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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14장, 장례 규례와 음식 규례의 신약적 의미

LNCK 2022. 7. 6. 20:08

신명기 강해. 장례규례와 음식규례의 신약적 의미 (신14장 1-21절) / 피영민 목사 YouTube

 

◈장례 규례와 음식 규례의 신약적 의미          신14:1~21           2020.09.27. 출처

신명기에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모세의 세 편의 설교입니다. 
특별히 12~26장까지는 두 번째 설교에 해당하는데요. 

이 부분에서는, 도덕법(십계명)을 구체적으로 
실제적인 삶의 영역에서 어떻게 적용하느냐?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 신14장 말씀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절은 장례 규례 
2~21절은 음식 규례 
22~29절까지는 십일조 규례

오늘은 장례 규례와 또 음식 규례 이 두 가지를 다루겠습니다.



◑1. 장례 규례     14:1

14: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여기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 이라고 칭하지 않고 
'여호와의 자녀' 라고 칭한 것은 대단히 독특한 경우입니다. 
구약성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칭한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성별한 민족이자 그분의 자녀이니,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따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레11:45).

주기도문처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기 위함이죠. 자녀-부모는 운명공동체입니다. 


신13:13절에 '성읍 거민을 미혹 다른 신을 섬기라' .. 이렇게 말하는 사회 지도자들을 가리켜 
'불량배들' 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예전 성경엔 '잡류'
이 말은 원어로 '벨리알의 자녀들'이죠. 
벨리알은 마귀이기 때문에, '마귀의 자녀' 라고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 와 '마귀의 자녀'가 구별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의 자녀'라고 사람을 표현할 때는 
'그 사람은 그 아비의 성품을 닮은 자라' 하는 의미의 표현인 것입니다. 

마5: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일 뿐만 아니라, 닮아야 마땅하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인 아버지가 하나님 인지, 마귀인지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성품과 행동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례 절차에 있어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내라 ... 이렇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 아비인 마귀의 성품을 드러내는 
두 가지 관습을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 몸을 베지 말라 
-또 하나는 눈썹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그러니까 머리 중앙부에 고속도로처럼 머리를 밀지 말라 
그래서 머리카락을 동서로 이렇게 양분시키지 마라 하는 말씀입니다. 

(대머리는 으례 수치와 멸시의 대상인데, 이방 문화에서 상주가 스스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왕하2:23)

왜 모세가 이렇게 장례 절차까지도 언급하고 있는 것인가요? 
이 장례절차는 일반적으로 그 사회와 사람들의 종교를 표현하고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리아나 팔레스타인 지역의 장례를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방국가들의 장례식에는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요소가 2가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장례식만을 위해서 입는 특별한 복장이 있다는 겁니다. 
검은색 옷을 입거나, 흰색 옷을 입거나, 아니면 옷을 안팎을 바꿔 입거나
아니면 옷의 위아래를 바꿔 입거나 하는 이런 관습이 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의도적으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는 관습이 있다고 합니다. 
모세가 경계한 1절 말씀은, 이 두 가지 관습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방인들의 장례 풍속에 이런 요소들이 존재하는가요? 
이방인들은, 사람의 육신이 죽으면 
그 영혼은 육신이 없는 채 공중에 돌아다니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존재가 되는데 
선한 영향보다는 해로운 악한 영향을 주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이방인들 마음속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두려워하는' 그런 신앙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샤머니즘과 비슷하지요.
그러므로 이방인들의 장례풍습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겁을 주거나 혹은 달래거나 해서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려는, 그런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런 이방인 장례풍습을 행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축복과 저주는, 죽은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모세는 신명기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 번째 신명기 설교 내용이 (신28~30장) 
'하나님으로부터 축복과 저주가 온다'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들도, 가족이 사망한 경우에 
슬퍼하며 애통하는 것을, 성경이 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과 애통은, 뭐 죽은 사람의 영혼을 달래려고 한다든가, 
죽은 사람의 영혼에 영향을 주려고 한다든가... 그런 것이 아니고 
죽은 사람과 살아있을 때 나누었던 교제가 잠시 단절되게 된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그것을 금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처음 나오는 장례 기록이,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가 127세에 사망했을 때의 기록입니다.
창23:2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헷 족속에게서 마므레, 즉 헤브론 앞에 막벨라 굴을 사서 장례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마므레'는 우리 강남중앙침례 교회의 묘지 이름을 '마므레'라고 지었는데 
이 마므레는 헤브론 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혼은, 육신을 떠날 지라도 
천국에 들어가서 평안을 누리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부활하여 영생할 것이기 때문에 
너무 슬퍼할 이유는 없습니다. 

잠시 슬퍼할 수 있어도, 너무 애통하고 너무 오래 슬퍼하고..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살전4:13절에도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랬습니다. 

불신자들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슬프겠지요. 
사람이 죽는 것을 '망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목숨이 망한(끊어진)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죠.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망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생에서의 삶을 잘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은 장례문화에 대해서 별도의 자세한 지시 내용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성경은, 장래에 대해서, 3가지 요소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죽은 사람의 시신에 대해서 적절한 케어를 해줘야 됩니다.
시신을 잘 관리해 줘야 한다는 거죠. 

죽은 사람의 시신이 장사되지 못하고, 땅 바닥에 버려지고 
짐승의 먹이가 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꼭 매장 해야 되느냐?
화장을 할 수도 있느냐?' 이런 문제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구약은 주로 매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땅도 넓고, 사람은 적고 하니까, 매장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는, 죽은 사람을 일일이 매장할 수 없기 때문에 
화장 문화도 발달하고 있는 것인데 

어떤 설교자들은 '성도들은 반드시 매장해야 된다' 이렇게 설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설교의 근거는, 성경에서 찾을 수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꼭 매장을 해야, 매장된 곳에서 부활이 일어날 수 있다..는 그런 믿음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매장을 하나 화장을 하나 
나중에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동일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의 시신을 적절하게 관리하면 되는 것이지.. 
죽은 사람의 시신을 아무데나 버려도 두지는 말라 이것이 첫째 요소이고, 

2) 두 번째로, 죽은 성도를 '망자'라 부르지 않고, 
도리어 '승자'이기 때문에 '이긴 사람들'이기 때문에 
죽은 사람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말라, 
그리고 부활의 약속이 있음을 서로 상기시키고 서로 위로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장례식에 가서 상주를 위로하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것은 
올바른 성도의 습관인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장례를 위해 스스로 몸을 상하게 하거나 
스스로 자기 몸에 피를 낸다든가, 뭐 일부 몸을 상해 한다든가 
또 여러 해 동안 특별한 옷(상복)을 입고 별도의 생활을 하는... 
그런 이방인들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효도라고 생각하는 옛날 풍습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죠. 

자기 몸을 채찍질하고, 고통을 주고...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위 스스로 채찍질 하며 self-flagelation 스스로 자기 몸을 괴롭게 하는 짓,
그런 짓을 하지 마라, 그런 것들은 다 이방 풍속이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성경의 원리에 따라서, 장례 절차도 잘 행해야 될 것이고 
특별히 우리나라 장례에는 유교의 많은 행습 들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주의해서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음식 교례     :2~21

유대인들은 특별히 지금까지도 음식규례를 대단히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의 깊게 이 규례를 지키고 있습니다.  *코셔 음식

그러니까 '피 없는 고기'를 먹는 데는 유대인들의 기술이 가장 발달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피를 뺀다 해도, 완전히 피를 다 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불고기를 먹던, 스테이크를 먹던, 결국은 그 안에 피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음식 규례를 엄격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또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도 음식 규례는 폐지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음식 규례를 존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안식교도들에게서 그런 경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음식 규례를 둘러싼 논쟁은 
'음식규례를 주신 이유가 무엇이냐?' 그 이유에 관한 논쟁입니다. 

왜 하나님은 짐승이나 물고기나 새들 가운데서 
정결한 것도 있고, 부정한 것도 있다고 말씀을 하시는가요? 

왜 정결한 것만 먹고, 부정한 것은 먹지 말라고 말씀하시는가요? 

또 모세가 정결하지 않다고 말씀한 짐승과, 고기와, 새들을 
오늘날 우리도 부정한 unclean 짐승으로 보아야 하는가? 
오늘날 우리도 그것을 먹지 말아야 되는가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러니까 이 음식 규례를 주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요?
이런 주제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중요한 4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 첫째로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정한 짐승들은 이방 종교의 제사와 관련이 깊은 짐승들이라는 것이죠. 

특별히 돼지가 이방 종교의 제사와 관련이 많다는 거에요. 
사65:4절에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으며, 가중한 물건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그랬어요. 

그러면서 '나는 너보다 거룩하다'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있다고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신을 섬길 때 
돼지고기를 먹는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보응하신다고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도 문제가 있죠. 
왜냐하면 이방인의 제사에서 꼭 돼지만 쓰는 건 아닙니다. 

이방인의 제사에도, 하나님이 정하다 clean 고 말씀하신 
소나 양이 많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부정한 짐승은, 이방 종교의 제사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하는 견해는 옳지 않죠. 

2) 두 번째로 "건강상의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짐승이나 물고기나 새라도 깨끗한 곳에서 살고, 깨끗한 것을 먹고 사는 짐승들이 
위생상으로나 건강상으로도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정결한 짐승들이 그렇다는 거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건강을 위해서 이 음식 규례를 가르쳤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과학자들 중에도 있는데,
그들은 '성경이 부정하다고 말씀하신 짐승들은 위생 상의 문제가 있다. 
먹으면 건강 상의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을 봐라' 하면서, 
구약의 음식 규례가 옳고 타당하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과학자들의 보충 증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 자체로 권위를 갖는 것이지 
과학자들이 인정해줘야 성경이 성경이 되고, 
과학자들이 부인하면 성경이 부인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일부 과학자들은 창조를 인정하지 않죠. 
그러면 성경이 잘못된 건가요? 아닙니다. 과학자들이 잘못 됐지요. 

과학자들이 자기들의 짧은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연구가 성경을 입증해야, 성경이 비로소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전제론적으로, 즉 '이미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를 갖는다' 
이렇게 <전제론적으로 변증>을 해야지, 

'과학자들이 연구해 보니까 과학적으로 맞더라' 하는 <증거론적으로 변증>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연구는 단지 보조적인 기능으로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견해, 즉 건강 상의 이유로 음식 규례를 주셨다는 견해는 
성경 어디에서도 '건강을 위해서 음식 규례를 주셨다'는 그런 기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9:2절에, 하나님이 노아홍수 이후의 사람들에게 
야채, 식물 음식 이외에, 육식도 다 음식으로 주셨습니다. 음식의 범위가 확대되었습니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산 동물은 다 먹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노아홍수 이후에, 
무슨 부정한 짐승이 따로 있고, 정결한 짐승이 따로 있고 
부정한 거 먹지 말고, 정결한 것만 먹어라! ..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 먹어라 모든 짐승을 너희에게 음식으로 주셨다' 그랬죠. 

또 딤전4:3~5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여기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다 선하다'고 했지, 
'하나님이 지으신 것 가운데 부정한 게 있다..' 이런 말씀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인간의 건강을 기준해서 구별되었다.. 라는 견해는 합당치 않습니다.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이 그럼 건강하지 않아야 되는데 
실제로 장수마을 사람들은 돼지고기 수육을 많이 먹지 않습니까. 
돼지 수육을 금방 삶아 가지고 김장김치에 얹어서 먹는 그 맛은 잊을 수가 없죠. 

그러니까 건강 상의 이유, 위생 상의 이유로 
정결한 짐승, 부정한 짐승이 구별됐다... 이런 견해는 전혀 근거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나중에 더 자세한 논증이 나옵니다)

 

3) 세 번째로는 이게 "상징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정한 동물이라고 말씀하신 동물들은 
그 형태나 습관들이 
성도의 행동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하는 얘기에요. 

예를 들어, '정한 짐승은 굽이 있어야 되고, 또 새김질을 해야 된다'고 말씀했는데 
'새김질 하는 짐승이 정하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씀을 여러 번 되새김질해야 한다.. 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뭐 그럴 듯한 얘기죠.

 

또한 '굽이 있는' 짐승이 정한 것은, 세상과 분리되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된다.. 라고 해석하는데요,

또한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이 본문에 '지느러미도 없고 또 비늘도 없는 생선들이 부정하다' 하신 것은, 
즉 문어, 오징어 같은 것을 먹지 말라 하신 것은, 

'흐물흐물 하기 때문이고,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흐물흐물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걸 상징하는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상징적인 견해는, 부분적으로 일리가 있는 주장이에요. 
왜냐하면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부정한 음식을 보자기에 싸서, 그릇에 담아내려 보내시고 

베드로가 '나는 부정한 음식은 안 먹겠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깨끗하다 하신 것을 네가 부정하다 하지 마라' 그랬어요. 

'부정한 짐승'이 이방인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죠. 
그러니까 이 상징적인 견해는 일부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를 포괄하는 그런 견해는 되지 못합니다.  
전체적으로 이 음식 규례를 주신 목적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타당한 견해가 뭔가요? 

4) 네 번째 견해인데, 음식 규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인과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별 separation 은, 다른 말로 하면 '거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유지하시기 위한 목적이다' 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훈련' training for holiness, training for separation 
그것이 <음식 규례를 정하신 목적>이라는 겁니다. 

거룩의 훈련을 위한 목적, 또 이방인과 분리를 위한 목적... 그런 것이죠. 

신14:4~8절은, 육지생물 가운데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했습니다. 
9~10절은, 바다에 사는 물고기 가운데 정결한 물고기와 부정한 물고기를 구별했습니다. 
11~20절은, 하늘의 새들 가운데 정결한 새와 부정한 새를 구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지와 바다와 하늘의 순서인데 
창1장에서 하나님의 만물을 창조하실 때의 순서와 동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어떤 것은 정하고, 어떤 것은 부정하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창1: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부정한 짐승이 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러므로 부정한 짐승과 고기와 새는 
왜 부정한 짐승이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알 수가 없다는 거에요.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렇게 음식을 구별하신 목적은 있다는 거죠. 
하나님은 왜, 무슨 목적으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음식 규례를 주시고 
정한 짐승으로 구별된 것들만 음식으로 먹으라고 하셨는가요? 

그 이유는 
-건강상의 이유도 아니고 
-단지 상징적인 이유도 아니고 
-또 그 짐승들이 이방인의 제사에 사용 되었기 때문도 아니고... 그럼 뭐냐?

1)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인들로부터 철저하게 분리시키려는 목적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과 안 먹는 사람이 
결혼해서 편안히 함께 살 수가 있을까요? 없지요. 음식가지고 매일 싸울 것 아니겠습니까.

'수육 먹으러 가자' 하면, 한 사람은 '안 된다'. 
또 김치찌개에 돼지고기 넣자, 한 사람은 '안 된다'

이렇게 허구한 날 음식가지고 싸울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결혼이 될 수가 없죠. 

또 음식이 다르면 가까운 친구도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먹는 게 각자 다른데 어떻게 친구가 돼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음식 규례로 말미암아 
철저히 분리된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을 가르치려는 목적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 때에 
선악과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먹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선악과 자체는 아무 잘못이나 문제가 있을리 없습니다.
그러나 아담에게 그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은 
순종을 가르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너는 불순종하는 존재가 되고 
너는 나를 거역한 존재가 되고 
너는 죄에 빠지는 존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을 가르치는 목적으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셨던 것입니다. 

분리와 순종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거룩'이라는 개념, 이것은 '분리, 구별됨'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분리된 백성, 독특한 백성,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그러니까 음식 규례의 제일 중요한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의 경건훈련, 거룩의 훈련에 있다는 겁니다. 

음식 자체의 정결함과 부정함을 가르친 것이, 음식 규례를 주신 목적이 아니라는 거에요. 
이스라엘 백성의 건강 유지를 위해서, 음식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14:2절과 21절에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즉 거룩한 백성, 구별된 백성이라는 내용이 두 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음식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인들로부터 철저하게 구별시키신 것입니다. 
음식이 다르면 함께 거주할 수 없고, 함께 살 수 없습니다. 

레위기 11장에도 동일한 음식 규례가 나오는데, 신명기와 똑같아요.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는 레위기의 근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이 음식 규례를 주신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른 이방인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다른 이방인들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백성, 성민으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음식 규례의 끝부분인 신14:21절에는 두 가지 내용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 것이라' 했고요.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그랬습니다. 

오늘 날은 소위 '델리커시 Delicacy' 라고 해서 
음식의 맛을 즐기는 그런 문화가 많이 형성돼 있는데 
델리커시를 즐기는 사람들은, 우유에다 삶은 고기를 맛이 있게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동물을 음식으로 먹더라도 
생명 자체에 대한 존중심을 잃지 말라는 것이죠. 

음식으로 먹어도, 생명을 경시하며 먹지는 말라는 겁니다. 

염소 새끼가, 그 어미의 젖으로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어미의 젖은 염소 새끼의 생명이에요. 

그런데 그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  *어미의 젖
자신을 죽이는 도구가 된다면  *새끼 염소
그것은 하나님의 원치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이방 풍습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거기에 주술적 의미도 담겨 있다고 봅니다.

생명을 유지하지 못해 죽은 짐승도 
먹지도 말고, 그리고 남에게 주지도 말라는 거에요. 
종에게도 그런 건 주지 말고, 객에게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규례는, '음식을 먹더라도, 생명을 존중하며 먹어라' 하는 교훈입니다. 


◑3. 그러면 이 "음식 규례가 신약에서 무슨 의미를 갖는가?" 
음식규례는 과연 신약에서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문제에 관해서 예수님은 대단히 급진적인 견해를 말씀하셨습니다. 
막7: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않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하고 마가가 기록했어요. 

'모든 식물은 깨끗하다' 이 말씀은 마가의 해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을 빨간색으로 표시한 성경을 보면 
이 말씀은 빨간색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마가가 인용을 했다는 얘기죠. 
그러므로 모든 음식은 깨끗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음식의 정함과 부정함은 사라졌어요. 
신약 시대에 음식 규례는 완전히 철폐되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이 한 마디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게 아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행10:11~16절은 베드로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베드로가 부정한 음식이라고 생각한 것을 
하나님은 깨끗게 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정한 음식은 이방인을 상징하는 것인데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별될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유대인이 따로 구별된 민족이 될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은 완전히 철폐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은 없어졌다는 거에요. 
유대인들이 이런 음식 규례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음식 규례를 가지고 구별된 백성이 된 것은 
이것은 구약시대의 그림자일 뿐이지 
이것이 영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거에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음식을 통해서 구별된 백성이 되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은 철폐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음식 규례는, 그 그림자로서의 기능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엡2:14~15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그러니까 예수님이 육체로 피를 흘리시고 구속을 완성하심으로써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음식을 별도로 먹으면서 
'나는 너희와 다른.. 내가 너희보다 거룩한 백성이다'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죠. 

거룩한 백성은, 음식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의 백성들이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어진 것입니다. 

바울도, 음식 규례처럼, 유대인을 이방인로부터 철저히 구별시키는 
의문에 속한 율법은 예수님이 폐하셨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골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그랬어요. 

'이제는 음식으로 사람을 구별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돼지고기 먹는다고 이방인 취급하고, 
또 우리 한국사람들은 특별히 어디 가면 '개고기 먹는다'고 개 취급 당하고 이러는데.. 
음식으로 사람 구별하지 말라는 거죠. 

제(피영민 목사)가 미국에서 1년 동안 교환교수로 가르칠 때 
한 학생이 제게 질문했어요. '교수님도 개고기 먹느냐고?' 

그래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으로 완전 포위가 되었을 때 
자기 자식을 잡아 먹은 것도 모르느냐? 
우리 한국 사람들이 어려울 때, 고기가 없어서, 먹을 거라고는 개밖에 없어서 
먹은 것을 가지고 왜 네가 정죄를 하느냐?'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죠. 

음식가지고 사람을 구별하고 폄론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음식규례는 신약 시대에 폐지된 것이다... 이 말씀이죠. 

어떤 교회에 가니까 목사님이 '성도는 돼지고기 먹지 말라'고 가르친 교회도 있어요. 
'그분은 이 문제에 관해서 대단히 혼돈에 빠진 목사님이다'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돼지고기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죠. 

딤전4:4~5절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그랬어요. 

하나님이 이제 부정하다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신 그 음식들은 
다 '말씀으로 거룩해졌다' 하신 것이죠. 

신약시대는 음식을 놓고 부정하냐, 정하냐 따지지 말고 
기도 하고 감사함으로..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짓겠습니다. 
신약에서 이미 폐지된 구약의 규례(본문 신14장)를 왜 우리가 공부를 해야 되는가요? 

하나님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인들과는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성도들에게
불신자들과는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니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영적인 교훈을 지금도 주시는 것입니다. 

이 근본적인 교훈은 폐지될 수도 없고, 변할 수도 없습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 거룩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백성이 이미 되었으니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구별하셔서 
거룩한 백성이 이미 되었으니, 너희는 거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 가지 면에서, 불신자들과는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니, 이 세 가지 분야에서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1) 첫째는 "진리 면에서" 성도들은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지식의 면에서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신학이라는 면에서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이 믿는 것을 우리는 따를 수 없습니다. 
진화론을 따를 수 없고, 성경에 어긋나는 가르침을 따를 수 없고 
"진리 면에서" 성도들은, 성경의 진리를 믿는 것, 
성경의 진리를 확고하게 믿는 것으로 인해서 구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윤리 면에서" 성도들은 구별되어서 
불신자들의 윤리를 따르지 말고, 성경의 윤리를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윤리는 십계명이죠. 이 성경의 윤리를 우리는 따라야 됩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면적으로 거역하고... 그런 시대가 되었어요. 
하나님이 말씀하신 윤리를 업신여기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윤리 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윤리를 따라서 
불신자들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3) 세 번째는 교제 면에서, 성도들은 불신자들과 너무 가까운 교제를 하지 말아야 됩니다. 
본질상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없어요. 불신자들과 어떻게, 무슨 깊은 신앙적인 대화를 하겠습니까? 
또 무슨 교제를 나누겠습니까? 

불신자와 절친한 친구가 결코 될 수가 없습니다. 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더더구나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될 수 없습니다. 
속에 있는 영이 다른데, 어떻게 함께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진리 Truth 면에서 구별되고 
윤리 Ethics 면에서 구별되고 
교제 fellowship 면에서 구별되고... 
이 세 가지 면에서 이방인들과는 철저하게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신14장 음식 규례가 가르치는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가 이 세 가지 면에서 경건을 훈련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절별 해석  -출처- .................................................................

 

: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너희는...여호와의 자녀니’ - 이스라엘이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이유이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성별한 민족이자 그분의 자녀이니,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따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레11:45).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요 1:12, 갈 5:16-24).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 사자(死者)를 위해 자기 몸을 자해(自害)하던 행위는

고대 이방인들의 고행적(苦行的)인 풍습이었다. 즉 당시 이교도들은 장례식 때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고 음부(陰部)의 신들을 달래기 위해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는 자해 행위를 자행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방 우상 종교의 그릇된 고행주의(苦行主義), 곧 자학과 고행을 통해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마음을 움직이며, 그리하여 동정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미신적인 행위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히 구별받은 이스라엘은

결단코 그러한 우상 숭배적인 이방인들의 장례풍습을 본받지 말아야 했다(레19:28).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 직역하면 '네 눈 사이를 대머리지게 하지 말라'이다.

히브리인들은 관습상 머리털을 밀지 아니하였다. 따라서 대머리는 으례 수치와 멸시의 대상이었다(왕하2:23).

그렇지만 예외적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조국의 멸망 등에 임해서는 머리털을 깎음으로

종교적 애도(哀悼) 외에는 지나친 호상(護喪)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레21:5

 

한편 본절은 진정 생의 궁극적 소망과 가치를 하나님께 둔 자는

비록 사랑하는 부모 형제 친척의 상(喪)을 당했다 할지라도

결코 극단적인 좌절 상태에 빠져들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아울러 교훈해 준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도리어 이 땅에서의 수고로운 삶을 끝내고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하는 복된 일이기 때문이다(살전4:13-18).

 

이런 견지에서 아인즈워드(Ainsworth)의 다음과 같은 인용구는 음미할 만하다.

"나무 토막을 향하여 너는 나의 아비라 하며, 돌덩이를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는(렘2:27)

이교도들은 세상의 아비가 죽었을 때에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해 줄 아비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베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그러나 영원토록 살아 역사하시는 하늘 아버지

여호와를 가진 성도들은 비록 육신의 아비가 죽었다 할지라도

극단적으로 자기 몸을 벨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결코

아비없는 자가 아니라 계속 아비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2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너는...여호와의 성민이라’ -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우상 숭배적인 각종 풍습을 좇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즉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열방 백성들 중에서

거룩히 성별해 놓았기 때문이다(레11:44,45).

 

‘여호와께서...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기업의 백성이 된 것은

그들에게 어떠한 자격이나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신7:7).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기쁘신 뜻을 좇아 그들을 만민 중에서 구별해 놓으셨기

때문임을 보여 준다<레11:29-47강해, 성경에 나타난 거룩의 개념>.

 

이런 점에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따라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도 예외일 수는 없다(엡1:11).

 

:3 너는 가증한 것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가증한 물건’ - 원어 '토에바'는 '타아브'(혐오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서 가증하다고 규정해 놓으신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수 없도록 규정된 짐승 뿐 아니라(4-20절, 레11:1-31),

그 밖에 하나님께서 부정하다고 규정해 놓은 모든 것(레12-15장)이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들을 가까이 하였을 경우에는 의식적(儀式的)으로 부정한 자가 되었다(7:26).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이러한 규례는 이스라엘의 위생적인(hygienic) 식생활을 배려해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목적은 종교적이고도 영적인 차원에서 찾을 수 있다.

 

1) 구약의 모든 의식법(儀式法)이 그러하듯 외적 정결 의식을 통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내적 신앙의 성결에 이르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2) 모든 부정한 것으로 인한 오염에서 부터 성결을 유지케 함으로, 백성들이 죄로부터도

자신을 거룩히 보존하는 '성결의 도'를 터득토록하기 위함이었다.

3) 가장 기본적인 식생활에서조차 이방인들과 엄격히 구별된 삶을살게 함으로,

백성들이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구별받은 선민(選民)임을 늘 기억하게하기 위함이었다<레11:1-8>.

 

:4 너희가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곧 소와 양과 염소와

 

‘먹을 만한 짐승’ -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짐승이 이에 해당된다(6절).

 

‘소와 양과 염소’ - 위의 2가지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정결한 짐승이자,

또 하나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로 쓰이는 대표적인 짐승들이다(레1:3-13).

 

:5 사슴과 노루와 불그스름한 사슴과 산 염소와 볼기가 흰 노루와 뿔이 긴 사슴과 산양들이라

 

‘불그스럼한 사슴’ - 원어 '야흐무르'는 '하마르'(붉다)에서 온 단어로, '꽃사슴'(공동번역)을 가리킨다.

 

‘볼기 흰 노루’ - 원어 '디숀'은 염소와 비슷하나 그보다는 몸이 크고 살진 편인 '영양'(antelope)을 가리킨다.

 

:6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정결한 짐승의 2대 조건이 명시되고 있다.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 여기서 '굽'은 '찢다', '나누다'란 뜻의 '파라스'에서 파생된 말로,

곧 완전히 둘로 나뉘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새김질도 하는 것’ - 한편 이러한 2대 조건을 지닌 짐승들은 대개 초식 동물이면서,

동시에 성질이 사납지 않은 평화스럽고 온순한 짐승들이다. 레11:3 주석 참조.

 

:7 다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낙타와 토끼와 사반, 그것들은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

 

‘돼지는...부정하니’ - 레11:7주석 참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 사체(死體)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한 것은 죽음을 죄의 결과로 여긴(롬6:23)

성경의 독특한 사상의 반영이다(레21, 17, 22:4). 그러므로 비록 살아 있는 것이라도

부정한 짐승을 먹거나 접촉하면 부정한 일로 간주되었으니,

그 주검을 접촉하는 것은 더더욱 부정한 일로 간주되었다<레11:8>.

 

:8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시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9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이런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요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 - 물 속에 사는 어류(魚類)의 2가지 정결(淨潔) 조건은

곧 1) 지느러미가 있을 것과

2) 비늘이 있을 것이다.

이 중 한가지만이라도 결(缺)한 것은 부정하여 먹을 수 없었다.

 

:10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에게 부정함이니라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 - 조개 따위의 연체 동물, 가재나 새우 따위의 갑각류,

미꾸라지나 뱀장어 등과 같은 비늘이 없는 어족(魚族)이 다 이속에 속한다<레 11:10>.

 

:11 정한 새는 모두 너희가 먹으려니와

 

‘정한 새’ - 어떠한 종류가 정한 새이며, 또 어떤 종류가 부정한 새인지 그 구분 기준이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볼 때 부정한 새는 죽은 시체의 고기를 먹거나 다른 짐승의 피를 흘리는 맹금류이며,

또는 거친 들판에서 홀로 외롭게 사는 것들, 그리고 더러운 장소에 둥지를 털거나

혹은 몸집이 아주 작은 새 등임을 알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류(類)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정한 새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12 이런 것은 먹지 못할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이런 것은 먹지 못할지니’ - 부정한 새로 간주된 것들의 대체적인 특징은 맹금류이거나

죽은 짐승의 썩은 고기를 먹는 것 또는 군집(群集) 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거친들이나 높은 산악 지대에서 외딴 생활을 하는 것 등이다<레 11:13-19>.

 

‘물수리’ - '바다 독수리'(ospray)의 일종인데, 공동 번역은 이를 '흰꼬리수리'로 번역하고 있다<레11:13>.

 

:13 매와 새매와 매의 종류와

 

‘매의 종류’ - 독수리류 보다는 몸집이 작으나 역시 육식(肉食)을 하는 새이다.

작은새나 병아리 따위를 주로 잡아 먹는데, 사냥용으로 사육되기도 한다<레 11:14>.

 

:14 까마귀 종류와

 

‘까마귀 종류’ - 육류(肉類)는 무슨 종류든지 거의 다 먹으며, 이는 죽은 것이든 죽어가고 있는 것이든

사양하지 않는 성질을 지닌다. 팔레스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로는 '큰 까마귀'(raven),

'부채꼴 꼬리 까마귀'(fantailed raven), '뿔 까마귀'(hooded crow), '어치'(jay) 등이 있으며,

'땅 까마귀'(rook)와 '갈가마귀'(jackdaw)도 겨울철에는 팔레스틴으로 날아든다<레 11:15>.

 

:15 타조와 타흐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타흐마스’ - 정확히 어떠한 종류의 새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공동 번역은 이를

'올빼미'로 번역하고 있으며, KJV나 RSV등은 '밤매'(nighthawk)로 번역하고 있다<레 11:16>.

 

:16 올빼미와 부엉이와 흰 올빼미와

 

‘올빼미’ - 레 11:17 주석 참조.

 

‘흰 올빼미’ - 해오라기와 비슷하나 몸빛은 흰색이다. 주로 동부 시베리아, 중국, 만주, 한국 등지에

서식하는데, 세계의 희귀종 중 하나이다<레11:18>.

 

:17 당아와 올응과 노자와

 

‘당아’ - 주로 광야와 같은 황폐한 땅에 사는 새로 일명 '사다새'(pelican)로도 불리운다<레 11:18>.

 

‘올응’ - 일종의 새끼 독수리이다<레 11:18>.

 

‘노자’ - '가마우지'(cormorant)를 가리킨다. 연못이나 하천, 해만(海灣) 등지에 서식하면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는데, 주로 한국과 일본에 분포한다<레 11:17>.

 

:18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며

 

‘황새 종류’ - 레 11:19주석 참조.

 

‘대승’ - '오디새'(hoopoe)나 '댕기물떼새'(lapwing)를 가리킨다.

 

‘박쥐’ - 실상은 포유 동물이나, 공중을 완전하게 날아다닐 수 있으므로 고대인들은 이를 조류로 분류하였다<레 11:17>.

 

:19 또 날기도 하고 기어다니기도 하는 것은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먹지 말 것이나

:20 정한 새는 모두 너희가 먹을지니라

 

‘날기도 하고 기어다니기도 하는 것’ - 즉 곤충 가운데서 부정한 것에 해당하는 종류이다<레 11:20-23>.

 

‘정한 새’ - 11절 주석 참조.

 

:21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스스로 죽은 모든 것은 먹지 말 것이나

그것을 성중에 거류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파는 것은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너희는...여호와의 성민이라’ - 2절 주석 참조.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 것이니’ - 비록 먹도록 허용된 정결한 짐승이라 할지라도

자연사(自然死)한 것은 먹지 말라는 뜻이다(출22:31, 레7:24, 17:15, 22:8).

왜냐하면 자연사했거나 다른 동물에게 죽임당한 짐승의 경우에는

그 고기 속에 피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먹을 시에는 곧 '피를 고기와 아울러 먹지 말라'(12:23)는 계명을 어기는 셈이 된다.

이처럼 율법은 그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피의 식용(食用)을 엄격히 금지시키고 있다. 12:23 주석 참조.

 

‘성 중에 우거하는 객’ -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 나그네를 가리킨다.

즉 어느 정도 이스라엘 사회에 동화되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로 작정하였으면서도,

아직 할례를 받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지 못한 자들을 가리킨다.

 

‘이방인’ - 이스라엘인의 영토에는 거주하지 않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이스라엘과 접촉하던 순전한 외국인을 가리킨다.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가나안 사람들의 사악한 식생활과 미신적인 종교 의식을 좇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가나안 족속들은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는 것이 최고의 맛을 내는 요리법이라고

생각하였을 뿐 아니라, 그러한 행위에 주술적(呪術的) 의미까지 부여하여 이를 종종 자행하였다.

 

그러나 실로 염소새끼를 그 생명의 유지원(維持源)인 어미의 젖에 삶는 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아주 야만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같은 이방인들의 사악한 관습을 성민(聖民) 이스라엘은

결코 답습하지 말 것을 단호히 명령하셨다(출23:19).

 

이처럼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의 근본 정신은 일상 생활의 세부적인 면과 하찮은 미물(微物)에까지

그 사랑과 긍휼이 미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출 23:19 주석 참조.

 

:2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토지 소산의 십일조’ - 여기서는 특별히 1/10을 바치고 나머지 소출에서 다시 1/10을

구별하여 바치는 소위 '제 2의 십일조'를 가리킨다<창 28:10-22강해, 구약의 십일조>.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본절은 소위 '제2의 십일조'의 용도(用途)를 밝히는 부분이다.

그것은 곧 백성들이 직접 중앙 성소로 가지고 올라가서, 한 해 동안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감사 축제를 드리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다(12:11,12,17-19).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 이스라엘의 유일 중앙 성소로 택정된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 12:5 주석 참조.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 -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팔레스틴의 3대 소산물로서

곧 모든 농작물을 대표한다. 따라서 이는 곧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수확한 모든 농작물의

십일조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7:13>.

 

‘네 우양의 처음난 것’ - 십일조와 더불어 하나님께 돌려야 마땅한 모든 초태생들의 대표물이다<12:6>.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 '제 2의 십일조'를 시행하는 목적이다.

즉 그것은 백성들이 한 해 동안의 풍성한 소출을 거둔 데 대하여

온 가족과 더불어 즐거워하며, 받은 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케 함으로써,

온전히 여호와를 경외할 수 있게 교훈하기 위함이었다.

 

: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각 지파별로 흩어져 정착하였을 때,

만일 자신의 거처가 중앙 성소로부터 너무 멀면 농작물의 십일조와 우양의 처음 난 것들을

직접 갖고 가는 대신, 그것을 일단 현금으로 바꾸어 가지고 가다가 성소 근처에서

다시 감사축제에 필요한 예물들을 구입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제도는 인간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주어진 규례인데,

하나님의 자상하신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이러한 제도가 타락하여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돈을 바꾸고 예물을 팔며 이를 통해 매매인이 무수한 폭리를 취하는

불의가 공공연히 자행되었다(막11:15-18).

 

그 결과 예수께로부터 엄한 책망을 당하였는데, 이는 하나님께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바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드리는 자의 내면적 신앙과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임을

단적으로 증명해 보여 주는 한 예이다,민18:21-32 강해, 십일조 드리는 자의 올바른 자세>.

 

:26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포도주’ - 원어 '야인'은 대개 포도주를 으깬 후 달여 만든 '포도즙'을가리킨다(창 9:21, 삼상 1:14, 전 10:19).

 

‘독주’ - 원어 '쉐카르'는 과일이나 곡식, 꿀 따위를 발효하여 증류시킨 것을 가리키는데,

포도주와 달리 아주 독한 음료이다. 한편 랑게(Lange)는 포도로 만들 술이 곧 '포도주'이고,

포도가 아닌 다른 재료로 만든 것이 곧 '독주'라고 해석하셨다.

 

‘네 권속’ - 자신의 일가 친척 뿐 아니라, 수하에 있는 종들까지 함께 지칭하는 말이다(12:12).

 

:27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레위인은...저버리지 말지니라’ - 레위인은 오로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여

종교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자들이므로, 생업에 종사할 겨를이 없었고,

따라서 생업을 위한 어떤 기업이나 분깃이 주어지지 아니하였다(12:12, 민18:24).

그러므로 모세 율법은 그 지방 사람들이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규정하였다<12:17-19>.

 

: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 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매 삼년 끝에...십분 일’ - 안식년(레25:8)을 기준으로 세번째 해가 되는 때,

곧 제3년과 제 6년째에 시행하던 소위 '제 3의 십일조'를 가리킨다.

<창28:10-22 강해, 구약의 십일조>.

 

이 '제 3의 십일조'란 '제 2의 십일조'<22,23절>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동일한 것인데 다만 용도가 다를 뿐이다.

 

즉 안식년을 기준으로 제 3년과 6년에는, '제 2의 십일조'로 감사 축제를 베푸는 대신

성 중에 거하는 레위인, 나그네,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등을 위한 구제비로 사용하였는데(29절, 26:12),

이를 가리켜 소위 '제 3의 십일조'라 칭하였던 것이다.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배부르게 하라’ - 원어 '사바'는 '가득 채우다', '충분히 만족시키다'는 뜻이다.

이는 곧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되, 형식적으로 겨우 주린 배를 채워 주는 정도로 해서는 안 되고,

구제 대상자들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게 구제하라는 의미이다.

이는 형식적인 십일조 의무 이행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그 근본 정신을 이행케 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리하면...복을 주시리라’ - 인간의 얄팍한 산술적(算術的)인 계산만으로는

분명 자기의 소득 중 일부를 떼어 바친다는 것은 손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재물이 모두 자신의 힘으로 얻은 자신의 것이라는 교만과 불신앙의 소치이다.

 

진정 인간의 생사 화복과 천지간의 재물을 하나님께서 홀로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인정하면,

오히려 바침으로써 배로 복을 받는 풍성한 은혜의 생활을 누릴 것이다.

모세도 이러한 염려에서 십일조 생활을 권면한 후, 그 마지막 결론으로서

'순종에 따른 범사 축복'의 메시지를 잊지 않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