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그런 저주가 임하기 전에, 고치고 돌이키라는.. 사전 경고의 뜻입니다. ‘저주가 그대로 응하기를 기원한다’는 뜻이 당연히 아니죠.
그러므로 신명기를 포함해서,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저주와 경고의 말씀들은, 창 49장의 야곱의 저주가, 신33장에서 모세의 축복에 나오지 않는 것처럼, 성도들이 성경 말씀을 통해 저주와 경고와 경계의 말씀을 듣고는, 다 돌이키고, 회개하고, 돌아설 수 있다는 희망 찬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렇지 못하고, 결국 저주와 경고의 약속대로 그걸 다 받는 신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늘 축복의 말을 해 줍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제목의 책도 있듯이 자녀를 늘 칭찬하고, 기를 세워주고, 축복해 주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경고, 경계, 경책’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일례로, 잠언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얼마나 많고 다양한 ‘경고, 경계, 경책’의 말을 하고 있습니까?
물론 부모가 화를 내면서, 노기가 가득한 음성으로 ‘경고, 경계, 경책, 저주’의 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평소에, 담담한 어조로 ‘경고, 경계, 경책’의 말을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죠. 그게 바로 다름 아닌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됩니다.
▲3. 이렇게 12지파의 축복을 개략적으로 보면,
누가 많이 받았느니, 누가 적게 받았느니.. 그런 것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약에 사도바울이, 성도의 각 지체의 다양성을 설교했듯이 이들 각 지파에게 주어진 축복의 내용은, 그 한 지파가 받은 것만으로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각 지파마다 각자 다른 축복, 또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즉 이들 12지파가 함께 단합해야만 온전한 나라를 이를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교회도 한 사람 한 사람 지체가 되고, 이 지체들이 하나로 뭉칠 때
온전한 교회를 형성할 수 있는 것과 동일한 이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내가 받은 것이 한 달란트 뿐이라고, 자꾸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면 안 됩니다.
우리 지체 중에서 사실 손 가락, 발 가락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지체가 없습니다.
12지파도 소중하지 않은 지파가 없다는 거죠.
그런 '나 자신의 정체성'을, 본문 12지파의 축복 내용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다짐해 봅니다.
내가 5달란트 받았다고 우월해서도 안 되고, 내가 1달란트 받았다고 비하해서도 안 되는 것은
각자의 지체가 모두 소중하고, 자기 고유한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먼저이고, 그 다음에 유다 지파니, 요셉 지파니.. 살펴봐야죠)
▲4. 아버지 입술에 축복의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축복한 대로, 모세가 축복한 대로.. 후손들의 인생이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자녀를 훈계할 뿐만 아니라, 자녀를 축복하는 입술이 되기를 바랍니다.
각 가정마다 어머니는 세심하고, 아버지는 근엄하고.. 그런 집들이 많죠. 그러다 보니까 자녀들이 아버지를 좋아하면서도, 좀 멀리하는 그런 경향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칭찬 한마디, 축복 한마디가 자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아버지가 늘 탁월함을 요구하다가도 '야 네가 정말 잘 한다!' 이 칭찬이나 축복의 한마디가 자녀에게 굉장한 자신감을 주고, 그의 인생의 방향을 바꿔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삭이 에서와 야곱에게 축복해준 그대로 에서와 야곱의 인생이 진행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야곱이 12 아들을 축복해준 그대로 그 후손들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 '정말 부모가 말 한마디를 해도, 잘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죠. 부모의 언어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죠.
▲5. 이 축복기도를 통해서 보는 것은 오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가 가문의 미래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잘 믿으면, 자손 대대로 복을 받고,
한 사람이 잘못 믿으면, 자손 대대로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문 안에 영적인 도미노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한국 최초로 가톨릭 신부가 된 김대건 신부 집안에는 '하나님을 위해 죽는 것이 영광입니다'
라는 신앙이 그의 작은 할아버지(순교)부터 내려와, 그의 부친 김제준도 순교,
3대 째인 김대건 신부도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25세 (1821~1846) 그는 참수 전에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개신교에도 주기철 목사에 이어, 그의 장남 주영진 전도사도 순교하였으며,
손양원 목사는, 아들 손동인, 손동신이 먼저 순교하고 2년이 채 못 되어,
아버지 손양원 목사도 따라서 순교하셨습니다.
이렇게 가문 안에 영적인 도미노 현상이 일어난다는 거죠.
나 한 사람 잘 믿으면, 반드시 영적인 후손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보면, 안타까운 것이 '욜로족'이다. 이런 표현을 쓰는데 *YOLO : You Only Live Once '당신은 인생을 한번 사는 거다. 그러니까 피곤하게 살지 마라. 누구하고 결혼해서 희생할 것도 없고, 자식 낳아서 고생할 필요도 없고 그러니까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죠.
그럼 한번 살고 끝나나요? 아니요. 그의 삶이 그 다음 세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거예요.
그래서 각 지파를 보면, 굉장히 좋게 시작했는데.. 안 좋아지거나 안 좋게 시작했는데.. 놀라운 반전을 이루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왜 그런가요? 그 가문의 선조가, 아니면 첫 선조가 아니라, 그 중간에 있는 그 누군가가 (죄든지/선행이든지) 중요한 삶의 결단을 내렸을 때 가문의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는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렇게 변화가 되면, 그것이 좋은 변화이든. 나쁜 변화이든 그 흐름이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그대로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에이 모르겠다' 그러고 막 살면 안 되는 것이죠.
하루 한 순간을 옷깃을 여미면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나 한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기우느냐에 따라서 우리 가문의 역사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죠. *관련글 : *피의 공명 현상 click
◑모세가 열두 지파를 축복하다 (신33:5~25)
<르우벤 지파> 6절,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은 ‘축복 같지 않은' 말입니다. 창49장과 비교해보면 약간 낫긴 합니다만...
이것은 창49장에서 레위 지파가 저주를 받았으나, 본문에서 축복을 받은 것과 비교됩니다.
그러니 그동안 르우벤 지파는 별로 공의 세운 것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축복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수가 적지 않기를 원한다'는 말은, 저절한 축복일 수 있습니다.
왜냐면 르우벤은 요단 동편에 땅을 배정받아 살 터이므로, 최일선 국경지대에서
늘 외적의 침략과 전쟁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에, 그런 미래를 내다보면 적절하고도 필요한 축복이었죠.
또한 곧 치르게 될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선봉을 담당해야 할 지파(민 32:16-32)라는 점을 고려할 때 매우 적절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어요.
르우벤은 장자이기 때문에, 본문에서나, 창49장에서나 축복 기도를 첫 시작으로 받긴 했지만 사실 이 장자 르우벤은 창49장을 보면, 아버지 야곱에게 저주를 받았던 아들이죠.
'네가 아비의 침상을 더럽혔기 때문에 너는 결코 탁월해 지지 못할 것이다' 물론 르우벤이 잘못했어요. 그러나 르우벤이 자기의 인생의 에너지와 힘을 엉뚱한데 쏟게 만든 이가 누구냐는 것이죠.
물론 아버지 야곱도 레아 하고 결혼할 생각은 없었어요. 레아는 자기가 원하는 아내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결혼식을 치르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레아인 거예요. 라헬이 아니라.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사랑하지 않는 아내에게서 낳은 첫번째 아들 르우벤을, 아버지 야곱은 사랑하지 않았어요.
첫째 아들인데..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아들은 전혀 리더십을 갖지 못했어요.
아버지가 세워주지 않는데, 동생들이 그 형을 인정 하겠습니까? 동생들도 르우벤을 무시해버렸어요. (구덩이에 떨어진 요셉을 르우벤이 살리라고 했는데, 동생들이 말을 듣지 않음)
여러분, 여러분의 장남, 장녀 물론 다른 자녀들도 해당이 되지만 그들이 그냥 내가 축복해 줄 것이 없어서 그냥 생존의 축복을 해줄 정도의 관계라면... 다시 생각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부부관계에 있어서 남편은 너무 밉지만.. 혹은 아내는 내가 꼴도 보기 싫지만 내가 자녀는 축복하겠다... 그게 가능한 줄 아십니까?
내 남편을 사랑하지 않고, 내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자녀를 온전하게 사랑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가정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여러분 가정안에 하나님의 회복과, 치유와,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내 장남, 장녀에게 르우벤에게 '축복같지 않은 축복'을 해주는 이런 수준의 가문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첫 자녀인 장남 장녀를 사랑해주시고 인정해 주시고, 세워주셔야 돼요. 어디를 가나 인생에는 질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유다 지파> 33:7 그리고 그는 유다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유다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십시오. 그에게 그 백성들을 보내 주십시오. 자기 손으로 스스로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 원수들을 대항해 그의 도움이 돼 주십시오!”
이 축복기도문이 전부 시 형태로, 운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약간 시적인 언어라서, 표현이나 이해가 빠르지는 않지만 유다 지파에게는 '그 백성들을 보내달라' 라는 축복을 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를 직역한 것인데, 그 의미를 풀면 '유다지파를, 그 백성들 12지파에게로 인도해주소서'라는 뜻이죠.
다시 이야기하자면 '유다지파가 지도자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창49장에서도 '통치자의 지팡이가 유다 지파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죠. 창49:10 그럼 처음부터 유다 지파가 훌륭했는가요? 아닙니다.
유다는 원래 넷째 아들이었고, 더 심각한 문제는 그는 기회주의자였죠. 창37장에 보면, 동생이 미워서 '야 저기 꿈쟁이가 온다' 그러고서는 그 동생을 구덩이에 넣고 죽이려고 했었죠.
그때 장자 르우벤이 '내가 잠시 어디 갔다 와야 되는데, 동생을 절대 해치지 마라! 근데 형이 아무런 리더십이 없었거든요. 아버지의 인정을 못 받으니까. 형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둘째 시므온, 셋째 레위가 역할을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시므온과 레위가 요셉을 죽이려고 했어요.
그때 넷째 아들인 유다가 '동생 죽여서 우리가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느냐.. 그냥 팔아넘기자!' 그래서 구약에 유다도, 신약에 유다도 사람을 팔아넘기고 돈을 받았죠.
구약의 유다는 은 20 개를 받았고, 신약의 유다는 30개를 받았죠. 은 20개를 챙겼어요. 그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난 적어도 죽이지는 않지 않았느냐?' 아니요. 실리적인 이득을 취하는.. 그 상황에서도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유다는 그 죄책감 때문에 창38장에 보면 자기 가족을 떠나서 영적인 방황을 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집요하게 추적하시면서 자기 아내가 죽고, 자기 두 아들 엘과 오난이 죽고 또 집요한 며느리 다말을 만나서 그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고꾸라지고, 자기의 죄를 다 쏟아놓고 회개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기회주의자였던 유다가 회개하고 가족에게 돌아와서,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특별히 애굽에서, 총리 요셉과 나머지 11형제를 화해시키는데 있어서 유다가, 자기 목숨을 담보로 잡히면서,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점들이, 그가 12지파의 실질적 지도자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이, 유다를 축복하기를 '너는 우리 집안의 장차 대대로 지도자의 집안이 되라' 지도자는 물론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이기적인 시대가 되어가고, 개인주의시대가 되어가기 때문에 가정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정을 위해서 흘린 당신의 눈물을 반드시 헛되게 만들지 않으실 줄로 믿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리더십'의 법칙이에요. 세상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가정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리더가 돼야 된다는 거에요. 그래야 세상이 평안하다는 것이죠.
<시므온 지파가 누락되다. 신33장에서> 자 그런데 세 번째 지파로 넘어가기 전에 이 축복기도문에서 이상한 점은, 한 지파가 누락이 되어 있어요. 열한 지파가 등장하는데, 시므온 지파가 누락이 됐어요.
그래서 시므온 지파처럼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시므온 지파도 아버지 야곱에게 저주를 받았던 그런 아들입니다. 시므온이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선동했던 사람이고 또 세겜성 사람들이 밉다고 해서, 그들을 속여서 (레위와 함께) 칼로 대학살을 일으켰던 주동자 였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분노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 시므온의 악행에 레위가 동참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창49: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그들은 칼을 쓰는 자들이다, 폭력적인 자들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오늘 본문에 보면 레위 지파는 축복을 회복했어요. 그런데 시므온 지파는 회복을 못했어요.
그럼 누구는 회복을 하고, 왜 누구는 회복을 못했는가요?
민수기의 광야 여정에 보면, 싯딤에서 바알 브올 사건이 있었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인들과 혼합되지 말라고 했는데 이방 여인들과 섞이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때 미디안 여자를, 감히 하나님의 임재가 계신데도 그 진영에 데리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레위 지파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죠.
그때 죽은 그 사람이 바로 시므온 지파의 시므리 라는 사람이었어요. 민25:14
그래서 창35장의 세겜성 살육 사건으로, 시므온이 창49장에서 아버지의 저주를 받았는데,
그 후손들이 분발하고 돌이키기는커녕, 모압 땅 바알브올 사건에서 시므온 지파 시므리 족장이
또 앞장 서서 음행의 범죄를 저지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죠. 본문 신명기 얼마 직전에 일어난 일이죠.
그 결과로, 신33장 모세의 축복에서, 시므온 지파는 아예 누락이 되어버립니다.
실제로 시므온 지파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 분배를 못 받고, 유다 지파의 기업 속에서 흩어져 살게 됩니다.
여러분 레위 지파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하겠지만 레위지파는,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고, 저주 받은 가문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지파의 운명을 바꿔놓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시므온 지파는 레위와 똑같은 저주를 받고, 그 저주가 계속해서 이어진 거에요.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 회복의 기회는 늘 있습니다. (레위지파) 오늘이라도 회복의 기회는 있는 거예요. 상처를 서로가 보듬고,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유턴하지 않으면 마치 물이 아래로 떨어질수록 가속도가 붙고 힘이 붙는 것처럼 내리 축복이 아니라, 내리 저주가 더 강력해지는 것을 이 시므온 가문의 역사에서 보게 됩니다.
<레위 지파> 33:8 레위에 관해 그가 말했습니다. ... 33:9 그가 자기 부모에 관해 ‘그들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자기 형제들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자식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의 칼을 바라보고 주의 언약을 지켰습니다.
'부모도 형제도 자식도 눈에 안 보였다. 주의 칼만 바라봤다.' 여기 또 칼이 나오죠. 그럼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요?
레위 지파가 복을 받은 것은 '주의 칼을 바라봤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어요. 위9절.
출32장에 보면, 시내산 앞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 돌판을 받는 그 중요한 시점에 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세워 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하고 난리가 났어요.
모세가 내려와서 분노하면서 '누가 하나님 편에 서겠느냐?' 그때 놀랍게도 칼을 차고 레위 지파가 나옵니다.
세겜 성 사람들에게 칼을 썼던 레위와, 4백 년이 흐른 뒤에 그 레위 후손들도 다 칼을 썼어요.
그런데 예전에는 개인적인 원한을 갚는데 칼을 썼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칼을 쓴거에요.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기 위해서, 레위 지파가, 가족과 형제와 자기 자식조차도 내려놓고 하나님 편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이 평생 하나님 앞에 양을 '칼로' 잡는 제사장 지파가 되도록 만드셨던 것이죠.
여러분, 아버지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저주하면서 창49장에 보면, '너희는 지파로서 존속하지 못하고 흩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 저주를 내렸어요.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안에 땅을 분배 받으면서 나중에는 지파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릴 정도로 흩어지게 됩니다. 사사기에서 실제로 그대로 이루어졌어요.
레위 지파도 놀랍게 그들은, 축복으로 그들 지파의 운명을 바꿔놓기는 했지만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고 전국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의 기업이 되어 주시겠다' 할렐루야! 이 축복의 말씀을 주신 것이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많이 속을 썩인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더 알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늘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시므온 지파로 전락할 것인가? 아니면 레위 지파로 회복될 것인가?
내가 그냥 우리 가문에 흘러오는 대로 이 분노가 '내리분노'로 흘러가도록 놔두고 이 저주가 '내리저주'로 흘러가게 놔둘 것인가? 그러면 시므온 지파로 전락하는 것이고요.
그러나 누군가가 하나님을 위해서 결단하고, 인생을 턴 turn 하면 하나님께서 그 지파를, 그 가문을 레위 지파처럼 회복하시리라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칼을 쓸 줄 아는 것도 능력이죠. 다만 그 능력을 어디에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칼을 사람들에게 휘두르면 다치는 것이고 그 칼을 가지고 음식을 만들면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죠.
여러분의 자녀들가운데도, 시므온과 레위 같은 캐릭터를 가진 자녀들이 있을 겁니다. 의분이 강하고, 못 참고... 네 제 친구도 아들이 그래서 학교에서 뭔가 잘못된 일이 있으면 선생님께 찾아가서 항상 얘기하고.. 갈등하고..
이게 부모는 너무나 걱정스럽지만, 아이의 캐릭터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주어진 아이들이 있어요. 부모가 볼 때는 '얘가 왜 이렇게 공격적인가?' 그래서 그것이 잘못됐다고 무조건 누르려고 하는데 그게 능사는 아니죠.
그의 내면에 있는 그 에너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대의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될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중보기도를 해주셔야 돼요.
<요셉지파> 33:13 요셉에 관해 그가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땅을 저 위 하늘의 귀한 이슬과 저 아래 저장한 깊은 물로 복 주시기를!
33:14 해가 내는 가장 좋은 빛으로, 달이 내는 가장 좋은 빛으로 33:15 옛 산들의 가장 좋은 선물로, 영원한 언덕의 많은 열매들로
33:16 땅과 그 충만함의 가장 좋은 선물로, 불타는 덤불 속에 계셨던 분의 은총으로, 이 모든 것들이 요셉의 머리 위에 머물기를, 그 형제들 가운데 왕자인 그의 눈썹에 있기를!
33:17 그의 위엄은 수송아지의 첫배 새끼 같으며 그의 뿔은 들소의 뿔과 같도다. 그 뿔들로 그가 민족들을 받을 것이고 땅 끝에 있는 민족들까지 받을 것이다. 에브라임에게는 만만이요 므낫세에게는 천천일 것이다.”
요셉지파를 볼 때마다 '복에 겨운 지파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위에 길게 예언된 내용이 모두 복, 복, 복입니다.
창49장에서도 가장 긴 구절로 복을 선언해 준 것이 요셉지파였고 본문 신33장도 5절에 걸쳐, 길게 계속해서 축복을 해줍니다. 축복이 넘치는 지파에요.
왜 그렇게 야곱이, 그 12 아들 중에서 11번째 아들인데 그를 그렇게 사랑했는가요?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의 첫번째 소생이기도 했지만 집에서 가장 출세했기도 했고, 근데 출세한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요셉이 자기를 죽이려고, 자기를 해코지하려고 했던 형제들을 다 용서하고 그들이 곤경에 빠졌을 때, 온 가족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죠.
그래서 그 아들 요셉을 특별히 사랑했고 축복을 해줬어요. 그래서 유다가 세상적인 지도자의 그 축복을 받았다면, 레위는 영적인 지도자의 축복을 받게 되고, 요셉은 땅의 축복, 물질의 축복을 받게 됐어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위 세 가지 중에 선택을 하라면 뭘 선택하시겠어요?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면 '저는 세 가지를 다 원합니다' 이렇게 대답하지 마시고요..
자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하면 창49: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에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서 막 감격하면서 해준 축복이에요. 그래서 "야곱의 축복"이라는 복음성가도 있는데, 저는 요즘 좀 이 노래를 잘 안 불러요.
왜냐면 복 받는 건 좋은데, 제 성격상 '왜 남의 집 담장까지 넘어야 될까?' 요즘은 그러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어요. 소송 걸고 난리나요.
결국에 이 요셉지파는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았는데 땅의 축복, 물질의 축복을 받았는데 결국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나중에 여효수아서에서 12지파가 땅 분배한 것을 보면 요단강 서편 지역의 전체에서 거의 절반을 차지했어요. 땅도 넓게 분배받았어요.
12지파인데 사실 요셉에서 나온 두 아들을 각각 한 지파씩.. 그래서 두 분깃을 준 것입니다. 레위 지파가 주님을 섬기는 성막 봉사로 빠진 사이에, 요셉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로 두 지파가 되어서, 결국 12지파를 형성합니다.
그래서 이 두 아들이, 전체로 놓고 보면, 요단강 서편에서 2/5 또는 절반 정도를 차지합니다. 여호수아 때 땅분배 할 때 그렇게 넓게 받았어요. 정말 아버지가 축복해준 대로 됐어요.
근데 문제는 뭐냐면, 결국에 에브라임이 유다 지파를 향해서 '왜 너희만 지도자가 돼야 되냐? 왜 너희만 왕이 돼야 되냐? 우리가 최고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는 지파다.'
그래서 결국에는 반역을 일으키고 북왕국 을 세우죠. 그리고는 영적 정통성이 필요하니까, 그들이 우상숭배를 하기 시작하죠. 이스라엘을 타락시킨 장본인들이 돼버렸어요.
그리고 결국에는 그게 나중에 신약의 '사마리아인'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책을 쓰고 싶은데, 그건 뭐냐면 글쎄요. 우리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축복의 원리, 하나님의 강복의 원리에 대해서 너무나 단순논리로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근데 하나님의 강복의 원리, 성경적으로는 '시소의 법칙' 입니다. 여러분 '시소의 법칙' 이란, 내가 겸손이 뒤로 물러서면.. 인생이 오르막길이 되고요. 내가 나서겠다고 교만하게 앞으로 나가면.. 내리막길이 되는 거예요.
아니 그런 법칙이 어디 있나? 세상에서는 내가 잘 나고, 능력이 있고, 높이 오르면 다 되는 거지...
아니요. 세상에서도 그러면 위태로워지죠. 공공의 타겟이 되죠.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겸비하는 사람의 인생을, 오르막길 인생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스스로 잘난 척하고, 교만하는 인생은 내리막길이 되도록 만드신다는 거예요.
요셉 지파와 유다 지파를 비교해 보면 처음에 겸손하고 성실했던 요셉은 정말 좋았죠. 그런데 후손들이, 그 섬김의 리더십을 다 망각해버린 거예요.
그들의 선조 요셉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그 형제들을 다 용서해주고 끌어안고 섬기며 살았는지... 그 시절을 다 망각하고 기득권만 주장한 거에요. 그리고는 망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는 처음에는 기회주의자였지만, 회개하고 가정을 위해 헌신했잖아요. 막내 베냐민은 배다른 동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베냐민을 위해서 '베냐민을 살려주시면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유다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아내도, 두 아들도 다 데려가셨잖아요. '저는 이제 가족도 없고, 저 혼자 뿐입니다. 우리 12형제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내 생명을 바치겠습니다.'
이런 눈물겨운 헌신을 했을 때, 아버지 야곱이 그 유다를 보면서 '너야말로 가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너야말로 너로부터 왕들이 이어서 나오며 지도자들이 나오는 지파가 될 것이다.' 라고 축복하고, 예언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게 반전을 이루게 된 것이죠. 여러분의 인생에도 반전의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기서 다루지 않은 나머지 지파는, 아래 '절별 해석'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이스라엘이 행복자인 비결 (신33:26~29)
33:26 '여수룬의 하나님 같은 분은 없다. 그분은 너를 도우러 하늘을 타고, 그분의 위엄으로 구름을 타고 오신다.'
: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수룬의 하나님 같은 분은 없다' 왜 이렇게 이야기를 했을까요?
▲1. 실제로 전능자 하나님 같은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수룬' - '의로운 백성'이란 뜻의 이스라엘의 별칭입니다. 앞서 32:15절에도 나왔죠.
그러니까 많은 민족들, 나라들, 족속들이 자기의 신을 믿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하나님과 같은 신은 세상에 없다는 거예요.
열방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을 보면 다 다신론적 개념의 선상위에 놓여있는 신들이죠. 그러나 우리는 영원하신,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영원한 초월자께서, 시간 속에 내주 하셔서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나에게 다가오셔서 나의 구원자, 나의 인도자가 되어 주신다는 게.. 이게 얼마나 놀라운 감격이냐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족속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미약한 히브리 족속,
사실 여러분 팔레스타인 땅덩어리를 보면 이스라엘 영토가 충청남북도 사이즈죠. 우리는 분할되어 있는 남쪽 영토만 봐도 사실 큰 땅이 아니거든요. 근데 그것보다 훨씬 작은 그 이스라엘 영토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친백성을 삼으셨다는 거예요. 너무나 감격인거죠.
제가 이걸 어떻게 표현을 해야 될까 고민하며 설교를 준비하다가, 갑자기 최근에 뭐 굉장히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도깨비 드라마'가 생각이 났어요. 반년 전이지만, 아직도 그 열풍에 이렇게 빠져 계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만약에 공유(주연배우)가 수천 수만 명의 팬들이 있는데 팬 미팅을 하다가 갑자기 무대에서 객석으로 내려와서 한 사람을 지목하면서 '제가 평생 당신 곁에서 당신을 돕는사람이 되겠다' 그러면 그가 기절하지 않겠어요?
왜 도대체 왜?
너무나 감격적인 거죠.
근데 유명 배우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내 편에 서 주시겠다는데.. 정말 행복자인 거죠! 일본 사람들은 민족 특성상
그 모임 중에서 '누구가 가장 중요한 지도자다' 그러면 딱 (그 권위를) 인정하고 들어가는 게 있습니다.
근데 한국 사람들은 잘 인정을 안 하거든요. 그래서 그 한국인의 정서에 대해서, 한국학 강의를 들었을 때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외국에서는 누가 총리가 되고 그러면, 어렸을 때 초등학교 친구들이 '그 친구가 어렸을 때부터 좀 비범했던 것 같다.. 조용히 혼자 책 보고..'
근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사람, 어릴 때 내 가방 들고 다니던 아이였는데..' 뭐 이런 식으로 잘 인정을 안 하는 국민성이 있다는 그분의 주장입니다.
'네가 장관하면 나도 장관 한다' 뭐 이런 식의 문화잖아요.
그러니까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조선 땅에 와서 너무나 놀랐다는 거예요. 섬나라에서 그들끼리 싸울 때는, 무사들끼리 싸우면 누군가가 승자가 결정되거나 하면, 백성들은 무조건 승복이에요. 딱 인정입니다. 인정하고 들어가는 문화입니다.
임진왜란 때는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거의 주요 성읍들을 다 정복하고 왕은 도망치고 그럼 게임이 끝난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승자에 대해 인정을 안 하는 거예요. 승복을 안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한 노병이 나타나서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하면서 말도 안되는 전쟁을 일으키니까 당황스러운 거죠.
여러분 영적인 측면에서도, 우리 삶에서도, 적용할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아무리 강력해도, 뚫고 나가야 되고, 도전해야 될 것은 도전하셔야 돼요.
그러나 또 정반대로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하셔야 돼요.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게 무엇이냐면 '당신이 믿는 하나님 같은 분은 없다'는 거예요. 세상 어느 민족이 믿는 신들과 비교해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와 비교해도 당신의 믿는 하나님 같은 분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2. 하나님과 같이 당신을 사랑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0장까지 그렇게 '순종하라. 사랑하라' 명령을 했잖아요. 그런데 신31~32장, 신명기가 거의 끝나는 지점에서 뭐라고 얘기합니까? '그런데 너희는 하나님을 배신할 거야' 그렇게 되지 말라는 뜻의 경고죠!
그러면 그런 우울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 다시 33장에서 그런 우울한 얘기가 전혀 없었던 것처럼 축복 일변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단 말이죠.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요?
왜냐하면 26절에 나오는 '여수룬'이라는 이 표현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수룬은 이스라엘에 대한 별칭, 닉네임입니다. '의로운 자'라는 뜻이 담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는 애칭이에요.
그러면 너희는 실패할 것이고, 너희는 망할 것이고, 너희는 배신할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결국 나중에 회복하시겠지만 그 어두운 터널을 지나갈 거라고 얘기하셨다고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향해서 '나의 사랑' 이라고 얘기하시는 거예요. '너는 존귀하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여수룬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어떤 용어로 바꿔서 표현을 한다면 그 자식을 볼 때, 막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부모가 어쩔줄 모르는, 눈에서 막 꿀이 뚝뚝 뚝뚝 떨어지는 그런거 있잖아요. 여러분, 이스라엘에 대해서 사실은 성경의 평가가 굉장히 박했습니다. 근데 부모가 자기 자녀를 볼 때는 어떤가요. '너는 여수룬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의로운 자고, 너는 잘 될 거야! 넌 앞으로 훌륭해질 거야!' 이런 사랑을 자식에게 베풀수 있는 건 부모밖에 없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육신의 아버지가 계신 것처럼 우리 영혼을 창조하신 우리 영혼이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줄로 믿습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할까요? 어제 묵상을 하다가.. 이번 주에 한국 영화산업의 스크린 독점 논란이 몇 차례 났어요.
이유는 제작사와 상영관이 같은 컴퍼니이기 때문에 생기는 그런 문제죠. 이 특혜시비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왜 갑자기 하냐면, 영적으로 볼 때 우리도 특혜 시비에 휘말릴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창조주와, 우리의 구원자가 같은 분이에요. 그러니까 사단 입장에서는 억울한 거에요.
'아니 당신이 세상을 이렇게 멋지게 창조해 놓고 사람들에게 생명과 시간과 인생이라는 기회를 주고, 너 스스로 한번 살아봐라 했으면 본인이 혼자 경기를 해야지.. 왜 하나님이 자꾸 개입을 해서 실수하고, 실패하고, 사고 치고 해도.. 또 구원해주고, 또 살려주고, 또 도와주느냐?'
천상의 법정에서는 사단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고소, 고발하잖아요. '하나님 이거는 특혜입니다. 이렇게 하시면 이건 페어플레이가 아닙니다.' 이런 고발을 사단을 하고 있단 말이죠.
그게 욥에게도 했던 이야기 아닙니까? 욥을 너무 많이 축복해주시니까, 욥이 잘 하는 거지 저거 한번 다 털어보시라고... 그냥 제로 베이스 에서 진짜 공평하게 페어플레이 해보면 저 욥은 분명히 무너질 거다... 이게 사단의 주장이었잖아요.
여러분 천상에서는 끊임없이 사단은 그렇게 고발하고 있는데 실제로 하나님의 형상들인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요?
인생이 좀 힘들어지고 어려워지고, 고난을 겪으면 '하나님이 도대체 나한테 해준 게 뭐냐?' 합니다.
몇 년 전에 한 장로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정말 이분은 저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아들바보' 이신 분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자기 인생이 좀 힘들다고 아버지가 이렇게 잘 타이르니까 아들이 뒤돌아서면서 '아빠가 내 인생에 해준 게 뭐야?' 그 말에 이 분이 무너진 거죠. 그래서 몇 달을 그냥 우울하게 다니시더라고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특혜인지를 알지 못해요. 사단은 이거는 지나치다고 얘기하고.. 우리는 부족하다고 얘기하고..
사단도 알고 있는 걸,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요? 여러분 영적 진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세상에 내보내셨으면 그냥 놔두셔야 되는거 아닌가요? 인생은 사람이 살아 내는 것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가이드를 주시고 끊임없이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격려해주시잖아요.
그래서 은혜는 특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개념은 특혜입니다. 선인과 악인에게 고루 햇빛과 단비를 주시는 보편적 은혜일 뿐만 아니라 선택이라는 특별한 은혜도 주십니다.
그런 특혜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안 되는 거라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 당신에게 아비의 사랑을 주실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3. 하나님과 같이 내게 잔소리를 해 주실 분은 없습니다.
자 신명기가 끝나가고 있어요. 모세의 3번에 걸친 계명에 대한 반복된 설교, 제가 만약에 똑같은 설교를, 지난주 했던 설교를 오늘도 하고, 다음 주에 또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웅성거리기 시작할 거예요.
그리고 '저주'에 대한 반복된 경고도, 6번이나 계속해서 나옵니다. 27:15~26, 28:15~68, 29:18~28, 30:1~10, 31:16~18, 32:19~43
어떤 목사님이 다른 교회에 설교 초대를 받아 갔다고 칩시다.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했어요. 그 교회가 분열돼 있었거든요.
성도들이 너무나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또 한 번 설교를 듣고 싶다고 다시 한번 설교 초청을 했어요. 똑같은 설교를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3번, 7번이나 똑같은 설교를 했다는 얘기를 하는 중)
그러자 그 설교자는 '여러분이 사랑할 때까지, 여러분이 화합할 때까지 저는 똑같은 얘기를 계속할 것입니다.' (모세가 그래서 3번, 7번 했다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이 반복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우리는 듣기 힘들어하죠. 부모가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면, 자녀들이 듣기 힘들어합니다. 잔소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왜 그 이야기를 반복해서 할까요? 내 삶이 변하는 것이 축복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반복해서 해주시는 것이죠.
왜 사람들이 잔소리를 듣기 싫어 하는가요?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대로 '두말하면 잔소리지' 벌써 두 번만 반복해도 잔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삶이 변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반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도 나에게 쓴소리 해주지 않죠.
제가 친한 한 성도님이 계신데, 그분은 해외에 계신 분인데, 가끔 가다 입국하셔서 예배에 나오십니다. 그 성도님이 뜬금 없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실 때가 있어요. '목사님 요즘 설교가 예전 같지 않아요!' 네가 놀라서 '네? (방금 뭐라고 하신 거에요?)' '기도를 많이 안 하시는 것 같아요!' 이렇게 얘기하시는 분이 있어요.
제가 신뢰하고, 그분이 저를 신뢰하고.. 그래서 직언을 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이 제 곁에 있다는 건 감사한 것이죠. 그의 쓴소리는 사랑이죠.
여러분 세상에서는 쓴소리 하지 않습니다. 뒤에서 평가하지요, 평가만 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부모는 앞에서 잔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잔소리는 사랑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로하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리운 것은 부모님의 그 잔소리가 너무 그리운 거예요.
너무나 바쁘게 도시 속에 살다가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오랜만에 전화했더니 '밥은 잘 챙겨먹니?' 그 한마디에 눈물이 나고
오랜만에 찾아 뵈니까 '왜 이렇게 춥게 입고 다니냐? 옷 좀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 늘 내 생각을 하시며, 나를 위해서, 내가 잘되기를 원하시는그 부모님의 사랑이 있잖아요.
'왜 이렇게 얼굴이 피곤해 보이냐? 좀 자고 가라!' 이 얘기는 제가 저희 어머니께 많이 듣던 얘기인데, 저희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요.
전도사 시절에 어머니를 뵈러 가면 학업에, 뭐 신혼살림에, 전도사 사역에 뭐 정신이 없었어요.
제가 어머니 집에 가면 일단 저를 소파에 '괜찮아, 괜찮아' 하며 계속 눕히시더라고요. '좀 쉬다 가라, 자다가 가라'
내가 잘 되기를 그렇게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과 부모님 외에 과연 누가 있을 수 있을까요?
부모님의 잔소리가 사랑인 것처럼 하나님의 반복되는 이 메시지는 여러분을 향한 비교할 수 없는 사랑 인 줄로 믿습니다.
그 놀라운 사랑, 변치 않는 무조건 적인 영원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해주시는 분, 그분 같은 분이 없는데.. 그분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의 내 인생, '나와 같은 인생이 어디 있겠느냐?' 할렐루야! :29
‘하나님의 사람 모세' - 이 표현은 모세의 위대성을 말해 줄 뿐 아니라, 이하(以下) 모세에 의해서 선포되는 축복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선포되는 것임을 시사해 준다.
한편 이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이란 칭호는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특별히 하나님의 사자(使者)로 고용된 자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들에게도 이러한 수식어가 붙여졌을 뿐만 아니라 (삼상 2:27, 9:6, 왕상 12:22, 왕하 1:9), 다윗(대하 8:14), 사무엘(삼상 9:6)등 특별한 하나님의 종들에서도 역시 붙여졌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 칭호가 어느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소유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게 되었다(딤전 6:11).
‘죽기 전에...축복함이 이러하니라' '죽기 전에'라는 말은 선포되는 축복의 장중함과 엄숙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이하 언급되는 모세의 유언적 축복은 일종의 기도로서 예언적 성격을 띤다. 한편 이 모세의 축복은 노아의 축복(창 9:26), 이삭의 축복(창 27:27-29), 야곱의 축복(창 48:15, 16, 49:2-27)과 비슷하니 그것들과 비교해 보라.
2 그가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 이슬람교는 위 구절을 생명처럼 귀중히 여깁니다. 이슬람교도 구약을 대부분 믿습니다.
그런데 위 구절을, 그들은 해석하기를 세 가지 산에 주목합니다. 거기에 세 산이 나오죠. 시내산, 세일산, 바란산.
시내산은.. 여호와께서 십계명을 주신 산이죠. 세일산은..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라는 거예요. 근거는 없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거죠.
그리고 '바란산에서 비추시고' 바란산이 어디냐면 아라비아 거든요.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바란산에서 일어난 세번째 선지자가 바로 마호메트 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호와께서 바란 산에서 '일만 성도 가운데 강림하셨다' 이 말씀을 바탕으로 '1만명의 군대를 일으켜서 메카에서 그가, 즉 마호메트가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거죠. 사실 억지죠.
‘시내에서...세일 산에서...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여기서 '시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기 위해 친히 영광 중에 강림하신 곳인 '시내 산'(Mt.Sinai)을 가리킨다(출 19:18).
그리고 '세일 산'(Mt.Seir)은 이스라엘이 모압 땅으로 들어오기 전에 통과 했던 에돔 인의 산지를 가리킨다(1:2).
마지막으로'바란 산'(Mt. Paran)은 바란광야의 고지대를 가리킨다(1:1, 민10:12, 13:3). 따라서 본절의 이 표현은 시내 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런 현현(顯現)이 어찌나 장엄하고 장중한지 그 영광의 빛이 시내 산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세일 산과 바란 산까지도 퍼져 나갔다는 시적(詩的) 표현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드보라의 노래(삿 5:4)와 하박국의 기도(합 3:3) 등에서도 나타난다.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 직역하면 '성도, 거룩한 자'란 천군 천사들을 가리킨다. '율법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이라는 스데반과 바울의 말(행 7:53, 갈 3:19)은 바로 본절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도 혹자는 이를 앞에서 언급된 지형들(시내, 세일 산, 바란 산)과 관련, '가데스의 고지에서'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공동 번역도 이와 유사하게 '가데스 므리바에서’ 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견해는 모두 본문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해석들이다.
‘그 오른손에는' - 여기서 '오른 손'은 하나님의 권능이나 통치권을 상징하는 말이다(출 15:6, 시 17:7, 애 2:3).
‘불 같은 율법' - 여기서 '불 같은 율법'(에쉬다트)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 주신 율법'(4:33, 출 19:16)이란 뜻이거나 혹은 '불 같은 역할을 하는 율법'(롬 3:19)이란 뜻인 듯하다(Matthew Henry).
3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 여기서 '백성'이란 시내 산에서 주의 율법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그런데 원문에는 문장 초두에 '또한', '뿐만 아니라'는 뜻의 불변사 '아프'가 나온다. 이 단어는 여기서 '그렇다'(yes), '참으로'(surely)라는 의미로 쓰이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확실한 것임을보여 준다.
‘모든 성도' - 여기서 성도는 '일만 성도'(2절)와는 달리 천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본절 초두에 언급된 '백성'과 동의어로서, 곧 하나님께서 택한 거룩한 무리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그 수중에 있으며' -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의미하는 말이다(32:9). 즉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를 맺으사 이스라엘은 자신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던 것이다(출 19:5, 6).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 여기서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란 '주의 발자취를 좇아'(RSV, Living Bible, They followed in your steps)로도 번역될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KJV나 NIV 그리고 몇몇 학자들(Gesenius, Keil)은 개역 성경의 번역과 같은 견해를 지지한다.
하지만 어느쪽 해석을 취하여도 본문이 의도하는 바에는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절은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던 장면(출 19:8, 20:19)을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4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령하였으니 곧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로다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하였으니' - 이처럼 모세 자신이 스스로를 '모세가'라고 제삼자로 칭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시하고 있음은 모세가 율법의 제정자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즉 그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율법을 전달하는 자였을 뿐이다.
‘곧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로다' - 여기서 '야곱의 총회'란 여호와의 회증인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31:30). 따라서 율법이 곧 이스라엘의 기업(KJV, inheritance, NIV, possession)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는 가장 귀하고 보배로운 것(시 11:72)이 곧 율법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후손들에게 그 귀한 율법을 제 1의 유산(遺産)으로 계속 물려주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5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수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 한 때에로다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 '여수룬'은 이스라엘의 별칭(別稱)으로서 도덕적, 영적으로 의로운 특성을 지닌 이상적인 민족을 의미하는 말이다. 32:15 주석 참조.
따라서 여기 '여수룬의 왕'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수여함으로 말미암아 공식적으로 신정(神政) 국가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사 33:2, 시 47:6).
한편, 그런데 여기서 '왕이 있었으니'라는 과거적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계심에도 불구하고 훗날 이스라엘이 인간을 왕으로 세움으로써 여호와를 배역(背逆)할 것을 내다본 때문인 것 같다(삼상 8:4-9).
‘백성의 두령이 모이고...함께 한 때에로다' -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수여받기 위해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3일간의 정결(淨潔) 의식을 거친 후 시내 산 기슭에 모였던(출19:14-16) '이스라엘의 총회 날'을 가리킨다(9:10).
6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르우벤...은 그 인수가 적지 않기를' - 이처럼 르우벤 지파에게 내려진 축복은 기껏 '종족 보존'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비록 르우벤이 야곱의 장자로 태어나긴 했지만,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힌 죄(창 35:22)로 인해 장자권(長子權)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야곱도 그의 축복에서 르우벤은 결코 탁월치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창 49:4).
그렇지만 모세의 이 축복은 1) 르우벤 지파가 요단 강 동편 제 일선에 위치한 지파로서 항상 대적들의 위협 속에 살 운명을 지녔다는 점과 2) 곧 치를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선봉을 담당해야 할 지파(민 32:16-32)라는 점을 고려할 때 매우 적절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모세의 축도 중 특이하게도 시므온(Simeon) 지파에 대한 축복이 언급되지 않았다. 따라서 70인역(LXX)은 본절은 "르우벤은 살고 죽지 않기를, 그리고 시므온은 수가 많기를“ 이라고 번역하여 본절 후반부를 시므온 지파에 대한 축복으로 돌리고 있으나 어떠한 근거에서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모세가 여기서 시므온 지파에 대한 축복을 생략한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다음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1)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영토 내에 함께 거주할 것이므로(수 19:1,9) 유다 지파의 축복에 동참된 것으로 여겨서이다.
2) 시므온 지파는 야곱의 저주(창 49:5-7)를 받은 후, 그 죄악을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거듭 죄악을 더하였기 때문에(민 25:14) 그 책벌로써이다.
7 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하니라 일렀으되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의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그의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가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유다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은 여호와께 대한 기도의 형식으로 선포되고 있는데, 그 축복 내용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왕권에 관한 것이다.
야곱도 일찍이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라고 유다 지파를 축복하였는 바, 여기 모세의 축복은 야곱의 축복을 재확인하는 축복이었다.
훗날 이 예언적 축복은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의 왕족(王族) 지파가 됨으로써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었다.(삼하 5:1, 2).
그러나 이 예언의 최종적 성취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즉 유다 지파를 통해 태어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든 원수를 물리치시고 만왕의 왕이 된 사실에서 마침내 이 예언은 온전히 실현된 것이다.
‘그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 유다 지파가 다른 지파들의 지도자적인 위치에 서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그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 여기서 '자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역시 유다가 이스라엘의 지도자적 위치에서 대적들과 싸우게 될 것을 의미한다.
8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둠밈과 우림' - '둠밈'(Thummim)의 뜻은 '온전함'이다. 그리고 '우림'(Urim)의 뜻은 '빛'이다. 이것들의 재료나 모양이 어떠한지는 분명치 않으나,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할 때 대제사장이 사용하던 일종의 제비(lot) 도구였음에는 틀림 없다. 출28:30 주석 참조.
‘경건한 자' - '경건한 자'란 넓은 의미로는 '레위 지파'를, 좁은 의미로는 그 중에서도 특히 '대제사장'을 가리킨다. 실제로 둠밈과 우림은 레위 지파의 대제사장이 맡아 보관하였었다(출 28:29, 30).
‘맛사에서...므리바 물가에서...다투셨도다' - 모세와 아론으로 대표되는 레위 지파 역사 중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맛사 생수 사건(출 17:1-7)과 므리바 반석 사건(민20:2-13)을 담담히 회고하고 있는 구절이다.
당시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 맛사(Massah)에서의 어려움은 잘 견뎌냈었다. 그러나 므리바(Maribah) 물가에서는 그만 격정을 이기지 못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하고 말았었다(민 20:12).
한편 본절에서 이 두 사건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인간의 행적에 상관없이 거룩한 직분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즉 모세와 아론 뿐 아니라 전체 레위 지파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어 거룩한 직무를 받았던 것이다.
9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
‘그 부모...그 형제들...그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 - 이 말은 금송아지 숭배 사건시 레위 지파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 형제에게 칼을 빼든 의로운 열정 및 전적 헌신을 언급하고 있는 말이다(출 32:25-29). 결국 이 어려운 결단으로 인해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중 나뉘고 흩어지리라"(창 49:7)던 야곱의 저주를 축복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주의 말씀을...지킴을 인함이로다' -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별된 레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일이 부모와 형제와 자녀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보다도 더 중요했다. 이런 맥락에서 훗날 예수께서도 부모나 자녀를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가르치셨다(마 10:37, 19:29, 눅 14:26).
10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
‘주의 법도를...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 레위 지파의 영광스러운 중보(仲保)직임 두 가지이다. 즉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말씀 교육의 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 예배봉사의 직임이다.
일찍이 레위 지파는 레위의 세겜 사건(창 34:25-29)으로 인하여 야곱의 저주를 받았었는데(창 49:7), 오히려 이처럼 저주가 축복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금송아지 사건시(출 32:25-29)의 의로운 열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온 백성을 위한 이 두 직임(職任)을 감당하기 위해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 흩어지게 되었다(민 35:1-8).
11 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 - 하나님의 성막 봉사를 의해 구별된 레위 지파는 가나안 정복 후 다른 지파들과는 달리 기업을 받지 못했다(10:9, 18:1). 따라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十一條)에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란 말은 결국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라는 의미도 되는 셈이다.
‘그 손의 일' - 레위 지파의 손을 통해 행해지는 모든 일, 즉 말씀 교육과 예배 봉사의 일을 가리킨다.
‘그를 대적하여...미워하는 자' - 레위 지파가 수행하는 말씀 교육과 예배 행위를 반대하는 모든 자들을 가리킨다. 이는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니 결단코 용서받지 못한다.
12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
본절은 베냐민 지파를 향한 축복으로서, 그 내용은 '안전한 보호'이다. 막내 지파에 대한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을 감지할 수 있다.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 여기서 '그 곁'은 '여호와의 곁'을 의미한다. 이 예언은 역사적으로 1) 베냐민 지파의 영토가 하나님께서 거하실 예루살렘 성전 곁에 위치하므로서(수 18:28), 2) 남북 왕국 분열시 베냐민 지파가 유다 지파와 결속하여 다윗 가문 및 하나님의 성전을 파수하므로서(왕상 12:21) 성취되었다.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 - 이 말은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등에 업은 모습을 가리키는 말로서, 곧 '품에 안아 주신다',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또한 두 어깨 사이에 머리가 위치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명예롭게 하신다', '머리가 되게 하신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13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요셉에 대하여는' - 여기서 말하는 '요셉' 이란 요셉의 두 후손인 에브라임지파와 므낫세 지파(창 41:51,52)를 가리킨다(17절).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 가나안 정복 후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차지한 땅은 요단 서편의 아주 기름진 땅들이었다(수 16:1-17:18). 특히 그들이 기업으로 할당받은 땅은 가나안 전 영토의 1/4에 해당할 정도로 광활하였다.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물' - 야곱도 이미 축복하였듯이(창 49:25). 농경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물에 대한 축복이다(32:2). 한편 본절 이하에 계속 나오는 '보물'이란 단어의 히브리어 '메게드'는 매우 '가치 있는 것'(KJV, the precious things)을 의미한다.
14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달빛)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태양이...태음이 자라게 하는 보물' - 태양열과 달빛에 의하여 풍성한 결실을 맺는 각종 땅의 소산물을 가리킨다.
15 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옛 산의 상품물' - 여기서 '옛산'이란 에브라임 산지로 대표되는 요셉 지파의 영토를 가리킨다. 그리고 '상품물'이란 그곳의 특산물을 가리킨다. 에브라임 산지에서 옛날부터 밀과 포도가 많이 생산되었다. 모세의 노래(32:1-43) 가운데 나오는 '지극히 아름다운 밀', '포도즙의 붉은 술'(32:14)이란 바로 이러한 것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영원한 작은 산의 보물' - '영원한 작은 산'이란 야곱의 축복 중에서 인용한 말로서(창 49:26), 곧 요셉 지파가 거주할 낮은 지대의 영토(언덕)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산의 '보물'역시 바로 그 땅의 특산물을 의미한다.
16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 - 40년 전 호렙 산 가시떨기 나무의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출 3:2-4). 모세는 여기서 요셉 지파에게 임할 모든 축복은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은혜(라촌)' - 원뜻은 '즐거움', '기쁨'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의미한다.
‘머리에...정수리에 임할지로다' - 당시 아버지가 아들을 축복할 때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던 관습(창 48:14-16)을 회상시켜 준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요셉 지파의 아버지로서 그들을 풍성히 축복하실 것을 의미한다.
‘그 형제 중 구별한 자' - 야곱의 축복에 나오는 '그 형제중 뛰어난 자'와 같은 말이다(창 49:26). 이는 1) 과거 요셉이 형제들과 떨어져(구별되어) 애굽으로 끌려간 탓에 오히려 그 가족들을 구할 수 있었던 점과(창 45:4, 5) 2) 장차 요셉 지파가 받을 축복이 다른 지파들보다 특별히 구별되게 뛰어날 것임을 의미한다.
17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민족들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리로다
‘첫 수송아지' - 힘과 위엄을 지닌 장자(長子)를 상징한다. 요셉은 근친상간죄로 인해 박탈된 르우벤의 장자권을 실제적으로 이어받았었다. 즉 그는 자신의 꿈(창 37:5-11)대로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됨으로서, 명실공히 야곱 가문의 장자가 되었었다(창 48:22, 대상 5:1, 2).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 여기서 '뿔'은 '힘'을 상징한다(삼상 2:10, 시18:2, 75:10, 112:9). 따라서 요셉 지파는 겁과 두려움을 모르는 강하고 용맹스런 지파가 되리라는 뜻이다. 실제 이스라엘 역사상 여호수아를 비롯하여 여사사 드보라, 기드온 등 그 기세를 이방에 떨친 뿔 달린 들소 같은 용사들이 요셉 지파에서 많이 나왔다.
‘에브라임의 만만...므낫세의 천천' - 요셉 지파의 번영과 영예에 대한 축복이다. 그런데 장자인 므낫세보다 차자 에브라임을 더 앞세워 축복하고 있는 것은 야곱의 축복과 같다.
18 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스불론이여...잇사갈이여' - 모세가 이처럼 스불론 지파와 잇사갈 지파를 함께 축복하고 있는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두 지파가 한 어머니 레아에게서 비롯되었고(창 30:17-20). 2) 또한 앞으로 들어갈 가나안 땅에서도 서로 인접한 지역에 거할 것이기 때문인 것 같다(수 19:10-23).
‘너는 나감을 기뻐하라...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 혹자는 이를 '노동'과 '휴식'을 의미하는 두 개념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예언은 어디까지나 야곱의 예언과 관련하여 생각하여야 한다(창 49:13-15).
그리할 때 여기서'나감'(going out)은 바다로 나가는 것 즉 무역 활동을 의미하고, '장막에 있음'은 평온한 생활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예언은 후일 스불론 지파가 해변까지 그들의 영역을 넓혀(사 9:1) 해로를 개척함으로써, 그리고 잇사갈 지파는 조용한 농경 생활을 영위하는 지파가 됨으로서 온전히 성취되었다.
19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
‘산에 이르게 하고...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 혹자는 여기서의 '산'을 스불론과 잇사갈의 경계에 위치한 '다볼 산'(Mt. Tabor)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의로운 제사'와 관련해 볼 때 여기서의 '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주의 기업의 산'(출 15:17), 즉 '가나안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절은 이 두 지파가 자신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불러모아 성소에서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라는 종교적 열심에 관한 예언으로 볼수 있다.
‘모래에 감추인 보배' - 해변가 모래속에서 얻을 수 있는 각종 귀한 물산(物産)이나, 혹은 해상 무역으로 인한 번영들을 의미하는 듯하다.
20 갓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갓을 광대하게 하시는 이에게 찬송을 부를지어다 갓이 암사자 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는도다
‘갓을 광대케 하시는' - 갓(Gad) 지파가 광활한 영토를 획득할 것을 가리킨다.
‘암사같이...팔과 정수리를 찢는도다' - 여기서 '팔'은 '힘'을, '정수리'는 '지혜'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 말은 갓 지파가 매우 용맹스러워서 대적들의 힘과 모략을 능히 격파하리라는 예언이다.(창 49:19).
21 그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 곧 입법자의 분깃으로 준비된 것이로다 그가 백성의 수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 -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Trans-Jordan)땅을 정복하자, 갓지파가 므낫세 반지파 및 르우벤 지파와 더불어 그곳의 땅 분배받기를 적극적으로 원하여 마침내 할당받은 사실을 가리킨다(3:12-17, 민 32:2-5).
‘법 세운 자의 분깃으로 예비된 것이로다' - 여기서 '법 세운 자'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세운 모세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여호수아에 의해 땅을 분배받았던 다른 지파와는 달리(수 14:1) 갓 지파는 모세에 의해서 직접 땅을 분배받은 사실을 의미한다.
‘두령들과 함께와서...행하도다' - 갓 지파가 다른 지파보다 먼저 요단 동편 땅을 분배받는 조건으로 모세와 맺은 약속, 곧 요단 서편의 가나안 본토 땅을 점령하는 가나안 정복 전쟁시 선봉(先鋒) 이 되어 싸우겠다는 약속(3:18-22, 민 32:16-27)을 그들이 성실히 수행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22 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 - 야곱은 그의 축복에서 단(Dan)의 교활함을 들어 뱀에 비유했었다(창 49:17). 그러나 모세는 단의 용맹성을 들어 사자 새끼에 비유하고 있다. 결국 이 비유들은 단 지파가 전쟁에서 뛰어난 계략과 용맹을 떨칠 것이라는 예언이다.
후일 사자같이 힘세고 용감햇던 삼손이 바로 이 단지파 출신이었다. 한편, '바산'은 레바논과 헤르몬 산지 지역의 고지대로서, 사자를 비롯하여 각종 맹수들이 들끓던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아 4:8). 그런데 여기서 바산이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단 지파는 본래 가나안 땅의 남부 해안 지방을 기업으로 받았었다(수 19:40-46). 그런데 아모리인들에 의하여 산지로 쫓겨나 유리(流離)하게 되자(삿 1:34, 18:1), 바산 지역에 속한 갈릴리 호수 북부의 라이스에 침입해 들어가 그곳에 정착하였던 것이다(삿 18:7-31).
빌하의 막내 아들인 납달리 지파가 받을 축복을 '풍요로움'이었다. 이 예언대로 이 지파는 가나안 땅의 젖줄인 갈릴리 호수 일대의 비옥한 지역을 차지했다. 한편 야곱의 축복(창 49:21) 때에는 이들이 놓인 암사슴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자로 묘사되었다.
‘서방과 남방을 얻을지로다' - '서방과 남방'에 해당하는 '얌 웨다룸'은 '바다와 남방'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역본 RSV는 이를'호수와 남방'(the lake and the south)으로, NIV는 '호수쪽의 남방'(southward tothe lake)으로 각기 번역하였다. 훗날 납달리 지파가 기업으로 차지한 땅이 갈릴리바다(호수)를 끼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수 19:32-39) 이는 상당히 적절한 번역이다.
24 아셀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아셀은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으며' - 아셀 지파는 1차 인구 조사 때에는 41,500명이었으나(민 1:41), 2차 인구 조사에서는 53,400명으로 늘어났다(민 26:47). 모세는 이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들을 축복하였을 것이다.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 일찍이 야곱도 아셀 지파에 대하여 축복하기를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창 49:20)라고 하였었다. 이는 아셀 지파의 땅이 비옥한 옥토(沃土)일 것임을 강조한 표현인데, 실제로 훗날 솔로몬 왕은 아셀 지파의 기업인 갈멜 평원에서 나는 곡식을 두로 왕 히람에게 공급한 적이 있다(왕상 5:11).
25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문 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 여기서 '문 빗장'에 해당하는 '미느알'은 '매다', '꼭 잠그다', '둘러싸다'란 뜻의 '나알'에서 온 단어로 '요새'나 '성채'(城砦)를 가리키는 시적 표현이다.
그런데 칼빈이나 KJV는 이를 '신발'(shoes)로 해석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왕상 4:13에도 '놋 빗장 문을 구비한 성읍'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개역 성경의 번역이 정당함을 알 수 있다.
또 혹자(Matthew Henry)는 이를 아셀 지파의 거주지에 놋과 철광산이 많을 것이라는 뜻으로 보기도 하나 그 역시 타당성이 희박하다. 따라서 본절이 의미하는 바는 아셀 지파의 거주지가 마치 철과 놋으로 지은 요새처럼 튼튼하고 안전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 '능력'에 해당하는 '도베'는 '평온'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공동 번역은 이를 '길이 길이 태평 성대를 누리어라'로 번역하고 있다.
26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여수룬' - '의로운 백성'이란 뜻의 이스라엘의 별칭이다. 32:15 주석 참조.
‘너를 도우시려고...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 여기서 '하늘을 타고 오다', '구름을 타고 오다' 등의 표현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시 18:10, 68:33, 사 19:1). 이처럼 천지의 대주재(大主宰)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신다면 감히 그들을 대적할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기 마련이다(27절).
27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 결코 그 힘이 다하지 않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팔이 항상 이스라엘의 안전한 처소가 되어 그들을 돌보고 붙드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가...멸하라 하시도다' - 이스라엘이 모든 대적들을 담대히 물리칠 수 있는 근거는 곧 이스라엘 군대의 대장 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친히 그들을 지휘하시고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28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야곱의 샘' - 이는 앞 구절의 '이스라엘'과 대구가 되는 말로서, 곧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즉 샘에서 물이 흘러나오듯 족장 야곱으로부터 근원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시 68:26, 사 48:1)를 가리키는 말이다.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 - 곡식과 포도주가 풍성한 땅,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며 이른비와 늦은비가 때를 따라 내리는 땅 '가나안'을 가리킨다 (6:11, 8:7,8, 11:9-12,14,15). 특히 여기서 '하늘이 이슬을 내린다'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수사적 표현이다(창 27:28).
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너는 행복자로다' - '행복한'에 해당하는 '아쉬레'는 '충만한 행복','완전한 행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너는 지극히 행복하다'로도 번역될 수있다.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 여기서 '높은 곳을 밟는다'는 말은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뜻이다. 32:13 이 말은 싸움에서 고지(高地)를 점령하는 것이 승리의 관건이 된데서 연유된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70인역(LXX)은 본절을 '네가 그들의 목을 밟을 것이다'라고 의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