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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3장, 배도했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라

LNCK 2022. 8. 5. 19:33

◈배도했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라               히3장               여러 설교 정리

그들은 결국 천국에 못 들어갔다

 

 

<히3장의 개요>

 

1절,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6절, 모세는 종이었고, 예수님은 아들이었다

 

7~19절, 광야 이스라엘의 배도의 예를 들면서 2nd 경고 (총 5번 중)

 

 

◑본문 해석 및 적용

 

▲3:1절,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천사보다 높으심’을 7가지로 설명했습니다.

2장에서는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천사보다 잠깐 낮아지신 (성육신) 예수님’을 설명했죠.

그러면서 3:1절에는 ‘그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필리핀 세부에서 어느 개신교 목회자가 관광하러 갔다가

우연히 길에서 만난 1년차 사제를 따라서, 그곳 성당 투어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복을 입고 있어서 그가 사제인줄 몰랐지요.)

 

그래서 어느 성당에 들어가서 두 사람이 같이 기도를 하는데,

사제는 무릎을 꿇고 (장의자 뒤에 무릎 꿇도록 받침이 설치 되어 있음)

강대상 앞쪽에 걸린 십자가를 가만히 쳐다보며, 5~10분간 눈을 뜨고 기도를 했습니다.

 

개신교 목회자는 장의자에 앉아서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눈을 감고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일정 시간이 흐른 후에, 서로는 서로를 쳐다보며 다소 놀랐습니다.

기도하는 자세나 스타일이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목회자가 보기에, 가톨릭 사제가 기도하는 폼이 .. 영 기도다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멍 때린다는 말이 있는데, 저 앞에 걸린 십자가 (가톨릭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달려 있습니다)의

예수님을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만히 멍 때리고 있을 뿐, 뭔가 열심히 기도를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묵상 이라는 것이었죠)

 

대신에 개신교 목회자는, 연신 몸을 흔들면서 뭔가를 기도했는데

주로 ‘주시옵소서’와 관련된 기도였습니다.

은혜를 주시옵고, 성령충만을 주시옵고, 건강을 주시옵고, 여행의 안전과...

 

그래서 요즘 개신교회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묵상하는’ 움직임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가톨릭이냐, 개신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느 것이 성경적인 본질인가? .. 그것을 좇아야 할 것입니다.

 

*관련설교

3:1  십자가 신앙이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3:1  예수를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자

 

3:1  흠 없으신 어린양을 바라보라

 

3:1~4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3:2~6절, 종인 모세보다 뛰어나신 아들 예수님

 

유대교는 모세를 거의 하늘처럼 모시고 섬기는

구약의 어떤 인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냥 가장 높은 분으로 섬깁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독립시킨 영웅일 뿐만 아니라

그보다도 시내산에서 십계명과 율법을 받아서 이스라엘에게 전해 주었기 때문에,

만약 율법이 없으면, 이스라엘 민족도 없는 것이죠.

그러니 모세가 없었다면, 자기들의 근본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앞서 1~2장에서는, 천사보다 높으신 예수님을 설명했습니다.

천사는 종종 구약에서 ‘하나님’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천사를 받들어 모셨겠습니까. (아직 성경이 없어서 천사의 지위를 몰랐던 시절)

 

이제 3~4장에서는, 모세보다 높으신 예수님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3:2절 ‘그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저자는 2절에서 예수와 모세가 서로 '충성되다'는 점에서 그 유사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3절 이하에서는 예수와 모세의 차이점,

즉 모세에 비해 예수께서 더 우월하심을 강조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사환으로서 섬겼지만,

예수는 그 집의 아들로서 섬겼다는 것입니다. :5

 

모세가 받은 영광은 예수의 영광과 비교될 수 없으며,

예수님의 영광과 비교될 만한 영광스러운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종'과 '아들'이라는 비교를 통해서 저자는

결국 히브리서의 수신자인 유대인 디아스포라 들에게

모세도 조상적부터 존경해오던 훌륭한 믿음의 선조이지만,

하나님의 종(유대교)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기독교)을 믿고 섬기라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은, 모세의 무덤조차 만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신34:5~6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그러자 사람들은, 이제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놋뱀은 히스기야 때에, 비로소 부수어 졌습니다. 왕하18:4 

   

그런데 북한은 ‘김일성 부자 우상화’를 아직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동상을 세우고, 그 앞에서 대대적으로 참배를 계속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엔, 북한에 매년 홍수가 나고 흉년이 들어서

주민들이 식량난에 허덕이는 것은, ‘북한의 우상숭배 때문이다’는 생각이 드는데,

북한 정권은 믿음이 없어서, 우상숭배의 폐해를 아직까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돌아가신 어떤 분을 너무 지나치게 높이면,

‘돌아가신 그 분께 민폐를 끼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단락 추천 설교

3:1~4:2  모세와 그리스도 

 

 

▲3:7~19절, 광야 이스라엘의 배도의 예를 들어 경고함 (5번 경고 중 2번째)

 

저자는 지금 배도의 유혹을 받고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에게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을 거역한 조상들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지금 여러분의 배도는

출애굽 때 광야에서 히브리 조상들의 배도와 같으며 *출애굽기, 민수기

그들은 안식(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3:11, 18

너희는 그같이 되지 말라는 것이죠. 그렇게 될까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7~11절을 시95:7~11에서 인용했는데요,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구약성경 민수기의 내용 즉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렀을때에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려고 했던 사건을 상기시킴으로써 (민14:3~4)

 

히브리서 수신자들로 하여금, 조상들의 그러한 전철을 밟지 말고

그들이 처음 가졌던 믿음의 확신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16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조상들은 얼마 못가서 애굽을 탈출한 것을 후회하였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격노케 했죠.

지금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전 유대교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출애굽 때 조상들이 애굽으로 되돌아가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격노케 한다는 거죠.

 

17절,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그렇게 조상들이 배도한 결과, 20세 이상은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 제외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저자는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빗대어서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3:11, 18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중도에 포기한 자들의 비참한 결과입니다.

 

오늘날에도 배도자들이 넘쳐납니다. 나도 그 범주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4가지 밭의 예를 드신 적이 있습니다.

‘길 가, 돌 밭, 가시 밭, 좋은 밭’

 

이 중에 ‘길 가’는 불신자를 뜻하고요,

‘돌밭, 가시밭’은 배도자 그룹에 포함됩니다.

 

둘 다 처음엔 말씀을 받고, 믿어서 싹을 틔웠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싹은, 결국 결실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돌밭은.. 흙이 너무 얇아서,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막4:17

 

가시밭은.. 흙이 얇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돌밭보다는 싹을 더 많이 자라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막4:19

 

결국 배도자는

출애굽 때도 수없이 많이 있었고, (거의 다 광야에서 엎드러졌음)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기에, 예수님이 돌밭, 가시밭을 경고하셨고,

히브리서 당시에도 있어서, 히브리서를 통해 경고를 받았고,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당연히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믿지만

행위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즉 예수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는 자들입니다.

 

딛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이 단락 추천 설교

 

3:7~19  마음이 굳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3:7~10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3:7~12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3:14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을 수 있습니까? / Piper

 

배교 시대에 대응책 / 로버트 하이머스

 

배교의 이유

 

교회의 종말론적 배교 / 데이빗 윌커슨

 

 

 

 

 

◑절별 해석 ...........................................................................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우리의 믿는 도리의...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믿는 도리'의 헬라어 '호몰로기아스'는 '고백'(confession)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4:14).

 

‘사도’ 복음서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자주 표현하고 있으나

예수님을 '사도'로 표현된 신약성경에서 본절뿐이다.

예수를 '사도'로 호칭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유대 문헌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전권 대사'로 간주되었다.

이 하나님의 전권대사를 뜻하는 용어 '쉴리'가 헬라어 '아포스톨로스'('사도')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2)'사도'라는 호칭은 예수를 구약의 모세와 비교해 언급한 것이다.

모세는 비록 구약에서 직접 '사도'로 불리지는 않았으나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라는 표현으로 보아(출3:10,LXX)

모세가 사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 제자가 예수를 '사도'로 표현한 것은 모세와의 역할을 비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시사한다.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더욱 타당하다.

 

‘대제사장’ 신약성경에서 본서만이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다.

'대제사장'이란 예수의 칭호는 예수의 사명 가운데 제의적 또는 중보자적 요소가 있음을 시사한다.

 

2 그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한 것과 같으니’

저자는 본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충성과 모세의 충성을 비교하고 있다.

민12:7에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온 집을 맡은 충성된 청지기로서 인정받은 것을 나타낸다.

 

모세는 예수님과 같이 완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조상 중의 하나인 모세를 충성된 자로 인정하면서

3절 이하에서는 예수를 보다 우월한 자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혹자의 기적대로 저자가 2:9에서 '영광과 존귀로 관 쓰는 예수를 보니'라고 기록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의 충성을 인정한 증거라고 할수 있다.

 

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저자는 2절에서 예수와 모세가 서로

'충성되다'는 점에서 그 유사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예수와 모세의 차이점,

즉 모세에 비해 예수께서 더 우월하심을 강조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사환으로서(5절) 자신을 세우신 이에게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영광을 받을 만하다. 더욱이 그는 출애굽 직후 40일동안 시내 산상에서 하나님과 만남으로 인해서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을 얼마간 간직했었다(출34:29-35, 고후3:7).

그러나 그의 영광은 결국 사라져 없어질 것에 불과했다(고후3:7,13).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2:9) 하나님의 본체시며(빌2:6),

영광과 빛의 근원이시므로(요1:4,5,9) 모세가 받은 영광은 예수의 영광과 비교될 수 없으며,

비교될 만한 영광스러운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본절의 상반절에 있는 '집'은 하반절에서 '만물'로 대치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그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로 묘사된다(사40:28, 45:7).

 

'집'이 존재하는 것은 '집 지은이'가 존재함을 시사하며,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모세의 역할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복음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었다.

즉 그는 장차 도래할 예수와 그 복음을 전하는 소개자였다.

 

한편 저자는 모세를 '사환'으로 표현한다. '사환'은 '종'의 의미를 가지는 말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나타나며 70인역에서는 자주 모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출4:10, 14:31, 민11:11, 12:7, 신3:24, 수1:2, 8:31,33,LXX)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모세는 비록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충성한 반면에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충성하였다.

'종'과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저자는 모세와 예수께서 충성하였다는 점에서는 유사할지 모르나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저자는 모세에게는 전치사 '엔'('안에서')을 사용하여 '집에서' 충성하였다고 묘사한 반면

그리스도께는 '에피'('위에')를 사용하여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음을 대비시키고 있다.

결국 이것은 모세에 비해 그리스도께서 질적으로 우월하심을 시사한다.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그러므로’ 헬라어 '디오'는 8절의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에 연결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함을 시사한다.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저자는 7-11절을 시95:7-11에서 인용하면서

이것을 성령께서 하신 말씀으로 설명하였다. 이런 사실은 저자가 인용한 시편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가 있음을 시사한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본문은 선지자나 천사나 모세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든'이란 의미로

수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아울러 즉각적인 행동을 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완고하게 하지 말라'의 헬라어 '메 스클레뤼네테'에서 '메'는 부정어이며

'스클레뤼네테'는 '말라서 굳은', '딱딱한'의 뜻을 갖는 '스클레로서'에서 파생한 동사이다.

이 '강퍅함'은 애굽 왕 바로가 하나님의이적을 보면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대적했던 것처럼(출9:35)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일절 거부하는 성향으로 굳어져 버린

인간의 심성을 가리킨다. *과거 개역에는 ‘강퍅케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본 구절의 뜻은 '입증하기 위하여 시험하였다'(tes-ted in proving)라는 뜻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객관적인 증거로

하나님의 '행사'를 보고자 하였다.

 

‘사십년 동안에’

맛소라 사본과 70인역에서는 이 40년을 하나님의 진노의 40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저자는 본절에서 70인역을 인용하면서도 이 40년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저자가 진노의 40년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셨음에 초첨을 맞추고 있음을 시사한다.

저자는 본절을 구약성경에서 인용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동안 하나님을 거역한 것과

예수께서 죽임을 배척하는 태도에 양자의 유사성을 염두에 둔 듯하다.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한편 심판의 내용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안식'(카타파우신)이란 창 2:2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그후 십계명 가운데 '안식일'의 규례가 제정되었다(출20:8).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안식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다(신12:9).

 

그러나 신약시대에 이 안식은 영적인 의미의 안식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성취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데 그곳은 악의 세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의와 공평이 실현된 곳이다.

 

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너희 중에 누가'라는 표현으로 보아 저자는 성도들 중에 더러는 기독교 신앙을 저버리고

유대교로 들어갈 위험성이 있다는것을 인식하였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유대교에서도 기독교에서 섬기는 같은 하나님을 섬기므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

배교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저자는 그러한 자들에 대해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었다고 설명한다.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시간의 긴박성을 암시한다. 저자는 배교의 위험성이 있었던 당시 유대인 공동체에게

한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는 긴박감을 가지고 서로를 권면하여 경건한 삶을 이루어 가도록 권면한다.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확실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스타세오스'는 '본질' 혹은 '정수'를 뜻하는 것으로

본절에서는 '확신'을 뜻한다(confidence, KJV, RSV, NIV, JB).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앞절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 민수기의 내용 즉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렀을때에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려고 했던 사건을 상기시킴으로(민14:3,4),

수신자들로 하여금 조상들의 그러한 전철(前轍)을 밟지 말고

그들이 처음 가졌던 믿음의 확신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세 가지 견해가있다.

1)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시45:7의 인용이며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동료'(companion)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2) 혹자는 '메토코이'가 파피리 문서(the papyri)에서 일반적으로 쓰여진 '동반자'(partner)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3)혹자는 '메토코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나눈다'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to share in,

NIV, RSV, Morris, Moffatt, Hewitt).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란 그리스도를 믿어 낙심치 아니하며 그와 함께 하늘나라를

상속할 자를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일을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얻게 되는 특권을 강조하는 것이다.

 

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하지 말라’

본절은 시95:7,8의 인용이다. 본절과 전후절의 관련성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본절이 지금까지 진술해 온 것에 대한 요약으로 앞절인 14절과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2)혹자는 본절이 새로운 문단의 시작으로서 다음절과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2)의 견해로 본다면 16절 첫머리에 있는 접속사 '가르'('왜냐하면')에 대한 해석이 애매하게 된다.

따라서 두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저자는 본절의 인용문을 통해 가데스의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가 수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7,8절).

 

16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를 지나는 도중에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불평하여 하나님을 여러 번 진노케 한 사실을 나타낸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원해서 애굽을 탈출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못가서 다시 애굽을 탈출한 것을 후회하였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좌한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본절에서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생활을 하나님의 진노로 설명한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에서 연유된 하나님의 진노이다.

그로 인해 그들은 40년의 광야 방랑 생활 속에서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였고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 40년의 진노하에서도 끊임없이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란 출애굽 당시 애굽에서 모세의 인도로 나온 자들로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킨다(민 14:29,30,32).

이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그를 대적하던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로서

하나님의 현존과 약속을 불신앙하고 거부한 결과이다.

 

저자는 이런 질문과 답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통해 구원의 은총을 체험한 것과 같이

수신자인 유대인 공동체도 동일한구원의 은총을 체험하였음을 상기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죄의 전철(前轍)을 밟지 말 것을 암시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이로 보건대’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블레포멘'은

저자가 지금까지 시편 95편에 대한 것을 해석한 결론임을 시사한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저자는 본절에서 이제까지 인용하여 수신자들에게 제시한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생활에 대한 결론을 맺고 있다.

이스라엘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불신앙'이다. '믿지 아니하므로'(아피스티안)는

비록 시편 95:7-11에는 직접 언급되고 있지는 않으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민14:11에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가데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항함으로 맞이하게 된 비참한 결과를 암시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상기는 본서의 수신자들이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불신(不信)으로 말미암아 가데스에서의 조상들처럼

그들도 같은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