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4장은 '칭의'로서의 구원 롬5~8장은 '성화'로서의 구원, '영화'로서의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아래 설교문 중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변화시키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를 전혀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믿을 때 그 믿음을 통하여 우리를 전혀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는 계획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고후5:17
제일 먼저는 죄인된 우리를, 불의한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 여기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들을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답게 거룩한 삶으로 변화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미래에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습니다.
롬1:16~17절, 로마서의 주제 구절이죠, 거기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할 때 이 구원에는, 이렇게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는 구원입니다.
◑구원에 세 가지 측면이 함께 있다는 것을 (또는 구원의 3시제를) 우리는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과거 - 칭의 - 순간적 제일 먼저 우리의 과거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불의한 삶을, 의롭다 여기 심으로써 용서하시고, 씻어주시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의롭다 여기시는 구원, 즉 '칭의 로서의 구원' 입니다. Justification
이것은 죄의 형벌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에 근거하여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값 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선물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즉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단번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창15:6절에,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셨을때 아브라함이 그 이후에 때로 믿음이 연약해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롭다 하신 이 하나님의 선언은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요. 즉시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단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 우리의 삶에 바로 이러한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값없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선물해 주심으로써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건, 바로 이때 우리 안에 거듭남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단번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현재 - 성화 - 점진적 그러나 의롭다 함을 받는 구원은 거기서 결코 그치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현재의 삶 속에서 구원을 체험하고 누려갑니다. 이것은 '성화로서의 구원'입니다. sanctification
이것은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칭의'가 죄에 대한 형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이라면
여전히 죄가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 안에 존재하고, 이 시대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는 날마다 구원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은 점진적으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가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라고 하실 때 *빌2:12 그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기 보다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이들이 매일 매일의 현재의 삶속에서,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을 체험하는 것,
이미 우리에게 약속된 의롭다 칭하신 그 구원을 *칭의 우리의 삶 속에서 믿음으로 체험해 가는 구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화 (구원을 칭의 한 측면으로만 설명하거나, 이해해서는 불완전합니다)
이것 또한 우리가 이 구원을 경험할 때, 믿음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미래에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이 있습니다.
▲미래 - 영화 - 소망 그것은 우리가 온전히 영화롭게 되는 '영화'로서의 구원인데, glorification 죄의 존재 자체로부터의 구원, 다시는 죄가 없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의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에게 이루어질 구원,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질 구원입니다.
-우리 인생의 시간은 계속 흘러갑니다. 우리가 어느 시점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든지 그 순간 우리는, 그 이전에 우리의 모든 삶에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음으로써만 용서를 받음으로써만 받을 수 있는 구원입니다. 이것은 '칭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볼 때, 칭의에는 반드시 '회개'가 동반되어야 확실합니다. '믿음'만 갖고가 아니라!)
-바로 그 칭의 받은 순간부터 우리는 미래의 구원에 이를 때까지 믿음으로 매일 매일, 매 순간을 삶으로써 현재의 구원을 체험해 가야 합니다. 이것은 '성화'로서의 구원입니다.
사도바울이 롬1~4장까지 설명한 구원은 바로 <칭의>, 의롭다 함을 받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칭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불의한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것은 즉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단회적으로,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 그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동일시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의로 덧입혀주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롬5~8장에 이르는 구원에서는 앞으로 우리가 경험할, 이 매일매일 경험할 성화의 구원 그리고 장차 우리에게 약속된 영광스러운 구원(영화)을 설명해 가고 있습니다.
▲5:1절이 전환점
롬4장에서 5장으로 연결되는 롬5:1절에 보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칭의 구원 받은 성도들이
이제 누리는 이 성화의 구원으로서의 축복,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에게서 반드시 나타나고, 반드시 경험해야 하고, 반드시 경험할 수 있는 축복된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 .. 이 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말)
5:1절을 헬라어로 보면,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 우리 말로는 세 단어이지만, 헬라어로는 한 단어입니다. *디카이오센테스(디카이아오)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 이 단어를 문장의 가장 앞에 놓음으로써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거죠.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 being justified 그런데 그것을 과거형으로 썼어요.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헬라어에 부정과거 시제라는 게 있는데 *Aorist 그것은 단회적이고, 취소되지 않고, 단 한번의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을 설명할 때 쓰이는 시제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여기서 시제가 분명하지 않지만 원어에는 분명한 과거의 사건입니다. *부정과거
과거에 의롭게 된 이 사건이 그렇다면 현재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요? 5:1절의 후반부에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에코, 누린다, 현재시제 현재 시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 절대로 그 자체에서 끝나는 어떤 교리적인 지식이 아니라는 거죠. (과거에 받은 칭의가) 현재 우리의 삶 속에 반드시 나타나는 삶의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체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있다는 거에요.
◑의롭다 함을 받은 자, 즉 구원 받은 자의 특징
오늘 롬5:1~11절은 바로 그러한 삶의 변화 중에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첫째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는 것, 우리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식이 아닌가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계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왜 믿음의 삶으로 나아오지 않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기가 거북한 것입니다. 두려운 것입니다.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에요. (*칭의가 정확히 안 되었기 때문이죠.
전통적 기독교는 여기서 radical conversion를 '칭의'로 봅니다/주)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에게도 때로 하나님과 누릴 수 있는 이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화평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값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의.. 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 화평은, 의가 가져다 주는 선물입니다.
세상에 평화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많지만 평화가 찾아오지 않는 이유는 의를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의'에서만 화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화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의를 저버리고, 우리의 불의를 눈감아 주시며.. 화평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에 우리가 담당해야 될 주의 형벌, 반드시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이루셨고 우리에게 그 의를 선물해 주셨어요.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신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주신 이 '하나님의 의'가 없이는 *롬1:17 우리가 결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 염려, 근심, 갈등.. 이 모든 것들은, 사실은 이 '화평'과 정반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심리적인 불안, 정신적인 갈등, 인간 관계의 갈등.. 그 깊은 바닥에 들어가 보면, 그 원인은 바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모든 관계에 있어서 갈등과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은 모든 관계에 있어서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평화 평화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은총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이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는 영혼은 이 세상 어떠한 상황 가운데 처해도,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과의 화평..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이들이,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때로 그런데 이것을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면 이것은 점진적으로 체험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사람들의 특징들"을 설교했는데 그것을 요약해서 제가 몇 문장으로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사람은 자신의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에 감격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과 화평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더욱 경외감을 가지고,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거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생활에 조심합니다. 조심함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기 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조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은, 선한 양심으로 늘 선한 일을 경주하려고 애씁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 이것이 의롭다 함을 받은 이들의 첫번째 복입니다.
▲2.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롬5:2 '또한 우리는 그분으로 인해,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기뻐합니다.' (우리말)
1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 .. 라는 그 말씀을 2절에서는 다른 표현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여기서 '들어감'이라는 단어는 *프로싸고게, access '나아감'이라는 말로도 신약에 사용 되었는데 세 번 나옵니다. *롬5:2, 엡1:18, 3:12
엡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프로싸고게, access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마치 유다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에스더가 왕 앞에 담대히 나아가듯이 어떤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access 것입니다.
어린 자녀가 부모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엄마 아빠에게 담대하게 나아가 당당하게 구하듯이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에게 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프레드릭 니코니우스 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병이 들어서 이제 죽어가고 있는 상황 속에 이제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그러한 느낌 속에 루터에게 작별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루터는 그 편지를 받자마자 바로 답신을 적어서 보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대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살아나시오. 당신은 교회 개혁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요. 주께서는 그대가 죽는다는 말을 내게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며 그대가 나보다 더 많이 살도록 하실 것이요.
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 하고 있고, 이 기도는 이루어질 것이요. 왜냐하면 (마지막 구절이 중요합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를 구하고 있기 때문이요.'
루터가 얼마나 담대하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친구가 '이제 나는 얼마 못 살 것 같아!' 그런 편지를 받았으면 '그렇구나..' 그러면서 위로하려고 할텐데
'아니야 당신은 살아야해! 그리고 나보다 더 오래 살 거야! 내가 기도하고 있어. 왜냐면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하고 있기 때문이야!'
얼마나 담대한 기도입니까. 그리고 실제로 이 기도는 이루어져서 루터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어요.
친구의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당당하게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구한 이 루터의 기도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단지 네가 내 친구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이 중요한 시대에, 교회를 개혁하고 새롭게 하는 이 시대에 당신이 얼마나 필요한지.. 하나님이 아시기에 당신은 나보다 더 오래 살 거야!'
여러분 이것이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자들에게 *롬5:2 주어지는 담대함 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그분의 은혜 속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어떤 기도 제목이 왜 담대하지 못합니까? 자기 뜻대로 잘못 구하고,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가 구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담대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기 위하여 드려지는 우리의 기도는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자녀가 단지 잘 살기 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잘 살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래 살기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단순히 죽는 게 두려워서 오래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제가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 기도 제목으로 담대하게 구한다면 하나님께서 연장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렇게 우리의 기도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면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하게 됩니다. (▲2.) 이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 그의 소원과, 그의 기대와, 그의 관심이 ...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는 거죠.
우리가 어떤 모임가운데 대화할 때 어느 한 사람이 계속해서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를 자랑하며, 자기를 높이며, 자기가 얼마나 위대한지.. 자기가 얼마나 잘났는지를 계속 설명하면...
사람들이 식사하다가도 소화가 안 되고 모임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다시는 이 사람 만나지 말아야 되겠다.. 하고 결심하죠.
그러나 만나는 중에,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을 자랑하면 그 시간이 계속 흘러가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심을 하게 되죠. '이 사람은 다음에 또다시 내가 만나야 되겠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하는 이 모습은 바로 믿음을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인 겁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기쁨은, 심지어 <환난 가운데서도 사라지지 않는 기쁨>입니다.
5:3절 '이 뿐만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노라'
어떻게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3절에 그 과정을 설명하죠. '환난을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말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환난 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선교적인 목적이죠. 복음이 전해지기 위하여 주시는 환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루살렘 교회가 받은 환난이 그랬고 지금 중국 교회에, 중국 공산당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환난도 어떤 면에서는 선교적인 목적이 있는 거에요. 복음이 더 확산되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십자가의 고난이 불충분하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전해지는데는 필요한 고난이 있다는 겁니다. 선교적인 목적의 고난입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를 나타내려는' 목적으로 주어지는 환난이 있습니다.
고후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받는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를 나타낸다는 거예요.
-세 번째가 바로 본문 롬5장에 나오는 환난입니다. 이것은 바로 소망을 정결케 하는 목적이에요.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게 하는 환난입니다.
롬5:3~4절, 여기에 '진리의 사슬 chain'이 이렇게 나옵니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환난 그 자체가 인내를 저절로 만든다..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이 환난 가운데, 진짜 인내가 드러난다..는 겁니다.
환란이 오면, 그 사람 마음속에, 그 사람 생각속에 무엇이 들어 있고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갔는지가 나타나죠.
교만하고, 육적이고, 세상적이고, 악한 사람은 환난이 오면 더 악해지고, 더 육적이 되고, 더 교만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 있는 겸손, 온유,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환난 가운데 더 온유하게 되고, 더 겸손하게 되고, 더 영적으로 지혜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내속에서 연단이 이루어집니다. 연단이라는 건 검증한다..는 거죠.
우리의 믿음이 연단을 통해, 무엇을 우리가 바라고 있는지 점점 소망을 향하게 되는 거에요.
그 소망이 정말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 것인지 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검증해간다는 거에요.
그래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만들어낸다.. 소망을 견고케 한다, 소망을 정결케 한다는 겁니다.
이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하는지, 기뻐하지 않는지를 이 환난을 통하여 임내하게 하고, 인내를 통하여 연단하고, 연단을 통하여 (구원의 완성이라는) 소망을 분명하게 한다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들에게 환란이 찾아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이 한 가지 시험이 분명한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구하고 살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바라고 살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고 자랑하고 살았는가?'
그것을 하나님은, 이 환란을 통해 확인하고 싶으신 거에요. 이 환란을 통해, 나에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소망이 더 분명하다면 나는 믿음으로 의럽게 된 자의 삶으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확신하셔도 되는 겁니다.
▲3. 세번째, 믿음을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복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롬5:5 '이 소망은 우리를 낙심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인해 그분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부어진다는 것은 넘쳐나는 것을 뜻합니다. 컵에 물이 간신히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컵에 차고 넘쳐 흐르는 상태를.. '부여진다'고 말하는 거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그렇게 '부어진다'는 거에요.
우리의 마음에는 '사랑 주머니' 같은 게 있어서 그 사랑이 결핍되면, 무엇인가를 통해서 자꾸 그것을 채우려고 합니다.
참된 사랑이 아닌 것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또 사람들의 관심으로 그것을 채우려고 하는 거예요.
희한하게도 인간의 마음에는 채워져야 될 '사랑의 주머니'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부모의 사랑으로 그것이 결핍되면, 다른 무엇으로라도 채워져야 돼요.
그런데 사람의 사랑으로, 부모의 사랑으로 다 채워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부족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져야 하는 빈 공간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져야 합니다.
만일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고, 부모로부터도 버림받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사람은 그 어떤 사람이 주는 사랑으로도 채울 수 없는, 충만한 은혜와 넘치는 행복이 있어요.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5:5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받는 성령세례의 중요한 체험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부어지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이 충만하게 우리에게 (내 인생에) 첫번째로 임하실 때 우리 마음에 느끼는 느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을 채우고 넘치는 거에요.
그래서 예전에 미웠던 사람이 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었던 일을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내어 놓을 수 없었던 나의 것을, 기쁨으로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느니라' 그 이전에는 뭐에요?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 라고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늘 부족합니까?' 항상 부족함을 느끼는 거에요.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셔도 나는 항상 부족합니다' 항상 부족함을 느끼는.. 뭔가 갈망과 갈증과 허기가 있는.. 그래서 늘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충만하게 임하시면 놀랍게도 이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만족합니다)' 5:5
△여러분 참된 사랑을 평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 사랑으로 인한 어떤 대가가 치뤄졌는가를 보면 압니다.
-두번째로, 얼마나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주어졌는가를 보면 압니다.
-셋째로, 그 사랑이 실제적인 어떠한 변화나 효과를 만들어냈는가를 보면 압니다.
-네 번째로, 그것이 얼마나 자발적으로 주어졌는가 입니다.
이 질문들을, 우리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빗대어 보겠습니다.
롬5: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작정된 시기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7. 의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해 과감히 죽는 사람은 간혹 있기는 합니다. 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5:10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됐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인해 그분과 화목하게 됐으니
화목하게 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해 확실히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첫번째 질문, 그 사랑에는 얼마나 큰 대가가 치뤄졌는가, 그 대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대가입니다.
-두번째 질문, 얼마나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주어졌습니까? 6절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능력이 없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의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길에 서 있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 진노의 대가를 치러주셨습니다.
10절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즉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피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꾸어 버리고 있었을 때 그분의 화목제물로 죽으심으로, 우리의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가 해소되었습니다.
-세 번째 질문, 그 사랑은 얼마나 실제적인 효과가 나타났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어지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로, 그것이 얼마나 자발적으로 주어졌는가 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 나가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어쩔 수 없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의인의 억울한 죽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위하여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나아가셨어요.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요 우리를 온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부어질 때 놀랍게도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되는거죠.
▲롬5:9~10절에는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의 복을 강조하게 위해서 '확실히 much more' 라는 단어를 두 번씩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1)
9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더더욱)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던 때에도 그 아들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더더욱) 그분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은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죄인되었을 때, 연약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다면
지금 우리가 이제 믿음으로 서있는 은혜 가운데 있을 때 얼마나 미래에 '확실히'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우리가 확실히 구원 얻을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앞서 말한 이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진 사건.
이것이 지금 우리가 누리는 <현재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구원을 받았다면 *칭의 우리가 현재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가 체험하고 누려가야 될 구원입니다. *점점 영광을 향하여 성화되어감
장차 우리가 받을 구원은, 바로 우리가 아닌 전혀 새로운 존재로, 분명 나이지만, 내가 아닌 새로운 존재로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죄가 없는, 죄의 존재로부터 우리가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죠.
여러분, 현재 우리가 누리는 이 구원의 축복은 점진적 이라고 했습니다. 즉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것은 아직 체험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게,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이 부어주십시오.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이전보다 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은 우리가 그 복을 누리기를 원하시며 이걸 누리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는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마음은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층만이 부어지지 않은 것 같아요.
어느 것이 부족하든, 우리는 날마다 점진적으로 그것을 구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역사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세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는,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 주어지는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짐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고, 역사해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안에서 구하십시오. 성령님의 임재를 간구하십시오. '제게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히 임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확실히 응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죄인됨 가운데서 의롭다 하신 분이라면, 우리를 의롭다 하셨으니, 우리에게 이러한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5:9~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확실히 우리에게 이것은 약속된 것이다'라고요. 이 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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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헬라어를 영어로 직역
5:9 Much more (폴리스 말론) then, being now justified by his blood, we shall be saved from wrath through him. 10 For if, when we were enemies, we were reconciled to God by the death of his Son, much more(폴리스 말론), being reconciled, we shall be saved by his life.
9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더더욱)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던 때에도 그 아들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더더욱) 그분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은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