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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10장, 체육관에 가서 운동 안 하고 구경만 하는 신자들

LNCK 2022. 7. 2. 09:31

◈체육관에 가서 운동 안 하고 구경만 하는 신자들        신10장           여러 설교 정리

 

◑신10장의 줄거리

 

본문 신명기 10장에서도 ‘모세의 회상’은 계속됩니다.

 

▲1.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10:1~11

 

신5장에서 십계명을 선포한 모세는

6~9장까지 ‘그 이후 백성들의 반응’을 주로 얘기했다면

본문 신10장에서 모세는 ‘그 이후 하나님의 반응’을 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10:1~5절에, 십계명 돌 판을 다시 새겨서, 이제는 법궤에 넣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보호하시고, 지켜나가시는 모습입니다.

 

10:6~9절에, 아론이 죽고 나서 후계자를 세우게 하시고, 레위지파 제도를 시행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언약을 계속 지켜나가도록, 주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10:10~11절에, 이에 모세가 (두 번째) ‘40일 금식기도’를 통해서

그런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을 돕습니다. 위로하고 중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11절에서, 언약을 끝까지 성실히 지켜나가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정리하면, 분문 신명기 10장의 전반부에서는 하나님 백성들의 실패와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2. 그 하나님께 신앙으로 반응하라 (라는 모세의 짧은 설교) *신10:12~22

 

11절에 하나님은 (백성들의 신실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계속 신실하실 것을, 이렇게 다짐하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서 백성보다 먼저 길을 떠나라 (모세 네가 앞장 서 가라)

내가 그들에게 주리라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에 그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에 대해 모세는 ‘짧은 설교’를 통해서,

<너희가 어떻게 반응해야 될 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12~13절에는 5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첫째 동사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fear the Lord)’

둘째는 그 모든 도를 ‘행하라(walk in his ways)’

세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love him)’

네 번째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serve him)’

다섯 번째 동사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keep his commandments)’

 

 

◑적용 “체육관에 가서 운동 안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신자들”

 

보통은 책상 앞에서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서 일을 하는 현대인들에게 운동은 필수적이죠.

그래서 헬쓰 클럽(체육관)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체육관까지는 겨우 용기를 내서 갔는데,

체육관에서 또 그냥 우두커니 앉아서 있는 것입니다.

그냥 남들 운동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합니다.

어쩌면 나이가 60이 넘으면, 힘이 들어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늘날의 21세기 신자들이, 예수를 믿는데 그렇다는 비유이죠.

신앙생활은 안 할 수 없으니까, 주일날에 교회는 갑니다.

 

그런데 체육관에 가서, 거의 우두커니 앉아서 구경만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그런 식으로 하는 신자들이 많다는 것이죠.

 

그런데 본문의 모세의 권면을 보십시오.

움직이라는 것입니다. 몸을 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되, 생각으로만 믿지 말하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fear the Lord)

그 모든 도를 ‘행하라(walk in his ways)’

하나님을 ‘사랑하라(love him)’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serve him)’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keep his commandments)’

 

▲구약과 신약은 서로를 해석하는 길잡이가 됩니다.

구약을 바탕으로 신약을 해석해야 하며,

신약을 염두에 두고 구약을 해석해야 합니다.

신약으로 구약을 해석하며, 구약으로 신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신앙생활에 가장 핵심적인 단어를 뽑는다면 ‘경외’입니다.

신약에서 신앙생활에 가장 핵심적인 단어를 찾는다면 ‘믿음’입니다.

 

경외와 믿음은, 본질은 서로 같은 것인데,

즉 하나님을 신앙함인데

 

경외는.. 신앙과 경건의 외적인 측면을 강조한 말이라면,

믿음은.. 신앙과 경건의 내적인 측면을 강조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음에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며,

믿음이 있는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드러나야 하는 거죠.

 

오늘날 신자들이 ‘체육관에서 구경하는’ 식의 신앙생활을 하는 저변에는

‘믿음’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믿음’을 그저 ‘생각으로 믿는 것’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자기는 철썩같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체육관에서 그냥 남들 운동하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지, 액션이 없습니다.

 

‘마음과 생각으로 믿는 것’.. 그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자기가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그저 ‘생각’으로, 그를 좋아하고 마음에 호감을 갖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개념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사랑’은, 물론 생각을 포함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랑의 수고’, ‘사랑의 행위’ ... 그게 성경적 개념의 ‘사랑’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인데,

신명기 6:5절에도 그 말씀이 나오고, 본문 신10:12절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라’가 나오는데,

 

거기서 ‘사랑’이란, 그저 생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 철학은 ‘사랑’을 생각으로 하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사랑’은, 생각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체육관에서 마음으로 구경하는 식으로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정리하면, 우리는 구약과 동떨어진 신약을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신약을 해석할 때는, 구약의 연장선상에서, 구약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을 주시고는 ‘어이쿠, 내가 예전에 잘못된 것을 줬다, 이제 새 것을 받아라’ 하신 게 아닙니다.

 

오늘날 구약과 동떨어진 ‘믿음’ 이해로 말미암아,

많은 신자들이 ‘체육관 health club 에 가서 운동은 안 하고, 앉아서 구경하는 식의’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체육관에 가서 운동은 힘들다고 안 하고, 체육관에만 열심히 출석하는 사람이 건강해 질까요?

Of course not! 입니다. (물론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아무 행함이 없이 교회만 다닌다고... 그가 영적으로 건강하고 충만해질까요?

Absolutely not! 입니다. (절대 아닙니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히11장에 나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히11:17, 20~24

 

신명기 6장에도 나오고, 예수님이 그걸 인용해서 마22장에도 말씀하셨는데,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셨지요.

 

본문 신10장에서도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 모든 도를 행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  :12

라고 명하신 후에.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네 행복을 위한 명령과 규례'라는 것입니다. :13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행복해진다는 것이지요.

   *네 행복을 위한 명령과 규례  https://blog.daum.net/rfcdrfcd/15980090

 


(예화) 미국 기업인 메리 케이 애시는 직원을 대할 때
“내가 저 사람이라면 어떤 대우를 받고 싶은가?”를 늘 고민했습니다.

누군가 직원들을 대하는 자신만의 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황금 채굴꾼의 마음으로 직원들을 대해요."

황금 채굴꾼이 약 0.028킬로의 금을 얻으려면 흙을 얼마나 퍼내야 하는지 아세요? 

수 톤이에요.

그러나 황금 채굴꾼은 수 톤의 흙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의 마음의 눈은 오직 0.028킬로의 황금에 집중되죠. 그래서 황금을 가질 수 있는 거예요.

"나는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어요.
그런데 대부분은 타인의 장점보다 단점에 집중해요.
황금 채굴꾼으로 비유하면, 금보다 흙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격이지요.

그러다 보니 금 같은 인간관계를 만들 수 없죠.
그러나 인간관계의 달인은, 단점에는 관심이 없어요. 오직 장점에만 관심이 있죠.
모든 사람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으니, 어떤 사람과도 금 같은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지요.”

내 이웃의 모습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흙을 보는 것이 아닌, 금을 바라 볼 수 있는 지혜를 주님께 기도합시다.

   그렇지 않고, 자꾸 이웃의 단점을 쳐다보는게 습관이 되다보면
   미국인이 쓰는 말로 lack of social 즉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이 되고 마는 거죠.
   결국 자기에게 큰 손해가 되는 셈입니다.

 


◑절별 해석 –출처-    ....................................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그 때에’-즉 금송아지 숭배 사건시(출 32:1-35) 모세의 중보 기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고 언약의 회복을 약속하여 주신 때를 가리킨다(출33:13-34:3).

 

당시 백성들은 모세의 명을 따라(출 32:20) 금송아지를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고

그것을 물에 뿌린 후 그 물을 마시며 죄를 회개하였고,

또한 모세는 간절한 중보 기도로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9:21, 25-29).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는데, 이는 아무리 크고 흉악한 죄일지라도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욜2:12).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첫번째 십계명의 두 돌판은 돌판 자체도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 주신 것이었다(출 31:18).

그러나 두번째 돌판은 이처럼 모세가 준비하고 하나님은 다만 그것에 십계명만 새겨 주셨는데(2절),

이는 인간이 범죄한후 회개하면 비록 죄사함을 받아 회복은 되지만

그 흉터는 남는다는 사실을 교훈해 준다(출 34:1).

 

2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처음 판에 쓴 말을 쓰리니’-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모든 계명이나 언약은

시대적 상황이나 받는 대상에 따라 형식적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내용은 언제나 동일함을 시사해 준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근본 정신에 있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고 완성되는 복음의 진리를 예표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3:19-31).

 

3 내가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조각목’-아카시아(acacia)나무를 가리키는데

아직도 네게브나 시나이 반도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내구력(耐久力)이 강하여

각종 가구의 재료로 종종 이용된다. 광야 체류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나무를 사용하여

언약궤를 비롯, 성막의 각종 나무 기구들을 만들었다(출25-27, 35-38장).

 

‘궤를 만들고’-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본절은 출 34:1-5에 대한 회고인데, 실제 궤를 만든 때는 출 37:1이하이며,

더군다나 그 궤 속에 십계명 두 돌판을 넣어 두게 된 때는

출애굽 제 2년 1월 1일 이후이기 때문이다(출 40:17, 20).

 

즉 모세가 두번째 십계명 판을 받기 위하여 시내 산에 오른 때와

실제로 언약궤를 만들어 돌판을 보관하게 된 때 사이에는 약 6개월 가량의 시간적 격차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출애굽기와는 달리 모세가 시간적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단지 언약이 회복되어 십계명 두 돌판을 하나님께로 부터 다시 수여받았다는 점과

그 두 돌판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만든 언약궤 속에 보관 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 두 사건을 하나로 묶어 동시에 회고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4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그 총회 날’-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 기슭에 모여 십계명을 듣던 날을 가리킨다<9:10>.

한편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날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지 꼭 50일째 되던 날이었다고 한다.

 

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산에서 내려와서’ -십계명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각종 규례와 법도를 전달 받기 위하여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시내(호렙) 산에 오르내린 기록에 대해서는<출19:16-25 강해, 시내 산과 모세> 부분을 참조하라.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십계명 두 돌판을 소중히 보관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손 대대로 영구히 전수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궤'(법궤, 언약궤, 증거궤) 속에는 십계명 두 돌판 뿐아니라 아론의 싹난 지팡이(민17:10, 히 9:4)

와 만나 한 오멜이 담긴 금항아리(출 16:33, 34)도 함께 보관되었는데,

훗날 솔로몬 성전이 완공되어 그 궤를 안치할 무렵에는 두 돌판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소실된 상태였다(왕상 8:9).

 

6 (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 야아간에서 길을 떠나 모세라에 이르러 아론이 거기서 죽어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이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

 

‘브에롯 브네야아간’-'야칸의 아들들의 우물'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공동 번역은 이를 '야칸 자손의 우물들이 있는 그곳' 으로 번역하였다.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수 없으나 에돔 족속의 땅 변경(邊境)으로 추정되는데,

그 까닭은 '야칸', 즉 '아간'(Akan)이 에서의 후손이기 때문이다(창 36:27, 대상 1:42).

 

‘모세라’-'징벌'이란 뜻이다. 호르 산 부근인데 민33:30에는 '모세롯'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이곳 '모세라'에서의 아론의 죽음이 므리바에서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음을

시사해주는 지명이다(민 20: 24).

 

한편 이스라엘이 브네야아간에서 출발하여 모세라에 도착했다는 본절은,

모세라에서 출발하여 브네야아간에 도착했다는 민 33:30, 31과는 일견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선, 이스라엘이 40년동안 광야를 방황하는 중 적어도 동일 지역을

두번 이상 거듭 지나갔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

여정의 순서가 약간 다르게 기록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아론이 죽고’-민 20:28 주석 참조.

 

‘엘르아살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

아론의 범죄(9:20, 출 32:1-5, 21, 민 12:1)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제사장직이 그의 후손에게 계승되었음을 주지 시켜 준다.

 

한편 이러한 대제사장직의 계승은

모세가 아론의 옷을 엘르아살에게 입히는 상징적 의식으로 이루어졌다(민 20:25-28).

 

한편 패역한 금송아지 숭배 사건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간절한 기도로

언약이 다시금 회복되었다는 사실은, 먼저 십계명 두 돌판의 회복(4절)에서 드러났고,

이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중보자로 활동할 제사장직의 계승(6절)에서 분명히 확증되었다.

 

7 또 거기를 떠나 굿고다에 이르고 굿고다를 떠나 욧바다에 이른즉 그 땅에는 시내가 많았으며

 

‘굿고다’-'갈라진 틈'이란 뜻이다. 가데스 바네아 근처의 '홀하깃갓'(민 33:33)과 동일 지역인 것으로 추정된다.

 

‘욧바다’-'상쾌함'이란 뜻이다. 에시온게벨 북방 21Km 지점인 것으로 추정된다.

본절에 언급된 것처럼 그곳에는 시내가 많아 사람들에게 상쾌감을 안겨다 주었으므로 붙여진 지명인 듯하다.

 

‘시내가 많았었으며’-십계명 두 돌판 회복(4절)과 제사장직 회복(6절)이라는 영적 축복에 이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풍부한 시내로 인도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영육간에 나타내셨다.

 

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

 

‘그 때에’-아론이 죽기(출애굽 제 40년 5월) 훨씬 이전인 출애굽 제 2년 2월을 가리킨다.

이때는 이미 성막이 완성된 때인데(출애굽 제2년 1월, 출 40:17-33),

출애굽 당시부터 모세와 아론을 도와 하나님께 헌신한 레위인들이

이때 특별히 구별되어 성막에서 수종드는 직무를 공식적으로 맡게 되었다(민 3:5-13).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이스라엘 12지파 중 특별히 레위 지파가 성막 봉사의 직임에 선택되어

구별된 이유와 근거에 대해서는, 민 1:48, 49, 3:12, 8:14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 가운데서도 그들을 각기 고핫, 게르손, 므라리 후손들로 구분하여

성막 봉사 직무를 분담시켜 줌으로써 일의 능류과 질서를 도모하셨다(민 4:1-49).

 

‘언약궤를 메이며’-이 일은 레위 지파 중에서도 특별히 고핫 자손이 맡았던 직무이다(민 3:31).

그런데 언악궤를 반드시 어깨에 메고 운반하도록 규정한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이 보관되어 있는 언약궤에 대하여 백성들이 경외감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민 4:15).

그런데 훗날 다윗은 이를 무시하고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 운반하다 하나님의 진노를 산 일이 있다(삼하 6:1 -11).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민 8:14-22 강해, '레위인의 2대 사역'을 참조하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민 6:27) 축복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 축복의 구체적인 내용이 민 6:24-26 부분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실로 이스라엘에게 큰 용기와 위로를 주는 내용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언약 백성이자 그분의 사랑과 관심의 대상임을 명백히 보여 주는 내용이다.

 

그러나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그러한 신적 축복을 선언할 권한을 가짐은,

결코 제사장 스스로의 권위에 기초하지 않은, 오직 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축복의내용을 선언하고 간구할 때마다 반드시 '여호와'란 이름을 전제한 후

각종 축언을 베풀어야 했다. 자세한 내용은 민 6:24-26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9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레위는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분깃'에 해당하는 원어 '헬레크'는 대개 동산(動産)과

관련된 할당물을 가리킨다. 그리고 '기업'에 해당하는 '나할라'는 부동산(不動産)과 관련된 상속물을 가리킨다.

 

영어 성경은 전자를 '몫'(part, portion, share)으로,

그리고 후자를 '상속 재산'(inheritance)으로 각기 번역하였다.

 

한편 이처럼 레위인들이 형제나 선대(先代)로부터 생계 및 상업에 필요한 토지나 물질적인 몫을

분배받지 못한 까닭은, 그들 지파는 오직 종교적인 직무에만 전념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다른 지파들로부터 48성읍(민 35:6, 7, 수 21:41)과 십일조를 받아(민 18:21-34)

그들에게 거주지와 생필품으로 공급해 주셨다.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즉 여호와의 거룩한 일을 하도록 구별된 레위인들이

비록 할당된 기업은 없으나 여호와를 섬기는 봉사의 직임에 충실할 때,

바로 여호와께서 친히 그들의 모든 생계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민18:20).

 

10 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렀고 그 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차마 멸하지 아니하시고

 

‘처음과 같이 사십 주야를’-9:18 주석 참조.

 

1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서 백성보다 먼저 길을 떠나라 내가 그들에게 주리라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에 그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하셨느니라

 

‘진행하라’-원어 '마사'는 '나사'(말뚝을 뽑다)에서 파생된 말로,

진쳤던 장막을 철거하여 짐을 꾸린 후 다시금 출발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패역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중보 기도로 인해 사죄받은 백성들(9:25-29)이

오랫동안 시내 산 앞에 진쳤던 장막을 걷고, 다시금 가나안을 향해 진군할 수 있게 된 것을 가리킨다.

아울러 여호와의 이 명령은 이스라엘을 다시금 당신의 언약 백성으로 인정하셨음을 의미한다.

 

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6:5 주석 참조.

 

‘네 행복을 위하여’-이스라엘의 구속주 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을 섬기고,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전 12:1, 고전 10:3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코 우리의 자유를 저해(沮害)하거나 의문(儀文)의 조항으로

얽어매려는 요구가 아니라, 도리어 우리들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와 복된 길을 제공해 주려는

축복의 방편임을 강조하고 있다(4:40, 5:29, 6:2, 8:2).

 

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본절의 표현에 대하여선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하늘의 광대 무변(廣大無邊)함과 장중함 그리고 지고(至高)함을 나타내는 히브리 문학의 독특한

수사학적 표현이라는 견해이다.

 

둘째, 하늘은 상 중 하 3층으로 되어 있다고 믿는 히브리인들의 우주 개념을 보여 주는 구절이라는 견해이다.

 

이 중 후자는 셋째 하늘에 대하여 이야기한 사도 바울의 사상과 일견 일치되는 듯 하나(고후 12:2),

실상 그가 말한 셋째 하늘은 눈에 보이는 공중과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 그리고 천국을 염두에 둔 말일 뿐이다.

 

또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3'이란 숫자는 더없이 높고 절대적인 것을 뜻하는 완전수이다.

따라서 본절의 경우 전자의 견해가 타당한데, 성경에는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종들의 종',

'왕 중의 왕', '노래 중의 노래', '거룩함 중의 거룩함'등이 있다(17절 , 계 17:14, 19:16).

 

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기뻐하시고-원어 '하솨크'의 기본 뜻은 '달라붙다', '결합하다'이다.

여기서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서 비롯된 사랑(시 91:14)과 연모의 정(21:11)을 가리킨다.

 

‘만민중에서 택하셨음’-모세의 설교 강조점은 이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정된 것이

결코 그들의 공로나 의로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과 무조건적인

사랑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울 수 없으며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할 따름이었다. 이점은 오늘날 하나님의 예정하심(엡 1:11)과

예수의 대속 사역(롬 3:23-26)에 의해 구원받은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이다<레 20:22 -27 강해, 선민 사상 이해>.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할례'(circumcision)는 히브리 남자 아이가 생후 8일째에 행하는 종교 의식으로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순결을 나타내는 징표이다(창17:10-14).

따라서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것은 죄에서 자신을 분리시켜 마음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하고 거룩한 자세를 취하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30:6, 렘4:4, 겔 44:7).

 

‘목을 곧게 하지 말라’-'목이 곧다'(목을 뻣뻣하게 치켜들다)란 말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전혀 굽힐 줄 모르는

인간의 패역한 고집이나 어리석은 거만 등을 나타낼 때 종종 쓰이는 성경의 관용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본절은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하지 말라는 뜻이다<9:6>.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신의 신이시여 주의 주’-하나님 외의 여타 존재들을 신(神)으로 인정하는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적 능력과 최고의 권위를 지닌 유일 무이(唯一無二)하신 참 신임을

역설하고 있는 말이다<4:35>. 즉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과 전능성을 강조한 표현이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이방 종교의 형식주의와 외식주의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다.

동시에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경외, 곧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는 전인격적인 헌신만을 기쁘게 받으시는 분임을 강조해 준다(6:5, 요 4:24).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도덕적, 윤리적으로 부패하기 이를 데 없는 이방신과 달리

절대적으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품성을 증거해 준다(욥 34:12, 사 30:18).

즉 고대 근동의 신들은 마음으로부터의 돌이킴이 없이 바치는 재물에 대하여서도

그대로 가납하는 탐욕자들 이었으나, 하나님은 참된 회개나 믿음이 없이 바치는 제사나

재물에 대하여선 절대 수납치 않으시는 신이신 것이다(삼상 15:22, 대하 19:7).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신원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아사 미쉬파트'는

'정의를 행하다', '정당한 권리를 찾아주다'는 뜻이다.

 

실상 고아나 과부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약자이기 때문에 남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나 천대를

받기 쉬운 계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들을 위해 신원(伸寃)해 주신다는 사실은

힘없고 의지할데 없는 약자들을 간과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증거해 준다(렘 22:16).

실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러한 소외 계층을 사랑으로 보살피라고 특별히

명하셨을 뿐 아니라, 자신을 친히 '고아의 아버지' 또는 '과부의 재판장'으로 선포하셨다(시 68:5).

 

‘나그네’-원어 '게르'는 단순한 여행객이 아니라 자기 혈족을 떠나 히브리인들 가운데 섞여 사는

이방인 우거객(寓居客)을 의미한다. 이들은 이주민으로서 자기 몫의 땅도, 법적 권리도 없던 약자들이었다.

 

한편, 모세가 이처럼 여기서하나님의 여러 속성(유일성, 전능성, 불편부당성, 공의성, 자비성 등)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그러한 여러 속성을 바로 깨달아 알 때,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뜻을 바로 실행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이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이방 모든 잡신들의 무능함과 헛됨도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전에 너희도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이스라엘의 과거 나그네 역사에 대해 모세가 새삼

그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에서 이방인으로서 먼저 절실히 겪었던 설움을 통해,

동일한 상황에 놓인 자들의 심정을 헤아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출 23:9).

2)자신들 역시 하나님께 큰 사랑의 빚을 진 자들임을 주지시켜,

그 빚을 연약한 이웃들에게 갚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친근히 하고’-원어 '베 다바크'는 ' ~에게 매달리다', '~ 에게 착 달라붙다'는 뜻이다.

이 말은 남녀간의 완전한 결합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었는데(창2:24),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가리킨다.

 

21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하나님의 권능과 놀라운 역사가 이방인들에게는 두려움의 원인이 되지만,

그의 백성들에게는 찬송의 동기가 됨을 강조하고 있다(2:25).

 

‘네가 목도한 바...크고 두려운 일’-이 일은 구체적으로 애굽에서 베풀어진 여호와의

10대 재앙을 가리킨다(출 12:29-36 강해, 여호와의 10대 재앙). 나아가 이 일은

홍해 도하사건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거쳐 여리고 맞은 편 모압 평지에

무사히 이르기까지 그 백성들의 목전에서, 그 백성들을 위하여 행사되어진 모든 하나님의 사역을 가리킨다.

 

22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의 성취이다(창 15:5, 22:17).

약 430년전 애굽으로 이주할 때 당시의 이스라엘 조상은 70명에 불과 하였으나(창 46:26, 27),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수는 장정만 60만 가량이었으니(출 12:37),

이 사실이야말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친히 목도하는 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들 중의 대표적인 예가 아닐 수 없으며,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송할 가장 큰 이유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