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상을 사는 게 참 어렵지요. 삶이 어려운 까닭은 내 맘대로 안 되기 때문이죠. 내 생각대로 안 되기 때문이죠. 삶이 생각대로 되고 내 마음대로 된다면, 사는 게 뭐 그리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만약 무인도에서 산다고 칩시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살아도 아마 내 생각대로 안 되는 일이 있을 거예요. 내 맘대로 안 되는 일이 또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모여서 사는 세상 가운데서 내 생각대로 되고, 내 맘대로 되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안 되는 게 너무나 정상적인 일 아니겠어요? 내 맘대로 안 되는게 뭐가 이상합니까?
그러니까 내 맘대로 될 때 '아 이거 이상하다!' 이걸 우리가 눈치채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날마다 살아가면서,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제대로 없어야 정상이란 말이에요.
▲오늘 본문의 상황을 보면, 압살롬이 마음먹은 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어요. 삼하16:15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른지라'
반란을 일으켰다가, 전쟁을 치다가, 상대편 수도에 입성한다는 것은 승리를 이제 확실하게 쟁취하는 일이죠.
근데 가보니까, 다윗의 무리가 무슨 저항을 해야 되는데 아버지 일행이 피난을 떠나가버리고 없는 거예요.
그러니 전혀 저항없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소위 무혈입성을 한 거죠. 압살롬에게 얼마나 잘 된 일입니까. 얼마나 조짐이 좋아요?
게다가 이스라엘 당대 최고의 지략가 아히도벨이 지금 압살롬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일단 반란은 성공한 거죠.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잘 알거니와 뭐 그렇게 겉보기에 잘 되는 것, 그게 꼭 잘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거예요.
특별히 악한 의도를 가지고 악한 방법으로 악한 사람들과 함께 무슨 일을 금방 이루었다고 해서 '우리가 성공했다..' 이렇게 속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37:1~2절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한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러분, 악한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들 때문에, 그 사람들이 잘 된다고 시기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잘 되는 것 같지만, 지금 왕성하게 풀이 자라는 것 같지만 여러분 가을 날씨로 바뀌기만 하면 그 푸른 풀빛은 그냥 금방 바래고 만다는 거예요.
'야~ 잘 되네..' 잘 되는 것 같을 때 우리가 그런 걸 부러워 할 게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특히 악한 사람이 잘 되는 거는, 하나도 부러워 할 일이 아니에요.
잠24:1절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 하지 말고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 말지어다'
근데 사람들은 누가 압살롬처럼 잘 풀리면, 그 곁에 못 있어서 어쩔 줄을 몰라해요. 그 곁에 줄을 못 대서 난리에요. 지금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줄을 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위에 누가 악한 사람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우선 그냥 누가 턱도 없이 잘 되는 거는.. 수상하게 봐야 돼요.
'뭔데 갑자기 저렇게 잘 되는 거야?' 그런 걸 부러워하지 말고, 그 곁에 있으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늘 이 아히도벨은 당대의 지략가인데, 그는 어떻게 보면 잠24:1절 말씀을, 자기 마음에 새겨 두지 않았던 탓일 거예요.
지금 다윗이 나라를 도탄에 빠뜨렸습니까? 정치가 부패해서 밀려난 것입니까? No 어쨌든 하나님께서 다윗을 징계하셨지만
국가 전체적인 경영에서 실패를 한 것도 아니고, 무슨 외침을 받아서 나라가 지금 위기에 빠진 것도 아니요, 국가 재정에 빚이 늘어서 경제파탄에 이른 것도 아니요.. 무슨 실정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무리 자기(아히도벨)가 평소에 다윗에게 혹시 불만이 있었다 하더라도 압살롬 곁에 있어야 할지/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거란 말이에요.
회사에서 '내가 저 사람이 꼴 보기 싫어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또 다른 악한사람 곁에 붙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내 원수를 갚기 위해서, 다른 악한사람 곁에 가서 붙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신신당부 하는 말이 '원수 갚는 일이 네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거예요.
내가 원수 갚겠다고, 또 다른 악한 자 편에 붙었다가 그 일 때문에 내가 덜미를 잡히는 일이, 흔하고 흔한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왜 당대의 지략가라는 아히도벨이 어떻게 다윗 편에 있다가, 압살롬 편에 가게 되었을까요? 몇 가지 추측해 볼 수 있어요.
첫째는 밧세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어쨌든 간음이란 수치스러운 일이에요. 집 안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밧세바는 아히도벨의 손녀딸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아히도벨에게는 가정 파괴범이었던 것이죠. 주1)
아히도벨 정도의 명성을 가진 집안이면 어찌 됐건 그가 왕이라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에서는 간음이 일어나는 일은, 그건 집안에 수치스러운 일이에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둘 다 돌에 맞아 죽을 일입니다.
게다가 손녀 사위 우리아의 죽음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에요. 그러니 그때부터 자기 마음이 다윗에게서 떠났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이유가, 그가 압살롬 편에서 서야 할 필요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람은 지략가가 맞습니까? 과연 이 사람은 다윗 곁에 무슨 의도로 이제껏 서 있었던 것입니까? 또 무슨 목적을 가지고 지금 압살롬 편에 서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또 배신합니다. 배신의 목적은,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어요. 내 이해득실을 따라서 배신하는 겁니다.
어쨌든 아히도벨이 압살롬와 함께 있다는 것, 남들이 볼 때는 '아히도벨까지 압살롬 편에 붙은 것을 보니까 이미 끝났구나'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죠.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그걸 부러워 할 일도 아니고 그 곁에 가려고 애를 쓰지 말라는 거예요. ▲자 후새가 밀명을 받고 압살롬에게 왔어요. 압살롬을 배신하기 위해서 다윗의 특명을 받고 지금 여기 온 겁니다.
후새가 어떻게 해서 압살롬의 의심을 떨쳐버리는 지를 한번 봅시다.
삼하16:16~19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갈 때에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
압살롬은 분명히 후새를 의심하고 있지요. '당신은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군데, 왜 아버지를 안 따라가고 나한테 왔냐?'
후새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호와와 이 백성은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해서 그와 함께 있는 게 마땅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반란을 하면, 법적인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을 제일 원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방송국을 장악하는 거예요. 여론이 마치 반란이나 혁명군을 지지하는 듯한 방송을 내보냄으로써 자기 정통성 합법성을 인정하는 거란 말이에요.
지금 후새가 그걸 인정해 주고 있는 발언을 해서, 그를 안심시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후새에 대한 의심을 확 털어 버립니다.
압살롬은 치밀하게 4년 동안 역모를 계획해서, 지금 거의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후새의 한 마디에, 자기 분별력이 흐려져 버렸어요. 왜냐면 자기가 원하는 욕심이 있었는데, 후새가 그걸 채워준 것입니다.
그래서 사기꾼들이 사기를 쳐서 성공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을, 이뤄준다고 약속하는 거지요.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뭐가 아쉬울 때가, 가장 취약할 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가장 아쉬운 게 있으면, 반드시 악한 존재들은 그쪽으로 틈나서 들어온다는 말이에요.
이단이 제일 쉽게 뚫고 들어오는 곳이 있습니다. '성도가 한 명이라도 더 왔으면..' 하는 그런 사람한테, 이단이 틈타기 쉽습니다.
근데 뭐 어떻게든지 한 사람이 오면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게 하나님 때문에 반가운 게 아니라, 내 교회 성장 때문에 반갑다면 여러분, 이단이 그 통로로 밀고 들어온다는 거예요.
▲16:20~21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하니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아히도벨은 참 정말 사악한 궤계를 냅니다. 이게 그 당시 전쟁 관행으로는 뭐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만약 뭐 압살롬이 블레셋을 침공했다, 또는 블레셋 아기스의 후궁들을 범하는 일이 있었다면 이해할 만하죠.
그러나 지금 압살롬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입성했어요.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한 겁니다. 근데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을 물었더니 그때 아히도벨은 '아버지 후궁들을 범하라'고 조언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엔 아히도벨의 자기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만약이라도 다윗이 돌아오면, 자기가 살 길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만약에 부자지간에 정이 좀 남아 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과거에 압살롬이 멀리 도망 갔다가도, 아버지 다윗이 다시 데리고 오는 판인데.. 부자 지간에는 얼마든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에요.
아히도벨의 관심은, 반란이 확실히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윗과 압살롬이 절대로 화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부자지간에 관계를 확실하게 끊어 놓는 것,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하는 것, 이 일을 통해서 압살롬의 기세가 오르고, 다윗 편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두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끝났구나, 이런 일이 있는데 어떻게 다윗과 압살롬이 화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양쪽에 어디에 줄을 설지, 눈치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 확실하게 편을 정하기로 마음을 먹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도록.. 한 것입니다.
아히도벨에게는 이런 복합적인 계산이 깔려 있는 거예요. 그는 당대의 최고 지략가인데, 악한 목적이긴 하지만, 굉장한 계략을 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지략, 모략이 종종 위험한 경우는, 그 지략에 자기의 개인적 사사로운 손익이 반영될 때입니다. 그때는 그 지략이, 위험에 빠지게 하는 요인으로 종종 둔갑하고 맙니다.
어쨌든 아히도벨은, 다윗과 압살롬의 부자간의 연을 끊어놓는 것이 자기에게도 좋고, 반란의 성공에도 좋다고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략가를 찾아 다닌 게 아니라 복음을 목숨 걸고 전할 수 있는 사람을, 예수님이 찾아 다니셨어요.
세상에는 권력이 있으면 권력 주변으로 사람이 모여 들어요. 와야 될 사람은 잘 안 옵니다. 안 와도 될 만한 사람들이 꼭 모여요.
근데 왜 아히도벨의 계략을 따라서는 안 됩니까? 이게 다른 나라의 왕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인간의 지략보다도 앞서야 하고 율법이, 어떤 인간의 조언보다도 앞서야 된단 말이에요.
레18:7~8절 '네 어머니의 하체는 곧 네 아버지의 하체이니 너는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어머니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너는 네 아버지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아버지의 하체니라'
비록 후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골육지친의 하체를 범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죠. 부모를 공경해야 될 최소한의 선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지금 적국의 왕의 처첩을 취하는 게 아니잖아요.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고, 그 계략을 들어서는(채택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레20:11 '누구든지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면 이스라엘 왕이 되겠다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 일이, 율법에 반하는 일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았어야 했죠. 물어보고 확인했어야 하는 일이고,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일이란 말이에요.
근데 그러면 우리가 앞서 본 12장에, 하나님께서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 했을 때 '너는 은밀하게 이런 일을 저질렀지만, 네 아내들은 대낮에 이런 일을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씀대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일을 내가 한 건데, 내가 뭔 잘못이 있냐?'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누군가를 징벌하실 때는, 그 누군가를 치는 막대기(하나님의 도구)가, 우리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들어서 의인을 징계하시지 않고 대개 악인을 들어서 의인을 징계하십니다. 그리고 그 악인은, 또 의인을 처벌한 대가를 자기가 치르게 되어 있죠. 대개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 막대기를 들어서 징벌하시지만, 그 징벌의 막대기를 다 쓰고 나면 부러뜨려 버려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바벨론이게 점령당하게 하시고, 포로로 끌려가게 하시지만, 그 막대기로 쓰임 받았던 바벨론은, 얼마 못 가서 (약 80년 만에)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하고 맙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겠지만 굳이 가룟유다가 은 30에 팔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대속물이 될 수 있는 일이에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지 않아도, 십자가를 통한 구속사역은 반드시 완성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신앙의 길을 가면서, 악한 자의 자리에 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악역에 쓰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16:22절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성경은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적어도 이스라엘 12지파의 후손이라면, 자기 조상 가운데서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던 르우벤 이야기 정도는 다 기억하고 있는 게 마땅하지요.
나중에 아버지 야곱이 르우벤에게 뭐라고 기도합니까? 창49:3~4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그래서 르우벤은 장자권을 잃어버리게 돼요. 르우벤 지파는 12지파 가운데서 그렇게 썩 인정을 받지 못하는 지파가 되고 말죠.
저는 적어도 압살롬이 '내가 이스라엘 왕이 돼야 되겠다' 라고 작정했으면, 하나님을 조금 더 알았어야 했고,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께 여쭤봤어야 했고, 어떤 일을 결정하던 하나님의 허락을 받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랬다면 그가 형 암논을 죽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거 특별히 이렇게 아버지께 반란을 일으키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는 어쩌면 순리대로 기다렸다면 이스라엘의 차기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마치 르우벤의 이야기처럼, 그가 능력이 탁월하고 기력이 탁월하고 모든 것이 출중 할지라도, 그 물이 끓어오름 같이, 어떤 선을 넘어서 버렸을 때 어떤 비극이 찾아오게 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죠.
우리 중에 탁월한 사람들이 많겠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 탁월함이 물이 끓어버리듯 넘쳐 버리게 되면 모든 걸 다 망가뜨리고 마는 것이죠. 하나님이 쓸래야 쓸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죠. 비록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근데 왜 이런 얘기를 듣고, 아무도 의심 하지 않았나 하면
23절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아히도벨이 얼마나 계략을 잘 베풀었는지, 그것이 또한 잘 맞아떨어졌는지 이게 한 두 사람의 입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이제는 이스라엘 전체에 '아히도벨의 계략은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의심하지 않고, 그의 계략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게 가장 조심해야 될 일입니다.
여러분 이래가지고 국정을 망가뜨린 사람이, 고려시대에도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세계 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어디에나 이런 인물들이 있어요.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가지고, 지도자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결국은 국정을 문란하게 하고 마는 것이죠.
지도자란 무엇입니까? 지도자가 모략가, 지략가일 필요는 없어요. 자문을 잘 구하면 됩니다.
다만 지도자의 역할은, 어떤 지략과 모략을 들어야 할 것인가, 결정해야 할 것인가? 이렇게 분별을 잘 하면 되는 거죠.
지도자 자체가 꼭 탁월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지만 판단력만큼은 분명하고, 틀림이 없어야 합니다.
기업의 총수가 꼭 똑똑해야 됩니까? 돈 버는데 박사라야 됩니까? 아니에요. 그 옆에 수많은 지략가들을 두지만,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야 될 지를 아는 사람이 리더가 되는 거죠.
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음으로써 리더의 반열에 이미 올라 있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왜냐면 사람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고, 누구 말을 들어야 할 줄 아는 사람이고, 어떤 지략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그리스도인 만큼 지도자의 자질이 갖춘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니엘처럼 아주 신실하게 믿는 경우에 그렇죠)
어쩌면 다윗은 압살롬보다 지략이 모자랐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2번이나 살려주지 않았습니까. 이건 세상 지략으로 따지면.. 많이 모자란 것이죠. 그러나 그렇지 않았어요.
삼상24:12~13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이게 압살롬과 다윗의 차이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은 왕을 해하려 하지 않았고, 압살롬은 그런 신앙이 없었고, 세상 지략만 가득했던 것이죠.
다윗은 악인의 길을 걷지 않았어요. 그런 악한 방법을 택하지 않았어요. 악한 자들의 조언을 듣지 않았어요. 이게 중요한 차이죠.
▲자 아히도벨이 두 번째 지략을 내는데요, (첫 번째는 후궁을 범하게 하는 것) 삼하17:1~4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사람 만 이천 명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그가 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에 기습하여 그를 무섭게 하면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죽이고 모든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게 하리니 모든 사람이 돌아오기는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하니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
두 번째 지략은, 정말 합리적이고 아주 정말 분명한 승산이 있는 계책이었어요. 사람들도 다 아히도벨의 계략을 옳게 여겼어요.
정예병 12,000 명이면,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다 데리고 가는 피난행렬을 쉽게 따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히도벨의 지략으로 다 결정된 듯한데 갑자기 압살롬이 후새의 얘기도 한번 들어 봅자고 말합니다.
17:5~6 '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이제 그의 말도 듣자 하니라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매 압살롬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히도벨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아니하거든 너는 말하라 하니'
이때 후새는, 어떻게 보면 아히도벨과 압살롬 사이의 균열, 또는 의심의 씨앗 같은 걸 뿌리는 것이죠. 17:7~10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번에는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아니하니이다 하고 또 후새가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라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지금 그가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하기를 압살롬을 따르는 자 가운데에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비록 그가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용사의 아들일지라도 낙심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아버지는 영웅이요 그의 추종자들도 용사인 줄 앎이니이다'
지금 후새의 말은 핵심이 두 가지예요. -아버지가 그래도 역전의 용사 아니냐, 광야의 전문가 아니냐, 함부로 공격하면 안 된다. -지금은 새끼를 빼앗긴 암콤처럼 웅크리고 있다. 다윗은 이미 피난행렬과는 달리 어디 가서 숨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추격하는 군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압살롬의 군대가 기습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역으로 기습을 당할 것이다...
그래야 지금 한 번도 제대로 전쟁을 해 본 적이 없는 압살롬에게 자칫하면 위험이 크다, 잘못해서 첫 번째 교전에서 지기라도 하면 당신의 명성이 땅바닥에 떨어진다... 이렇게 두려움을 심어주었어요. 리스크, 위험성이 너무 크다, 모험할 필요가 없다. 안전한 방법이 있다... 이걸 설득한 것이죠. 그래서 다윗이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습니다.
17:11~13 '나는 이렇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당신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그를 기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우리가 그의 위에 덮여 그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또 만일 그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작은 돌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게 할 것이니이다 하매'
핵심은 뭐냐면 아히도벨에게 군사 1만2천 명을 주어서, 아히도벨이 승리하게 할 것이 아니라 압살롬 당신이 나라의 왕이기 때문에, 전 이스라엘에 전군 소집령을 내려서 당당하게 그 많은 이스라엘 병력을 이끌고, 다윗의 그 피난행렬을 압도적으로 이기는 전과를 압살롬 당신이 취하라는 말이었죠.
아마 후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압살롬 마음 가운데는 '아히도벨이 1만2천 명을 달라는 게, 가서 다윗을 죽였다는 공로를 자기가 차지하려고 하는 것인가?'
지금 후새의 얘기는, '왜 이 전쟁의 전과를 그렇게 서둘러서 아히도벨에게 줄 이유가 뭐냐? 지금 브엘세바 단까지 온 나라가 지금 당신이 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러니 전 군대를 다 군사를 소집해서 비록 천천히 쫓아 가더라도, 독안에 든 쥐처럼 승리를 거두는 건 일도 아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를 듣는데 갑자기 압살롬 머리에는 개선장군처럼 백마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자기의 위용이 그리지 않겠어요?
압살롬은 이 생각 하나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어요. 인간이란 그런 존재라는 말이에요.
우리가 다 그런 사람이에요. 조금만 이익이 되고, 조금만 내게 유리하고, 내 이름이 드러나면 못 참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더 해요. 조금도 양보 못 합니다.
이 한 마디에, 지금 아히도벨과 후새는 모략과 역모략이 서로 대결하고 있습니다.
▲자 근데 이게 뭐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삼하15:31절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압살롬이 어리석은 결정을 택하고, 아히도벨이 나름대로 지혜로운 선택을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리석은 것처럼 거절당한 이유가 뭡니까?
위 구절에 보면, 다윗의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여호와여 아히도벨의 모약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다윗은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가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신이 아뜩했을 것입니다. '이거 끝났구나, 큰일 났구나!' 그렇지만 다윗은 즉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붙었는데, 이제 저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제발 아히도벨이 내는 모략이, 어리석게 하옵소서!'
그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히도벨이 가장 지혜로운 계책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압살롬과 그의 측근들이 모두가 어리석은 쪽으로 결정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다고, 일이 다 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아히도벨의 경우에서 보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라는 것을, 그때 일이 어떻게 바뀌는지요 ... 우리가 에스더서를 봐도, 야곱을 봐도 그렇고... 오직 하나님의 일은,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 후새는, 다윗 입장에서 (아히도벨의 모략에 대해) 역모략을 내고 있는데, 압살롬 편에서는 그걸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편 1장 6절 말씀 입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악인들의 길이 결국 망하는 이유가 뭡니까?
형통한 것 같을 때, 가장 성공한 것 같을 때 실패의 씨앗, 파멸의 씨앗이 함께 자라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악인들의 형통함을 부러워 하지 말라는 거죠. 악인들은 성공하는 순간에, 실패와 파멸의 씨앗이 함께 뿌려지고, 자라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마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가 되었다면 이 땅에 있는 지혜를 때로는 우습게 여기야 된다는 거예요. 이 땅의 모략 들을 그렇게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들이 엄청난 정보와 방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오랜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노련한 사람들을 동원해서 어떤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그것이 기도하는 사람들의 지혜를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받은 사람들보다 더 낫지 못하다는 겁니다.
로마서 11장 33절 말씀 읽고 마치겠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아멘!
우리가 살다보면, 종종 사람의 조언과 하나님의 말씀(성경)이 부딪히는 경우를 만납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여러분들이, 어리석어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택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십자가의 길은, 손해를 보고 어리석은 것 같습니까. 얼마나 세상에 편안하고 안락스러운 성공의 길이 매력적으로 보입니까.
그러나 좁은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좁은 문을 택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의 길을 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렵더라도 그 길이 하나님께서 생명의 길로 준비해 놓은 길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사람들이 모두 다 피하는 길,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다 포기하는 길, 그런 십자가의 길을 도전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고 믿습니다. 능력을 주실 것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우리가 보면 세상이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AI는 이제 사람의 지식과 지혜를 뛰어넘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선한 길, 믿음의 길, 좁은 길, 좁은 문을 택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지혜를 반드시 이기고 승리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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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삼하 11:3과 23:34를 통해 아히도벨의 가족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밧세바)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삼하11:3
"마아가 사람의 손자 아히스배의 아들 엘리벨렛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과“ 위 두 구절에 중요한 세 인물이 나온다. 삼하23:34
위 밑줄을 보면, 아히도벨은 엘리암의 아버지이며, 엘리암은 밧세바의 아버지이다. 즉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친 할아버지이다. (그런데 성경에 동명이인이 많이 나오므로,
위 두 구절의 엘리암은 동명이인 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밧세바가 아히도벨의 손녀가 아니라는 거죠.)
이제 아히도벨의 배신 이유를 알 수가 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죄를 범하였고, 그것을 덮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헷 사람 우리아를 죽였다. 그리고는 밧세바를 궁으로 불러들여 왕비로 삼았다. 과연 아히도벨이 다윗이 숨어서 범한 이 범죄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