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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기독교 시대의 선교전략 1강

LNCK 2022. 8. 5. 14:57

후기기독교시대의 선교전략(1)-시대적 위기의식 - YouTube

 

◈후기 기독교 시대의 선교전략 1강             마24:3~14           2022.08.03.


'후기 기독교 시대 Post- Christendom' 이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선교사도 아니고, 한국의 기독교인이고 
'후기 기독교 사회'라 함은 서구 기독교 사회와 관련이 있는 것인데 
대한민국에서 예수를 믿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서구사회는 전기 기독교 사회를 겪었고, 지금 후기 기독교 사회를 겪고 있으며
우리 한국은 130년 역사속에, 전기 기독교 사회를 겪지 않았기 때문에, 후기 기독교 사회도 아예 없다는 뜻.
일례로, 영화도 전편이 있어야 후편이 있는 게지, 전편도 없는데 무슨 후편이 있을 수 있느냐는 논리)

서양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들의 문제요, 그들이 해결할 것이지.. 
우리가 간섭을 한다고 뭐가 달라질 수 있겠느냐? 

자기들이 자기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별의별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전쟁 뉴스를 
우리가 매일 같이 듣고, 그 영향을 안 받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죠. 

또 이웃나라 중국에서 벌어지는 일, 대만에서 벌어지는 일, 일본에서 벌어지는 일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소위 글로벌  (지구촌) 시대입니다.

인간의 일도 이렇다면, 영적인 일은 오죽하겠습니까? 
여러분 옛날에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한국이 독감이 걸린다.. 이런 말을 했는데 

이제는 어느 한 지역에서 영적으로 재채기를 하면 
그 이외 나라에 영적으로 독감이 걸릴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후기 기독교 사회'라는 서구의 시대적 상황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후기 기독교 시대에 선교전략> 
이것은 제(김영준 목사)가 수년에 걸쳐서 연구하고, 공부하고, 생각한 주제이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해서 연구하고 생각할 주제가 될 것입니다. 

제가 그런 주제로 이미 책을 한 권 출판했지만 
그 주제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다룰 만한 가치가 있고 
또 분량이 크고 참으로 연구 범위가 넓고 
제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들이 뛰어들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해야 될 그런 주제입니다. 

삼국지를 보면, 삼국지의 용사들이 누굽니까? 
유비를 도와 직접 전쟁에 나가서 공을 세우는 관우와 장비 같은 장수가 있죠. 
반대로 제갈공명은 직접 전투에 나가서 칼을 들고 싸웠다는 말은 없지만 
그럼에도 이 초나라가 이길 수 있고, 앞으로 어떻게 천하를 통일할 것이냐, 
앞으로 어떻게 전쟁을 이길 것이냐? 하는 전략을 세운 사람은 제갈공명이에요. 

관우와 장비같은 장수처럼, 직접 칼을 들고 나가서 싸워야 될 사람도 있고 
제갈공명처럼 앞으로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이기고, 어떤 식으로 정세가 돌아갈 것인가를 
연구하고 조언하는 책사(선지자)도 있어야 되는 것처럼, 

이제 이 시대의 세계 선교, 또 민족복음화도 
직접 보병으로 자기 발로 들어가서 걷고, 뛰면서 일을 해야 되는 사람들도 많이 필요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될 것이며 
지금 이 시대는 어떤 식으로 변화하고 있느냐를 분별하고 그것을 말해 줄 수 있는 
예언자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천기는 분별하면서, 어찌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마16:3
이렇게 '시대의 표적 sings of the times'이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후기 기독교 사회에 대한 모든 토론은 무엇을 반영하냐면 
시대적인 위기의식을 반영합니다
교회가 느끼는 시대적인 위기의식을 반영합니다. 

모든 사람은 위기의식을 안고 삽니다. 
개인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기업체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습니다. 

개인이 갖고 있는 위기감은, 여러분이 다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내가 죽으면 어떡하지? 사고 당하면 어떡하지? 내가 혹시 망하면 어떡하지?'
이런 어떤 위기의식을 갖고 살고있어요.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봤더니 
'대학생들이 제일 많이 생각하는 것이 성이고, 그 다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죽음이다...'  
이런 발표가 있던데 

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데,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무의식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고 
우리 주변에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고들  
그게 환경이든, 기근이든, 홍수든, 무슨 태풍이든, 지진이든, 질병이든 

이런 소식을 접할 때, 우리 모두는 그것을 내 자신에게 연결을 시켜서 
'내가 저렇게 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위기의식을 안 갖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코로나시대에 이제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쓰고 다닙니다. 

옛날에는 마스크를 쓰지 않는 게 당연했는데 
이제는 쓰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2년만에 그런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보면 
인간의 습관을 바꾸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후기 기독교 사회의 시대적 영향을 내가 안 받을 수 없다는 얘기를 하는 중)

   

 

◑세상 역사는 끊임없이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습니다. 

과거 역사를 보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의 차원에서도 위기의식이 있어요. 
지금 우크라이나 같은 나라는, 나라가 존립할까/ 망할까 알 수 없는 위기에 처해 있죠. 

그런데 우크라이나만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옆나라 대만도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것을 보니까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모든 사람들이 이 다음에 전쟁은, 대만에서 일어나지 않겠느냐 라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만 뿐만이 아닙니다. 1948년에 건국한 이후로 

지속적으로 국가의 존립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고 사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적대적인 나라들의 둘러싸여 있습니다. 
북쪽에는 시리아, 동쪽에는 요르단, 남쪽에는 이집트 
또 더 멀리는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전부 다 이스라엘에 대해서 적대적인 국가들인데 

이 작은 나라가 1948년에 건국을 했을 때부터 
주변 나라들은 '우리가 너희를 바다로 쓸어버리겠다' 라고 공언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늘 위기의식을 갖고 삽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위기의식을 갖고 살았어요. 
오늘 성경말씀을 읽어 보시면 마24:3~14절, 
많은 신학자들이 이 구절을 근거로 기독교 종말론 시나리오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종말론에, 이 본문에서 따오지 않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구절이,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이 
어떤 체계적인 종말론 시나리오를 만들기에는 너무 짧고 단편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마24장을 근거로 뭐 전천년설이 후천년설이 어떻고, 
뭐 7년 환난이 어떻고, 휴거가 일어나고, 예수님의 재림이 어떻고...
이런 거대한 종말론의 시나리오를 만들려고 하는데 

그러기에는 24:3~14절의 짧은 구절을 가지고 
어떻게 그런 체계적인 종말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일까요? 

물론 신학자들이 이 구절만 인용하는 게 아니고 
다니엘서, 데살로니가전서, 계시록도 인용하지만, 

그러나 저는 이 구절이, 어떤 체계적인 종말에 어떤 일이 일어날것이고 
어떻게 끝이 올 것이냐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갖고 계셨던 미래에 대한 경고와, 
초대교회가 갖고 있었던 미래에 대한 위기의식을 반영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가 세월이 지나가면서, 시대가 변하면서 
세상이 세속적으로 바뀌면서 
이전에 없었던 위기감을 갖게 된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시대에는 교회가 소멸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처음(초대교회)에도 그랬고, 중간(중세시대)에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사라질 수 있다. 소멸될 수 있다... 지금은 후기 기독교 사회로 인한 위기감입니다.

신앙이 사라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위기의식을 어느 시대든 모든 교회가 갖고 있었어요. 

그러한 정서를 이 성경 구절(마24:3~14)이 반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 보면, 굉장히 미래가 암울하게 여겨지고 
두렵고, 난리와, 핍박과 배교와 별의별 문제가 앞으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데 

마24: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세상 끝에 대해서 물어봤어요. 그렇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질문이죠.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을 읽어보면, 이것은 세상 끝에만 일어날 일이 아니에요. 

세상 끝이 언제인지 알 수도 없고 
그것보다는 제자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이미 겪을 만한 일을 말씀하시는 거죠.  *종말론의 현재적 해석 (미래적 해석, 둘 다 봅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이라는 것은, 어떤 역사의 끝, 먼 미래의 일어나는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자기 시대를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일이 
말세와 같은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세 라는 말은, 우리가 어떤 때 말세 라는 말을 씁니까? 
소망이 암울하게 보일 때, 이제는 더 이상 길이 없다, 끝이다.. 
이제는 어떤 해결책이 없다.. 이대로 끝나는가? 라고 생각할 때 
'말세' 라는 말을 쓰죠. 

요즘에도 사람들이 세상에 납득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보면 
'말세야!' 라는 말을 아주 자주 씁니다. 

그런데 이 말세, 즉 종말이라는 말은 
지금 이 시대만 쓰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오순절 날 첫 설교를 할 때 '말세' 라는 말을 썼어요. 
(그래서 말세란,  예수님의 초림~재림까지, 매 시대가 그 시대를 사는 사람에겐 말세였죠)

'기록되었으되 말세에 내가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주리니'  행2:17
여기서 말세 라는 말을 썼어요. 
여기서 종말론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종말이라는 것이 
어떤 역사가 수천 년, 수만 년.. 우리가 알 수 없는 장구한 역사가 흐르고 
맨 마지막을 종말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종말이란 말은, 어느 시대든 자기 시대에 세상이 끝날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 시대를 '말세'라고 여겼어요. 
그처럼 위기감을 갖고 믿음을 유지했습니다. 

애초부터 오순절 날,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기록되었으되 말세에 (마지막 날에) 내가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주리니' 행2:17 
이미 그때에 마지막 이란 말을 썼고, 이미 그 시대를 마지막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말세'라는 것은 
어떤 시간적인, 시간적인 차원에서 말세가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교회는, 어느 시대를 살던, 어느 지역에 있던 
지금이 말세요, 지금 우리는 위기이고,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우리가 알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의 위험이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우리 북쪽에 있는 북한은 이미 이걸 경험했어요. 

북한의 교회가 말살이 됐습니다. 평양은 과거에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는데요. 
평양 대 부흥, 
대한민국에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북한이 대한민국 기독교의 중심이었는데,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교회가 싸그리 문을 닫고 말살되었어요.

물리적으로 말살된 것뿐만이 아니고, 사상적으로도 
북한의 어린이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어렸을 때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체계적으로, 집중적으로 기독교를 말살했습니까. 

북한에서 일어난 일이 20세기에 일어난 일이에요. 
한 나라의 교회가 아예 문을 닫아버렸어요. 

종말론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인데, 당연히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죠. 
그 위기감은 '교회가 망할 수 있다. 신앙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 
기독교가 이대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위기감을 
모든 시대에 모든 나라가 겪었습니다. 

초대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물론 초대교회의 박해가 많았죠. 
오죽하면 기독교인들이 카타콤을 만들어서, 그 속에 들어가서 살 정도로 
그건 물리적인 위협을 두려워한 거예요. 

저 사람들이 언제 우리를 찾아와서 죽일지 모르니 
생존하기 위해 땅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가서 산 거에요. 

그런데 이런 위기감이 초대교회 시대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어느 시대든 있었어요. 
어느 시대든 있었습니다. 

여러분, 찬송과 가사를 한번 찾아보세요. 
찬송가 384장, 중세의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작사한 곡인데 
이 가사의 위기감이, 절절이 배여 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루터가 그 시대에 큰 환란을 느꼈어요. 
마치 모든 것이 다 망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마르틴 루터가 이 작사를 한 이유는, 그렇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정말 위기의식을 느낀 거죠.

(지금 이 시대는 후기 기독교 사회로 인한 기독교 말살의 위기를 느끼고 있는 중이라는 논지를 펼치는 중)

이 위기의식 가운데, 만약에 우리 시대에도 우리가 믿음으로 굳게 서지 않으면 
믿음이 몰락할 수 있겠다.. 개신교회가 몰락할 수 있겠다.. 위기의식을 가지는 거예요. *주제

어느 시대든 그 시대에 위기의식이 있어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이 시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도 예외일 수 없다는 거죠.

그러므로 지금 이 세대에 우리가 후기 기독교 사회를 말하는 것은 
각 세대가 감당해야 할 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우리 세대의 감당해야 될 위기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보다 더 위험하고 무서운 일들이 
과거의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자세히 몰라서 그렇지요.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기독교 신앙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했죠. 
예수님 말씀대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기독교가 퍼져 나갔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사마리아로 증거되고, 안디옥으로 퍼져가고 
안디옥을 중심으로 소아시아(터키)에서 기독교가 퍼져나가다가
이제 유럽으로 건너갔죠. 마게도냐로 건너갔어요. 

1세기 그때 이미 아시아 사람이, 유럽을 전도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바울사도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서 유럽인을 전도했어요. 

유럽인이 아시아 사람의 환상에 나타나서 '이리로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고 했어요. 
그렇게 기독교가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기독교가 마치 유럽 종교인것처럼 변화가 된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를 생각할 때, 서양종교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지만 
원래 서양 종교가 아니에요. 

참고로, 서양에서는 어떤 종교도 시작되지 않았어요. 
힌두교는 인도에서 시작했죠. 불교도 인도에서 시작했어요.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스라엘에서 시작했죠. 이슬람교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작했죠. 

다만 역사적인 여건에 의해, 이 기독교 복음이 유럽으로 전파된 후에 
그것이 로마로 들어가고, 로마 제국이 313 년에 기독교 국가가 되고 
그 신앙이 이탈리아 북쪽으로 퍼져갔죠. 

야만 족들이 북쪽에서 쳐들어 와가지고 로마를 멸망시켰는데 
돌아갈 때 황금이든, 보물만만 가져간 게 아니고, 기독교 신앙을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이 유럽대륙이 복음화가 된 거예요. 영국이 복음화가 되고... 
그러면서 유럽이 기독교 문화가 되었습니다. 

2천년이 지나갔어요. 이제 2천 년이라는 역사의 무게가 
옛날에 우리 어른들이 성령의 움직임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셨죠. 
복음이 움직인 거라고 하지 않고 '성령이 움직였다' 라고 했는데 

성령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북아프리카와 지중해로 갔다가 
그것이 로마로 갔다가, 유럽으로 갔다가, 영국으로 갔다가, 
성령이 미국으로 움직였다가, 이제 성령이 아시아로 오신다.. 이런 식으로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움직임뿐만이 아니고, 기독교 신앙이 그런 식으로 
서진 운동을 해서 지금까지 2천년을 지내 왔습니다. 

'후기 기독교'라는 것은 서구 사람들의 관점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원래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아요. 

우리 역사에 무슨 셰익스피어, 밀턴, 나폴레옹이 없었듯이
후기 기독교라는 말도 우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아직 전기 기독교(초대교회~중세)가 온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기 기독교' 라는 말을 우리가 쓸 수 없으나 
그들은 이미 기독교 시대를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그리고 2천년이 지난 후에 사람들이 신앙을 떠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에 
'후기 기독교' 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 자체는 위기감을 반영하는 단어이죠. 
'기독교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후기 기독교, 포스트-기독교라는 말은, 그럼 기독교가 이미 끝났다는 말인가?
새로운 것을 찾아 간다는 말인가? 
이 다음에는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 이렇게 위기감을 반영한 단어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교회가 사라질 수 있을까?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이같은 위기는 어느 시대든 존재했다" 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이런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시면 
마24:4~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두려워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사람들은 끝났다.. 라고 생각합니다. '말세야!' 라고 생각합니다만
아직 끝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이것은 우리 개인의 차원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끝이야, 이제 끝났나봐, 이제 끝이야!'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라고 느껴질 때가 있죠. 

경제적으로든, 이제 우리 집은 끝이야, 더 이상 갈 데가 없어!' 
그런데 주님 말씀은 '아직 끝이 아니야, 난리와 난리가 일어난다고 해서 끝이 아니야!' 
이건 믿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불이 나고, 무슨 부도가 나고, 뭐 사람이 다치고 
뭐 별의별 일이 일어날 수 있는데.. 끝이 아니에요. 
주님이 '끝이다!' 라고 말씀하시기 전에는 끝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돼요. 

주님이 '이제 끝!' 하시면, 그건 우리가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야 끝내!' 라고 하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임의로 끝이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개인의 차원, 가정의 차원, 교회, 기업, 국가의 차원..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난리와 난리를 좀 겪어봐야 생존력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난리를 좀 겪어봐야 됩니다. 

그리고 이런 난리도 겪었고, 저런 고난도 겪었지만 극복을 했어요. 
그러면서 이제 생존력을 갖게 되고, 우리의 믿음에 관록이 생기게 되고 
우리의 믿음에 능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믿음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죠. 

 

그래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때 사람들이 너희를 환란에 넘겨주겠으면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마24:7~9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서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니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24:10~14

끝이 온다는 가장 확실한 징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많은 사람들이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면,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전도종족을 향해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모든 선교단체는 그런 식으로 움직였어요.
모든 선교단체는 선교전략과 종말론을 연계해서 생각했어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면 종말이 오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어떤 일이 발생했냐면, 땅 끝까지 복음 전하러 가는 동안에 
먼저 믿었던 나라들이 신앙을 떠나기 시작한 거예요. 
(전쟁으로 비유하면, 외국으로 군사 원정을 떠났는데 그 와중에 본국이 함락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여기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문제에 봉착한 것입니다. 
그럼 '땅끝' 이라는 것이 어디를 말하는 것이냐? 

미전도 종족, 주로 아프리카, 아시아의 이런 미전도 종족에게 전하는 것이 끝이냐? 
아니면 이제 상황이 달라져서 
프랑스와 독일과 이탈리아와 영국과 미국과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가 땅 끝이 되었느냐? 

역사가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건 이제 앞으로 계속해서 우리가 생각할 부분이고 
물리적인 위협,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난리
뭐 기근, 지진, 재난, 뭐 죽음, 미움, 이런 이런 물리적인 시련은 
사람들을 오히려 주님께 돌아오게 만듭니다. 

한국에서도 한국전쟁 후에 교회가 엄청나게 부흥을 하기 시작했죠. 
물리적인 환난은 오히려 사람들을 주님께 돌아오게 합니다. 

가난, 질병, 전쟁 이런 것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물리적인 위협이 아니고, 정신적이고 지적인 도전... 이건 좀 달라요.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어려워지면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데 
지적인 차원에서 시험이 오면 믿음으로부터 멀어집니다.  (후기 기독교 사회의 문제점)

서구 사회에서 지난 몇 백년 동안 일어난 일은 
지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이 도전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지적인 문제가 제일 어려운 문제는 아니에요. 

그게 가장 어렵고 해결하기 어려운 게 아니고 
그보다 더 심한 일들도 많습니다. 

아예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모조리 잡아 죽이는 일, 그런 것보다는 쉽죠.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났다는 말입니까? 
과거에 일어났어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여러분 한 때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이 동방교회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아세요?

애초에 복음이 전파될 때 
서쪽(서로마)은 로마가 서방교회 중심이었고 
동쪽(동로마)에서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이 교회의 중심이었던 때가 한 때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이 사라졌죠. 
왜냐하면 무슬림이 쳐들어와서, 모두 무슬림화 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흔적을 볼 수가 없죠. 

기독교인이 그런 얘기를 들으면 경악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 네, 별의 별 일들이 있었어요. 

일본의 천주교가 박해를 당할 때, 거의 사라졌어요. 
임진왜란 때 여러분 조선에 쳐들어온 왜군 중에, 군종장교 신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세요?
군종 신부들이 임진왜란 때 따라 왔어요. 
왜냐하면 천주교가 일본의 전파됐기 때문에, 
성주가 천주교를 믿으면, 그 성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집단 개종을 했거든요. 

그러나 그 후에 큰 빅해가 일어나서, 일본에서 당시 천주교가 거의 사라졌죠. 
여러분 그런 일도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비교하면 
현재의 우리가 '후기 기독교 사회가 됐다. 뭐 전성기가 지나갔다. 이제 어떻게 할거냐?' 

 

'이제는 교회 다니는 것이 더 이상 인기가 없고, 사람들이 신앙에 관심이 없고, 
젊은이들이 교회를 오려고 하지 않고, 신앙적인 주제에 관심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은 
어느 시대든 있었던 문제에요. 지금만 있는 게 아니에요. 

시편에 이런 구절이 있죠. 
'미련한 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수천 년 전에, 그때도 이미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러니 현재에 이런 현상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에요.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예수께서 '교회' 라는 단어를 두 번 사용하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 구절입니다. 

아직 교회가 세워지기 이전의 일이에요. 
그러나 이때 벌써 예수님이 '내가 내 교회' 라고 말씀하셨어요.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미 예수님이 선포하셨습니다. 
이대로 될 줄 우리가 믿는 것이고, 
여기에서 교회가 어떤 시련이든, 어떤 시대적인 위기감이든 
그것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계속) 

 

*관련글 : 대중화의 위험  https://blog.daum.net/rfcdrfcd/15974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