
우리는 주님이 하시던 다리 놓는 일을 계속하도록 부름받은 대리인(제사장)이란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사장을 라틴어로 '폰티펙스' 라고 불러요.
폰티펙스 라는 단어의 의미가 뭐냐면 '다리를 놓는 자' 라는 것입니다. *연결하는 자
예수님이 그 일을 하신 대제사장 이시죠.
이땅에 오셔서, 죄로 인해서 무너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다리를 놓아주신 분이 예수님 이시지요.
근데 히브리서 기자는, 히3:6절에서 이제 결론적으로 얘기 합니다.
'근데 예수님만 그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부름 받은 자로 부르시며,
우리에게 원하신 삶, 계획하신 삶이 뭐냐면,
6절에 보면 제가 이제 설명할 텐데요.
'우리가 그 일을 계속해 가도록'
'예수님이 하시는 그 일에 우리가 함께 동참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되는 선한 일이라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이것을 놓치기 쉬운 이유가 뭐냐면
히3:2~5절 사이에 보면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근데 히브리서의 배경은, 유대교로 돌아오라는 유혹을 받던 성도들에게 쓰여진 책이에요.
그러니까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위대한 사람이죠. 모세가 유대인들의 민족의 구원자이잖아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죠.
근데 그 모세와, 또한 다리를 놓는 예수님이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을
지금 대조해서 보여주는 목적으로 그 말씀을 쓴 것입니다.
그래서 히3:5~6절을 보면,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다리를 놓는 일에 종의 역할이 모세라면,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하는 아들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종과 아들은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그 논리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쓰고 나서 6절에 가면
'우리가 그 일에 파트너입니다' 하는 말을 하죠. 히3:14
6절에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그렇게 기록했어요.
여기서 '그의 집'이란, 그냥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이라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4절에 가서 보충 설명을 하지요.
히3:14 '우리가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3:6절과 14절을 한번 비교해 보세요.
6절에서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14절에는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영어성경에 보면 partakers of Christ 라고 했어요.
New RSV는 'partners of Christ' 라고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다'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파트너로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무너진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그 다리를 놓는 역할을 계속 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파트너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리 놓는 역할은 어디에서 해야 할까요?
우린 종종 '부르심'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또는 '소명'이라는 말을 들으면
막 크거나 아주 특별한 일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하는 거 같아요.
어떤 지혜로운 분이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많은 고목이 쓰러져 갈 때, 산을 다시 푸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작은 나무를 많이 심고 잘 가꾸는 것이다!'
소명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위대한 일, 특별한 일을 하는 소명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부르신 현장에서 지극히 평범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리 놓는 역할을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장소는 가정입니다.
제가 사실 최근에 '내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가정에 보내졌구나'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게 됐어요.
제가 한번은 결혼 주례를 하는데,
미국에서는 아버지가 딸의 팔을 끼고 앞으로 걸어나가면
신랑이 앞에서 기다립니다. 그러면 신랑에게 딸을 건네 줍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물러서서 앉게 되고, 딸과 신랑이 이제 같이 서게 되는데,
그때 제가 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어요.
평생 얼마나 귀하게 키운 딸입니까!
근데 정말 잘 알지도 못하는 한 청년에게, 그 딸을 손을 건네주면서
그 아버지의 눈물이 고인 눈이 던지는 메시지는 이것이었습니다.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딸이야!
이제부터는 자네가 맡아서 잘 돌봐 줘!'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었어요.
저는 그때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정에 보내시고, 맡기신 역할이 그와 같아요.
'내가 어디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하면서 살아야 할까?' 생각해 보십시오. *제사장의 사명
한번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십자가의 피값으로 나를 사셨는데, 그리고 나를 소명자로 부르셨는데
내가 어떤 다리를, 어디에서 놓으며 살아야 할까요?' 한번 하나님께 물어보십시오.
하나님이 바르게 알게 하실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가 원하는 일을 한다는 데
그걸 서포트 해 주지 않는, 도와주지 않는 부모가 있나요? 없지요.
두려워하지 마시고, 오늘도 기도하시면서 한번 물어 보십시오.
어떨 때는 두려워서 기도하지 않지요.
'혹시 기도하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라고 그럴까봐..'
소명은요,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그렇게 하도록 디자인(계획)된 일을 찾아서 하게 하는 것이 소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소명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고난을 받은 자의 사명, 다른 고난 받은 자를 도웁니다
시작보다 끝이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오늘 보면 '예수 그리스를 주목하라 기억하라..' 라고 말했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기억함으로 기억해야될 소명이 있죠.
그게 뭐냐면 '고난 당하는 사람을 격려하며 세우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다리 놓는 자리인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보여 주셨던 모델은
'함께 아픔을 나누는 격려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히2:18절에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이 도우실 수 있느니라'
고난 당하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격려하실 수 있다는 그런 논리죠.
제가 존경하는 척 스윈돌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예수님을 인간과 동일하게 만드는 것은 고난이다.
고난이 없었다면, 그분은 결코 나를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으셨을 것이다.'
이 원리를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를 이웃과 공감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당한 고난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는 고난의 흔적이, 이웃의 아픔을 격려하는 그러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성도들에게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신데, 왜 삶에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고난이라는 그 질문에 대한 쉬운 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헛되게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받는 자를 도울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상처입은 치유자'
고후1: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도 아픔이 있습니다.
고난 당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고난이, 우리 주변에
고난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그런 다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삼일교회에 와서 보니까, 아주 활발하게 노숙자 사역을 하시더라고요.
미국에 있는 저희 교회는, 그렇게 삼일교회 처럼 활발하게 하지는 못 해요.
저희도 노숙자 사역을 합니다.
저희가 있는 Fairfax VA 지역은, 겨울에 추우면 바깥에서 잘 수가 없으니까
여러 단체들이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노숙자들을 먹여 주고 재워 주는 일을 교대로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그 일을 하는데, 한 몇 년 전이었던 것 같아요.
저희 교회가 이제 정성스럽게 식사를 준비해서 함께 식사를 하는데
제가 40대 중반된 백인 여자 노숙자와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되었어요.
그분이 제게 이렇게 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 겨울 내내 당신의 교회에 올 수 있는 차례를 너무나 고대하며 기다린다'는 거예요.
제가 물었어요. '왜 그러냐고, 다른 곳은 우리보다 더 좋은 시설을 제공하는 곳도 있는데,
왜 우리 교회 차례가 오기를 그렇게 기다리느냐?'
그랬더니 그분의 대답은 '우리는 당신 교회 오면 존중함을 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we feel respected'
왜냐면요. 우리 교회 교인들은 다 미국 땅에서 이민자예요.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미국 땅에서 나그네의 설움을 알아요. 나그네의 외로움을 알아요.
나그네의 아픔을 알아요.
성도들이 노숙자들을 섬길 때, 그냥 내가 잘 사니까, 내가 가진 자니까
그냥 불쌍하니까, 동정심으로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어 보았던 동료로서, 그들을 섬기기 때문에
그 사랑이 전해진 것 같아요.
저는 제 자신이 이민자 이면서, 또한 이민교회 목회자입니다.
이민자는요, 항상 아웃사이더 들입니다.
어떤 지위에 있든지, 어떤 자리에 있든지
우리는 항상 아웃사이더 들입니다.
항상 나그네로 취급 받는 아픔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 감사한 것은, 그 아픔마저도
하나님께서 써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부족함을 써 주시는 하나님이 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고난을 피할 수 있는 선택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자리에도 아마 고난의 순간을 지나가는 분들이 계시지요.
저는 여러분의 그 고난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는 고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고난이, 그냥 내 고난에만 초점을 맞추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눈이 열리게 되는
그런 고난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형통한 날을 지나가는 분들도 계시죠.
전도서 7:14절에 보니까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라'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형통한 날이 있는 것은 특별한 은혜입니다. 당연하게 받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형통함이 '다리 놓는 자'가 되라는 축복이니까
흘러 보내게 하는 통로가 될 수 있는
그런 복된 형통함을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불러 주신 분이 있다는 것은
결산의 순간이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결산이라는 단어가 좀 부정적이고 무겁게 들릴 수 있지만
사람은 적당한 부담이 있을 때, 현재라는 시간을 생각하며 유용하게 살게 됩니다.
제가 말을 키우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분이 이런 얘기를 해 주시더라고요.
말은 아무런 무게가 올려지지 않았을 때, 맨몸으로 있을 때에 가장 빨리 달릴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말의 등에 안장을 얹어서, 적당한 무게가 올려졌을 때
말은 훨씬 빨리 달린다는 것입니다. 우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야 되는 순간이라는
그런 적당한 양의 짐이 우리의 삶에 올려져 있기 때문에
목적이 있는 인생, 의미 있는 인생을 달려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을 마칠 때,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솔로몬이 했던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는 고백이 아니라
삶을 마치며 우리의 고백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는 다윗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김용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