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구한 아내 출4:18-26 2015.06.21출처보기
◑결혼을 하되, 너무 기대는 마십시오.
교회 안에 결혼을 하지 않은 미혼 청년을 보면
어르신들이 ‘왜 시집 장가를 가지 않느냐? 내가 좋은 사람 소개해주겠다’
이렇게 말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내가 결혼을 했더니, 얼마나 좋더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렇게 결혼을 권할 정도로 결혼을 높이 평가를 하는 사람이라면
본인도 결혼생활이 흡족해야 될텐데
‘그건 그거고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생각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가끔 성도들이 말은 하지 않지만, 눈빛으로 저에게 질문하는 것을 느낍니다.
제가 오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떤 성도들은 눈빛으로
‘목사님, 저 어려워요’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럼 저도 눈빛으로 ‘인내 하세요’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좀 더 구체적으로
‘목사님, 결혼을 하면 모든 게 더 나아져야 되는데, 제 결혼생활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아요.’
이런 말을 눈빛으로 하는 분이 있어요.
그럼 저도 눈빛으로 ‘다 그래요’ 이렇게 대답을 하는데
아마 여러분도 그런 질문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부부가 같이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면, 결혼생활이 정말 개선될 수 있을까요?
당연히 개선이 될 수 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것만으로
일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부부가 같이 기도하면 더 친밀함을 얻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냥 부부가 기도하는 게 아니고, 같이 기도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아내는 교회에서 기도를 많이 하는데, 남편은 혼자 기도를 많이 하는데
같이 기도하지 않는 부부들 많아요. 같이 기도해보세요.
2) 둘째, 부부가 신앙생활을 하면, 나만을 생각하던 사람이
상대방을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자연히 결혼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3) 셋째, 신앙생활에 결과로 절제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자신의 감정과 말을 절제하게 되고, 그것이 당연히 부부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4) 넷째, 신앙생활을 통하여 자녀들에게 바른 가치관을 가르칠 수가 있고
그 결과로 자녀들이 더 행복하고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5) 다섯째, 가정이 시련을 만났을 때
그것을 함께 극복할 수 있는 믿음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막론하고 부부가 같이 신앙생활을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유익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해서, 신앙이 없는 부부는 행복할 수 없다는 말이냐?
그건 아니에요.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결국은 사람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이것이 결혼생활에 끼치는 영향력이 지대합니다.
신앙이 없더라도 사람이 좋으면, 얼마든지 성공적인 결혼생활이 가능하지만,
신앙이 있더라도 사람이 형편없으면, 결혼생활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신앙인이라도 사람에 따라
결혼생활의 모습이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과 미갈. 다윗은 부인이 여러 명이었지만 첫 아내가 미갈이었는데
둘이 서로 사랑했어요. 그러나 그들의 갈등이 지대해서
그들이 이혼하지는 않았지만, 죽을 때까지 거의 별거를 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또 이삭과 리브가. 그들은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쌍둥이 아들 중에 누구를 축복할 것이냐를 놓고 그들의 대립이 첨예해서
아마 부부간에 갈등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야곱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야곱은 레아는 사랑하지 않고
라헬을 사랑한 것이 가정에 갈등을 일으키고
이 두 여자가 남편에 사랑을 얻기 위하여, 누가 더 자식을 많이 낳느냐는 경쟁을 벌였습니다.
베드로에게도 아내가 있었어요. 그가 선교여행을 다닐 때 믿는 아내를 데리고 다녔다고 했는데
그 이름이 무엇인지, 어떤 여자였는지 성경은 전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독신으로 사셨고, 제자들에게도 할 수 있다면 독신을 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결혼생활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주신 말씀은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이 한마디뿐이었어요.
예수님은 ‘결혼 생활을 어떻게 하라. 가정교육을 어떻게 하라.’ 이런 말씀을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루느냐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도 독신으로 살았고, 독신을 명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말하기를 ‘혼인하는 자에게는 고난이 따르리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그런 성경구절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어느 목사도 주례사할 때 그 성경구절 인용하지 않습니다.
‘혼인하는 자에게는 고난이 따르리라’
여러분의 삶에 고난이 있다면 결혼했기 때문이에요. 이상한 게 아니에요.
그걸 미혼에게도 알려줘야 됩니다.
고전7:28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결혼한다고 모든 것이 다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내가 혼자 살 때는 나 혼자만의 결점을 안고 살면 되지만
결혼하면 상대방의 결점까지 인내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돕는 배필을 주십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결혼에 대하여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이 없다’고 했어요. 고전7:25
이건 아주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결혼에 대하여 ‘하나님이 내게 특별히 주신 말씀이 없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이것을 인간에게 일임하신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많이 살아봤으니, 너희의 지혜와 너희의 경험대로 알아서 하라’
주님이 우리에게 일임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러분 신앙인이라고 자동적으로 결혼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노력을 하지 않으면 예수 믿는다는 것만으로
결혼생활에 당연히 유익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기독교 서적을 보면
전부다 ‘서로 노력해야 되는’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칭찬을 하라는 이, 남에 앞에서 장점을 말하라는 이,
손을 잡아주라는 이, 뭐 이런식으로 서로 노력해야 되는 부분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지
노력을 하지 않는데,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당연히 좋은 아내나 좋은 남편이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남편, 배우자가 예수 믿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분은
그 배우자의 영혼구원을 위하여 그것을 소망해야지
‘내 남편이 예수만 믿으면 더 좋은 남편이 되리라’ 그건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고집스러운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고집스러운 신앙인이 됩니다.
사람이 노력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 자체만으로
더 좋은 남편이나 아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빌리그레함 목사님의 사모 루스그레함 여사에게
누가 ‘사모님은 이혼을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물어봤더니
‘이혼은 생각 안 해봤지만 살인은 생각해봤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가정에 위기를 당할 때, 배우자가 돕습니다. 그래서 결혼이 좋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결혼생활에 자잘한 노하우는 아닙니다.
‘어떡하면 더 살갑게 다정하게 살 수 있느냐’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을 오늘 성경구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부부가 신앙을 가짐으로 상대방이 위기를 당했을 때
구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중에 발생한 일이에요.
하나님이 모세보고 내려가라고 했어요. 모세가 순종하여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와가 모세를 죽이려고 했다’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아주 의아한 구절이에요.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할 때는 언제고, 모세를 죽이려고 할 때는 언젭니까?
이게 하나님 맞습니까? 여러분이 오늘 성경 읽을 때 이 구절에서는
목소리가 좀 작아지더라고요. 이상하니깐.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증표로 할례를 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않은 체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한 것이고
하나님이 그 일 때문에 진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이 상황을 파악한 사람은 모세가 아니고 십보라에요.
그래서 25절에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워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원래는 모세가 자기 아들들의 할례를 해줘야 하는데
모세가 하지 못하니깐 십보라가 대신한 것이고
그것으로 자기 남편의 목숨을 건진 것입니다.
▲복잡한 신학적인 해석이 있어요. 그것을 차치하고라도
어떤 이유로든지 모세에게 위기가 닥쳤는데
남편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아내 십보라가 만일 믿음의 여성이 아니었다면 당황했을 것이고,
쩔쩔맸을 것이고, 그리고 모세는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보라가 처음에는 믿음이 없는 미디안 여성이었으나
지금 할례 문제로, 가정에 어려움이 닥친 것을 보고서
상황을 재빠르게 파악을 하고, 자기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알고
그것을 함으로써 남편의 목숨을 구원한 것입니다.
‘당신은 내게 참으로 피 남편이로다’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을 입으로 시인했어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모세를 놓아 주셨어요.
여러분 십보라는 용기 있는 여성, 슬기로운 여성,
그리고 남편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배우자가 왜 필요하냐? 이런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의인의 간구는 무엇이 많다고 했습니까?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accomplish much
‘역사하는 힘이 있느니라’라고 하지 않고 ‘역사하는 힘이 많다’라고 했어요.
누군가 의인이 기도를 해줘야 됩니다. 의인의 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많아요.
누군가 가족 중에 의인이 있어야 됩니다.
누군가 역사하는 힘이 많은 기도를 해줌으로써
가정을 구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자신의 영혼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집을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치실때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좌우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라고 명하셨어요.
그래서 애굽을 치는 천사가 지나갈때에 피를 보면 건너갔다고 했습니다.
그게 유월절에 유례인데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예수님 어린양의 피를 믿음으로 재앙이 다가올 때에
그 집을 피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남편, 예수를 믿는 아내, 예수를 믿음으로
더 살갑게 다정한 배우자가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걸 논하기 전에
믿음의 배우자는 그 가족, 자기의 남편, 자기의 아내를 위기로부터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남편이 해야 될 일을 남편이 못하면 아내라도 해야 됩니다.
모세가 할례를 행해야 했지만 안했기 때문에 십보라가 대행한 것입니다.
남자냐 여자냐, 남편이냐 아내냐, 그걸 따지기 전에 한 사람이 해야 될 것을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해야 됩니다.
왜 우리는 기도할 책임이 아내에게만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게 한국교회의 문화에요.
우리의 찬송가를 보세요. ‘아침 저녁 읽으시던 아버님의 성경책’이란 그런 구절은 눈을 씻고 봐도 없고,
‘아침 저녁 읽으시던 어머님의 성경책’.
‘나 집에 돌아갑니다 아버님 기도 못 잊어’라는 구절은 눈을 씻고 봐도 없고
‘어머님 기도 못 잊어’
이렇게 기도하는 분도 어머니요. 성경을 읽는 분도 어머니요, 밥하는 분도 어머니요.
도대체 남편은 뭐한다는 얘기에요?
엄마가 못하면 아빠라도 해야 됩니다. 누군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하느냐? 그건 두 번째 문제에요.
왜 장로교회는 여자 장로와 여자 목사를 안수를 줍니까? 남자가 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남자가 해야 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여자라도 봉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남자가 선교사로 가지 않기 때문에 여자라도 가야되는 것입니다.
누가 하느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하는 것이 중요하죠.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라도 쓰실 것입니다.
빌립보에서 최초로 예수를 믿은 사람은 남자가 아니고 여자였습니다. 루디아.
그리고 루디아의 온 집이 세례를 받고 그의 집이 빌립보 교회가 모이는 곳이 됐습니다.
남자가 못하면 여자가 하면 되고, 여자가 못하면 남자가 하면 됩니다.
그 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 집을 구원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은 그저 ‘더 좋은 남편이 되느냐? 더 좋은 아내가 되느냐?’와는 별개의 문제에요.
여러분 우리가 우리 인생을 평가할 때 그건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결혼생활을 평가할 때 부부가 얼마나 살갑게 재미있게 잘 살았느냐만을 가지고
그 결혼을 평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할 사람을 배우자로 붙여주십니다.
성격이나 사람만을 보면 더 적합한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사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창세기 2장에 ‘돕는 배필을 주셨다’라고 했는데
여러분 인간을 돕는 가장 큰 도움은 심리적인 도움, 경제적인 도움,
그런 것보다도 영혼의 도움, 영혼을 돕는 것이 가장 가장 필요한 도움이에요.
영혼을 돕는 것. 다른 것은 도와주는데 영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는 그것은 돕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로다’
결국 우리를 도우실 분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도움을 우리가 받을 수 있도록
돕는 배우자가 귀중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섭리를 그런데서 찾을 수 있어야 됩니다.
십보라가 모세에게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남편이로다’ 이것은 할례를 뜻하는 말이라고 했지만
궁극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피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믿는 남편,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아내,
그 사람이 진정으로 도움을 주는 배우자에요.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그 집에 임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돕는 배필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
◑십보라에 대한 해석 (아래글 모두 스크랩)
※요약하면, 십보라가 미디안 여인이고 믿음이 없어서, 아들에 대한 할례를 반대하다가
남편 모세가 죽게 된 것을 보고서, 할 수 없이 자기 뜻을 꺾고 아들의 할례를 시켰다는 해석입니다.
▲질문: 하나님께서 이집트로 향하는 모세를 죽이려 했으며,
또 가나안 정복을 떠나는 여호수아를 왜 죽이려 했나요 ?
답변: 모세는 40년 미디안 광야 생활을 마치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집트로 돌아가려던 길에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죽이려 하셨습니다(출 4:24-26).
참고로, 로마 전도를 향해 가던 바울을 유라굴로 태풍으로 죽이려 하셨으며,
또한 유럽 전도를 하려고 첫 성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서 흠뻑 매를 맞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여기에 대한 답변을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갈 때 옛사람이 죽는 체험이 앞으로의 사역에 큰 힘이 됩니다.
바울도 다메섹에서 육신의 눈이 멀어져 아나니아에게 안수기도 받은 후 시력이 회복되면서
온전히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한 것과 같습니다.
모세의 경우에도 보면 진정 우리를 죽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한 이유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답변을 찾을 수 있습니다.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셨습니다.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출 4:25)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레위지파 출신인 아므람과 요게벳 사이에 태어나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지역에서 만난 이방인의 아내가 아들에게 할례를 실시하는 일에 반대를 했든지
소홀했든지 지금까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아니했는데,
하나님께서 이를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십보라도 바로 할례문제로 남편이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함을 깨닫고
즉시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짐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될 모세가 아들의 할례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강제적으로 이를 시행하게 하셨고
십보라도 즉시 이를 순종함으로 과감하게 아들에게 할례를 실시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꺼림직한 것이 있으면 깨닫는 즉시 실시함이 중요합니다.
이 일 후에 십보라는 모세와 헤어져 친정으로 돌아가 기다린 것 같습니다.
출18:5,6의 기록에 보면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 아내로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이라.
그가 모세에게 전언하되 그대의 장인 나 이드로가 그대의 아내와 그와 함께한 그 두 아들로 더불어
그대에게 왔노라"고 한 것을 보면
십보라는 이 할례 사건 직후에 친정으로 돌아가서 출애굽 이후에 다시 만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이런 경우를 통하여 로마서 8:28에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40년이 흘러갔습니다. 모세는 죽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이르렀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맨 먼저한 행위는 길갈에서 할례를 베푼 것입니다 (수 5:2-9).
이집트에서 나온 군인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고, 광야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할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길갈에 있는 언덕을 ‘할례산’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심으로
이 지역 이름을 굴러가다는 뜻인 길갈로 정했습니다.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부터
만나가 내리기를 그쳤습니다(수 5:10-12).
이 후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습니다.
여호수아는 놀라서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고 하니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그렇다면 이 분은 미가엘 천사일 것입니다 (단 10:13).
여호수아가 얼른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 하니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수 5:13-15)
함으로써 모세가 호렙산에서 소명을 받을 때와 같은 말씀을 듣습니다.(출 3:5).
이에 여호수아가 신을 벗었습니다. 신을 벗는다 함은 하나님께 온전히 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자의 자세를 단단히 보여 주신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여호수아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주시는
통과의례(rite of passage)로 죽음의 경험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